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 2015. 8. 6. 테마전 청룡사 괘불

백련암 2015. 8. 10. 05:59

안성 청룡사 安城 靑龍寺 괘불掛佛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사찰에서 의식을 위해 걸었던 큰 불화, 괘불을 박물관에서 감상하며 이해할 수 있는

테마전 "청룡사 괘불"을 개최하였습니다.

여러사찰의 괘불을 연속적으로 전시 함에 좋고 이번엔 지난번 무안(변산반도)에 있는

개암사 괘불에 이어 안성지역의 왕실의 원찰인 청룡사에 소장된 괘불을 공개합니다.

17세기에 조성된 괘불의 초기작례로서 법화경을 설하는 영산회의 모습을 큰 화면에 그려낸 청룡사 괘불을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괘불은 특별한 행사가 아님은 볼 기회가 없는것이라 더 소중하고 보고 싶은지도 모릅니다.

괘불속에서 또 다른 부처님의 모습과 마주하며 진지하게 감상을 해봅니다. 

 

청룡사는 1265년(고려 원종 6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창건한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라 하였으나

1364년(공민왕 13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보물 824), 관음전, 관음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1674년(조선 현종 15년)에 만든 5톤 청동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까지 마련해 놓았다.

대웅전 기둥은 구불구불한 아름드리 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무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옆면과 뒷면 기둥을 살펴보시길...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원찰(願刹)이었다는 청룡사는 1900년대부터 등장한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이들은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청룡사에서 준 신표를 들고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연희를 팔며 생활했다.

지금도 건너편에는 남사당마을이 남아 있다.

 

 

안내 포스터 사진

테마전 = 靑龍寺 掛佛(청룡사 괘불)

이 전시는 석가모니불이 인도 영취산(靈鷲山)에서『법화경[法華經]』을 설법하는 모임을 그린 17세기 괘불을 선보이는 자이리다.

<靑龍寺 掛佛[청룡사 괘불, 보물 제 1257호, 1658년 작>은 현전하는 괘불 중에서도 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으로,

17세기 조선이 성대한 불교의식을  거행하면서 조성했던 괘불의 제작을 보여주는 귀중한 예이다.

당시 불교의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죽은 많은 영혼들을 위무하기 위해 법당(法堂) 내부에서 외부 공간으로 이동하여

괘불을 걸고 죽은 이들의 천도(遷度)하기 위한 대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의식이 거행되고 석가모니와 영취산 설법이 그려진 괘불이 법당 밖에 걸리면 현세(現世)의 공간은 석가가 머무는 정토(淨土)로 바뀐다.

괘불이 조성된 곳은 인평대군(麟坪大君, 1622년~1658년)의 원당(願堂)인 안성 청룡사(靑龍寺)였다.

화기(畵記)에는 주상전하(主上殿下)와 왕실의 안녕을 비는 축원문이 기록되어 있다.

화원(畵員), 사과(司果), 박란(朴蘭)을 비롯한 승려 명옥비구(明玉比丘) 등 5명이 성대한 괘불 제작에 참여한 일은

불화의 조성이 왕실과 밀접한 관련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瑞雲山(서운산)靑龍寺靈山會掛佛幀(청룡사영산회괘불탱)  : 보물 제 1257호   시대 = 조선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괘불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회화를 말한다.


깨달음에 대한 설법
이 영산회상도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6대 보살, 10대 제자 등이 에워싼 모습인데, 중앙의 석가불은 머리에서 빛이 나고

특이하게도 오른손은 어깨 위로 들고 왼손은 무릎에 올린 시무외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다리는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관을 쓴 제석천, 면류관에 홀을 든 범천상, 책과 연꽃·정병 등을 들고 있는 6명의 보살 등이 석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석가 위로는 여러 제자들과 부처의 수호신인 4명의 금강역사상이 있고, 그림의 맨 윗부분에는 여러 불상들이 작게 그려져 있다.

주로 진한 붉은색과 청색이 많이 사용되었고 복잡한 구도로 인해 무거운 느낌이 들지만 윗부분에서 보여주는 화려함과

아랫부분의 무늬로 인해 여유있어 보인다.

이 그림은 효종 9년(1658)에 승려화가인 명옥 등이 그린 것으로 본존의 크기가 매우 컸던 고려말∼조선초의 그림과는 달리

본존인 석가불이 작아져 상대적으로 주변 인물의 크기와 비슷해진 그림으로, 17세기 중엽 영산회상도를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의 글>

 

 

청룡사 괘불(靑龍寺 掛佛) : 시대 = 조선 1658년, 소재지 = 안성 청룡사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문수 · 보현보살을 비롯한 6보살과 제석천과 범천, 제자 등 설법에 참여한 많은 청문중(聽聞衆)들을 그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석가모니의 영취산 설법모임은 쾌불의 도상으로는 가장 대중적인 주제이면서 17세기에 다수 그려졌다.

법회(法會)에 참여한 많은 인원이 부처의 설법에 집중해 있는 가운데 부처의 앞쪽에 가사와 장삼을 입고

깍은 머리를 한 뒷 모습을 보이는 승려형 인물이 있다. 그는 석가의 제자 중 지혜롭기로 유명한 사리불(舍利佛)로 ,

깊은 명상에서 깨어난 석가는 그에게 깨달음을 설법하고 있다.

