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고궁박물관의 대한제국의 역사를

백련암 2015. 6. 17. 16:57

 

 

창덕궁 대조전 벽화의 제작

창덕궁은 1917년 11월에 대조전(大造殿)에서 불이 나 내전 일곽이 소실되었고, 이어 내전의 재건 공사가 진행되었다.

화재 후 즉시 시작된 재건 공사의 마무리 단계였던 1920년에 대조전, 희정당, 경훈각 내 벽화를 제작할 적절한 화가를 결정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왕직(李王職)의 일본인 관리들은 일본대가를 데려와 벽화를 그리게 하고자 했지만

결국 순종의 결정에 따라 조선인 화가들에게 작업이 맡겨졌다.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과 경훈각(景薰閣)의 벽화는 서화미술회 출신인 오일영(吳一英, 1890~1960), 김은호(金殷鎬, 1892~1979),

이상범(李象範, 1897~1972), 노수현(盧壽鉉, 1899~1978), 이용우(李用雨, 1904~1952) 등 신진 화가들이, 순종의 응접실이었던

희정당(熙政堂)의 벽화는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를 이끌던 원로 화가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각각 담당하여 그렸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모두 2~3개월 안에 마무리 되었다.

창덕궁의 벽화는 제작이 용이하도록 비단에 그림을 그려 붙이는 "부벽화(부벽화)"의 형식을 택했다.

김규진은 서화연구회의 작업실, 김은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나머지 청년 작가들은 덕수궁의 준명당(浚明堂)에서

공동 작업을 진행했다. 그림의 제작이 끝난 후 궁중 표구사(表具師)가 배접하여 각 전각에 부착함으로써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다.

 

 

鳳凰圖(봉황도) : 대조전, 등록문화재 제 242호     작가 = 吳一英(오일영) · 李用雨(이용우)  시대 = 1920년 비단에 채색

 

봉황은 예로부터 군왕의 덕치(德治)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룸로서 그림의 소재와 각종의례 용품 등의 문양으로 자주 사용되었다.

대조전 대청마루 동쪽 상단 벽에 그려진 이 그림은 봉황은 태양을 마주하는 골짜기에서 태어나서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산해경[산해경]』의 내용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그 외에도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나라꽃, 창록화풍으로 표현된 바위 등이 극채색으로 함께 그려져 벽화 전체에 화려한 분위기를 다하고 있다.

화면의 우측 하단에는 "오일영 · 이용우 등 근사(吳一英 · 李用雨等 謹寫"라는 낙관이 쓰여 있다.

 

◈약력

정재(靜齋) 오일영(吳一英, 1890년 ~ 1960년)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오세창(吳世昌)의 조카이다.

1911년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에 입학하여 조석진(趙錫晉)과 안중식(安中植)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1914년 제 1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이용우와 함께 창덕궁 대조전 동쪽벽의 벽화제작에 참여하여 <봉황도[鳳凰圖]>를 제작했다.

이후 서화협회(書畵協會)의 정회원으로 1921년부터 서화협회전에 출품하였으며,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작품을 출품하였지만

일제의 문화통치정책과 편파적인 전시 운영 방법에 반기를 들고 참여를 거부하였다. 치밀하고 장식적인 북종화풍의 산수를 잘 그렸다.

대표작으로 <夏景山水圖[하경산수도]>와 <萬丈峰[만장봉]>이 있다.

 

묵로(墨鷺) 춘전(春田) 이용우(李用雨, 1904년 ~ 1952년)는 서울 출생으로 1911년 8세의 나이로 서롸 미술회 화과(畵科)

1기생으로 입학하여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으로 부터 전통화법을 배웠다.

1918년에 최연소로 서화협회의 정회원이 되었고, 1920년에는 서화미술회동기생인 오영일(吳一英)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봉황도>를

제작하였다. 1921년에 시작된 서화협회전람회와 1922년부터 열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였고, 1923년에는 이상범(李象範) · 노수현(盧壽鉉)

· 변관식(卞寬植)과 함께 최초의 동양화가 동인(同人)인 "동연사(同硯社)"라는 연구 모임을 조직했다.

이용우는 초기에는 시대적 표현정신을 예민하게 나타냈지만 1930년대에는 안정된 자기 양식의 심산풍경(深山風景)을 환상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1940년을 전후해서 부터는 다시 농촌풍경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제작하였다.

현대적 감각의 화조화(花鳥畵)도 다수 제작하였다. 대표작으로 <봉황도>, <시골풍경> 등이 있다.

 

 

①물 = 십장생의 하나로 장생물이 자생할 수 있는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졌다. 파도가 일렁이는 넓은 바다는 복을 가져다 주며 부귀와 강녕을 상징한다.

②봉황 = 수컷인 봉(鳳)과 암컷인 황(凰)을 함께 부르는 말로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이의 등,  물고기의 꼬리를 지닌 상상의 새이다.

