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속리산 법주사 = 금동 미륵대불

백련암 2015. 6. 9. 21:23

보은 법주사 (報恩 法住寺)  :  사적  제503호 

법주사에는 우리나라에서 하나밖에 없는 목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과 기발한 착상과 원숙한 조각솜씨로 조각한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한국 제일의 석연지(국보 제164호), 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대웅전(보물 제915호), 원통전(보물 제916호),

신법천문도(보물 제848호) 등과 충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여러 문화재가 있어 신앙유적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고려시대의 법주사

고려시대에 들어서 법주사에는 뛰어난 고승대덕들이 주석하면서 여러 차례 중창이 거듭되었습니다. 

먼저 문종(1046~1083)의 다섯 째 왕자였던 도생 승통(導生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다.  문종의 넷째, 다섯째 아들이었던 대각국사 의천과

혜덕왕사 소현은 도생 스님의 형이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국교라고 할 만큼 국광과 백성들의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왕실에서는 왕자가 출가할 경우 

이를 대단한 영광으로 받아 들였고, 특히 문종은 세 아들을 출가시킬 만큼 신심이 돈독하였습니다.

도생 스님의 행장은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투철한 법상종 승려였던 해덕 왕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던 사실은 스님이

곧 법상종 승려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스님이 법주사의 주지를 지냈다는 것은 절이 신라 이래의 법상종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 나갔다는 사실로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절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인종 때(1122~1146)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속리사점찰법회소(俗離寺占찰法會疏)],

1342년(충혜왕3)의 [고려국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高麗國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銘)], 그리고 도생승통비(導生僧統碑) 등입니다.

이를 통해 먼저 인종 때까지는 법주사를 산 이름과 같은 속리사로 불렀고, 유학자 김부식이 왕명으로 점찰법회의 소문을 지을 만큼

사격이 높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종 때(1259∼1274)는 자정 미수(慈淨彌授, 1240∼1327) 대사가 절에 주석하였습니다.

 

스님은 고려 중기의 유명한 법상종 승려였습니다. 일찍이 13세에 출가하여 이래 법주사를 비롯해서 장의사(莊義寺) · 국령사(國寧寺) ·

대민천사(大旻天寺) · 동화사 등지에서 수행하였습니다. 법주사에 있을 때는 왕명으로 각종의 경전과 장소(章疏)를 92권이나 찬술하였습니다.

1281년(충렬왕 7) 왕이 절에 행차하여 산호전(珊瑚殿)에 참배하였고, 뒤이어 충숙왕도 절을 다녀갔습니다.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양산 통도사(通度寺)에 사신을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사리탑은 지금 능인전 뒤쪽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의 법주사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지 장석상(張石箱) 스님이 발원하고 전라북도 태인에 살던 김수곤(金水坤) 거사가 시주하여

80척의 미륵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았던 김복진(金復鎭)이 요절하면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1963년 3월에 재착수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1967년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이 기울고 퇴락한 전각을 중수하였습니다.

당시 금오 스님은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정열적으로 가람을 일궈나가면서 법주사의 선풍을 진작시켰습니다.

1974년 정부의 지원으로 가람의 전각 대부분을 보수하고 복원하였습니다. 1975년 현대불교의 산증인이었던 금오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습니다.

1976년 주지 탄성(呑星) 스님이 대웅보전을 보수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습니다.

1990년 주지 월탄(月誕) 스님의 원력으로 청동미륵상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으며, 그 좌대의 지하에 성보전시관인 용화전을 마련하였습니다.

1997년 선원과 후원 불사가 완료되어 현대적 시설을 잘 갖춘 환경에서 정진하는 대중을 외호하고 있으며,

 2002년 청동미륵대불을 과거 진표율사계서 금동미륵대불을 모셨다는 기록에 의거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게 됩니다.

 2005년 현재 4년간의 해체, 복원 불사를 통해 대웅보전이 예전의 위용을 되찾으며 속리산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웅보전 비로자나 삼불좌상 후불탱화에 함께 있는 좌우측 사천왕후불탱화들

노사나불 · 비로자나불 · 석가모니불 후면에 각 1점씩 배치되어 있으며 특이하게 사천왕탱화 2폭이 분리되어 걸려 있으며

3차례에 걸쳐 수리된 기록이 남아있다.

 

眞影閣(진영각) 혹은 祖師殿(조사전)이라고도 한다.

역대 큰스님들의 영정을 모셔 두는 전각이다.

조사라고하는 말은 어느 학파를 창건하거나 또는 크게 중흥시킨 선덕으로서 후학들에게 존경을 받는 큰스님을 일컫는 말로

특히 선가에서 즐겨쓰는 말이다.

