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장물과 후원 계층의 확대
복장물(腹藏物)은 불상 안에 사리(사리)와 성스러운 물건을 함께 넣어 불상에 신성성을 부여하는 불상 봉안 형식이다.
불상의 내부를 꾸미는 복장(腹藏)은 불상의 겉을 꾸미는 것만큼 중요한 의식이었다.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복장물로 넣을 사리와
사리를 담을 통, 경전, 진귀한 광물, 곡물, 약재, 향, 직물, 복식등 여러 물품을 마련해야 하므로 제직비용도 늘어났다.
이러한 물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아 충당했다. 불상에 복장물을 넣는 새로운 방식은 수많은 후원자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고위 관료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후원에 참여하였다.
관료부터 천민까지 함께 조성한 阿彌陀佛 三尊佛像(아미타삼존불상) : 시대 = 고려 1333년, 금동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 삼존불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과 그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불이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즐거움만 가득한
극락세계에 태어나고자 했던 중생의 간절한 바람은 아미타신앙의 유행을 가져왔다.
이 아미타삼존불상은 1333년 9월 22일에 조성된 것이다.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의 바닥 안쪽 면에 적힌 묵서를 통해
장현(張鉉)과 그의 처 선씨(宣氏)의 시주로 불상이 조성되었고, 조성을 주관한 주요 인사는 승려 행인(行因), 영전(永全), 계환(戒桓),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 삼존불의 뒷모습
大勢至菩薩(대세지보살)
阿彌陀佛(아미타불)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관음보살상 바닥판 대세지보살상 바닥판
지순(至順) 4년(1333년) 9월 22일 시주자는 장현(張鉉)과 처 선씨(宣氏) 이고 일을 주관한 동량(棟梁)은 행인(行因), 영전(永全), 계환(戒桓)이다.
복장을 조성하며 남긴 글 腹藏發願文(복장발원문) : 시대 = 고려 1333년 종이에 묵서
발원문에는 주복장(主服藏) 비구 오회(比丘 烏廻)의 주관 아래, 복장의식에 참여한 수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복장물 전통이 확립되면서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여러 물품을 마련할 재정적 후원이 필요해졌으며 후원자의 수도 늘어났다.
복장발원문에 나온 이름을 살펴보면 조지경(趙之璟), 이천보(李天補), 최연(崔連)처럼 성씨가 있는 인물과
길덕(吉德) · 만덕(万德) · 어리가이(於里加伊) · 금이(金伊) · 물금(勿金)처럼 성씨가 없는 일반 평민의 이름이 함께 나열되어 있다.
동일한 형태의 발원문 조각이 관음보살상 복장물 중에서도 발견되었다.
복장을 조성하며 남긴 글 腹藏發願文(복장발원문) 중 김진명 영가군부인 권씨의 서명이 있는 다라니 : 시대 = 고려 1333년 목판본
「金稹[김진]」명 다라니 · 「永嘉郡夫人 權氏명[영가군부인 권씨명]」 명 다라니
복장물 중 불상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다라니 판본들을 넣었는데, 그 가운데 金稹[김진, 1292년 - ?]과 永嘉郡夫人 權氏명[영가군부인] 권씨 이름을
묵서로 쓴 다라니 판본이 있다. 김진은 1333년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인물이다. 부인인 영가군 부인 권씨의 묵서명도 함께 남아 있는데,
이름을 단독으로 쓴 사례와 李 모씨의 서명을 함께 쓴 경우가 있다.
이러한 묵서명들로 보아 1333년 김진이라는 고위 관료부터 성씨 없는 천민에 이르는 다양한 계층이 금동 아미타삼존불상 조성에 참여 하였음을 보여준다.
1. 중수 발원문, 조선 1702년 = 하단 글, 2. 중수 발원문, 조선 1738년 = 상단 글 3. 후령통
승려와 신도가 발원한 觀音菩薩坐像 · 腹藏物(관음보살좌상과 복장물) : 시대 = 고려 말 - 조선 초, 재질 = 목조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제작된 관음보살상으로, 보관이 남아 있지 않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장물로 후령통과 1702년과 1738년의 중수발원문 등이 발견되었다.
중수발원문에서는 개금(改金)하는 훌륭한 공덕이 모든 시주자에게 돌아가기를 기원하였다.
한번 조성한 불상이 후대에 어떠한 인연으로 새로운 공덕을 만드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수 발원문 역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1702년 중수 당시 시주자의 이름으로 원경(圓鏡)비구와 임시립(林侍立) 부부, 그리고 김일천(金一千)부부가 기록되었으나
1738년에는 승려들의 주도로 개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수 발원문, : 시대 = 조선 1702년
1702년 중수 당시 시주자의 이름으로 원경(圓鏡)비구와 임시립(林侍立) 부부, 그리고 김일천(金一千)부부가 기록되었으나
중수 발원문 : 시대 = 조선 1738년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제작된 관음보살상으로, 보관이 남아 있지 않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장물로 후령통과 1702년과 1738년의 중수발원문 등이 발견되었다.
후령통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제작된 관음보살상으로, 보관이 남아 있지 않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장물로 후령통과 1702년과 1738년의 중수발원문 등이 발견되었다.
승려와 신도가 발원한 觀音菩薩坐像 · 腹藏物(관음보살좌상과 복장물) : 시대 = 고려 말 - 조선 초, 재질 = 목조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제작된 관음보살상으로, 보관이 남아 있지 않으며 여러 차례 중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장물로 후령통과 1702년과 1738년의 중수발원문 등이 발견되었다.
중수발원문에서는 개금(改金)하는 훌륭한 공덕이 모든 시주자에게 돌아가기를 기원하였다.
한번 조성한 불상이 후대에 어떠한 인연으로 새로운 공덕을 만드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수 발원문 역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1702년 중수 당시 시주자의 이름으로 원경(圓鏡)비구와 임시립(林侍立) 부부, 그리고 김일천(金一千)부부가 기록되었으나
1738년에는 승려들의 주도로 개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신도 부부가 시주하여 만든 지장보살상
「正德十年」銘 地藏菩薩坐像(정덕십년명 지장보살좌상) : 보물 제1327호 시대 = 조선 1515년 재질 = 석조
붉게 채색한 바위 모양의 대좌에 앉은 지장보살좌상이다. 뒷면의 명문에 따르면 1515년 김순손(金順孫)부부, 김순대(金順代),
김귀천(金貴千) 부부, 송화(宋和) 부부가 시주하고 조각승 절학(節學)이 조각하여 관음보살상과 함께 조성되었다.
재정을 담당한 사람들의 명단인 시주질과 불사에 간여한 사람들의 명단인 연화질을 구분하는 조선 후기 발원문의 시원적 형태를 보여준다.