불화는 보통 붉은 색, 녹색, 남색의 진채(眞彩) 위주로 그려지는데 비해, <청룡사 괘불>은 담채(淡彩)의 사용으로 맑고 산뜻한 느낌을 주며

노란색, 하늘색등의 중간색이 조화를 이룬다.  천상의 세계를 상징하는 천개(天蓋)와 바닥에 그려진 꽃몬양, 채운(彩雲)등이

채색과 어우러져 석가가 머무는 곳이 정토(淨土)임을 알려준다.

<박물관의 글>

 

괘불의 상단 세밀도

 

 

정중앙 석가모니불

 

 

우측면의 인물들

보현보살,  대세지보살, 보살중, 아난존자, 제석천 등등

 

 

좌측면의 인물들

청문자 사리불을 기점으로 문수보살, 가섭존자, 보살중, 관음보살 사천왕상하, 범천 등등

 

 

하단 사리불과 여러 보살들

깍은 머리를 한 뒷 모습을 보이는 승려형 인물이 있다. 그는 석가의 제자 중 지혜롭기로 유명한 사리불(舍利佛)로 ,

깊은 명상에서 깨어난 석가는 그에게 깨달음을 설법하고 있다.

 

 

 

 

北塞宣恩圖(북새선은도)  함경도 지방의 과거시험 : 시대 = 조선 1664년,   작가 = 한시각(한시각, 1621년~?)

 

 

北塞宣恩圖(북새선은도)  함경도 지방의 과거시험 : 시대 = 조선 1664년,   작가 = 한시각(한시각, 1621년~?)

1664년(현종 5) 화가 한시각(韓時覺)이 함경도에서 처음 실시된 문무과 과거 시험의 장면을 그린 기록화.

 

함경도의 길주목(吉州牧)과 함흥부(咸興府)에서 실시된 문무과(文武科) 과거 시험 장면을 왕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기록화 이다.

그리고 문무과시험을 치르는「길주과시도(吉州科試圖)」,와  합격자를 발표하는「함흥방방도(咸興放榜圖)」가 그려져 있다.

두루마리 맨 끝에는 시험관 명단, 시험일자, 제목, 합격자 명단 등 과거 시험과 관련된 사항을 기록호로서 뿐만 아니라

17세기 실경산수화로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北塞宣恩圖(북새선은도)  함경도 지방의 과거시험 : 시대 = 조선 1664년,   작가 = 한시각(한시각, 1621년~?)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57.9㎝, 가로 674.1㎝. 함경도의 길주목(吉州牧)과 함흥부(咸興府)에서 실시된 문무과(文武科) 과거 시험 장면을 

기록한 공식적인 행사도이다.  이 그림은 두루마리의 형식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머리에는 ‘북새선은(北塞宣恩 : 변경지역에 베푼 임금의 은혜)’이라는 예서체의 제명이 적혀 있다. 그리고 「길주목도회시(吉州牧都會試)」,

「함흥부문무과방방도(咸興府文武科放榜圖)」가 그려져 있다.

끝에는 시관(試官) 명단, 시험 일자, 제목, 합격자 명단, 합격자 출신군별 통계 등을 적은 기록이 적혀 있다.

 

「길주목도회시(吉州牧都會試)」는 관아의 마당에 문과와 무과의 시험을 보는 장면을 주제로 삼았다.

시험을 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으로 묘사되어 조선후기 풍속화와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문무과방방도」는 과거를 치른 뒤 시상하는 장면을 담았다.

 

 

 

 

선비들의 한가로운 일상 : 後園雅集圖(후원아집도) : 시대 = 조선 19세기  작가 = 未詳(미상)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을 보여주는 아집(雅集) 형식의 풍속화이다.

자연을 벗 삼아 자리를 깔고 앉아 바둑을 두는 두 명과 이를 구경하는 사람,

그리고 소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서화를 감상하는 선비들의 고상한 취미를 엿보게 한다.

가옥과 마당에 깔린 자리 등에서 원근법이 눈에 띄며, 연못가에는 낚시하고 있는 동자의 모습을 포치하여

화면의 생기와 흥미로움을 부여하였다.

바둑과 서화를 매개로 선비들의 친밀한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사인풍속화이다.

 

사냥 : 狩獵圖(수렵도) : 시대 = 조선 19세기,  작가 = 傳 李寅文(전 이인문, 1745년~ 1821년)

이 그림은 황량한 들판을 배경으로 기세좋게 내달리는 말 위에서 세명의 기마 무사들이 신중한 표정으로 창과 활로 호랑이를 겨냥하고 있다.

표적이 된 호랑이는 무사들로부터 점점 가까워지면서 눈에 쌍불을 켜고 입을 벌린 채 혀를 내밀고 있어 절박한 순간임을 느끼게 한다.

수묵에 연한 채색이 가미되어 은은하고 담백한 분위기를 춤은 이 그림에서 차가운 기운이 도는 겨울에 호랑이를 쫓아 사냥을 하는

영웅적인 무사들의 정취를 엿볼 수 있다. 근경에 사냥 장면을 강조하고, 먼 산을 원근법으로 처리하여 안정된 구도를 보여준다.

 

 

바둑두기 : 圍基圖(위기도) : 시대 = 조선 19세기,  작가 = 白殷培(백은배, 1820년~1895년 이후?)

백은배는 조선 말기의 화원(畵員)으로서 1852년 철종 어진에 이어, 1872년 고종 어진을 그릴 때 참여할 정도로 그림 실력이 뛰어났다.

