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상명대 주변 = 소림사, 세검초교의 보물 장안사지 당간주, 옥천암 백불, 세검정, 석파랑

백련암 2016. 4. 7. 15:46

난 이곳을 모른다. 다만 이 근처인 옥천암으로 공부를 하러 오다보면 저 멀리 내 시야에 사계절 변화에 따라

이 절의 탑과 대방이 눈에 들어와 저 절은 어떤 절일까 내심 많은 생각을 하면서도 쉽게 접할 생각을 못했다.

이유는 이 근처에 조계종이 아닌 개인절이 꽤 있어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잘못들어가면 스님의 이상한 말 한마디가 마음을 무겁게 하기 때문에 쉽게 닥아오지를 못하다가 오늘 수업을 끝내고 한번 주변을 돌아보고푼 마음에

세종초교에 있는 장의사지터와 사지터에 있는 당간주를 보고 세검정을 들러보고 하는데 절이 바로 눈앞에 있어 올라와 보니

팻말에 대한불교조계종이란 글이 보여 혹시나 하면서 올라와 보았다 생각보다 마음이 확 트이는 높이에 절이 있어 둘러보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도 간직한 곳이 어서 더 마음이 놓였다.

약사전이나 대웅전이나 그리고 삼성각까지 두루두루  절을 하는데 마음이 너무 편하고 푸근하다. 

한결 마음이 편해지자 사찰 주변을 다시 둘러보고 왔다. 이곳은 비구니스님 사찰이다.

 

少林寺(소림사)

소림사(少林寺)는 홍지동 세검정(洗劍亭)의 맞은편에 자리잡고 있는 비구니 사찰로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말사이다.

앞쪽으로는 인왕산, 뒷쪽으로는 북악산 풍광 좋은 북악산 계곡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세검정은

인조반정 당시 이귀, 김유 등이 칼을 씻고 창의문을 통해서 궁궐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역사의 산실이다.  

이 세검정 맞은편 산허리에 소림사(少林寺)가 있다. 

 

소림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곳의 작은 굴에서 기도하여 개국의 뜻을 이루었으므로 1396년(태조 5년)에 달마대사께서 9년동안

면벽좌선(面壁坐禪)한 숭산 소림사의 이름을 따서 "소림굴(少林窟):이라 하였다고 한다.

왕명을 받아 사찰을 직접 창건한 사람은 혜철(慧哲)스님으로 창의문 밖에 관음보살을 모시게 된 것이다.

 

이후 조선왕조실록에 중종과 선조 때 소림굴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았을때, 당시에도 사찰이 계속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고,

특히 선조 때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수륙재를 설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717년(순조 17년)에 관해(觀海)스님이 중건하면서 "소림사(少林寺)"로 명칭을 바꾸었다.

1913년에 두삼(두삼)스님의 대방 불사가 있었고, 1933년에 칠성각, 1935년에는 대웅전,

그리고 1942년에는 대방과 산신각이 각각 용호(聳湖)스님에 의해 중수되었다.

근래에 소림사는 비구니 도량으로 1979년부터 2003년 사이에 혜윤(慧允)스님의 원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해 삼성각, 요사채,

약사전 중창불사를 통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돌계단 위로 일주문과 범종각이 함께 되어 있다.

 

 

一柱門(일주문)

종각에는 따로 현판이 걸려있지 않으며 불전 사물이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범종만이 걸려있다.

 

 

梵鐘閣(범종각)

종각앞에 서니 앞이 확 트여 마음이 시원하고 답답함이 없다. 도심에는 많은 아파트와 높은 건물로 인해 항상 답답이있었는데

이곳은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답답함이 없이 시원하다.

 

 

 

 

 

 

계단을 올라오니 팔각 7층 석탑과 대웅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탑은 1995년에 건립되었으며 2단으로 된 팔각 기단위에 7층의 팔각 탑신을 올렸다. 

각층의 면석에는 8여래가 조각되어있다.

 

 

팔각 칠층석탑

 

 

大雄殿(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위주로 하고 좌우보처로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大雄殿(대웅전)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 부처님을 대웅(大雄), 즉 대장부라고 부릅니다. 좌우에 협시보살을 모시게 되는데,

이 절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님을 협시로 모시고 있다.

 

 

地藏菩薩(지장보살)

 

 

釋迦牟尼佛(석가모니불)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

 

 

탄생불

 

 

 

 

神衆檀(신중단)

 

 

목탁의 유래

옛날 어느 절에 덕 높은 스님이 몇 사람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어가고 제멋대로 생활하며, 계율에 어긋난 속된 생활을 일삼다가 그만 몹쓸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죽은 뒤에는 물고기 몸을 받아 태어났는데 등 위에 큰 나무가 솟아나서 여간 큰 고통이 아니었다.