지장보살은 죽은 후의 세계를 관장하는 보살로 윤회로 고통 받는 중생, 특히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부처가 되는 것을 미룬 보살이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석조지장보살좌상 (石造地藏菩薩坐像) : 보물 제1327호 시대 = 조선시대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상으로 바위형태의 대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전체 높이가 33.4㎝ 정도의
작은 불상으로 몸체는 두껍게 도금이 되어 있고 대좌는 붉은 빛이 도는 칠을 하였다.
결가부좌한 모습의 지장보살상은 약간 앞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으며 목은 짧게 표현되었다.
양 어깨를 모두 감싼 옷을 입고 왼손에 보주를 들고 있다.
머리와 몸에 비해 다리와 양손이 작게 표현되어 있고, 조선시대 불교조각품으로는 드문 소형 석조상이다.
특이한 바위형태의 대좌 뒷면에는 이 불상 조성 배경 및 시주자와 제작자, 제작연대를 밝혀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조선 중종 10년(1515)에 만들어진 이 석조지장보살좌상은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하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고 조성 배경이나 연대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금강산 사찰에서 발원한 관음보살좌상
觀音菩薩坐像 · 腹藏物(관음보살좌상과 복장물) : 시대 = 조선 1763년, 재질 = 목조
1965년 한일 협정으로 반환된 관음상으로 복장물도 함께 반환되어 제작연대를 알 수 있다.
동그란 턱선에 평면적인 얼굴 표현과 방형 기둥을 연상시키는 신체 표현은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이다.
나무로 만든 보관 중앙에는 부처의 모습을 새긴 장식판과 봉황모양 장식판이 달려있다.
머리 안쪽에서는 진언(眞言)을 적은 종이가 발견되었고 몸 안에서는 조성 발원문과 중수발원문, 종이로 만든 후령통과 오보병, 경전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복장물을 납입하는 방식은 조선 후기 복장물 납입 규범서로 자리잡은『造像經[조상경]』에 의거하였다.
금강산 사찰에서 발원한 관음보살좌상
觀音菩薩坐像 · 腹藏物(관음보살좌상과 복장물) : 시대 = 조선 1763년, 재질 = 목조
褡穫(답호)
원(元)나라에서 들어온 것으로 고려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왕과 관리들의 상복(常腹) 안에 입거나 사대부의 겉옷 위에 덧입는 옷이었다고 한다.
형태는 옷깃은 곧은 깃이고 반소매가 팔꿈치에 이르며, 넓은 섶이 가슴을 덮어 겨드랑이 밑에서 여며지며
옷길이는 발목까지 오는 긴 길이로 옆트임이 있다.
영조대왕이 하사한 도포 : 중요민속문화재 제 220호
英祖大王 道袍 · 發願文(영조대왕 도포와 발원문) : 시대 = 조선 1740년, 소장 = 파계사
1740년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년 - 1776년)이 하사한 도포로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음보살상을 개금 중수할 때 납입한 복장물이다.
이곳은 숙종 계비 인원황후, 영조와 영조비 정성왕후의 탄일 불공을 드리는 왕실의 원당으로 1740년 12월 영조대왕이 왕의 도포를 하사하면서
만세유전(萬歲流傳)을 기원하였다. 1740년은 영조가 정치적 대통합을 이루고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던 해이기도 하다.
연한 녹색의 영조대왕 도포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도포에 격식을 더했으며, 넓을 소매에 일반인의 곧은깃과는 달리
당코깃(반목판깃)의 형태가 특징이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에서 퍼옴>
발원문
乾隆五年 庚申十二月十一日 腹藏記 聖上主甲戌生李氏 靑紗上衣一領萬歲流傳于 把溪寺者國家願堂三殿誕日佛供處也
(건륭오년 경신십이월십일일 복장기 성상주갑술생이씨 청사상의일령만세류전우 파계사자국가원당삼전탄일불공처야)
뜻 = 건륭 5년(1740년 영조 16년) 경신 12월 11일 복장기 성상께서 갑술년(1694년, 숙종 20년)에 태어나셨으며 성은 이씨이다.
청사(靑紗) 상의(上衣) 1령(一領)을 파계사(把溪寺)에 대대손손 남기는 것은 삼전(三殿)의 탄일(誕日)에 불공을 드린
국가의 원당(願堂)이기 때문이다. = 옷깃속에 발원문이 들어 있음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영조대왕의 도포 (英祖大王의 道袍) : 중요민속문화재 제220호 시대 = 조선 소장 = 파계사
이 도포는 1979년 파계사 원통전(圓通殿)의 관세음보살상을 금칠하다가 발견된 것이다. 도포와 함께 발견된 한자 두루마리에 적힌 발원문에 의하면,
그 제작연대가 건륭 5년(1740) 9월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대법당을 개금하고 불상과 나한을 중수했다.
이 때 영조대왕은 탱불, 일천불을 희사하고 이 곳을 불상을 공양할 원당으로 삼았으며,
성상의 청사상의를 복장하여 만세유전을 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왕의 도포(道袍)를 내렸다고 한다.
도포는 조선시대에 왕을 비롯하여 사대부의 외출복으로 입혀졌던 옷으로 기록이나 유물은 16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형태는 곧은 깃에 넓은 소매(廣袖)가 달린 것으로 뒷자락이 2중구조로 된 특징이 있다. 길에서 내려오는 기존의 뒷자락이 있으며
앞의 무가 뒷자락 안에 붙어 있어 뒷자락이 2단으로 분리되어 있다.
18세기 풍속화 중 도포를 착용한 모습에서 서로 분리되어 있는 뒷자락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조의 도포는 무늬 없는 사(紗:[은조사])로 된 홑옷으로 현재의 색상은 연한 녹색빛을 보인다.
소매는 넓은 두리 소매이며 깃의 모양은 목판깃과 당코깃 모양이 합쳐진 반당코깃(반목판깃)이다.
일반인의 도포가 곧은깃(직령깃)인데 반하여 반목판깃의 형태여서 서민과 왕족이 사용한 도포의 양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본 유물은 전세 유물 도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왕이 착용하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는 중요한 자료로 형태와 색이 비교적 완전하여
복식사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
사경 후원 계층의 변화 ↓↓
화려한 색으로 물들인 종이에 금과 은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 옮긴 사경(사경)은 정교하고 화려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고려시대 사경의 후원자들은 금은을 쓸 수 있는 높은 신분이었고 제작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최상위 계층이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후원자의 신분보다는 사찰에 물질적인 지원을 할 수 있는 경제력이 중시되었다.
따라서 왕공 귀족뿐만 아니라 지방의 향도나 승려, 여성도 제작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면 사경의 발원자가 되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신도들은 기존의 경전을 다시 활용하거나 여러 사람들이 공동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승려 신인이 발원한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 : 보물 제 1098호, 시대 = 고려 1315년, 소장 = 호림박물관
감지에 은니 = 감색 종이에 은으로 쓴 글
미륵신앙의 기본 경전인『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불설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
『불설관미륵보살하생도솔천경[佛說觀彌勒菩薩下生兜率天經』『佛說彌勒大成佛經[불설미륵대성불경]』의 세 경전을 모은 사경이다.