이 그림은 바둑을 두는 선비들의 일상을 그린 사인풍속화이다. 열심히 바둑을 두는 두 사람의 중앙에는 곰방대를 물고 한손에는 부채를 든 채

구경하는 사람이 있다. 바둑을 두는 그림에는 보통 세사람 또는 그 이상이 등장한다.

바둑을 구경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고요하게 정돈하고, 바둑에 대한 비결을 익히는 표정처럼 진지하기만 하다.

 

 

대동강 뱃놀이 : 月夜船遊圖(월야선유도) : 시대 = 조선 19세기,   작가 = 未詳(미상)

이 그림은 새로 부임해 온 평안감사를 환영하는 장면을 장대한 파노라마 형식으로 그린 것이다.

대동문과 연광정, 부벽루와 을밀대가 보이는 평양성을 배경으로 평안감사의 뱃놀이가 펼쳐지는 광경을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성곽에는 깃발이 휘날리고 횃불을 든 관원들과 평양 주민들이 대동강 주변에 가득 차 있다.

감사가 탄 관선(官船)을 중심으로 많은 배들이 사열을 이루듯 앞서고 뒤따르고 있다. 춤과 노래를 하는 평양의 관기들이 탄 배도 눈에 띈다.

능라도에도 많은 환영 인파를 등장시켜 평양성의 번화한 광경을 묘사한 풍속화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현명한 황후들(賢后實跡圖[현우실적도]) : 시대 = 조선 16세기    작가 = 未詳(미상)

이 그림은 어질고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는 황후와 황제 태종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중요성에 대해 일깨워주는 황후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후한 화제(和帝)의 후비인 등씨(鄧氏, 81년~121년)와 당 태종(太宗)의 후비인 서혜(徐惠, 627년~650년)의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조선왕조 내명부가 외척세력과 결탁하여 권력 행사에 개입하는 것을 경계하고자 그린 감계화(鑑戒畵)의 일종이다.

 

조선의 성종과 숙종대에 이와 같은 주제가 많이 그려졌는데 현존하는 두 점의 화첩 모두 인물과 산수 표현에서 유사하다.

화면에 이야기와 "이제현(李齊賢)"의 인장이 있어, 16세기에 활동한 이제현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우측에 쓰여있는 글 내용

당 태종이 옥화궁을 지었다. 서혜비(徐惠妃, 627년~650년)는 태종이 동쪽으로는 고구려를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구자국을 토벌하며

취미궁 · 옥화궁을 계속해서 짓고, 또 의복과 기호품이 매우 화려하자 상소를 올려 간언 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유한한 농사로 무한한 큰 낭비를 채우고자 하고 정복하지 못한 다른 민족을 도모하면 안정적인 우리 병사를 잃을 것입니다.

옛 적 진시황제가 육국을 합병하였으나 도리어 나라가 망하는 토대를 불러 들였고,

진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이 세 지역을 가졌으나  도리어 패망하는 일을 이루었습니다.

어찌 공로를 자랑하고, 강대함을 과시하고, 덕을 버리고, 나라를 경시하며, 이익을 도모하고 위험을 잊으면서,

마음대로 욕심을 부린 탓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검소해야 한다고 원칙을 세우더라도 오히려 사치를 조심하는데 사치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후대를 통제하겠습니까 라고 하니

당 태종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서 매우 예우하고 존중하였다.

 

 

현명한 황후들(賢后實跡圖[현우실적도]) : 시대 = 조선 16세기    작가 = 未詳(미상)

 

◐우측에 쓰여있는 글 내용◑

후한의 화제 후비인 등태후(鄧太后, 81년~121년)는 품성이 효우하였으며, 서책 읽기를 좋아하였다.

궁으로 뽑혀 들아가 귀인이 되었는데 공손하고 조심하였으며,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  

음태후(광무제의 후비)를 섬기고 같은 계급의 동료를 대할 때는 항상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고 낮추었다.

설사 중궁의 하급 하인일지라도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자 화제가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황후가 되고 나서는 전국에서 올라오는 공물을 모두 금하도록 명을 내렸으며, 명절에도 단지 종이와 묵 만을 바치도록 할 뿐이었다.

화제가 항상 등씨 일족의 관작을 올려 주려고 하여도 등태후는 그 때 마다 겸손히 사양하였으므로

오빠 등즐(鄧騭)은 화제가 재위하였을 때 벼슬이 중랑장에 불과하였다.

 

 

공자의 행적(聖蹟圖[성적도]) : 시대 = 조선 1700년    작가 = 金振汝(김진녀, 1675년~ 1760년)

 

 

공자의 행적(聖蹟圖[성적도]) : 시대 = 조선 1700년    작가 = 金振汝(김진녀, 1675년~ 1760년)

김진녀()는 평양출신으로 조세걸의 제자이다. 1713년 숙종어진도사에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될 정도로 설채에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

이 화첩은 공자(孔子)의 생애 동안 일어난 중대한 사건이나 일화를 그린 것이다. 

원나라 화가 왕진붕(王振鵬)이 그린 성적도(聖蹟圖)를 모사한 것으로서 유년기의 공자, 직무에 충실한 인품의 소유자, 박학다식한 면모,

교육자, 공자의 가르침, 성인으로서 남다른 혜안, 수양의 모습, 수난과 시기의 대상이 된 모습, 제자들의 공자 섬김과 덕행,

후대 왕들의 공자 받들기 등 공자와 주변 인물들의 일화들을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정치한 솜씨를 띠며, 공자의 얼굴에 음영을 많이 가한 점, 시 공간을 달리한 장면 배치 등이 흥미롭다.