 

 

보은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가신 역대 고승들의 영정들이 모셔져 있다.

 

본래 법주사에는 조사각(祖師閣)이라 하여 조선 후기 영조의 후궁이었던 영빈 이씨(暎嬪李氏)가 원당으로 사용하던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에 모셨었는데 1991년 지금의 진영각을 새로 지었다.

18세기 중엽에 작성된 호영 스님의 법주사전경도에 의하면 영자전(影子殿) 이라 하여 지금의 삼성각 위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안에는 법주사의 창건주 의신 조사, 전법초조 태고선사를 중심으로 모두 30분의 진영을 봉안하였다

 

 

진영각 벽화들 =

 

 

원효대사의 해골물 벽화 이야기

 

 

비천상 벽화

도솔천인 비천상은 미륵세계 도솔천에 살면서 하계 사람들과 왕래한다는 여자 선인이다.

비천상은 화려하고 경쾌한 천의(天衣) 자락을 흩날리며 하늘을 날고 공후와 생을 연주한다.

 

 

도림선사와 백락천의 벽화이야기

 

 

물고기가 된 제자의 목탁 벽화 이야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벽화 이야기

 

 

부설거사  벽화 이야기

 

 

구지선사의 일지두선 벽화 이야기

 

 

무착도사와 문수보살 벽화 이야기

 

 

 

 

집을 들어 옮기는 스님의 벽화 이야기

 

 

구정선사 벽화 이야기

 

 

임진왜란때 벽암대사에게 항복하는 왜놈들의 벽화 이야기

 

 

포대화상 벽화 이야기

 

 

비천상 벽화

도솔천인 비천상은 미륵세계 도솔천에 살면서 하계 사람들과 왕래한다는 여자 선인이다.

비천상은 화려하고 경쾌한 천의(天衣) 자락을 흩날리며 하늘을 날고 공후와 생을 연주한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  보물  제1417호    시대 = 통일신라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지대석 위에 비교적 큰 향로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흔치 않은 조각상이다.

 희견보살상으로 불리어 오고 있으나 그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하부 대석과 신부,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다.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 올리는 독특한 조각상이다.

조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었으나, 그 밖의 부분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에 나타난 천의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은 비록 얼굴부분에 손상이 있으나 향로를 받쳐 든 전체적 구성미나 세부 조각수법이 독특한 조각상이다.

<문화재처의 상세 해설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  보물  제1417호   

보살상은 전체 높이 213cm 규모로 크게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가로 네모반듯한 모양의 받침돌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고정시켰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 되었다.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 옷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의 쌍사자석등을

제작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주사의 해설문>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 (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뒷 모습

 

 

金銅 彌勒大佛(금동 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12년(776년) 진표율사가 조성한 이 불상은 애초 금동으로 된 것을 조선시대 고종 9년(1872년) 경복궁 축조자금으로 쓰기 위해

해체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9년 불상복원이 시작돼 25년 만에 현재 크기의 시멘트로 만들어졌다가 1990년 지금의 청동불로 다시 세워졌다.

금 옷을 입히는 개금사업도 이번이 세 번째다.

사찰 측은 2002년 불상 전체를 순금을 덧쓰웠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청동색 녹이 배어 나오자 2011년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단행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녹스는 현상은 멈추지 않았고, 곳곳에 얼룩가지 생겨나면서 결국 세 번째 개금을 하게 됐다.

 

 

금동 미륵대불의 수난

법주사의 상징적인 존재인 금동미륵대불,  원래 미륵대불이 있는 자리에는 산호전이란 법당이 있었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높이 12m의 금동미륵불을 조성하였었다. 조선 말기 1872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경복궁에 쓸 못과 화페(당백전)을 주조하는데 쓸 목적으로 금동미륵불은 용광로로 사라졌다.

이후 1939년 현재 크기인 33m 높이의 시멘트 미륵대불을 조성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64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시주로

미륵불을 다시 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멘트로 조성한 미륵불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외관이 보기 싫게 변하여

시멘트 미륵대불을 헐고, 1990년 현재의 청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완성하였다. 소요된 청동의 무게는 160톤

다시 조성한 청동미륵대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부식이 진행되면서 외관상으로 보기 흉해져서 2000년부터 3mm 두께로 금박을 입히는

불사를 시작하여 2002년에 완성되었다. 소요된 금이 80kg이 된다.

 

 

 

 

統一護國 金銅 彌勒大佛 沿革(통일호국 금동 미륵대불 연혁)

신라 헤공왕 12년(서기 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불대불(金銅彌勒大佛)을 조성해 모셨다.