경전 끝의 사성기에 따르면 1315년 승려 신인(信因)이 국왕의 장수와 돌아가신 부모와 친인천이 극락왕생하여 아미타불을 만나고,
미륵불의 하생 시 중생들을 깨우쳐 줄 것을 발원하였다. 승려가 개인적으로 가족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제작한 사경으로,
명망높은 승려들이 종종 개인적인 불사에도 참여하였음을 보여준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감지은니미륵삼부경 (紺紙銀泥彌勒三部經)
미륵삼부경이란 미륵신앙의 3가지 기본경전인 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 미륵하생경, 미륵대성불경을 가리킨다.
검푸른 빛의 종이에 은가루를 이용하여 글씨를 썼으며, 크기는 세로 29.5㎝, 가로 52.5㎝이다.
각 장의 종이를 이어붙여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도록 한 형태이다. 책 끝에는 고려 충숙왕 2년(1315)에 승려 신인(信因)이
국가와 국민의 태평, 돌아가신 부모의 평안함 등을 기원하는 뜻에서 이 책을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책은 고려시대 미륵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자료이며, 책을 쓰게 된 목적이 밝혀지고 글씨도 정성스럽게 쓰여진 뛰어난 작품이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상단 =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 하단 = 묘법연화경
戶長 李臣起 發願한 妙法蓮華經 券 七(호장 이신기가 발원한 묘법연화경 권 7) 감지에 은니
감지은니묘법연화경 (紺紙銀泥妙法蓮華經) : 국보 제234호 시대 = 고려시대 소장 = 삼성미술관 리움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우리나라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음을
기본 사상으로 하고 있다.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확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쳤으며, 삼국시대이래 가장 많이 유통된 불교경전이다.
이 책은 후진의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것을 고려 충숙왕 17년(1330)에 이신기가 옮겨 쓴 것이다.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으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8.3㎝, 가로 10.1㎝이다. 표지에는 제목이 금색 글씨로 쓰여 있고,
주위에 4개의 화려한 꽃무늬가 금·은색으로 그려져 있다. 본문은 검푸른 색 종이 위에 은색 글씨로 썼으며,
곳곳에 손상을 입은 흔적이 보이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7권의 끝부분에 나오는 기록을 통해 이신기가 살아 계신 아버지의 장수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화경을 정성껏 옮겨 쓴 경전들 중에 비교적 만들어진 연대가 빠르며, 특히 7권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제청 상세 해설문>
妙法蓮華經 券 七(묘법연화경 권 7) : 국보 제 234호 시대 = 고려 1330년
옛 충청남도 부여 지역인 홍산군(鴻山郡) 호장 이신기(李臣起)가 1330년에 발원한 사경이다.
아버지의 장수와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시주하였다. 호장(戶長)은 지역의 행정을 관리하는 향리의 최고직으로 향도(香徒)의
중심이었지만, 13세기까지 호장이 금과 은으로 경전의 글씨를 옮겨 쓰는 사경을 발원한 사례는 드물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이르러 계층에 상관없이 재력이 있으면 지방 향리, 승려, 여성 등도 사경 제작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었다.
<박물관 해설문>
하급 관료들이 재활용한 妙法蓮華經 券 七(묘법연화경 권 7) : 보물 1138호, 시대 = 고려 1366년
권도남(權圖南)을 비롯한 권씨 일가가 죽은 아버지와 선조들의 명복을 빌며 발원한 사경이다.
시주한 사람들은 직장(直長), 별장(別長) 등 하급 관료 또는 무관으로, 사경의 주요 발원층인 국왕과 귀족, 고위 관료들과는 거리가 있다.
이 사경은 기존 사경에 발원문을 적는 사성기 부분만 새로 쓴 것이다. 경전의 앞부분은 금빛이 비래고 획이 희미해진 반면,
새로 적은 경전 끝의 사성기는 선명하다. 사경 전체를 발원한 만환 경제력이 없는 계층은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드는 기존의 사경을
다시 사용하기도 하였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감지금니묘법연화경 권7 (紺紙金泥妙法蓮華經 卷七)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요사상으로 하고있다.
천태종의 근본 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이다.
이 책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옮겨 쓴 것으로, 법화경 7권 가운데 마지막권에 해당된다.
책 뒷면의 표지 속에는 금색으로 법칠사장(法七四丈)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다. 검푸른 색의 종이 위에 금가루를 이용해 글씨를 썼으며,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고 크기는 세로 31.3㎝, 가로 11㎝이다.
책 끝부분에는 고려 공민왕 15년(1366)에 권도남 등이 돌아가신 아버지와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 책을 봉정사(鳳停寺)에
모셔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이 본문과는 글씨와 종이질이 달라 당시 권씨 일가가 기존에 있던 법화경을 구하여
봉정사에 시주할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형식으로 보아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친정 부모와 남편의 명복을 발원한 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 普賢行願品 神衆合部(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 신중합부) : 시대 = 고려 1350년
화엄경의 시작인『普賢行願品[보현행원품]』과 마지막인『世主妙嚴品[세주묘엄품]』을 앞뒷면에 옮겨 쓴 사경이다.
연안군부인(延安郡夫人) 이씨(李氏)가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 이사온(李思溫)과 어머니 진씨(秦氏) 남편 김석(金碩)의 명복을 빌기 위해
발원하였다.『高麗史[고려사]』에 따르면 이사온은 고려 왕실의 명망있는 신하였으나 유배당하였고,
남편 김석은 환관으로 충숙왕이 왕위에 오르는데 기여하여 이등 공신이 되었던 인물이다.
한씨 여성이 바친 접시 = 「韓氏」銘 楪匙[한씨명 접시] 6점 : 시대 = 고려 청동 출토지 = 충북 괴산군 사담리
딸이 아버지의 명복을 기원한 향완「庚戌」銘 香垸(경술 명 향완) : 시대 = 고려, 청동 출토지 = 전북 완주군 상관면 대성리
향완(香垸)의 명문은 주로 몸체에 달린 테두리 뒷면에 새긴다. 이 향완에는 돌아가신 아버지 숭건(崇巾)을 위해 그의 딸인 엄가(嚴加)가
경술년(庚戌年)에 발원하여 불전에 바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전기까지 왕실이나 고위 관료의 부인이 아닌 일반 여성 신도가
독립적인 불사의 후원자로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는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지역 신도의 후원이 필요한 의식구나 공양구에서 여성 후원자의 이름이 보인다.
①사내사 명 향완 ②태화5년명 향완
①사내사 명 향완
지방 향리들이 발원한「思內寺」 銘 香垸(사내사 명 향완) : 시대 = 고려, 청동 출토지 = 충북 청주 사뇌사지
호장 한경필(韓鯁弼)과 호정 한억(韓億)이 사내사(思內寺) 탑전(塔殿)에 봉안하기 위해 발원하여 만든 향완이다.