 

 

신선 세계의 복숭아 : 海蟠桃圖[해반도도] : 시대 = 조선 19세기   작가 = 未詳[미상]

 

이 그림은 웅장한 바다를 배경으로 탐스럽게 열린 반도(蟠桃)를 그린 것이다.

반도는 삼천 년에 한 번 꽃이 피고 삼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으며, 또 다시 삼천 년에 열매가 익는다.

이를 먹으면 불로장생하게 된다는 믿음 때문에 영지, 대나무, 바위 등과 함께 표현되어 국왕의 장수를 축원하고 왕실의 영원함을 기원하였다.

앞 뒤 양면에 그려진 이 그림은 원래 장지(障子)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방 중간의 벽과 천장에 문틀을 고정시킨 다음 문지방은 필요에 따라 끼우고 장지문을 달면 공간을 구획할 수 있는 칸막이 형식을 말한다.

그림의 구성이나 장황의 구조 및 형식으로 볼 때 19세기 중후반경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장보살과 시왕 : 地藏十王圖[지장시왕도] : 시대 = 조선 1673년

지장보살, 도명존자(道明尊者), 무독귀왕(無毒鬼王)의 지장 삼존(地藏三尊)과 시왕(十王)의 간결한 구성을 보이는 지장시왕도이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의 위촉을 받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도록 의뢰받은 보살이다.

명부의 교주인 지장보살은 시왕에 둘러싸여 화면의 중앙에 앉아 보주와 석장을 들고 있다.

필선이 단조롭고 색채는 담채로 그려졌다. 조성 사례가 많지 않은 17세기 지장보살도로 조선 전기와 후기

지장보살도의 양식적 흐름을 연결하는 예로써 주목된다.

 

 

달마대사진영(達摩大師眞影) : 시대 = 조선 19세기

보리달마(菩提達摩, ?~536년)는 남인도 출신의 승려로 중국에 건너가 중국 선종(禪宗)의 초대 조사(祖師)가 되었으며,

慧可(혜가, 487년~593년)가 자신의 팔을 잘라 가르침을 구하자 그에게 선종의 법을 전하였다.

상단에 기록된 "서천 제 28세 중국초주[初祖]"는 "염화미소" 일화로 알려진 마하가섭을 선종의 초조(初祖)로 하여

보리달마에 이르렀을 때 28대 조사가 된다는 의미이다.

禪 수행 중심의 조선시대 불교에서 달마대사는 선불교의 선구자로서 중요시되었다.

진영에 그려진 달마대사는 옷을 머리까지 덮어쓴 이국적인 차림을 하고 있으나 얼굴은 한국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七元星君(칠원성군) : 시대 = 조선 19~20세기

손에는 홀을 쥐고, 관복과 관모를 쓰고 있는 일곱명의 인물은 하늘의 별, 북두칠성(北斗七星)을 의인화하여 묘사한 칠원성군(七元星君)이다.

칠원성군은 탐랑성군, 거문성군, 녹존성군, 문곡성군, 염정성군, 무곡성군, 파군성군의 7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는데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과 수명(壽命)을 관장한다는 도교(道敎)의 믿음에서 유래되었다.

배경에는 상서롭게 피어나는 구름을 묘사하여 하늘의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별 가운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며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북두칠성만을 성군의 형태로 단독으로 표현하여 칠성에 대한 염원을 보여준다.

 

 

十六羅漢圖(십육나한도) : 시대 = 조선 19세기 후반

십육나한이란 부처가 열반에 든 뒤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머물러 불법을 수호하도록

부처에게 위임을 받은 16명의 제자들이다.  최고의 수행자이면서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존재인 나한들의 모습은 염주를 들고 수행하는 모습으로,

혹은 옷을 풀어헤친 편안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 나한도에는 십육나한 중 2, 4, 6, 8, 10번째 나한이 그려져 있어, 여러 점으로 이루어진 십육나한도 중의 한 폭임을 알 수 있다.

 

 

十六羅漢圖(십육나한도) : 시대 = 조선 19세기 후반 =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  = 중앙  

 

 

나한들의 모습은 염주를 들고 수행하는 모습으로,  혹은 옷을 풀어헤친 편안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 우측

 

 

염주를 들고 수행하는 모습과 경전을 읽고 있는 모습 = 좌측

 

 

木造 觀音菩薩 坐像(목조 관음보살 좌상) : 시대 = 조선

불상 안에 넣는 물품을 복장물(腹藏物)이라고 하는데, 관음보살상에서는 황색 보자기에 싸인 원통형의 후령통(喉鈴筒)이 발견되었다.

후령통 안에서는 오곡(五穀), 오향(五香), 오보(五寶), 등 여러 물목이 오색의 직물에 쌓여 있었다.

또한 깃발 모양과 금강저 모양도 직물로 표현되었으며 볍씨, 보리, 녹두, 등의 곡식과 대황을 비롯한 한약재 등이 함께 들어 있었다.

 

 

   

木造 觀音菩薩 坐像(목조 관음보살 좌상) : 시대 = 조선

 

 

木造 觀音菩薩 坐像(목조 관음보살 좌상)과 복장물(복장물) : 시대 = 조선

 

 

복장물들(腹藏物)

불상 안에 있던 복장물(腹藏物), 황색 보자기에 싸인 원통형의 후령통(喉鈴筒)과

후령통 안에는 오곡(五穀), 오향(五香), 오보(五寶) 등 여러 물목이 오색의 직물에 쌓여 있었다.