부부 사이의 금슬을 나타내기도 한다.

③해 = 음양오행의 陽을 상징하는 존재이자 만물탄생의 근원으로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십장생의 하나이다.

유일한 존재로 왕조의 영원함과 임금을 나타니기도한다.

④바위 = 십장생의 하나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비바람을 견디는 바위는 장수와 변치 않음을 상징한다.

⑤대나무 = 십장생의 하나로 강하고 유연한 성질을 갖고 있어 군자의 성품과 지조, 곧은 절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⑥모란 = 꽃잎이 탐스럽고 화려하기 때문에 "화왕(花王)"이라고 하며,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한다.

⑦오동나무 =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상서로운 새인 봉황이 깃드는 나무로 영수(靈樹) 또는 상서가목(祥瑞嘉木)으로 여겨지며,

군왕을 축복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⑧나라꽃 = 일본화에 자주 등장하는 야생초로 병풍 그림에 즐겨 등장하던 소재이다.

 

 

白鶴圖(백학도) : 대조전, 등록문화재 제 243호     작가 = 金殷鎬(김은호)  시대 = 1920년 비단에 채색

 

대조전 대청마루 서쪽 벽에는 16마리의 백학이 달을 배경으로 소나무를 향해 날아와 앉는 모습이 동쪽 벽의 <봉황도>와 대칭을 이룬다.

기록에 따르면 대조전에는 <봉황도>와 함께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가 장식될 예정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대칭을 이루도록

백학을 소재로 한 그림이 그려졌다.

이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학, 소나무, 영지, 바위, 물, 달 등은 모두 "십장생(十長生)의 요소로 황제 부부의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고 있다.

동편의 <봉황도>에 그려진 극채색의 청록화품 바위와 대나무, 모란 등이 함께 그려져  두 그림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화면의 좌측 하단에는 "김은호 근사[金殷鎬 謹寫]"라는 낙관이 쓰여있다.

 

◈약력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년 ~ 1979년)는 인천 출생으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화과(畵科)에 입학하여 조석진(趙錫晉) ·

안중식(安中植)으로 부터 전통화법을 배웠다. 1915년에 화과 과정을 졸업하고 1917년에는 서과(書科) 과정도 수료하였다.

순종의 반신상 어용(御容)을 제작하여 명성을 얻어 윤덕영(尹德榮) · 윤택영(尹澤榮) 등 당시의 세도가들의 초상화도 제작했다.

1918년에 서화협회가 창립되자 정회원이 되었으며, 1920년에는 창덕궁 대조전의 벽화 <백학도[白鶴圖]>를 제작하였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3년간 수학했다. 1928년에는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된 태조 · 세조 · 순종의 어진을 봉사(奉寫)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수도여자사범대학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김은호는 <이충무공상[李忠武公像]> · <의기논개상[義妓論介像]> · <신사임당상[申師任堂像]> 등 주요 역사 인물상을 다수 제작하였다.

또 미인도(美人圖), 전통형식의 신선도(神仙圖) 등에서도 독보적인 경지를 펼쳤다.

대표작으로 <춘향상, 1965년> · <백모란[白牡丹], 1968년> 등이 있다.

 

 

①학 = 십장생의 하나로 장수(長壽)를 상징한다. 신비롭고 영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선비의 청렴한 기상을 뜻하는 상서로운 새로 여겨졌다.

②소나무 = 십장생의 하나로 사계절 동안 푸르른 모습을 잃지 않고 변하지 않아 곧은 기개와 이상, 충절, 지조를 상징한다.

③모란 = 꽃잎이 탐스럽고 화려하기 때문에 "화왕(花王)"이라고 하며,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라 하여 "부귀화(富貴花)"라고도 한다.

④영지 = "서지(瑞芝)" 또는 "서초(瑞草)"라고도 불린다. 십장생 중 하나인 불로초(不老草)로 여겨져, 먹으면 기사회생하고 불로장생한다고 믿었다.

⑤바위 = 십장생의 하나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비바람을 견디는 바위는 장수와 변치 않음을 상징한다.

⑥달 = 음양오행의 陰을 상징하는 존재이다. 십장생의 하나로 해와 달이 영구히 빛나듯이 인간의 생명도 그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타낸다.

⑦물 = 십장생의 하나로 장생물이 자생할 수 있는 생명의 근원으로 여겨졌다. 파도가 일렁이는 넓은 바다는 복을 가져다주며 부귀와 강녕을 상징한다.