호장(戶長)은 고려시대 향리의 우두머리로 지방의 실무 행정을 총괄하였다. 호정(戶正)은 향리의 아홉 등급을 뜻하는
구등향직(九等鄕職)중 네 번째 등급이었다. 이 향완은 지방의 향리들이 개인의 안위를 위해 불사를 후원하였음을 보여준다.
②태화5년명 향완
하급 관리의 명복을 기원한 향완 :「太和五年」銘 香垸(태화 5년 명 향완) : 시대 = 고려 1205년 출토지 = 충북 청주 사뇌사지
상단 = 설씨 부인이 쓴 시주를 권하는 글인 薛氏夫人 勸善文(설씨부인 권선문) : 보물 제 728호 시대 = 조선 1449년
설씨부인(1429년 - 1509년) 종이에 색과 묵서
설씨부인(薛氏夫人)이 순창(淳昌)의 강천사(剛泉寺)를 다시 고쳐 세우고자 신도들에게 시주할 것을 권한 글이다.
설씨 부인은 신말주(申末舟, 1429년- 1503년)의 부인이며 신말주는 집현전 학자로 잘 알려진 신숙주(申叔舟, 1417년- 1475년)의 동생이다.
설씨부인은 보시를 하면 공덕을 쌓을 수 있고 자신뿐만 아니라 임금과 어버이 그리고 천지만물을 이롭게 한다며 신도들의 참여를 권하였다.
이러한 권선문은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점차 제약이 커지던 상황에도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하단 = 죽은 남편을 위해 발원한 妙法蓮華經 券 三 · 四 · 七(묘법연화경 권 3 · 4 · 7) : 시대 = 고려 1385년
백지에 묵서(경문)와 금니(변상)
경전을 옮겨 쓰는 것은 그 자체가 공덕(功德)으로『法華經[법화경]』을 옮겨 쓰는 것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의마가 담겨있다.
권 7의 발원문을 통해 개성군부인(開城郡夫人) 김씨가 죽은 남편 박중기(朴仲起)의 명복을 빌기 위해 사경을 조성하였고,
신분이 높은 여성은 단독으로 사경을 발원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려 후기에는 여성의 신앙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여성 발원자들이
늘어났다. 금으로 변상도를 그리고 먹으로 경문을 쓰는 백지묵서(白紙墨書)사경은 다양한 발원 계층의 등장에 따른 사경 재질의 변화를 보여준다.
<사성기>
개성군부인 김씨가 특별히 망부(망부) 박중기()_의 존귀한 영혼이 번뇌를 끊고 진실한 불법(佛法)을 증명하며 범부의 습관을 고쳐 성인(聖人)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를 위하여 삼가 깨끗한 재물을 내어 공경히 묘전(妙典, 불교 경전)을 완성하여 세상에 영원히 유통시켜 공양하고,
널리 모든 인류로 하여금 모두 그 이익을 받아 화성(化城, 소승의 열반)에 지체하지 않고 바로 寶所(보소, 대승의 열반)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홍무(洪武) 을축년(乙丑年 1385년) 3월 일 기록합니다. 동원(同願), 산납(散衲), 상우(尙愚),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
설씨부인 권선문 (薛氏夫人 勸善文)
설씨부인 권선문(薛氏夫人 勸善文)은 조선 단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문신으로 활약한 신말주의 부인 설씨가 선(善)을 권장하는 내용을 담아
쓴 글과 그림이 있는 문서이다.
내용을 보면 설씨가 남편 신말주와 함께 전라북도 순창에 있을 때, 이 곳 강천산에 있는 강천사를 복원하기 위해
신도들에게 시주를 얻고자 권선문(勸善文)을 짓고 사찰도를 그려 돌려보게 했던 것이다.
전체 16폭 가운데 그 가운데 14폭은 권선문이고 나머지 2폭은 사찰의 채색도가 그려져 있으며, 뒷면에는 후손들의 집에 전해내려오던
편지글과 권선문이 쓰여져 있다. 또한 성화 18년(성종 13년 1482) 7월 정부인 설이라는 연대와 인장이 찍혀있다.
이 문첩은 조선시대 여류 문인이 쓴 필적으로는 가장 오래되었고, 사대부 집안의 정부인이 쓴 인과법에 의한 글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문화재청의 상세 해설문>
고려의 황후, 함평궁주가 발원한 향완 「咸平宮主房」銘 香垸(함평궁주방명 향완) : 시대 = 고려 1247년 이전
청동에 은입사
고려의 황우가 발원하여 제작한 유일한 향완으로 함평궁주방(咸平宮主房)에서 화엄경장(華嚴經藏)에 놓기 위해 제작하였다.
함평궁주(?- 1247년)는 고려의 21대왕 희종(熙宗, 재위 1204년 - 1211년)의 비인 성평왕후(成平王后)로 1211년에 함평궁주로 책봉되었다.
황실의 일원으로 태어나 황후가 되었으나 남편인 희종은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되었고 두 아들도 유배되는 등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이 향완은 황후의 발원품답게 귀한 재료였던 은을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홈을 새기고 은실을 끼워 넣는 은입사(銀入絲)
기법으로 연꽃 문양, 포도넝쿨 문양, 구름 문양등 당양한 문양을 표현하였다.
고려의 황후, 함평궁주가 발원한 향완 「咸平宮主房」銘 香垸(함평궁주방명 향완)
이성계와 부인 강씨가 발원한 사리구
李成桂 發願 舍利具(이성계 발원 사리구) : 시대 = 고려 1390년- 1391년 출토지 = 강원도 회양군 장연리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직전 금강산 월출봉에서 발원하여 봉안한 사리구이다. 사리기는 석합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사리를 담은 탑 모양,
사리기를 팔각형 집 모양 사리기, 청동완, 백자발에 차례로 봉안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처가 새겨진 탑모양 사리기에는 이성계와 부인 강씨의 이름을 기록하고, 팔각형 집모양 사리기 안의 은제 팔각통에는 홍영통(洪永通),
황희석(黃希釋)등 이성계 측근과 장인의 이름을 적었다. 주요 후원자일수록 가장 안쪽의 사리기에 이름을 기록하였는데,
이성계가 조선 개국에 일조했던 두 번째 부인인 강씨와 그의 가문에 대해 각별했음을 잘 보여준다.
1932년 10월 6일, 금강산 월출봉(1580m)에서 산불 저지선 공사를 하던 인부들이 돌 상자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안에는 사리갖춤이 들어 있었는데,
이성계와 부인 강씨, 그리고 후에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이들을 비롯한 1만여 명이 미륵을 기다리며 금강산 비로봉(1638m)에 사리갖춤을 모신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당초 비로봉에 봉안한 사리갖춤이 어떻게 월출봉에서 발견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은기(銀器) 3점, 동기(銅器) 1점, 백자(白磁) 5점으로 이루어진 이 사리갖춤(이하,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발견 반년 후인 이듬해 7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정식 유물로 등록되고, 후에 국립박물관이 인수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이성계 발원 사리갖춤은 그 조형적 특징과 미술사적 위상이란
면에서 크게 주목되지만, 한편으로 역성혁명을 목전에 둔 신흥무장 출신 이성계의 자신감과 야망이 매우 정치색 짙게 드러나는
특이한 역사 유물인 점에서도 대중적 재조명이 필요한 유물이라 생각됩니다.