또한 깃발 모양과 금강저 모양도 직물로 표현되었으며 볍씨, 보리, 녹두, 등의 곡식과 대황을 비롯한 한약재 등이 함께 들어 있었다.

 

 

黃綃幅子(황초폭자) = 후령통을 감싼 보자기

 

 

金銅藥師佛 立像(금동약사불 입상) : 시대 = 통일신라시대

 

 

金銅菩薩 立像(금동보살 입상) : 시대 = 통일신라시대

 

 

金銅藥師佛 立像(금동약사불 입상) : 시대 = 통일신라시대

 

 

   

뒤모습                                                                                                                    앞모습

보살 = 金銅菩薩立像[금동보살입상] : 시대 = 고구려 7세기 전반

왼쪽 무릎을 살짝 구부리고 오른쪽으로 하체를 기울여 몸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표현된 보살상이다.

긴 신체와 목걸이 형태는 중국 수(隋)나라 불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따로 주조하여 결합했던 양팔에 걸친 천의는 남아있지 않고

현재는 끝자락만 대좌에 남아있다.

 

 

보살 = 金銅菩薩立像[금동보살입상] : 시대 = 고려

 

 

부처를 모신 작은 집 = 金銅佛龕[금동불감] : 시대 = 조선 1417년   출토지 = 경남 고성

불감(佛龕)은 부처를 모신 작은 법당(法堂)으로 안에는 불상이나 보살상을 넣고  탑 속에 봉안되었다.

불감은 지붕이나 문 등 실제 건축물을 충실히 재현하였으며 불감 받침은 분청사기로 제작되었다.

받침 윗면에는 불상의 대좌를 뜻하는 불좌(佛座)라는 글씨가, 측면에는 영락(永樂) 15년(1417년) 9월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靑銅 賓度盧尊者像(청동빈도로존자상) : 시대 = 고려

빈도로 존자는 십육나한 중 첫 번째 나한의 이름으로 대좌 앞면에 개성 영통사(靈通寺)승려가 조성했다는 명문이 있다.

영통사는 왕실의 진전이 있던 사찰로 고려시대 주요 사찰이었다. 나한은 두건을 쓰고 불자(佛子)를 들고 있다.

 

 

金銅菩薩坐像(금동보살좌상) : 시대 = 고려

 

 

金銅菩薩坐像(금동보살좌상) 중 하반신 상세

 

 

氷山寺址 五層石塔 舍利具[빙산사 터 오층석탑 사리갖춤] : 시대 = 고려    출토지 = 慶北 義城(경북 의성)

1973년 경북 의성  빙산사 터 모전(模塼) 석탑의 3층 지붕돌[屋蓋石. 옥개석]에서 수습된 사리갖춤이다.

금동제의 사리그릇 안에 녹색의 유리제 사리병을 안치하였는데, 사리그릇의 네 면을 투조기법(透彫技法)으로 장식하였다.

함께 발견된 공양품으로 금동제의 광배(光背) · 뒤꽂이 · 청동제의 방울 · 부젓가락 · 돌 구슬 등이 있다.

 

 

금동제의 사리그릇 안에 녹색의 유리제 사리병을 안치하였다.

 

 

竹山里 五層石塔 舍利具[죽산리 오층석탑 사리갖춤] : 시대 = 고려 11세기   출토지 = 京畿 安城(경기 안성)

1969년 안성 죽산리의 오층석탑을 수리하던 중 발견된 사리갖춤이다.

납석으로 만든 사리기의 바닥 쪽으로 금동제 사리병을 넣은 다음 동그란 마개로 바닥을 막았다. 사리병안에서 사리는 발견 되지 않았다.

 

 

사리를 담았던 사리병

 

 

奉印寺 釋迦世尊浮屠 舍利具[봉인사 석가세존부도 사리구] =   보물 제 928호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사리탑 및 사리장엄구 (南楊州 奉印寺 浮圖庵址 舍利塔 및 舍利莊嚴具) : 보물 제 928호

조선 광해군 때 세워진 사리탑과 그 안에서 발견된 여러 사리장치들이다.

광해군은 왕세자의 만수무강과 부처의 보호를 바라며 봉인사의 부도암이라는 암자에 사리탑을 세우게 하였는데,

사리탑에는 승려의 사리를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이 유물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수난을 겪었는데 1927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60여년이 흐른 1987년에서야 비로소 우리나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사리탑은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단(基壇)은 상 · 중 · 하의 세 부분으로 나누었고,

그 위로 북처럼 둥근 탑몸돌을 올려 사리를 모셔 두었다. 8각의 지붕돌을 그 위에 올린 뒤 꼭대기에는 길쭉한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청룡사의 사리탑이나, 회암사의 사리탑을 떠올리게 한다.

즉 북처럼 둥근 탑몸돌과 지붕돌 낙수면의 여덟 모서리마다 새겨진 용머리조각, 탑 주위로 둘러진 난간석 등이 그러하다.

이는 당시가 조선 중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탑몸돌 윗면에는 사리장치를 넣어두던 네모난 홈이 있는데, 이 곳에서 7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모두 뚜껑이 있는 그릇으로, 놋쇠그릇 3점, 은그릇 3점, 수정사리병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놋쇠그릇 안에 은그릇을 넣어두는 방식으로 각각 3쌍을 이루고 있는데, 놋쇠그릇에는 명주실 · 비단 · 향(香)이 담겨져 있다.

