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안암동 대원암과 보타사

백련암 2016. 7. 25. 19:03

안암동 大圓庵(안암동 대원암)

대원암(大圓庵, 개운사 부속 암자)은 1845년(조선 헌종 11년) 지봉(智峯) 우기(祐祈) 스님이 창건하고,

여기에 근대의 고승 정호(鼎鎬)가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 지도자를 길러냈다.

개운사와 함께 20세기 이후에 한국 교육불사와 불교의 진보적인 운동을 주도해 왔다. 또 대원암은 불경번역의 요람으로

1973년 탄허(呑虛)스님이 머물면서 역경사업에 전념하였고,  1926년에는 근대불교의 석학 박한영(石顚 朴漢永) 스님도 머문 곳.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불교의 대석학인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스님이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 석학들을 배출했고,

1970년대에는 탄허(呑虛)스님이 주석하면서 경전 번역불사를 하신 곳이기도 하다.

 

대원사 옆 현대식 5층 건물이 있다. 전에 왔을 때 고려대장경 연구소라고 적혀 있던 현판을 본것 같다.

중앙승가대학교 보육교사 교육원(中央僧伽大學敎 保育敎師 敎育院)이라는 글이 쓰여있다.  

중앙승가대학교(中央僧伽大學校)는 1979년 조계종단에 설립해 성북구 보현사를 학사로 했으나

1981년 개운사 내 개운회관을 인수하여 교사로 썼고 2001년 1월 김포로 이전했다.

그리고 4층에는 고려대장경연구소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1층에는 중앙승가대가 2015년에 설립한 국공립 연화어린이집이 있다.

 

※보타사(普陀寺, 개운사 부속 비구니 암자)는 승가대학교가 있을 때 기숙사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비구니 스님 정진터 다.

 

지봉강백(智峯講伯)  ( 1830경 ) 법명-우기(祐祈), 조선 스님

스님의 법명은 우기(祐祈)이고 지봉(智峯)은 법호이다. 경기도 양주(楊洲) 사람으로, 삼각산 도선암에서 인파축현(仁坡竺絃) 스님을 은사로 하여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뒷날 향을 사르고 인파 스님의 법을 잇게 된다. 

인간 됨됨이 효성스럽고 인자하기로 이름나 산중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다.

한 예로 지봉 스님은 큰 놋차관을 만들어 물을 담아 지고 다니며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곤 하였다.

 

언젠가 임금 거동시 행렬 속에서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주는 스님의 모습이 운현군(雲峴君), 즉 대원군(大院君)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마침 갈증이 나던 대원군은 지봉 스님이 준비한 물 한 잔을 마시고 고마운 마음에 참서(參書)라고 하는 관직을 주었다.

대원군은 참서관이란 관직을 주고 나서 그 관직이 지봉 스님과 걸맞지 않다고 생각됐던지 그날 다시 불러서

 “지봉 판서(判書), 한 잔의 물을 가져 오시오”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모두들 스님을 ‘지봉판서’라고 부르게 되었다.

 

참서관은 구한국 때 내각의 궁내부(宮內府)․ 의정부(議政府)․ 중추원(中樞院)․  표훈원(表勳院)․ 내부(內部)․ 외부(外部)․ 탁지부(度支部)․

학부(學部).  농공상부(農功商部)에 두었던 주임(奏任) 벼슬이다. 

판서는 조선시대 육조(六曹)의 으뜸 벼슬로 정이품이며 요즘의 장관벼슬에 해당된다.  태종 5년부터 고종 31년까지 있었다.

 

지봉 스님은 해남 대흥사 표충사(表忠祠) 총섭과 적멸궁 총섭이란 승직을 역임했다.  표충사를 중창할 때 전라도 안찰사는

용운(龍雲)․  지봉(智峯) 두 스님에게총 지휘 감독을 맡은 도감동(都監董) 임명장을 수여하였다. 

도감동인 두 스님의 헌신적 노력으로 표충사 중창 불사는 원만히 회향되었다.