 

 

♧창덕궁 경훈가 벽화♧

경훈각은 본래 2충 단독 전각으로서, 대비 등 왕실 여성의 생활공간으로 활용되었으나 1920년 재건 당시는 단층 전각으로 대조전에서

뒷편 행각으로 이어지도록 재 설계되었으며 이후 왕비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의 동쪽 벽은 당시 22세의 노수현(盧壽鉉, 1899년 ~ 1978년)이 그린 것으로 동자가 천도복숭아를 들고 있는 내용인<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로

장식되었다. 중국의 고사를 주제로 한 이 그림은 집, 나무, 산, 바위, 인물 등의 묘사가 모두 전형적인 공필(工筆) 화원 화풍으로

흰색과 검은 태점이 청록색의 암석을 강조하여, 대담하고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곳의 서쪽 벽은 당시 24세의 이상범이상범(李象範, 1897년 ~ 1972년)이 그린 고사인물도인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가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와

짝을 이루고 있다. 『동파지림[東坡志林]』에 나오는 고사대로 한 산신이 바다를 가리키며 저 바다가 뽕나무 밭으로 여러 번 변하도록 오래 살았음을

다른 신선들에게 자랑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그림은 화면의 상당부 좌측으로 갈수록 경물의 크기를 줄이고 색채를 흐리게 하여 공간감을 조성하였고,

각 형태들은 정교한 묘사와 함께 짙은 청록색으로 표현했다.

 

경훈각의 두 그림은 모두 장수(長壽)를 뜻하는 주제를 담고 있어 왕실 어른의 휴식처인 공간의 특성에 부합하고 있으며,

청록산수화를 바탕으로 한 공필 왕실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三仙觀波圖(삼선관파도) : 등록 문화재 제 245호,   작가 = 李象範(이상범)   시대 = 1920년 비단에 채색,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1897년 ~ 1972년) 은 충청남도 출생으로 18세인 1914년에 서화 미술원(書畵 美術院)에 입학,

1917년 수료한 뒤 안중식(安中植)의 화실인 경묵당(耕墨堂)에서 수학했다.

1920년에는 경훈각의 벽화<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를 제작하였고, 1929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 상인 창덕궁 상(昌德宮 賞)을 수상하였다.

1936년 동아일보사 재직시 "일장기 말살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뒤, 자택에 설립하였던 청전화숙(靑田畵塾)에서 광복 때까지

후진양성에 힘썼다. 194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이에 참여하여 추천작가 ·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고

1950년부터 1961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57년 예술원공로상,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3 ·1 문화상, 1965년 서울시 문화상등을 수상하였다.

 

시골 산야의 정취를 계절의 변화에 따라 특유의 기법으로 처리하여 한국적 서정성을 격조 높게 다루었다.

대표작으로는 <초동[初冬], 1926년> · 설로도[雪路圖], 1957년>, · 고원귀려도[高原歸旅圖] 1959년> 등이 있다.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

有三老人相遇, 或問之年. [상유삼노인상우, 혹문지년,]=  *嘗 : 맛볼 상

一人曰 吾年不可記, 但億少年時, 與盤古有舊. [일인왈 오년불가기, 단억소년시, 여반고유구]

一人曰 海水變桑田時 吾輒下一籌, 爾來吾籌已滿十間屋. [일인왈 해수변상전시 오첩하일주, 이래오주이만십간옥,]

一人曰 吾所食蟠桃, 其核於崑崙山之下, 今已與崑崙齊矣. [일인왈 오소식반도 기기핵어곤륜산지하, 금이여곤륜제의]

以子觀之, 二子者, 與蜉蝣朝菌, 何以異哉. [이자관지, 이자자, 여부유조균, 하이이재.] = 蜉 : 하루살이 부

 

"세 노인이 만나 서로 나이를 물었다. 먼저 한 노인이 말했다.

"내 나이는 얼마나 먹었는지 알지도 못한다. 단지 내가 어렸을 적에 천지를 만든 반고(盤古)씨와 친하게 지냈던 생각이 날 뿐이다."

또 한 노인이 말했다.

"바다가 변하여 뽕밭이 될 때마다 내가 숫자 세는 산가지 하나씩을 놓았는데 지금 내가 놓았던 산가지가 벌써 열 칸 집을 가득 채웠다."

다른 한 노인이 말했다.

"내가 신선들이 먹는 복숭아를 먹고 그 씨를 곤륜산 아래에 버렸는데 지금 그 씨가 쌓여 곤륜산과 높이가 같아졌다."

내 나이로 본다면 두 사람은 하루살이나 아침에 나왔다가 저녁에 죽는 버섯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소식(蘇軾), 「동파지림[東坡志林]」권 7

 

 

朝日仙觀圖(조일선관도) : 등록 문화재 제 244호,   작가 = 盧壽鉉(노수현)   시대 = 1920년 비단에 채색, 

 

심산(心山)  노수현(盧壽鉉, 1899년 ~ 1978년)은 황해도 출생으로 1914년에 보성중학교에 진학하였다가 중퇴하고 서화미술회강습소 화과(畵科)에

입학하였 안중식(安中植) · 조석진(趙錫晉)의 지도로 관념 신수 중심의 수업을 받았고, 1918년에 정규과정을 졸업하였다.