①팔각형 집 모양 사리기 ②탑 모양 사리기
①팔각형 집 모양 사리기 명문
庚午 三月日 造成舍利 塔奉持 納子 月菴 施主 加 伊氏 安月 同知密直 黃希釋 朴氏福壽 樂浪郡夫人 妙禪 康澤 江陽郡 夫人 李氏 妙情
<경오 삼월일 조성사리 탑봉지 납자 월암 시주가 이씨 안월 동지밀직 황희석 박씨복수 락랑군부인 묘선 강택 강양군 부인 이씨묘정
勝田宝德 樂安郡夫人 金氏 孝人希寬■志 信南 造 羅得富 李氏奴竜 朴子靑
승전보덕 락안군부인 김씨 효인희관■지 신남 조 라득부 이씨노룡 박자청>
領三司事 洪永通, 貞順宅主 黃氏, 興海郡 夫人 裵氏釋碑
<영삼사사 홍영통, 정순택주 황씨, 흥해군부인 배씨석비>
라마탑형 사리기를 품은 것은 은제금도금 팔각당형 사리기일 것입니다. 팔각당형 사리기도 라마탑형 사리기처럼 연화형 대좌와 팔각형 은판,
팔각당형 뚜껑 등 각 부분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한 형태입니다. 팔각형 은판의 표면에는 종서(縱書)와 횡서(橫書)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庚午년(1390년, 공민왕 2) 3월에 사리탑을 조성하여 모신다는 내용과 발원자들의 이름이 보입니다. 강양군부인(江陽郡夫人) 이씨(李氏),
낙안군부인(樂安郡夫人) 김씨(金氏)(혹은 전씨(全氏)) 등 상류층 여성 신도들과 함께 발원에 참여했습니다. 승려 월암(月菴)과
영삼사사(領三司事) 홍영통(洪永通), 동지밀직(同知密直) 황희석(黃希), 그리고 박자청(朴子靑) 입니다.
월암은 이성계가 일찍이 보살피던 승려입니다. 그는 이성계와 인연으로 사리갖춤 불사에 봉안 홍영통은 유명한 재상 홍자번의 증손입니다.
황희석(黃希석)은 1388년 요동 정벌시 청주상만호(靑州上萬戶)로 이성계 휘하에 있으면서 위화도 회군 이후 회군공신에 책록되고,
1392년에 살해된 정몽주 일파의 단죄 요청을 주도하는 등의 활약으로 개국공신이 된 인물이다.
그가 환속한 승려인데도 개국공신에 책록된 것은 잘못이라는 태종 때 권희달의 주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회군공신인 데다
불교계와의 깊은 인연으로 이성계의 사리갖춤 불사에 동참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리기 제작을 맡은 인물로 추정되는 나득부(羅得富), 이씨(李氏), 노룡(奴竜) 등과 함께 명문 맨 끝부분에 기록된 점, 그리고 사리기에
돌아가며 새긴 8구의 합장한 불입상이 1408년 박자청이 감역한 태조(太祖) 건원릉(建元陵)의 무인석상(武人石像)과 양식적 친연성(둥그스름한 어깨,
귀가 크고 넓적한 얼굴 모습, 양쪽 발을 벌리고 서 있는 자세 등)이 있다는 견해 등을 감안하면, 이성계 휘하인 황희석의 가인으로 있으면서
장인으로서의 전문성이 인정되어 동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②탑 모양 사리기 명문
분충정난(奮忠定難), 광복섭리(匡復燮理), 좌명공신(佐命功臣),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수문화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李成桂), 삼한국대(三韓國大), 부인강씨(夫人康氏), 물기씨(勿其氏) 등
가장 안쪽에 모신 사리기는 은제금도금 라마탑형 사리기입니다. 이 사리기는 유리와 금속으로 된 가느다란 원통형 용기와 연좌형 대좌.
원통형 은판, 그리고 라마탑형 용기가 결합한 형태입니다. 불사리를 직접 봉안했을 가느다란 원통형 용기를 연좌형 대좌 위 원통형 은판
안에 놓고, 여기에 라마탑형 용기를 뚜껑으로 덮었을 것입니다. 이 용기에는 돌아가며 4구의 불입상(佛立像)이 새겨져 있습니다.
양 발을 벌리고 마치 호위 무사처럼 정면으로 서 있는 이 불상들은 전형적인 고려 불화의 양식과 달리 정면관(正面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불입상을 비롯한 여러 문양은 축조(蹴彫)와 어자문기법(魚子文技法), 그리고 선조기법(線彫技法)으로 표현되었고, 대좌부ㆍ상륜부 등 주요 부분과 함께
부분 도금을 하였습니다. 이런 부분도금은 현존 고려시대 금은기(金銀器)나 사리갖춤 중에서는 예를 찾기 어려운데, 연화형 대좌는 타출한 은판 1장과
연꽃 모양으로 자른 은판 3장을 겹쳐 연결하였는데, 하단부는 한 장의 은판을 타출하여 변형 여의두문 형태의 독특한 다리와 2단의 연파문대,
원형 대좌부 등을 표현하였습니다. 뚜껑으로 쓰인 라마탑형 용기는 상륜부와 계란형 탑신부를 따로 만들어 결합한 것으로, 한 장의 은판으로 제작한
상륜부는 고도의 타출기법을 보여줍니다.
한편 원통형 은판의 표면에는 ‘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守門下侍中 李成桂 三韓國大夫人 康氏 勿其氏’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사의 핵심 발원자인 이성계와 그 부인 강씨를 기록한 것입니다. ‘奮忠定難…守門下侍中’은 1389년 공양왕 옹립 후에 받은 위호로서,
사실상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 이성계의 위상을 담고 있습니다. 그처럼 대단한 이성계의 불사에서 첫째 부인 한씨(韓氏) 대신 둘째 부인 강씨가
이름을 올립니다. 물론 한씨는 불사 넉 달 후에 신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라마탑형 사리기의 제작 시기는 명문에 보이지 않으나, 기법과 양식 면에서 유사한 팔각당형 사리기가 만들어진 1390년 3월경에
두 사리기가 한 세트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靑銅 鉢(청동 발)
라마탑형 사리기와 팔각당형 사리기를 봉안한 것은 청동발입니다. 구연부 바깥 면에 ‘洪武二十四年辛未二月日造舍利盒施主信堅妙明朴竜’이라는
명문이 점각(點刻)으로 새겨져 있어서, 신미년(1391년) 2월 어느 날, 신견(信堅), 묘명(妙明), 박룡(朴竜) 등 3인이 시주하여 사리합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견과 묘명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鐘碑(1379년))에도 그 이름이 보여서 나옹의 문도들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박룡은 발을 만든 장인인 듯하지만, 분명치는 않다. 발의 안팎 면에 동심원으로 가질한 흔적이 있어 고려 말의 보기 드문 기년명 방짜유기일 가능성이 있다.