하루는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 가는데 등 위에 커다란 나무가 달린 고기가 뱃전에 머리를 들이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스승이 깊은 선정(禪定)에 잠겨 고기의 전생을 살펴 보니, 이는 바로 병들어 일찍 죽은 자기 제자가 방탕한 생활의 과보(果報)로 고통받는 모습이었다.

이를 가엾게 생각하여 수륙천도제(水陸薦度際)를 베풀어 고기의 몸을 벗게 하여 주었다.

그날 밤 스승의 꿈에 제자가 나타나서 스승의 큰 은혜를 감사하며 참으로 발심하여 공부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등에 있는 나무를 베어 고기 모양을 만들어, 부처님 앞에 두고 쳐주기를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고, 강이나 바다의 물고기들은 해탈할 좋은 인연이 되겠기에 ...

 

이렇게 해서 고기 모양의 목어(木魚)를 만들게 되었다. 이것이 차츰 쓰기에 편리한 둥근 목탁(木鐸)으로 변형되어,

예불이나 독경을 할 때 혹은 때를 알릴 때에도 사용하며, 그 밖의 여러 행사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란다.

(일설에는, 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므로 수행자도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해야 불도(佛道)를 성취한다는 뜻에서

고기 모양의 목어를 만들어 아침 저녁으로 치게 하였다고도 한다.)

 

* 우리나라의 큰 사찰에 가보면 종각이 있고, 이 종각에는 네 가지 법구(法具 : 사물四物)가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쇠로 된 범종(梵鐘)과 가죽으로 만든 커다란 법고(法鼓), 구름 모양의 운판(雲板), 그리고 고기 모양의 목어(木魚)가 그것이다.

 

* 범종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 땅 밑 중생들의 해탈을 기원하며 울리고, *큰 북은 네 발 가진 짐승의 무리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치는 것이며,

 *목어는 물 속 생물들의 구원을 위해 두드리는 것이며,  *운판은 날아다니는 날 짐승과 온갖 곤충들의 안락을 바라며 소리내는 것이다.

 

이 사물의 울림 속에는 「원컨대 이 소리 온누리에 두루 퍼져 고통 받는 온갖 중생 다 함께 해탈케 하여지이다」하는 염원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곧 뭇 중생의 행복과 해탈을 기원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자비의 소리인 것이다.

 

 

감로도

 

 

 

地藏菩薩(지장보살)

 

 

 

 

법당용 동종 =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동종이다.

 

 

포대화상

당말기(唐末期) 명주 봉화현(明州 奉化縣)에서 태어났으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안습니다.

몸집이 뚱뚱하고 배가 늘어져서 배불뚝이였으며, 지팡이에 큰 자루를 끼어 메고 다니다가, 주는 대로 받아 넣고,

달라는 대로 꺼내 주며, 먹을 것이라면 무엇이나 주는 대로 먹기를 잘 하였습니다.

잠은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누워 잤으며, 한 잠자리에서 거듭 지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길흉화복과 날씨 등을 미리 말하였는데(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본디 출가한 법명은 계차(契此)스님이지만, 큰 자루(布袋)를 메고 다녀서, 포대화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게송으로,

一鉢千家飯 한 바리때에 천 집 밥을 빌어먹고
孤身萬里遊 홀몸으로 만리를 노닌다
靑日覩人少 대낮에도 보이는 사람 드물어
問路白雲頭 갈길 을 흰구름에게 묻는다

하고 읊었습니다.

 

번뇌의 티끌에 젖지 않고 의, 식, 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두타행(頭陀行)을 즐긴 포대화상은,

그가 열반한 후에 미륵보살 화현으로 알려졌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의 상(像)이 많이 그려집니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시는 석가모니부처님

 

 

藥師殿(약사전)

대웅전 뒤로 암벽에 깊은 굴이 하나 있다 이곳에 약사여래와 좌우협시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모셨다.

 

 

약사전(藥師殿)

전설에 의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기 전 이곳의 작은 굴에서 기도하여 개국의 뜻을 이루었으므로

등극후에 달마대사(達摩大師)께서 9년동안 면벽좌선(面壁坐禪)한 숭산 소림사의 이름을 따서 "소림굴(少林窟):이라 하였다고 한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여래불과 좌우협시로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모시고 있다.

동방 유리광세계의 교주이시고 대의왕불(大醫王佛)이신 약사유리광여래를 모신 전각으로서 유리광전이라고도 합니다.

약사여래부처님은 현세 중생의 모든 재난이나 질병을 없애고 고통을 구제하는 부처님이며,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이 좌우에 협시하여 진리광명을 두루 비추어 중생의 모든 고통을 제거한다고 합니다.