은그릇은 뚜껑에 금박이 입혀진 구름과 용무늬를 역동적으로 새기고, 그릇 밑바닥에는 몇 줄의 글귀를 기록해 놓았는데,

기록을 통해 이 유물이 광해군 12년(1620)에 봉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리탑과 사리유물 모두 조선 전기의 양식을 거의 변함없이 따르고 있으면서도, 곳곳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 흥미롭다.

탑의 길쭉한 머리장식이라든가, 사리그릇을 두세 개만을 넣어두던 당시 흐름에 비해 여기에서는 7개나 되는 그릇을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이 그것이다.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선시대의 유물연구에 기초적인 자료가 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출처 =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  문화재청에서 퍼옴

 

남양주 봉인사 부도 사리구 : 奉印寺 釋迦世尊浮屠 舍利具[봉인사 석가세존부도 사리구] : 보물 제 928호  시대 = 조선 1620년

 

 

잔과 잔받침= 銀製鍍金 托盞[은제도금 탁잔] : 시대 = 고려 12세기

탁잔은 술이나 차를 마시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잔을 놓는 받침인 탁(托)과 액체를 담는 잔으로 구성된다.

이 탁잔은 여섯개의 꽃잎 모양으로 새김과 돋을 새김기법으로 무늬를 표현하였다.

서긍(徐兢)의『고려도경』1123년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외국의 사신에게 술을 대접할 때 이런 은제 도금 탁잔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잔과 잔받침= 銀製鍍金 托盞[은제도금 탁잔]

 

♣♧♣

고려시대의 은그릇= 高麗時代 金銀器[고려시대의 금은기]

고려시대에는 세련된 기형과 화려한 무늬의 금은그릇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왕실과 지배층이 주로 사용하였고, 외교사절의 접대에도 사용되었다.

술과 차 및 향과 관련된 그릇이 많고, 새김이나 돋을 새김으로 무늬를 새기거나 무늬 부분만을 도금하는 장식기법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송(宋)과 요(遼), 원(元) 나라의 영향을 받은 금은 그릇도 제작하였다.

 

 

쟁반 = 銀製盆[은제분],   숟가락 = 銀製匙[은제시],   단지 =  銀製小壺 : 시대 = 고려

 

 

병 = 銀製 甁[은제 병],   꽃모양 잔= 銀製 花形 盞[은제 화형 잔],   타호 = 銀製 唾壺[은제 타호] : 시대 = 고려

 

 

병 = 銀製 甁[은제 병]

 

 

靑銅注子承盤(청동주자승반) : 시대 = 고려

 

 

귀때 그릇 =  靑銅片口盌[청동편구완] : 시대 = 고려

 

 

鐵製銀入絲 硯滴[철제은입사 연적]                                                  鐵製銀入絲 筆筒[철제은입사 필통]

 

 

 

 

 

 

   

장생무늬 담배 합 = 鐵製銀入絲 長生文 煙草盒[철제은입사 장생문 연초합]

 

 

대반 = 鐵製 銀銅入絲 大盤[철제 은동입사 대반] 시대 = 조선 후기

 

 

달항아리 = 白磁壺[백자호]  : 보물 제 1437호   시대 = 조선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는 높이에 비해 몸통이 약간 벌어져 보이는 둥근 구형이지만, 입지름에 비해 굽 지름이 80% 정도 작지만 전체적인 비례는 단정하고 안정적이다. 입과 굽의 높이도 서로 적당하여 잘 어울리며, 몸통의 접합부가 비교적 완전하여 부분적인 쳐짐이나 비틀림도 거의 없다.

유태(釉胎)는 비교적 안정적이며 유약의 두께는 얇지만 태토에 완전하게 융착(融着)되어 있고 맑은 황갈색을 아주 엷게 띠는 투명유(透明釉)이다. 입술부분(口緣部) 일부를 수리하였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문화재청의 글>

 

 

   

 달항아리 = 白磁壺[백자호]  : 보물 제 1437호   시대 = 조선 18세기

백자 달항아리는 생긴 모양이 보름달 처럼 크고 둥글다하여 이름 붙여진 것으로, 조선 후기 영조(英祖, 재위 1724년 ~ 1776년) ·

정조대(正祖代, 재위 1777년~ 1800년)에 화려한 꽃을 피운 조선 백자를 대표 한다.

특히 18세기 전반에는 경기도 광주 금사리(金沙里) 가마에서 우유빛의 보름달을 닮은 질 좋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

<박물관 내 설명문>

 

 

포도무늬 화분반침대 = 白磁 透刻靑畵鐵彩[백자 투각청화철채] : 시대 = 조선 18세기

 

 

   

포도무늬 화분반침대 = 白磁 透刻靑畵鐵彩[백자 투각청화철채]

 

 

매화 난초 대마무무늬 수반 = 白磁 靑畵 梅蘭竹文 水盤[백자 청화 매난죽문 수반] : 시대 = 조선 18세기

 

 

녹야원에서의 첫 설법 = 初轉法輪(초전법륜)

교진여 등  5비구에게 설법하시어 처음으로 법륜을 굴리시는 모습

 

♣♣♣

간다라 지역은 오늘날 아프카니스탄 지역을 일컫는 말로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문화가

이 지역에 도입되었다.  얼마전 인류문화유산이 파괴되었고, 미국과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드인 텔레반이

지금 근거지로 삼고 있는 지역이기도 한다.