백자발 1. 백자발 2.
백자발1과 백자발2에 새긴 명문들입니다. 백자발1의 바깥 면에는 앞의 팔각당형 사리기에서 본 월암과 이성계(송헌시중(松軒侍中)에서
송헌은 이성계의 호이다. 그리고 만여 명의 사람들이 1391년(공양왕 3) 4월, 장차 미륵의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며 발원한다는 내용의 명문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백자발2는 굽 부분에 “辛未四月日防山砂器匠 沈竜 同發願比丘 信寬”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신미(辛未)년(1391년) 4월에
방산의 사기장 심룡이 그릇을 만들고 승려 신곤이 함께 발원한다는 뜻입니다. * 방산이란 =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을 말한다.
백자발2에는 또 하나의 명문이 그릇 안쪽 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金剛山毘盧峯舍利安遊記’로 시작하는, 앞서 본 팔각당형 사리기의 명문과
백자발1의 명문을 한 데 섞은 놓은 내용의 것인데, 신미년(1391년) 5월에 이성계와 부인 강씨, 승려 월암, 그리고 여러 상류층 여성들이 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비로봉에 사리갖춤을 모시고 미륵의 하생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 파손되어 명문 일부가 망실되었고,
유약으로 덮여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도 있지만 그릇의 크기나 ‘金剛山毘盧峯舍利安遊記’라는 제목 성격의 글이 있는 점에서
사리갖춤 가운데 가장 바깥쪽 용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위해 발원한 향완 「靑谷寺」銘 香垸(청곡사명 향완) : 시대 = 조선 1397년 청동에 은입사
태조 이성계의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명복을 빌며 진주 청곡사 보광전(普光殿)에 놓았던 향완이다. 향완의 발원자인 청곡사의
승려 상총(尙聰)은 1397년에는 청곡사의 중창비구로서 활동하였고, 1398년에는 신덕왕후 정릉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인 흥천사(興天寺)의
일을 맡았다. 함께 발원한 김사행(金師幸)은 태조대 환관이며, 김진(金秦)은 종 1품 찬성(贊成)을 지낸 인물이다.
왕비의 명복을 빌기 위한 향완답게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은이라는 귀한 재료를 사용하여 제작하였다.
♣♣♣ ↓↓
왕실 여성, 발원의 주체가 되다. 여성은 불교미술의 중요한 후원자로 고려시대부터는 거의 모든 계층에서 발우너의 주체로 부상하였다.
왕실은 조선 초기에도 여전히 불교의 중요한 후원 계층이었다. 특히 종친과 왕실 여인들은 사찰의 건립과 중창, 불상과 불화의 봉안, 범종 제작 등
모든 영역의 불사를 주도하였다. 이는 여성의 권한과 역할이 상당히 컸던 고려시대의 전통이 남아 있고, 권력을 지닌 왕실 여인들이 불교미술을 크게
후원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들이 후원한 불교 미술품에는 종종 궁중 화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최고의 화가와 장인들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발원 내용을 살펴보면 보통 영인들의 바람처럼 딸, 아내, 어머니로서 부모와 남편, 자식의 안위 또는 명복을 기원하였다는 점에서
여성 특유의 정서가 드러난다. 예학이 발전하면서 유교적 규범이 확립된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후원이 줄어들었지만
조선 말기에는 상궁들이 주요 후원자로 나서게 되었다.
인수대비가 발원한 佛頂心陀羅尼經(불정심다라니경)
佛頂心陀羅尼經(불정심다라니경) : 보물 제 1108호 시대 = 조선 1485년 목판본 소장 = 호림박물관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잘 알려진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아들 성종(成宗)을 위하여 간행한 경전이다. 인수대비는 장인을 시켜 중국의
경전을 본떠 만들게 하였다. 상단에는 그림을 그리고 하단에는 글을 실어 이해를 돕고 있다.
소혜왕후는 성종(成宗)의 모후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며 엄격한 유교적 윤리에 따라 내명부의 질서를 세웠다.
아들 성종의 만수무강과 안녕을 기원했던 어머니의 모정을 엿볼 수 있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불정심다라니경 (佛頂心陀羅尼經)
불정심다라니경은 온 마음으로 읽고 지니면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신앙에 의해 널리 유통된 경전이다.
다라니는 지혜와 삼매(三昧:잡념을 버리고 한가지 일에 정신을 집중시키는 것)를 성취시켜 주는 힘을 지니고 있는 말씀으로
글자 하나마다 무한한 의미와 위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목판에 새기고 닥종이에 찍어낸 것으로 상·중·하 3권을 1책으로 엮었으며, 크기는 세로 31㎝, 가로 18.7㎝이다.
책 끝에 있는 학조(學祖)의 글을 통해서 성종 16년(1485)에 인수대비가 당나라 판본을 견본으로하여 간행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문을 상·하 2단으로 나누어 위쪽에는 불경의 내용을 요약하여 묘사한 변상도(變相圖)를 그리고 아래쪽에는 불경을 썼다.
이 책은 이후에 여러 차례 다시 새겨 찍어낸 책들이 전래되고 있지만 지정된 보물 제1108호는 왕실에서 간행된 불정심다라니경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문화재청 상세 해설문>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가 발원한 부모은중경
佛說大報父母恩重經(불설대보부모은중경) : 보물 1125호 시대 = 조선 1432년, 목판본
태종의 후궁 명빈(明嬪) 김씨(金氏, ? - 1479년)의 후원으로 간행된『父母恩重經[부모은중경]』이다. 부모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치는 불교
경전으로, 孝를 중시하는 유교적 이념에도 부합되어 널리 유통되었다. 글과 그림을 함께 새겼으며, 경전 끝에는 1432년 간행 당시의 기록이 남아 있다.
왕실의 중요한 불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명빈 김씨는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과 자신의 친정을 위하는 마음에서 경전 간행을 후원하였다.
부모은중경의 판화는 부처가 해골에세 합장하는<如來頂禮圖[여래정례도]>, 어머니의 열 가지 은혜를 찬양한<十恩變相圖[십은변상도]> 등
21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에 표시된 해설문>
불설대보부모은중경 (佛說大報父母恩重經)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줄여서 ‘부모은중경’, ‘은중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부모의 소중한 은혜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얘기한 경전이다.
은중경은 구마라습이 번역한 것이며, 이 책은 세종 14년(1432)에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에 의해 간행된 것이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첩장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3.5㎝, 가로 11.3㎝이다.
일반적인 은중경과 같이 부모의 10가지 소중한 은혜를 글과 그림으로 함께 나타내고 있으며, 뒤에는 불설부모은중태골경이 함께 들어있다.
이 책은 왕실에서 간행된 책인 만큼 글자의 새김이 정교하며, 기림사 비로자나불복장전적(보물 제959호)에 있는 것과 동일한 판본으로 여겨진다.