 

19세기를 살았던 근대의 인물인 지봉 스님의 입적과 관련하여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스님이 입적한 지 수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기 위해 북경에 들어간 사신이 있었는데 그때 중국의 고관(高官) 한 사람이 사신을 데리고 자기집으로 들어가

어린 손자를 보여주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의 팔에 ‘해동지봉(海東智峯)’이라고 하는 네 글자가 쓰여 있는데

이것이 산 이름입니까,  아니면 사람 이름입니까?”  사신은 “우리나라의 서울 근교 사찰에 살던 스님의 이름입니다.”라 하였다.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요?”   “세상 떠난 지 벌써 3~4년 되었습니다.” 

“그 스님의 덕행이 어떠하였는지요?”  “스님들 중 최고였습니다. 사람들은 지봉 스님을 일컬어 ‘보살’이라고 하였고

또 스님으로서 판서직까지 받았으니까요".

중국의 고관은 크게 기뻐하면서 우리나라의 사신을 극진히 대접하여 떠나보냈다.

 

지봉 스님의 제자 중에는 운구(雲句) 대사가 있었다. 운구 스님은 예천 용문사(龍門寺)에 선불장(選佛場)을 개설하고 스스로 화주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또한 일곱 화엄조사의 영정을 봉안하고 봄 가을로 성대하게 제향을 올렸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매우 가까이 지냈던 까닭에 추사로부터 운구(雲句)라는 별호로 불리웠다.

지봉 스님의 출생, 입적 연대는 기록의 미흡으로 알 수 없으나 제자인 운구 스님과 김정희 선생(1786년 ~1856년)이 친밀하게 지냈다는

사실로 미루어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강백이라고는 하나 당시 스님들은 교학을 배워 마친 뒤에 반드시 선문(禪門)으로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던 만큼

선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 같다.  지봉 스님의 선(禪)과 교학을 전수받은 문인들의 명단과 스님이 도를 깨달았던 순간의 기연(機緣) 및

설법 요지는 스님의 어록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대원암 한 칸엔 조계종 불교어산작법학교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아마도 비어있을 당시 조계종에서 사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어산작법이란  :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게송에 곡을 붙인 노래인 범패 발상지를 뜻하는 어산과 재를 올릴 때 추는 춤을 이르는 작법을 말한다.

 

어산이란 = 범음, 어산이라고도 하며 부처님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범패"라고 부른다.

작법이란 = 재에서만 연행되는 독특한 불교무용이 있는데 이것을 작법(作法)이라 한다. 불교의 삼대작법에는 바라춤, 나비춤, 법고춤이 있다.

맨 아래 자세한 설명있음

 

 

2012년의 대원암 당시에는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2016년 7월 13일의 대원암의 문은 활짝 열려있고 보타사가 옮겨와 있었다.

 

 

대원암 현판

 

 

서울 普陀寺 金銅菩薩坐像(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물  제1818호    시대 =  조선

‘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서울 普陀寺金銅菩薩坐像)’은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 바닥을 딛고 오른쪽 다리의 무릎을 세워 앉는

유희좌(遊戱座)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유희좌는 중국 북송대부터 유행하여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후기에 유행하기 시작하여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

통통한 뺨, 반개한 눈, 작고 아름다운 입술 등에서 여성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보살상의 얼굴 표현과 조선 전기 금동상으로는 규모가 큰 점에서

조선 초 왕실이나 지배층이 발원한 상으로 판단된다. 어깨에 천의(天衣)를 숄처럼 걸치고 그 한 자락을 수직으로 늘어뜨리고 있는데,

국보 제221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등 조선 초기 보살상에서 볼 수 있는 착의법이다.

또한 이 상은 보존상태가 양호할 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 중앙에서 유행했던 귀족적인 보살상 형식을 보여주는 예로,

조선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서울 普陀寺 金銅菩薩坐像(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물  제1818호   

 

 

 

 

서울 普陀寺 金銅菩薩坐像(서울 보타사 금동보살좌상)  :  보물  제1818호   

 

 

대원암 불단에 모셔져 있는 삼존상과  보물인 금동보살좌상

불단에 모셔져 있는 삼존상과  보물인 금동보살좌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아마도 금동보살좌상은 이번에 모셔진 것 같다.

세 칸으로 세분이 자리하셨는데 이번에 옆으로 살짝 밀려 모셔진것 같다.

 

 

대원암 삼존상

 

 

석가모니불과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부처님의 당당하면서도 그윽한 미소가 너무 마음에 닿았다.

 

 

미소

 

 

 

 

관세음보살님의 표정이 너무 슬퍼보이십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데

제 눈에 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찢기고 갈라지고 부서진 비로자나 부처님 그러나 미소만큼은 온화해 보이십니다.