1920년에는 창덕궁 경훈각의 동쪽 벽화<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를 제작하였다. 1921년부터 서화협회 전람회에 정회원으로 해마다 출품하였으며,

1922년부터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 · 특선을 거듭하였다. 1945년 이후부터 서울대학교 예술학부 미술학과 교수와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및 고문, 예술원 회원등을 지냈다.

 

1920년대까지는 정형화된 관념 산수를 그렸지만 1923년 이후부터 실제하는 산수를 합리적인 원근법에 바탕하여 묘사하는 근대적 조형관을 보였다.

1950년대 이후에는 산수형태를 이상화해 조형적인 효과를 드러내는데 치중하였다.

주요작품으로 <성재수간[聲在樹間], 1920년> · <산촌귀목[山村歸牧], 1924년> · <산촌[山村], 1956년> · <谿山情趣[계산정취], 1957년>등이 있다.

 

 

= 창덕궁 희정당 벽화 = 김규진(金圭鎭, 1868년~1933년)

희정당은 왕의 집무실인 편전(便殿)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순종황제의 접견실(接見室)로 사용되었다.

이곳의 동 · 서벽은 김규진(金圭鎭, 1868년~1933년)이 그린 금강산 그림 두 점으로 장식되었다.

창덕궁 벽화 제작에 참여했던 화가 중 유일하게 두 점을 제작한 김규진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53세의 원로였다.

김규진은 희정당의 벽화를 그리기 전인 1919년에 신문에 금강산 그림을 연재하는 등 금강산의 밑그림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희정당 벽화를 맡게 되자 바로 금강산 사경(寫景)을 재차 다녀오는 등 두 점의 왕실 벽화를 제작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동쪽 벽의 <총석정 절경도[叢石亭 絶景圖]>는 우측의 조밀한 바위 모습에서 좌측의 넓게 트인 하늘로 시선이 이동하도록 묘사되었다.

정면관과 부감법이 혼합된 점이나 총석정 바위의 표현법은 모두 조선시대 금강산 실경산수화를 연상시키는 전통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서쪽 벽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는 구름과 붉게 물든 단풍으로 감싸인 금강산의 전체 모습을 화면에 가득 담아 냄으로써

<총석정도[叢石亭 圖>와 함께 압도적인 금강산 풍경으로 희정당을 장식하고 있다.

이 두 그림은 모두 조선시대 금강산도와 왕실 공필 장식화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반면 "김규진근사[金圭鎭謹寫]"라는

글씨와 함께 김규진의 낙관이 들어가 있어 화가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근대적인 변화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庚申初夏 因昌德熙政堂壁畵事 奉命入金剛之路 經到通川庫底

경신초하 인창덕희정당벽화사 봉명입금강지로 경도통천고저

登叢石亭 觀水石之天下絶勝 駕小丹寫其全景起草

등총석정 관수석지천하절승 가소단사기전경기초

轉向金剛周覽 名勝各處數幅 此歸家 乃伸模寫

전향금강주람 명승각처수폭 차귀가 내신모사

此畵及萬物肖全景 進獻掛御壁 留此草本以供後人之紀念

차화급만물초전경 진헌괘어벽 유차초본이공후인지기념

 

"경신년 초여름에 창덕궁 희정당 벽화 일로 인하여 명을 받들고 금강산에 들어가는 길에 통천군 고저면에 이르러

총석정에 올라가 수석(水石)이 천하에 절승(絶勝)함을 보고 작은 배를 타고 그 전경을 그리어 초본을 만들고

금강산으로 향하여 그 명승의 각처를 돌아보고 몇 폭을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이를 확대하여 그리어

이 작품과 만물상전경을 나라에 바치어 궁 안벽에 걸고 이초본은 남기어 후세의 기념으로 하다."

김규진 작<창덕궁 희정당 벽화> 초본의 제발

 

金剛山萬物肖勝景圖(금강산만물초승경도) : 등록 문화재 제 241호,   작가 = 金圭鎭(김규진)   시대 = 1920년 비단에 채색, 

 

해강(해강)  김규진(김규진, 1868년 ~ 1933년)은 평안남도 출생으로 18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8년간 수학한 후 1893년에 귀국하여

평양에서<조선국평양성도[朝鮮國平壤城圖], 1895년>를 그렸다.

1987년 서울로 올라와 궁내부 외사과(외사과)와 예식원(禮式院) 문서과(文書課)에서 일했고, 1901년에는 궁내부 시종(侍從)에 임명되었다.

1906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사진기술을 익혀 귀국 후, 서울에서 천연당(天然堂) 사진관을 열았다.

1913년에는 천인당 사진관에서 최초의 근대적 영업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을 개설 하였다.

 

1951년에 고금서화관의 신축건물에 서화연구회(書畵硏究會)를 열었다. 서화연구회는 1911년에 발족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

이어 두 번째로 출현한 근대 미술교육기관으로서 이왕직(李王職) 인물들이 관여한 단체였다.