 

약사여래는 왼손 밑에 약이든 약합을 들고 계신다. 동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소멸, 의복과 음식 등을 구족시키고자 하는 부처님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신장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좌우 보처는 일광변조 소재보살과 월광변조 식재보살로 되어 있습니다.

 

 

 

 

三聖閣(삼성각)

산신(山神) · 칠성(七星) · 독성(獨聖)님을 모신 곳이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것이다.

 

 

 

 

칠성단의 칠성탱

칠성은 북두칠성을 만하는데 별나라에 주군(主君)으로 인간의 수명을 담당한다고 한다.

주불로는 금륜보계 치성광여래불(金輪界 熾盛光如來佛)을 모시고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협시로 모시고

칠여래와 칠원성군, 삼태, 육성, 이십팔수 제성군중을 모셔놓았다.

 

*치성광여래불(金輪界 熾盛光如來佛) = 원형의 두광과 신광 안에 선정인으로 앉아 계신다. 천재지변을 관장하시고 난리와 질병을 다스리시며

재앙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특히 자식 낳기를 원하는 사람이 불공을 올리면 그 원을 살펴 들어주신다고 한다.

일광변조 소재부살 = 해를 보관에 얹고 있으며, 인간의 번뇌를 제거하고 광명을 가져다준다.  =  약사여래불의 좌보처이기도 하다.

월광변조 식재보살 = 달을 보관에 얹고 있으며 중생 인도를 완성하겠다는 대서원을 발원하신 분이다. = 약사여래의 우보처이기도 하다.

 

 

獨聖撑(나반존자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도를 닦아 깨달음을 증득하여 연각의 지위에 있는 분을 독성이라 하며

나반존자로 불리워지는 부처님의 제자 16나한중의 한분으로 모셔져 있다.

 

♣♣재미있는 배울거리 이야기♣♣

나반존자는 어려서 출가하여 아라한과를 얻어 여러 곳을 다니며 전도하였으나 부처님이 왕사성에 계실 때

수제 장자가 전단향나무로 발우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 나무 끝에 매달아 놓고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누구든지 사다리나 막대기를 쓰지 않고

신통력으로 가져가라는 소식을 듣고 나반존자는 신통력으로 큰 바위에 앉은 채로 날아가 발우를 벗겨 가져갔다.

이일로 외도들에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이에 부처님께서는 부질없이 신통력을 나타내지 말라 꾸중하시며,

이곳 남염부제에 있지 말고 서구 야니주에 머물며 교화토록 명하여 그곳에서 교화하다가 다시 돌아와 부처님의 명에 따라

열반에 드는 것은 허락되지 않아 아직도 남인도 마리산에 머물며 중생을 이익 되게 한다고 전해진다.

 

 

산신탱과 산신조각상

 

 

삼성각 벽화 = 호랑이

 

 

삼성각 벽화

 

 

七層石塔(칠층석탑)

이 탑은 1995년에 건립되었으며 2단으로 된 팔각 기단위에 7층의 팔각 탑신을 올렸다. 

각층의 면석에는 8여래가 조각되어있다.

 

 

 

 

 

 

 

 

 

 

 

 

 

 

 

 

 

 

 

 

 

 

 

 

 

 

 

 

 

 

 

 

 

 

 

 

 

 

세종초교의 활짝핀 백목련

 

 

 

 

 

 

서울 莊義寺址 幢竿支柱(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  :  보물  제235호    시대 = 통일신라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서는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지금은 세검정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장의사의 옛터에 동서로 마주 서 있다.

장의사는 백제와의 싸움으로 황산(지금의 논산으로 추정)에서 전사한 신라의 장수 장춘랑과 파랑(罷郞)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라 무열왕 6년(659)에 세웠다고 전한다.

이 당간지주는 마주 보는 기둥의 바깥면 두 모서리를 죽여 약간의 장식을 보이고,
기둥머리는 안쪽 면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약간 평평하다가

이내 원을 그리며 깎여져 있다. 당간을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해 안쪽 면 윗부분 가까이에 둥근 구멍을 뚫어 놓았다.

대개의 경우 당간을 꽂기 위한 장치를 하더라도 기둥머리에 따로 홈을 내는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서는 그 유례를 따르지 않고 있어 흥미롭다.

전체적으로 높이에 비하여 중후한 편이며, 별다른 장식이 가해지지 않은 매우 소박한 모습이다.

세워진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망덕사터의 당간지주와 비교하여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서울 莊義寺址 幢竿支柱(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

 

 

서울 莊義寺址 幢竿支柱(서울 장의사지 당간지주)  :  보물  제235호    시대 = 통일신라

 

 

 

 

                 서울 玉泉庵 磨崖菩薩坐像(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  보물  제1820호   지정일 = 2014. 3. 11.