이 간다라 지역은 불교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한 곳이며, 불교에 외래 종교인 이집트, 그리스 등의 종교와 문화가 도입되어 융합되게 만든

중요한 지역 중 하나이다. 불교에서 신앙의 중심이 초기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탑)에서 부처를 형상화한 불상으로 변화하게 만든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는 다수의 불상을 비롯하여 서방 문화의 영향을 받은 조각상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인류의 문화에 정신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 부조 : 간다라 2~3세기

간다라 지역에서 발견된 이야기 부조는 원래 불교 사원의 성소(聖所)와 스투파의 표면을 장식했던 것이다.

현존하는 유물에는 대략 10가지의 본생(本生)과 70가지의 불전(불전)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부처의 가르침과 보살행의 중요성을 신도들에게 재미있고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칸타카의 출생 뒤에 있는 그림은 대 스투파(대탑)이다.

 

 

인도 간다라 이야기 부조의 칸타카의 출생

 

 

出城(출성)

 

 

出城(출성) =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은 싯달타 태자가 성을 나가 출가하는 장면이다.

태자께서 성을 넘어 출가를 결행하시는 모습 = 말을 탄 태자는 제석천· 범천과 사천왕의 호위를 받으며 높은 성을 넘어

밖으로 나가는 모습[夜半踰城(야반유성)]이 그려져 있다.  태자가 탄 말 발굽을 천인들이 받쳐 들었다

 

 

사냥꾼과 옷을 바꿔입음

 

 

붓다와 선인

 

 

세명의 여인 = 간다라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외래신을 모티브로 한 부조로 그리스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외래의 신과 모티프 : 간다라, 2~3세기

간다라 미술에 등장하는 신과 모티프에서는 다양한 문화를 수용한 이 지역 미술의 특징이 드러난다.

인간모습이 상반신에 물고기 꼬리를 지닌 모습의 그리스계 神 트리톤에 해당된다.

술이 담긴 가죽 보따리를 든 젊은이와 꽃줄을 든 동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다오니소스 신앙과 관련된 모티브이다.

 다양한 문화를 수용한 이 지역 미술의 특징이 드런난다.

악기를 연주하는 젊은이와 여인들의 경우 신체 표현, 자세, 복식에서 고대 지중해 미술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트리톤(포세이돈)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리톤신을 모티브로 한 부조.

 

 

악기를 연주하는 젊은이 = 신체적인 특징이나 복식에서 그리스인을 묘사한 것이다.

 

 

보관을 쓴 부처의 얼굴 : 팔라시대 10~11세기

인도에서 보관을 쓴 모습의 부처는 6세기 경에 등장하여 10세기 이후 보편적인 도상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엄숙하고 육중한 느낌을 주는  얼굴과  섬세하게 묘사된 화려한 관,

목걸이 등 장신구의 조화에서 팔라 조각가의 뛰어난  실력을 확인할 수 있다.

 

 

시바와 파르바티 : 라자스탄 9~10세기

굽타 시대 이후 북인도에서 유행한 시바 상(像) 형식 중 하나로, 시바 사원의 회벽에 마련된 독립된 성소에 모셔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소 난디를 탄 시바와 파르바티를 중심으로, 기단 양측에는 이들의 아들인  가네샤와 카르티케야가 앉아 있고,

윗부분에는 브라흐마, 비슈누, 그리고 브라흐마니를 비롯한 7명의 모신(母神)이 등장한다.

 

♧♣♧

라가말라 :  지역과 시대 = 라자스탄 암베르 1710년경

라가말라는 음계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장르이다 여기에서 멜로디는 남성(라가Raga)과 여성(라기니Ragini)으로 의인화되며,

특정한 감정이나 신화적인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그림에는 종종 주제를 설명하는 시가 같이 등장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이는 음악, 시, 그림의 세 가지 형태의  예술 표현이 결합된 장르이다.

왼쪽 그림에는 회색의 코끼리에 왕과 그의 수행자가 올라타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남성과 여성 연주자가 등장한다.

오른쪽 그림은 숲을 배경으로 왕자가 백마 옆에 서서 두 명의 여인에게 시중을 받고 있다.

 

라가말라 :  지역과 시대 = 라자스탄 암베르 1710년경

그림에는 회색의 코끼리에 왕과 그의 수행자가 올라타고 있으며, 그 주위에는 남성과 여성 연주자가 등장한다.

 

 

라가말라 :  지역과 시대 = 라자스탄 암베르 1710년경

오른쪽 그림은 숲을 배경으로 왕자가 백마 옆에 서서 두 명의 여인에게 시중을 받고 있다.

 

♣♧♣

궁정인물 : 라자스탄 18세기

지역적인 회화 전통을 유지했던 라자스탄은 17~18세기에 무굴제국의 회화 양식의 영향을 받아 왕족과 고위관리의 초상화,

왕의 알현 장면, 풍속적인 내용을 소재로 한 그림이 새롭게 등장했다.

양식적으로도 평면적이고 원색적인 색채에서 벗어나 보다 압체적이면서 다채로운 색을 사용하였다.

이 두 점의 초상화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인물 모두 갑옷 위에 입는 길고 풍성한 웃옷인 앙가르카(angarkha)를 입고 터번을 쓰고 있으며,

의례용 방패와 칼을 지니고 있다.

 

갑옷 위에 입는 길고 풍성한 웃옷인 앙가르카(angarkha)를 입고 터번을 쓰고 있으며, 의례용 방패와 칼을 지니고 있다.

 

 

갑옷 위에 입는 길고 풍성한 웃옷인 앙가르카(angarkha)를 입고 터번을 쓰고 있으며, 의례용 방패와 칼을 지니고 있다.