김규진은 서화연구회의 대표자격으로 창덕궁 희정당 벽화를 의뢰 받아 <총석정 절경도[叢石亭 絶景圖]> ·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를 제작 했다. 김규진은 희정당 벽화와 같은 채색화뿐만이 아니라 묵죽도와 묵란도 등의

수묵화와 산수화, 화조화 등에도 능했다.

 

 

叢石亭 絶景(총석정 절경도) : 등록 문화재 제 240호,   작가 = 金圭鎭(김규진)   시대 = 1920년 비단에 채색, 

 

김규진은 서화연구회의 대표자격으로 창덕궁 희정당 벽화를 의뢰 받아 <총석정 절경도[叢石亭 絶景圖]> ·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를 제작 했다.

 

♣♣♣

建陽(건양) = 조선 고종 때인 1896년에 제정한 朝鮮(조선)의 年號(연호)

왕권의 강대함이나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왕을 황제라 부르고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여 사용하는 것을 건원칭제(建元稱帝)라 하였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주변국 때문에 연호를 제정하지 못하였으나 1895년(고종 32) 8월에 2차 집권한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이 갑오개혁을 이끌면서

건양이라는 연호가 제정되었다.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896년 1월 1일부터 건양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건원칭제는 친일내각인 김홍집내각에서 주도한 것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의미를 담고있기도 하다.

이듬해 1897년에 원구단에서 건원칭제를 하면서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었다.

 

光武(광무)  =  1897년(고종 34년) 제정된 대한제국의 연호,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개화당 내각은 갑오개혁 때의 내정개혁안(內政改革案)을 추진시켜 1895년 11월부터 양력을 사용하기로 하여,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첫 연호로 건양(建陽)을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독립협회의 여론 환기에 따라 국민의 국가의식이 앙양되는 가운데, 국왕에 대한 황제의 칭호 사용과 새로운 연호의 제정을 기하고

국호를 개정함으로써 국운(國運)의 신기원(新紀元)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의정부 의정대신(議政大臣) 심순택(沈舜澤)의 주청(奏請)으로 1897년 8월 14일 광무라는 연호를 실시하도록 하여

김홍집내각에서 주도한 것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의미를 담고있기도 하다. 이듬해 1897년에 원구단에서 건원칭제를

8월 17일부터 사용하였다. 이로써 첫번째 연호인 건양을 사용한 지 1년 7개월 만에 두번째 연호인 광무로 고쳐

순종(純宗)이 등극할 때까지 10년간 사용하였으며, 광무 원년은 조선 개국기원 506년이 되었다.

 

17일에는 각국 외교사절들에게 연호가 광무로 개칭되었음을 통보하는 한편, 원구(圜丘) · 사직(社稷) · 종묘 ·

영녕전(永寧殿) · 경모궁(景慕宮) 등에 건원고유제(建元告由祭)를 올리고 죄인들을 특사하였다.

10월에는 국왕을 대군주(大君主)에서 ‘황제’로 승격시키고, 국호를 ‘大韓帝國[대한제국]’으로 고쳐 대외적으로 완전자주독립을

다시 선언함으로써 광무개혁의 제일보를 내디디었다.

 

隆熙(융희) = 1907년 부터 사용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연호

일본에 의해 강제로 고종이 황제를 양위하여 1907년 8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연호를 광무(光武)에서 융희로 바꾸었다.

1910년 8월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4년간 사용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 즉위로 연호가 광무(光武)에서 융희로 바뀌어 1907년부터 1910년 국권상실 때까지 쓰였다.

 

1905년 을사조약에 따라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고종은 특사를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국제 정의에 한반도정세를  호소하여

자주독립을 되찾으려는 헤이그특사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와 친일정객들에 의하여 강제로 순종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은 새 연호로 융희와 태시(太始)를 놓고  내각에서 논의한 뒤 융희로 결정하여 1907년 8월 12일에 공포하였다.

이때 김인욱(金寅旭) · 윤태상(尹泰相) · 이우영(李宇永) 등 15명은 유년기원법(踰年紀元法)을 내세우며 전위(傳位)의 절차가  폐립이나

방축(放逐)과 다를 바 없다고 반대하였지만, 원안대로 새 연호가 선포되고 순종의 융희황제 즉위식이 강행되었다.

 

 

御座(어좌)  : 시대 = 조선

나무로 형태를 만들고 붉은색 칠을 한 후 금으로 용 문양을 그려 넣고, 모서리에는 황금색 용머리를 장식하였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태조어진>에 그려진 어좌와 형태 문양이 동일하다. 

 

뒤 병풍 = 日月五峰圖(일월오봉도) : 시대 = 조선

궁궐 안 왕의 자리 뒤에 세워놓는 장식병풍이다. 일월오봉도에는 다섯개의 산봉우리와 해, 달, 소나무, 물이 그려져 있는데,

왕의 덕을 칭송하고 하늘이 자연을 돌보듯이 국왕을 보호해 주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 있다.