普渡閣 백불이라 부르지만 조선말기 부터 통칭하여 백의 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혹은 해수관음상으로도 부른다.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普渡閣 )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磨崖坐像)이다. 불암(佛巖) 또는 '보도각(普渡閣 )백불' 로 일컫지만,

조선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 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때, 이 존상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난 존상이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m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다. 그리고 이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前室)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서울 玉泉庵 磨崖菩薩坐像(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 ) :  보물  제1820호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台城>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台城>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 33호 시대 : 숙종 45년(1719년)

옥천암을 가려면 이 홍지문을 지나야 갈 수가 있다 여기까지가 서울로 들어가는 첫문이되면서

옥천암은 성문을 나서는 첫번째 사찰이 되는 것이다.

 

 

 

 

 

 

洗劍亭 址(세검정터)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4호   시대 = 조선

세검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한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데서 세검(洗劍)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정자는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영조 24년(1748)에 고쳐 지었으나 1941년에 불타 없어져서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검정은 평화를 상징하는 정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는 점 등에서 한국적인 건축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洗劍亭 址(세검정터)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4호   시대 = 조선

 

 

洗劍亭 址(세검정터)  :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4호   시대 = 조선

세검정은 홍제천 일대의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예로부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하여 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정자를 처음 지은 것은 언제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1748년(영조 24년)에 고쳐 지으면서 세검정 현판을 달았다.

세검정(洗劍亭)이라는 이름은 칼을 씻고 평화를 기원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현재의 건물은 1941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鄭歚: 1676년~1759년)이 그린 (洗劍亭圖[세검정도])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그림의 세검정은 정자 뒤로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져 있고 길 족에 문이 있으며, 개울 쪽으로도 작은 문이 있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숙종 대에 북한산성과 서울 도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을 건설하는 등이 일대가 서울의 북방 관문으로서 중요성이 커지면서

무신들의 휴식처로 자주 이용되었다.

또한 부근에 종이를 만들던 조지서(造紙署)가 있어서 실록의 편찬이 끝나면 사용한 종이를 씻는 세초(洗草) 작업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세검정 터는 경치가 좋은 계곡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즐기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잘 엿볼 수 있는 곳이며,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무대가 되었던 서울의 도성 밖 경승지다.

 

    

 

洗劍亭 址(세검정터)

 

 

겸재 정선(鄭歚: 1676년~1759년)이 그린 (洗劍亭圖[세검정도])

 

 

 

 

 

 

 

 

洗劍亭[세검정]

 

 

 

 

宋公壽天慈善不忘碑(송공수천자선불망비)  = 시대 = 근대

세검정 삼거리에서 북악터널 방면으로 올라가다 보면 월드캐슬빌라 입구 화단에 위치해 있는 비석으로 곳곳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있다.

옆면에「大正十一年壬戌正月 日[대정십일년임술정월 일]」이라 새겨진 것으로 보아 1922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대한 설명이 없는 고로 정확한 의도를 모르겠다.

 

 

벽화이야기 : 종이를 만드는 모습  = 세검초교 가는 길목에는 이렇듯 벽화가 그려져 있다.

 

造紙署 址(조지서 터)

조지서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관아로서 1415년 태종 때 조지소(造紙所)란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6년 세조 때 조지서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서는 국가문서에 쓰이는 표전지(表錢紙), 지폐용지인 저화지(楮貨紙)와

기타 서적 제작용 종이를 생산하였다.

 

 

造紙署 址(조지서 터)

조지서는 국가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만드는 관아로서 1415년 태종 때 조지소(造紙所)란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이곳에서는 국가문서에 쓰이는 표전지(表錢紙), 지폐용지인 저화지(楮貨紙)와

기타 서적 제작용 종이를 생산하였다.

 

 

돗자리를 만드는 모습

 

 

서당의 모습

 

 

 

 

만세문(앞쪽)

石坡廊(석파랑) = 대원군이 사랑한 아름다운 별장   "석파(돌언덕)"는 흥선대원군의 아호이다.

지금은 한정식을 하는 식당에  불과하다.

 

지금 보이는 문은 만세문이다.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종황제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 안에 세워졌던 "만세문"도 볼 수 있다.

암수 학 한 쌍이 불로초를 입에 물고 구름위를 나는 형상 새긴 만세문은 만사형통과 무병장수를 상징한다.

 

 

 

 

만세문= 뒷쪽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고종황제 즉위를 기념해 경복궁 안에 세워졌던 "만세문"도 볼 수 있다.

암수 학 한 쌍이 불로초를 입에 물고 구름위를 나는 형상 새긴 만세문은 만사형통과 무병장수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