 

 

피츠바이 크리슈나 숭배를 위한 벽걸이 그림  :  지역과 시대 = 라자스탄 19세기

크리슈나의 여러 모습 중 하나인 스리나트지를 숭배하기 위한 그림으로, 성소(聖所)에서 신상(神像) 뒷벽에 걸렸다.

스리나트지는 특히 목동들에게 중요한 신이었다. 화면 중앙에서 왼손을 높이 올리고 있는 스리나트지의 자세는

인드라 신이 보낸 폭풍우에서 브린다반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고바르단 산을 들었다는 설화와 관련이 있다.

소를 치는 여인들이 스리나트지와 함께 원을 그리면서 라사릴라라고 불리는 사랑의 춤을 춘다.

거대한 암 · 수 공작들이 이들과 유사한 춤을 추는 모습으로 이들을 둘러싸고 있다.

 

 

   

비로자나불 : 지역과 시대 = 서티베트 13세기

비로자나불의 다양한 모습 = 내려다 보는 모습, 정면을 보는 모습

비로자나불은 우주에 편재한 법신(法神)을 상징하는 부처이다. 밀교에서는 아촉불, 아미타불과 함께 가장 중요한 부처로 인식되었으며,

보관을 쓰고 여러 가지 색의 옷과 영락으로 장식한 보살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 상은 같은 유형의 예 중에서 비교적 크기가 크며, 얼굴 표면에 금 장식의 일부가 남아 있다.

 

비로자나불 = 얼굴과 보관의 세밀도

 

 

코끼리 무늬 항아리 : 시대 = 리오아조, 11~ 12세기

표면은 백색 유약을 바른 후 문양을 새기고 그 위에 다시 갈색 유약을 칠했다. 이러한 백유갈채(白釉褐彩)의 도자기는

베트남의 특징적인 유형으로 12~15세기에 크게 유행했다.

 

 

흰 코끼리를 끌고 가는 비슈반타라 왕자, : 미란(米蘭) 제 5사원지(寺院地) 3~4세기

비슈반타라 왕자 본생도 단편(須大拏王子 本生圖 斷片[수대라왕자 본생도 단편)

 

영국 탐험대를 이끈 스타인의 보고서에 수록된 사진과 비교할 때 이 벽화 단편이 미란 제 5사원지 회랑 벽에 그려진 본생도의 일부인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본생도의 주인공은 비슈반타라 왕자로 석가모니의 여러 전생 중 하나이다.   

신비한 능력을 지닌 하얀 코끼리를 비롯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남에게 준 이 왕자의 이야기는 보시의 가르침을 준다.

 

 

바구니와 가면 = 造容器 · 假面[용기 · 가면] : 지역과 시대 = 樓蘭(누란) 청동기 시대

"떠도는 호수"라고 알려진 로프노르(Lop Nor)일대에 해당하는 누란 지역의 묘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바구니의 경우 풀의 뿌리로 짜서 만들었으며, 표면에는 계단 모양의 무늬가 있다. 이러한 용기는 식량 등을 넣고 천으로 입구를 덮은 후

시신의 머리맡 등에 안치되었다. 가면의 경우 나무 심에 가죽을 씌워 만든 것으로 눈과 치아에는 뼈를 부착하였다.

눈을 부릅뜨고 있고 치아를 모두 드러낸 다소 위협적인 표정으로 보아 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假面(가면)

가면의 경우 나무 심에 가죽을 씌워 만든 것으로 눈과 치아에는 뼈를 부착하였다.

눈을 부릅뜨고 있고 치아를 모두 드러낸 다소 위협적인 표정으로 보아 무덤을 지키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2 수호신 =  三彩 十二支像[삼채 십이지상]

중국의 십이지신은 도교의 방위신앙을 바탕으로 동 · 서 · 남 · 북 등 각 방위에 상응하는 열두 마리의 동물을 상징한다.

그 동물들은 각각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로 당나라(唐, 618년~907년)  중기 이후에

도교의 방위 신앙과 관련되어 능묘를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고분벽화에 그려지거나 도용으로 매장되었다.

 

 

불사약을 찧는 토끼와 두꺼비무늬 벽돌 = 仙兎搗藥文 塼[선토도약문 전]

 

 

 박산장식단지博山樽(박산준) : 漢나라 黃釉陶器(화유도기)

 

博山 香爐(박산향로)와 博山樽(박산준)

한대(漢代)에는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유행으로 불사영생의 신선이 산다는 선계(仙界)의 신산(神山),

즉 박산(博山)을 표현한 박산향로(博山 香爐)와 박산준(博山樽)을 많이 제작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박산향로에 향을 피우면서

선계의 선인을 불러내려 불사약을 얻고자 했고, 박산준에 술을 담아 신산의 불사수(不死水)처럼 생명의 술로 변하기를 바랬을 것이다.

 이 박산향로는  뾰족한 산 모양의 뚜껑과 가는 기둥의 형태만 남은 후대의 간략화된 형태이고 박산준도 틀로 다량으로 찍어 낸 것으로

세속화 된 도교신앙 속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博山 香爐(박산향로) 黃褐釉陶器(황갈유도기) : 東漢(동한)시대

 

 

   

 박산장식단지博山樽(박산준)과 博山 香爐(박산향로)

 

 

서왕모가 장식된 네 잎 모양의 금속 판 = 水晶嵌入四葉金具[수정감잎사엽금구] : 漢나라 靑銅 · 水晶(청동 · 수정)

금속판 수정장식에 표현된 서왕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