 

 

御寶 函(어보 함)

 

왕권의 상징물, 어보(御寶) · 어책(御冊) · 교명(敎命)

어보(御寶)는 국가와 왕권을 상징하는 예물이다. 일반적으로 왕의 인장을 뜻하나 왕비. 왕세자등의 의례용 인장까지 통칭한다.

왕실 인사를 책봉하거나 덕을 기리며 특별한 이름을 올리는 의식을 할 때 지위와 이름을 어보에 새겼다.

어책(御冊)은 어보와 함께 올리는 책으로서 주인공의 공덕을 칭송하는 글이나 국왕의 훈유(訓諭)를 새겼다.

어보와 어책은 지위와 의례의 종류에 따라 재질을 다르게 제작했다.

교명(敎命)은 왕비 · 왕세자 · 세자빈 등을 책봉할 때 수여하는 문서로 왕의 당부의 말이 담겨 있다.

왕과 왕비의 어보 · 어책 · 교명은 주인공의 사후 종묘(宗廟) 신실에 봉안하여 조선 왕실의 권위와 전통성을 상징했다.

 

追尊(추존)

왕이 돌아가신 사친(私親)에게 왕호(王號)를 올려 숭상(崇上)하는 의식으로 "추숭(追崇)"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추존된 왕은 모두 9위로 태조의 직계 4조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와 덕종(德宗), 원종(元宗)

진종(眞宗), 장조(莊祖), 익종(翼宗)이다.

 

 

穆祖 金寶(목조 금보) : 시대 = 조선 1705년(숙종 31년)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穆祖?~1274년)에게 올린 어보이다. 1394년(태조 3년) 태조 즉위 후 목조로 추존하였다.

이 금보는 숙종 31년(1705)에 시호를 올리며 새로 만든 것이다.

 

 

眞宗 金寶(진종 금보)

 

眞宗 金寶(진종 금보) : 시대 = 조선 1776년(정조 즉위)

영조의 유지(遺旨)에 따라 효장세자(孝章世子)를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추승하며 만든 금보이다.

사도세자가 폐위되어 죽자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養子)로 입적(入籍) 시켰다.

 

 

玉冊 腰輿(옥책 요여)  :  옥책을 실은 작은 가마

 

金寶 彩輿(금보 채여)  : 금보를 실은 장식가마

 

 

諡號(시호)

왕이 승하하면 생전의 업적을 평가해 올리는 이름으로 중국황제로부터 받는 시호[賜諡, 사시]와 신하들이 올리는 시호가 있다.

봉상시(奉常寺[봉상사])에서 시호를 모아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는 의정부에 보고하였다.

의정부에서는 2품이상의 관료들을 모아 시호를 의논하고, 정해지면 이를 왕에게 보고해 결정하였다.

 

太祖 金寶 印面(태조 금보인면)  : 시대 = 조선 1683년(숙종 9년)

태조(太祖)의 시호를 새긴 어보이다 "강헌(康獻)"은 明에서 내린 시호이고, "지인계운성문신무(至仁啓運聖文神武)는

1408년(태종 8년)에 올린 시호이다. 이 어보는 숙종이 "정의광덕(正義光德)이라는 시호를 더 올리면서 만든 것이다.

 

肅宗 玉寶(숙종옥보) : 시대 = 조선 1713년(숙종 39년)

숙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면서 존호를 올려만든 어보이다. 숙종에게는 현의광륜예성열렬, 인경왕후에게는 광렬(光列),

인현왕후에게는 효경(孝敬), 인원왕후에게는 혜순(惠順)이라 올렸다.

 

 

肅宗妃 仁元王后 玉寶(숙종비 인원왕후 옥보) : 시대 = 조선, 1752년(영조 28년)

"수창(壽昌)"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만든 어보이다. 인원왕후는 1702년(숙종 28년) 왕비로 책봉되었고,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왕대비로 있으면서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마다. 왕실의 큰 어른으로서 먼저 존호를 받았다.

 

 

경종이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할 때 내린 옥인 · 죽책

英祖王世第冊封 玉印 · 竹冊(영조왕세자책봉 옥인 죽책) : 시대 = 조선 1721년(경종 1년)

영조는 1694년(숙종 20년) 태어나 1699년(숙종 25년)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으며, 1721년(경종 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英祖 竹冊函(영조 죽책함)  :  시대 = 조선 1721년(경종 원년)

 

 

英祖 竹冊(영조 죽책)  : 시대 =  조선 1721년(경종 원년)

 

 

英祖 玉印(영조 옥인)  :  시대 =  조선 1721년(경종 원년)

 

 

英祖妃 貞純王后 冊封 金寶 · 玉冊 · 敎命(영조비 정순왕후 왕비 책봉 금보와 옥책과 교명) : 시대 = 조선 1759년(영조 35년)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정성왕수(貞聖王后)가 승하한 지 2년 후인 1759년(영조 35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때 금보와 임명장인 교명, 왕의 당부의 글을 새긴 옥책이 올려졌다.