그때부터 모신 미륵부처님을 조선조 고종 9년(서기 1872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축조함에 소여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다.

일제 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 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 25 동란으로 중단되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장군과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웨 시멘트미륵부처님이 완성 · 회향되었다.

1986년 류월탄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 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다.

기존조성 시멘트 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명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2 한 · 일 월드컵행사의 성공 개최및

세계평화를 발원하며 검푸른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 회향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본래의 금동미륵부처님을 복원한 셈이다.

개금방법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3미크론 두께로 연도금면적 900㎡에 황금 80kg 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신심어린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총 4,500여명이었다.

<법주사 글>

 

 

 

 

 

 

 

 

 

 

 

 

 

 

冥府殿(명부전)

명부세계를 주관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신전각이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 입멸 후 미륵불이 출현할 때 까지 무불(無佛) 세계의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분이다. 도리천(忉利天)에서 머물면서 미혹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지옥에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남아있다면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여 스스로의 성불마저도 미뤄 둔 대자비의 보살이다.

 

 

지장보살과 그의 권속들인 시왕들

지장보살의 대원력이 살아 숨쉬는 전각으로서 명부전(冥府殿)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이라고도 한다.

 

 

地藏菩薩(지장보살)과 좌우협시인 無毒鬼王(무독귀왕)과 道明尊者(도명존자)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쪽의 무리들의 세밀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쪽의 무리들의 세밀

 

冥府殿(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十王(시왕들)

 

冥府殿(명부전)에 모셔져 있는 十王(시왕들)

 

명부전 벽화들 

제 2 확탕지옥(第 二 鑊湯地獄) 鑊 = 가마 확, 죄인을 삶아 죽이는 형기(刑器) 고기를 삶는 가마    *湯 = 넘어질 탕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거나,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준 공덕이 없는 자가 가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무쇠솥의 펄펄 끓는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고통을 받는다

 

 

각가지 악기와 향과 연꽃을 들고 천상의 세계를 나는 비천상들

보통 사람에게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유롭게 빨리 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신이다.

주로 부처가 설법하는 곳이나 보살이 머무르는 곳에 나타나 허공을 날면서 꽃을 뿌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공양한다고 한다.

어떤 비천은 꽃을 뿌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손에는 각각 다른 모양의 악기를 하나씩 들고 연주하고 있다.

나팔을 부는 비천, 비파를 타며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여인상의 비천, 북을 든 비천 등 각양각색이다. 주로 부처님의 처소 가까이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수호하는 권속들이다.

 

 

黃龍(황룡)

 

 

흑암지옥(오도 전륜대왕)

낮도 없고 밤도 없는 암흑만이 지속되는곳 남녀 구별을 못하고 자식 하나 못 낳은 사람들이 죽어서 가게되는곳

부모나 스승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심문하고 벌준다고 한다.

 

※이곳을 관장하시는 분은 오도전륜대왕 열번째인 마지막 지옥이기에 형벌과 더불어 생전 행위에 대한 심판 후에 다시 태어날 곳을 결정한다.

사후 맞이하는 3년 즉 대상을 관장하는 분 = 중생의 어리석음과 번뇌를 다스리는 왕

 

 

제 9 정철지옥(第 九 釘鐵地獄)

죄인의 몸에 쇠못을 박는 지옥을 정철 지옥이라고 한다. 지옥 형벌의 하나로 죄인의 머리와 몸 모든 곳에 카다란 못을 박아서

죄인에게 참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 지옥이다.

목에 커다란 나무칼을 찬 죄인과 못을 박을 때 고통으로 실신한 죄인이 왼쪽에 쓰러져 있다.

그리고 사납게 생긴 지옥 옥졸이 죄인 위에 걸터 앉아 머리채를 움켜잡은채, 커다란 못을 머리에 천천히 꽂으려 하고 있다.

 

 

 

 

제 5 발설지옥(第 五 拔舌地獄)

혀를 뽑는 고통을 당한다고 하는 지옥. 말로써 악업(惡業)을 저지른 자가 죽어서 간다는 지옥

부모님과 조상님의 말에 불손하게 대꾸를 한 자. 입으로 일가화목을 깨뜨린 자, 동네 어른을 박대한 자는 발설지옥으로 간다.

이곳은 죄인을 형틀에 매달고 집게로 입에서 혀를 길게 뽑아 그 위에서 소가 밭을 갈듯 쟁기를 이끄니 처참한 고통을 겪는다.

입으로 짓는 죄악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를 일깨워 준다.

 

 

제바달다의 벽화 이야기

 

 

 

 

사후  저승문으로 들어가는 죄인들

 

靑龍(청룡)

 

 

飛天像(비천상)

도솔천인 비천상은 미륵세계 도솔천에 살면서 하계 사람들과 왕래한다는 여자 선인이다.