<문화재청 상세 해설문>
인목대비가 발원한 金光明最勝王經(금광명최승왕경) : 시대 = 조선 1622년, 소장 = 동국대학교 박물관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선조의 두 번째 비였으나 광해군의 즉위 후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어었다.『金光明最勝王經[금광명최승왕경]』은 폐서인 신분이었던 인목대비가 손수 필사한 경전이다.
경전을 간행하면서 아버지와 형제, 아들 영창대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딸 정명공주와 상궁들의 수명장수를 기원하였다.
이 경전을 필사한 이듬해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었다. 경전의 표지에는 자수가 남아있어 한땀 한 땀 수를 놓았던 인목대비의
정성과 간절함이 엿보인다.
명빈 김씨와 인목대비가 발원한 수종사 불감과 불상
水鍾寺 佛龕 · 佛像(수종사 불감과 불상) : 보물 제 1788호 시대 = 조선 1493년 출토지 = 경기도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수종사 팔각 오층석탑에 봉안했던 불상이다. 1층 탑신석에서 금동불감과 함께 발견된 석가불좌상에는 시주자인 명빈(明嬪) 김씨의 명문이 남아 있다.
불상 안에서는 숙용(淑容) 홍씨, 숙용(淑容) 정씨, 숙원(淑媛) 김씨가 발원한 복장발원문(1493년)이 발견되었다.
기단 중대석에서 발견된 비로자나불좌상 대좌바닥에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1628년 조성기가 남아있다.
함께 발견된 불상 23구는 이 당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박물관 해설문>
금동불감 컽 뒷면에는 삼존불의 불화가 그려져 있다.
뒷면의 불설법도 등은 조선시대 전기에 유행했던 도상들과 연관된다.
금동불감 안에는 티베트- 몽골 양식의 삼존불을 문에는 인왕상을 표현하였다.
문에는 인왕상을 표현하였다.
금동석가삼존불은 독특하게도 석가불, 반가사유상과 지장보살상의 뒷모습
명빈 김씨가 발원한 불상과 불감 : 보물 제 1788호 소장 = 불교 중앙박물관
명빈 김씨(김씨, ? - 1479년) 태종의 후궁으로 성종 때까지 오랫동안 내명부를 지키면서 승려들과 교유하고 왕실과 불교계를 중재했던 인물이다.
발원문을 남긴 숙용 홍씨, 숙용 정씨, 숙원 김씨는 성종의 후궁으로, 임금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 불상 중수를 통해 부처의 은덕을 받고자 했다.
발원문이 작성될 당시는 명빈 김씨가 죽은 뒤였다.
금동석가삼존불은 독특하게도 석가불, 반가사유상과 지장보살상으로 구성되었고, 금동불감 안에는 티베트- 몽골 양식의 삼존불을
문에는 인왕상을 표현하였다.
금동 석가모니불
지장보살 반가사유상관음보살
인목대비가 발원한 불상의 뒷 모습 : 보물 제 1788호
인목대비가 발원한 불상 : 보물 제 1788호
수종사 불상 중 23구의 불상은 1628년 인목대비(인목대비, 1584년 - 1632년)가 발원하였으며 조각승 성인(性仁)이 제작하였다.
이중 비로자나불상 대좌 바닥에는 인목대비의 조성기가 새겨져 있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였으나 1608년 광해구닝 즉위하자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폐서인되어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물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위된 인목대비는 죽은 사람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자주 불사를 행했다.
수종사 불상을 조성한 1628년은 역모사건이 있던 해로 왕실이 여전히 불안한 상황에 있었다. 인목대비는 억울하게 희생된 일가족과
자신의 원통함이 풀리기를 기원하며 불상을 조성하였을 것이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출토유물 일괄 (南楊州 水鍾寺 八角五層石塔 出土遺物 一括) : 보물 제1788호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출토유물 일괄은 조성 발원문과 불상 대좌 밑면에 새t겨진 명문을 통하여 조선시대 15세기 후반과
조선시대 1628년경에 각각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감은 많이 부서지긴 하였지만, 조선시대 초기의 불감 형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뿐만 아니라, 불감 안팎에 표현된 도상들을 통하여
당시 불교 도상 연구에 기준작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불감 내부 정면에 표현된 삼신불의 도상, 가늘고 긴 조선시대 초기 탑의 조형, 불감 외부 양 옆면의 관음보살상과 지장보살상의 그림,
뒷면의 불설법도 등은 조선시대 전기에 유행했던 도상들과 연관된다. 함께 발견된 조성 발원문은 이들 일괄품이 조선시대 왕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는데, 특히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의 대좌 바닥에 새겨진 명문을 통하여 이 불상의 발원자가 정의대왕대비(貞懿大王大妃)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문에 기록된 화원 성인(性仁)은 17세기 초에 활동했던 조각가로서 서울 지장암 비로자나불상을 만든 사람과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있어서 주목된다.
15세기 불상으로 보이는 일련의 상들은 고려 후기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듯하며, 17세기 불상으로 편년되는 웅크린 자세의
무거운 존상들은 비례가 맞지 않아 약간은 해학적인 면도 없지 않으나 시대상을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수종사 불감 및 불상 일괄은 수종사 탑에 납입될 조선시대의 상황과 발견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없고, 함께 봉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들이 여러곳에 흩어져 있는 상태이지만, 조선시대 초기의 왕실 불교미술을 대표하고, 발원문과 명문도 수반하고 있다.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南陽州 水鐘寺 八角五層石塔) : 보물 1808호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로 조선 세조 5년(1459)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온다. 석탑은 원래 사찰 동편의 능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전하며,
이 위치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모이는 양수리 지역이 훤히 내려다보여 경관이 우수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석조부도, 소형석탑과 함께 대웅전 옆에 옮겨져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나 북한지역 향산 보현사 팔각십삼층석탑과 같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규모가 작아지고 장식적으로 변모한 조선초기 석탑의 형태를 잘 보여준다. 이 탑에서는 1957년 해체수리 시에 1층 탑신과 옥개석,
기단 중대석에서 19구의 불상이 발견되었고, 1970년 이전 시에는 2층, 3층 옥개석에서 12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함께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서 이 불상들 가운데 태종의 후궁이었던 명빈 김씨(?-1479)가 발원조성하고, 성종의 후궁들이 홍치 6년(1493)에 납입했다고
하는 불상 2구(석가여래 1구와 관음보살 1구)와 인목대비(정의대왕대비)의 발원으로 조성된 금동불·보살상들, 숭정원년(1628)에 화원[조각승]
성인(性仁)이 조성한 금동비로자나불좌상(대좌바닥에 명문음각)이 확인되어, 석탑 건립의 하한은 1493년이며 1628년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탑의 형태는 지대석 위에 팔각의 대석을 올리고 그 위에 불상의 팔각연화대좌와 같은 형식의 기단이 올려져 있다. 팔각 대석의 각 면을 2등분하여
장방형의 액(額)을 새기고 그 안에 안상(眼象)을 표현하였다. 같은 형태의 안상은 기단의 받침과 탑신 받침에도 통일되게 새겨져 있다.