 

 

 

 

 

 

 

왕의 당부의 글을 새긴 옥책

 

 

英祖妃 貞純王后 冊封 金寶 · 玉冊 · 敎命(영조비 정순왕후 왕비 책봉 금보와 옥책과 교명) : 시대 = 조선 1759년(영조 35년)

정순왕후(貞純王后)는 정성왕수(貞聖王后)가 승하한 지 2년 후인 1759년(영조 35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때 금보와 임명장인 교명, 왕의 당부의 글을 새긴 옥책이 올려졌다.

 

 

英祖妃 貞純王后 金寶(영조비 정순왕후 금보)

 

 

英祖妃 貞純王后 敎命(영조비 정순왕후 교명)

 

 

英祖妃 貞純王后 敎命函(영조비 정순왕후 교명함)

 

 

皇帝之寶(황제지보) : 大韓帝國(대한제국) 1897년(광무 원년)

황제국임을 천명한 대한제국 선포 이후부터 사용된 국새다. 황제지보는 훈기(勳記 : 훈장 서훈 사유)와

친임 관칙지(親任官勅旨 : 국왕이 직접 임명하던 관직) 용으로 제작되었다.

 

 

皇帝之寶(황제지보) : 大韓帝國(대한제국) 1897년(광무 원년)

 

 

諭書之寶(유서지보)  :  시대 = 조선 1876년(고종 13년) 경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서인 유서(諭書)에 날인하여 사용한 인장이다. 유서지보는 세종 대부터 고종 대까지 사용됐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칙명지보(勅命之寶)로 바뀌었다.

 

 

   

諭書之寶(유서지보) 정면과 옆면

 

 

濬明之寶(준명지보)  :  시대 = 조선, 1889년(고종26년) 이후

준명지보는 세자시강원 관원의 교지에 사용한 국새로 1889년(고종 26년)부터 사용됐다.

이와 유사한 국새로는 "흠문지보(欽文之寶)" · "명덕지보(明德之寶)" · "광운지보(廣運之寶) 등이 있다.

 

 

濬明之寶(준명지보) 

 

 

壽康太皇帝寶(수강태황제보) : 시대 = 대한제국 1907년(융희 원년)

1907년(융희 원년) 순종황제(純宗皇帝, 1874년~1926년)가 高宗皇帝(고종황제, 1852년~ 1919년)에게 "수강(壽康)"이라는 존호(尊號)를 올리면서

제작한 어보(御寶)이다. 8각의 측면에는 주역(周易)의 팔괘(八卦)를 새겼는데, 이러한 어보는 조선과 대한제국을 통틀어 희귀한 형식이다.

 

   

 

   

다양한 모습의 壽康太皇帝寶(수강태황제보)

 

 

영조가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하사한 유서(英祖兪世孫書[영조유세손서])  :  시대 =  조선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83세에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은인을 내릴 때 함께 하사한 유서이다.

정조의 효성이 만세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과 후계자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다.

 

 

   

"孝孫八十三書(효손83서)"를 새겼다.                                                                        영조가 내린 銀印(은인)

 

 

영조가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하사한 은인

正祖孝孫銀印 · 兪世孫書(정조효손은인과 유세손서)  :  시대 = 조선 1776년(영조 52년)

 

영조가 83세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의 효심에 감동하여 내린 은인이다. 영조의 친필로 "孝孫八十三書(효손83서)"를 새겼는데,

정조는 이 은인을 소중하게 여겨 정사를 볼 때나 거동길에 항상 앞에 두었다.

 

 

英祖가 내린 銀印과 書筆 함(영조가 내린 은인과 서필 함)

 

 

英祖(영조) 임금이 세존(正祖[정조])에게 이르는 글 = 兪世孫書[유세손서]

 

 

숙종비 인원왕후의 금보를 포장하는 과정

肅宗妃 仁元王后 金寶 封裹(숙종비 인원왕후 금보 봉과) : 시대 =  조선  1702년(숙종 28년)

 

금보를 보자기에 싸서 금속으로 된 보통에 넣고 빈 공간을 흰 솜으로 채운다.

보통은 다시 보자기로 감싸보록에 넣고 그 위에 방충제(衣香[의향])를 올린 후 자물쇠를 걸어 초주지(草注紙)를 봉한다.

 

   

숙종비 인원왕후의 금보를 포장하는 과정

 

 

숙종비 인원왕후의 금보를 포장해 넣은 함 

금보를 보자기에 싸서 금속으로 된 보통에 넣고 빈 공간을 흰 솜으로 채운다.

보통은 다시 보자기로 감싸보록에 넣고 그 위에 방충제(衣香[의향])를 올린 후 자물쇠를 걸어 초주지(草注紙)를 봉한다.

 

 

 

 

冕旒冠(면류관) = 복원

구장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최고 격식의 모자이다.