비천상은 화려하고 경쾌한 천의(天衣) 자락을 흩날리며 하늘을 날고 공후와 생을 연주한다.

 

 

三聖閣(삼성각)

 

 

삼성각 안에 모셔진 탱화들은 1991년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칠성탱은 상단부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칠성여래가 있고,

중단부에는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 · 월광보살이 협시하고있다.

하단부에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를 나타낸 28수(二十八宿)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되어 있다.

 

 

중단부와 하단부분 세밀도

중단부에는 북극성에 해당하는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 · 월광보살이 협시하고있다.

하단부에는 수많은 별들의 무리를 나타낸 28수(二十八宿)의 무리가 보살상처럼 표현되어 있다.

 

 

산신탱화는 호랑이를 타고 앉은 산신할아버지와 시자의 모습이다.

 

 

독성탱화는 천태산(天台山)에 머물며 홀로 수행하는 독성을 중심으로 2명의 시자가 시봉하고 있다.

 

 

삼성각 외벽에는 호랑이와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을 벽화로 그려 나타내었다.

 

 

숲 속에서 수행하는 독성의 모습을 벽화로 그려 나타내었다.

 

 

 

 

 

 

산신할아버지께 시자가 산삼을 캐어 바치는 벽화 이야기

 

 

삼성각 외벽엔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 (報恩 法住寺 圓通寶殿)  :  보물  제916호     시대 =  조선시대

 

 속리산 기슭에 있는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지었고, 혜공왕 12년(776)에 다시 지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탄 것을 인조 2년(1624)에 벽암이 다시 지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통보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지붕은 중앙에서 4면으로 똑같이 경사가 진 사모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에는 앉은키 2.8m의 금색 목조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상은 머리에 화관(花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에는 자비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다.

단순하지만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상세 해설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報恩 法住寺 木造觀音菩薩坐像)  :  보물  제1361호    시대 =  조선시대

 

법주사에 모셔져 있는 나무로 만든 관음보살좌상으로, 머리에는 화염보주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을 쓰고 있는데, 관의 가운데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배 부분에는 복갑(腹甲)같은 둥근 꽃장식 판을 두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장식성이 두드러져 보인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는데, 마치 실제 인물의 부드러운 손을 대하듯 곡선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생동감이 넘쳐난다.

양어깨를 덮은 천의 자락 역시 신체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표현함으로써 부피감 있는 곡선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나온 유물 중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순치 2년, 즉 1655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고 단순 · 소박하지만 부피감이 있는

이 목조관음보살상은 임란후 제작된 조선후기 불상연구에 있어 중요한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문화재청 상세 해설문>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報恩 法住寺 木造觀音菩薩坐像) 

 

 

원통전 신중탱(신중단)

 

 

관세음보살의 좌우보처의 한분인 남순동자상이 보살을 향해 합장을 하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좌우보처중 한분인 용왕상이 보살을 향해 앉아있다.

 

 

법주사 석조물들

 

 

 

 

報恩 法住寺 幢竿支柱(보은 법주사 단간지주)

당간이란 찰(刹) 또는 찰주(刹柱)라 불리고 일반적으로 절(寺)을 사찰(寺刹)이라 말함은 절에 당간 즉, 찰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종파(宗派)를 표시하기 위해 당간 위에 특정한 색깔의 깃발을 내걸기도 하였다.  한편 당간이란 솟대와도 같은 기능을 갖게 되어

신성구역임을 표시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현재 전하는 법주사 당간지주(幢竿支柱)는 고려 목종 7년(1006년)에 조성된 것으로서

조성 당시의 높이 전체 약 16m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년) 국가재정마련을 위한

당백전(當百錢)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있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경) 이곳 철당간은 22m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의 글>

 

 

당간은 찰주(刹柱)라고도 하는데 사찰에 의식이 있을 때 깃발을 걸어 높는 용도로 쓰인다.

 

원래 이 철당간은 고려 목종 9년(1006년)에 높이 16m로 조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철당간도 미륵대불과 똑 같은 수모를 당하였다.

조선 말기 고종 3년(1866년)에 경복궁 복원과 당백전 조조에 쓸 목적으로 대원군이 미륵대북과 함께 용광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순종 때 높이 22m로 다시 조성된 것이다.  

 

금동미륵대불과 철당간이 용광로에서 녹여지는 수모를 당했다는 것은 조선 500년간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한

불교핍박의 전형적인 폭거(暴擧)라 할 수 있다.

 일제 36년의 강점기에도 불상이나 사찰의 기물을 훼손하는 사례는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