기단부는 상대 앙련석과 하대 복련석에 16엽의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는데, 연판(蓮瓣)에는 고려중기부터 유행했던 화려한 꽃머리 장식이 새겨져 있고,
팔각 중대석에는 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隅柱)가 입체적으로 조각되었다. 5층의 탑신 역시 팔각 모서리에 원형의 우주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에는 각각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옥개석 처마의 부드러운 곡선과 원형 기둥, 옥개받침 등은 목조 건축을 석재로 옮긴 모습을 잘 나타낸다.
정상부에는 합각지붕 형태의 삼각형 문양이 조각된 복발과 보주가 올려져 있다.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고려시대 팔각석탑의 전통을 이어 조선시대에 건립된 석탑으로 출토된 사리장엄과 명문을 볼 때, 건립연대는 늦어도
1493년에 건립된 이래 1628년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으며, 왕실 발원의 석탑임도 확인된다.
또 양식을 보면 기단부는 불상대좌의 양식이고, 탑신부는 목조건축의 양식이며, 상륜부는 팔작기와지붕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형식은 현재까지 조사된 조선시대에 조성된 석탑 중 유일한 팔각오층석탑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은 건립연대가 확실하고, 각부의 부재가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된 조선시대 유일의
팔각오층석탑으로서 역사적·학술적으로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상세 해설문>
수종사는 조선 세조 6년(1460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이 탑은 현재 대웅전 옆에 있지만 원래는 경내에서 동쪽으로 벗어난 곳에 있었다.
기단으로부터 탑신에 이르기까지 팔각형의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지대석과 기단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 틀안에 안상이 새겨져 있다.
3차례에 걸쳐 이전과 해체, 복원되었는데 그때마다 많은 사리구가 출토되었다.
1939년에는 사리장치인 고려 청자 안에서 금동구층탑, 은제도금육각감이 각 1점씩 나와 보물 제 259호로 지정되었다.
1957년과 1970년 탑을 다시 옮겨 세우는 과정에서 모두 18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팔각다층석탑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석탑으로 안정된 균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당시 한강을 통한 문화 전파 경로를 추정하는데 붕요한 자료이다.
탑내에서 출토된 불상등 관련자료를 볼 때 이 석탑은 조선 성종 23년(1493년)을 건립 하한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후 조선 인조 6년(1628년)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수종사에 표시된 해설문>
수빈 한씨가 발원한 수종사 종「成化五年」銘 鍾(성화 5년 명 종) : 시대 = 조선 1469년 청동
수빈(粹嬪) 한씨(韓氏)와 정업원(淨業院)의 주지가 함께 발원하여 수종사에 봉안한 종이다.
수빈 한씨(1437년- 1504년)는 세조의 며느리이자 성종의 어머니로, 1455년 의경세자(懿敬世子, 덕종[德宗])의 세지비로 간택되어
수빈으로 책봉되었다. 1457년 남편이 병사한 후 사가(私家)에 머물다 1469년 둘째 아들인 성종이 즉위함에 따라 훗날 인수대비(仁粹大妃)가
되었다. 따라서 이 종은 수빈 한씨가 아들의 안위와 앞날을 기원하며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업원은 도성 안에 있던 비구니 사찰로 왕실의 여인들이 출궁하여 머물렀던 곳이었다.
수빈 한씨가 발원한 수종사 종「成化五年」銘 鍾(성화 5년 명 종) : 시대 = 조선 1469년 청동
아기 부처를 모시는 가마
蔚珍 佛影寺 佛輦(울진 불영사 불연) : 경북 유형문화재 제 397호 시대 = 조선 1670년 목조 소장 = 불영사
불연이란 법회를 열 때 사용되며 나라의 임금을 태우는 연(輦)처럼 존귀한 부처와 보살을 모시는 가마이다. 가마 바닥연의 명문에 따르면
승려 학종(學宗)이 울산 지역에 이르러 시주를 받고 양산 지역인 원적산(圓寂山) 대승암(大乘庵)에 머물며 1669년부터 1670년에 걸쳐
불연 제작을 주관하였다. 시주자로는 포(布)를 공양한 양산(陽山)의 박수억(朴守億)과 구월(九月) 부부, 울산의 김춘산(金春山) 부부와
이림(李林) 등이 있으며 주로 울산과 울진지역 신도들의 후원이 많았다.
불연의 지붕 정상에는 연꽃 모양 나무판 위에 붉은색 연꽃 봉오리를 꽂았고 지붕의 네 모서리에는 봉황 모양의 조각을 꽂아 봉련(鳳輦)이라고 불렸다.
창에는 구슬을 달고 동경을 매달았으며 불연을 드는 손잡이 끝부분과 난간 모서리에 생동감이 가득한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였다.
<박물관의 표시된 해설문>
울진 불영사 불연 (蔚珍 佛影寺 佛輦)
불영사에는 2채의 불연이 있는데, 매년 석가탄신일때 아기부처를 모시고 경내를 도는 시련의식을 행하고 있으며, 이때 이 불연을 사용하고 있다.
불연 1의 받침대 하부에는 조련기가, 불연 2의 받침대 하부에는 시주질이 묵서되어 있는데, 이 명문들에 의해 불연의 제작시기와 제작동기,
공역에 참가한 시주자와 승려들을 확인할 수 있다. 불연 1의 크기는 높이 125 × 난간폭 86 × 길이 311cm이며,
불연 2는 높이 125 × 난간폭 80 × 길이 303cm이다. 형태는 전체적으로 나간을 두른 집모양으로 받침대, 몸체, 지붕으로 분리되게 조립하였다.
받침대는 누각의 난간과 같은 형태이며, 앞뒤에 두개씩의 손잡이를 만들었고 난간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각각 장식하였다.
몸체는 창이 있는 벽체를 돌렸으며, 벽체에는 화려하게 여러 가지 꽃을 조각하였다. 지붕은 녹색비단으로 처리하였으며,
상부에는 연봉을 세워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이 불연들은 1670년(조선 현종 11)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불영사 불연은 제작연대가 있어서 유물양식의 편년을 설정할 수 있고
시주질(施主秩)을 통하여 불영사의 알려지지 않은 승려의 계보 등을 알 수 있어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특히 조각수법이 정교하며 현재까지 알려진 불연 가운데 연대가 알려진 것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문화재청 상세 해설문>
울진 불영사 불연 (蔚珍 佛影寺 佛輦)
울진 불영사 불연 (蔚珍 佛影寺 佛輦) 의 손잡이
불연을 드는 손잡이 끝부분과 난간 모서리에 생동감이 가득한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였다.
울진 불영사 불연 (蔚珍 佛影寺 佛輦) : 경북 유형문화재 제 397호 시대 = 조선 1670년 목조 소장 = 불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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