앞뒤로 옥과 구슬이 늘어뜨려져 있어서 시야를 가리고, 좌우에도 작은 솜뭉치가 늘어뜨려져 있다. 

 여기에는 "악을 보지말고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冕旒冠(면류관)

구장복을 입을 때 머리에 쓰는 최고 격식의 모자이다.

앞뒤로 옥과 구슬이 늘어뜨려져 있다, 여기에는 "악을 보지말고 나쁜 말을 듣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국왕의 면복(九等冕服[구등면복]) = 복원

국왕위 입는 최고의 예복으로 즉위식과 비(妃)를 맞는 가례, 종묘 제례와 조회(朝會), 정조(正朝)에 착용하였다.

머리에는 면류관을 쓰고 곤복(袞服)을 갖춰 입었다.

곤복은 곤의(章服[장복]) ·  중단 · 상 ·  폐슬 ·  옥대 ·  대대 · 후수 · 패옥 · 말 · 석 · 규로 구성되었다.

곤의에는 국왕이 갖추어야할 덕목이나 국왕을 상징하는 문양을 그리거나 수 놓았다.

상의(上衣)에는 龍(용) · 山(산) · 불꽃(火) · 꿩(華蟲[화충]) · 술잔 · 종이[宗彝] 등을 그르고

하의(下衣)에는 수초[藻, 조] ·  살[분미, ·  粉米] ·  도끼[보]  ·  불[黻]을 수 놓았다.

조선시대 국왕은 아홉 개 문양이 시문된 구장복(九章服)을 입었고

1897년(고종 34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자리에 오르면서 십이장복[十二章服]을 입었다.

 

 

袞服(곤복 = 곤룡포)에 들어가는 9개의 문양을 수 놓았다.

 

 

 

 

方心曲領(방심곡령) = 복원

 

 

裳(상) = 복원

 

 

                                蔽膝(폐슬)                                                                                          佩玉(패옥) = 복원

 

 

대대 · 후수(大帶 · 後綬) = 복원

 

 

태조임금 초상 = 太祖御眞(태조어진) : 대한제국 1900년(광무 4년)  = 복제

함경도 영흥(永興) 준원전(濬源殿)에 봉안되어 있었던 조선 태조 이성계 초상을 그대로 본 떠 그린 초상이다.

홍룡표에 익선관을 착용하고 어좌에 앉아 있는데『影幀模寫都監儀軌[영정모사도감의궤] 1900년』에는

준원지의 태조 어진을 옮겨 모사하여 경운궁의 선원전에 봉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 임금 초상화 = 英祖御眞[영조어진]

 

 

 

철종 임금의 초상 = 哲宗 御眞(철종 어진) : 보물 제 1492호   시대 = 조선 1861년(철종 12년)

조선 제 25대 철종임금(재위 1849년~1863년)의 31세 초상으로, 1861년(철종 12년)에 임금을 직접 보고 그린[圖寫,도사]것이다.

어진 제작 관련 기록인『御眞圖寫事實[어진도사사실] 1872년 이후』에 따르면 자비대령화원 李漢喆(이한철, 1808년 ~?)과

도하서 화원 趙重默(조중묵, 생몰년 미상)이 왕명을 받들어 주관 · 제작한 것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군복본 어진이다.

화면 상단에 "내 나이 31세 때의 초상(子三十一歲眞[자31세진])" 이라고 쓴 표제는 철종임금의 친필이다.

어진의 하단에는 용의 무늬를 놓아 짠 자리인 龍紋席(용문석)을 깔았다.

용문석의 가장자리에 "ㄹ"자 모양의 선을 두르고,  자리 중앙에 여의주를, 양쪽에는 청룡과 황룡을 수 놓았다.

 

 

實錄閣(실록각) = 기록문화의 정수,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 실록』은 제 1대 태조부터 제 25대 철종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왕들의 행적을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으로

총 17,00여 권에 달한다. 국왕이 승하하면 역시 편찬기관인 춘추관(春秋館)에서 임시 기구인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사관(史官)들이

평소에 기록해둔 사초(史草)와 각종 자료를 모아 실록을 편찬하였다. 사초는 사관이 매일매일 국왕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한 것으로

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열람하지 못하였으며, 사관은 기록에 공정성을 기하고자 노력하였다.

초초(初草) · 중초(中草) · 정초(正草)의 세 단계 수정 작업을 거쳐 완성된 실록은 중앙과 지방의 사고(史庫)에 각각 봉안하였고,

이후 정기적으로 바람을 쏘여(포쇄[曝曬]) 관리하였다.

 

 

영조가 써서 호조에 내린 현판 = 御筆書下戶曹(어필서하호조) :  시대 = 조선 1734년(영조 10년)

호조에 걸었던 현판으로 "씀씀이를 절약하여 재력을 축적하고 공물을 고르게 배정하여 백성을 사랑하라"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