항상 이자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 상

 

 

    

 

 

 

 

명상에 잠기신 부처님의 모습

 

 

    

 

 

 

 

이 나무의 이름이 무엇일까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어봐도 모르고 찾아봐도 모르겠고...

 

 

石顚 朴漢永(석전 박한영) 스님의 硏究室(연구실)이 있던 곳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1870년- 1948년)스님은 전북 완주 출생이다. 17세에 출가하여,  선암사 금봉스님, 화엄사 진흥스님과 함께

태고 보우국사의 선맥을 잇는 태고 선종의 3대 강백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만해 한용운 스님과 함께 불교 유신운동을 펼쳤는가 하면 올바르게 시대를 이끌 수 있는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근현대 대표적인 선지식인 이었다.  1926년 이곳에 불교 강원을 설립해 20여 년간 청담, 운허스님을 비롯해

미당 서정주 등 수많은 불교지도자를 배출하였으며 1931년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임돼 불교를 전하는 일에 앞장섰다.

1948년 2월 29일 정읍 내장사에서 입적하였다.

 

 

    

石顚 朴漢永(석전 박한영) 스님의 자세한 글 아래에 있음

 

 

 

呑虛(탄허)스님께서 新華嚴經(신 화엄경) 合論(합론)을 번역하신 곳

현대불교를 대표하는 학승 탄허(呑虛, 1913년- 1983년)스님은 유(儒) · 불(佛) · 선(仙) 삼교의 사상을 깊이 있게 연구해 높은 학식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님은 1934년에 출가해 팔만대장경 한글 번역작업, 한글대장경 간행 등에 이바지했다. 

또한 조계종 초대 중앙역경원 원장 동국역경원 초대 역장,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특히 교육과 인재양성에 큰 뜻을 품고 1959년 "영은사 수도원"을 개설해 후학들을 배출했다.

 

 

탄허스님의 모습

 

 

향적실 =  대원암 공양간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香積室(향적실)

 

 

 

 

보타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기념비와 송덕비들

 

 

반달 감로 연지라는 안내판이 있다.

보타사 입구가 보이는 계단을 오르기 전에 작은 반달형 연못이다.

 

 

보타사 일주문격인 입구

 

 

서울 普陀寺 磨崖菩薩坐像(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  보물  제1828호     시대 =  고려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서울 普陀寺磨崖菩薩坐像)’은 개운사의 암자(칠성암)인 보타사 대웅전 뒤쪽 암벽에 조각된 상이다.

전체적으로 넓은 어깨에 양감이 강조되어 신체가 당당한 모습이다.

머리는 보관을 쓰고, 천의를 걸친 채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아래쪽으로 내리고 오른손은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편으로 좌우로 길게 뻗은 눈, 초승달 모양의 눈썹, 높게 솟은 콧등이 특징적이다.

보관은 높은 편인데 좌우로 관대가 돌출되고 보관 장식이 아래쪽으로 길게 늘어진 모습이다.

이러한 표현은 보물 제1820호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에서도 확인된다.

이 상과 관련한 기록은 현재 전하는 것이 없지만 마애보살좌상 왼편에 새긴 신중패(神衆牌)가 조성시기 추정에 참고가 된다.

이 상은 서울 옥천암 마애보살좌상과 함께 여말선초에 유행한 보살상의 한 형식을 보여주는 뛰어난 예이다.

<문화재청의 글>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 개운사의 암자인 보타사 대웅전 뒤쪽 화강암 암벽에 조각된 고려시대의 마애불상이다.

이 불상은 1992년 서울문화사학회가 정기 답사 때 발굴한 것으로 높이 5m, 폭 4.3m의 거대한 보살상이다.

머리에는 좌우 옆으로 뿔이 있는 관을 쓰고 있으며, 뿔 끝에는 복잡한 타원형의 장식이 늘어져 있다.

얼굴 생김새가 토실토실하며 어깨가 넓고 웅대한 형상을 하고 있다. 

비교적 자연스럽고 미감이 풍부한 표정이며 옷은 양 어깨를 감싼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최근에 온 몸을 흰색으로 칠하여 백불(白佛)의 인상을 풍기는데, 입술은 붉은색, 눈과 눈썹, 윤곽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마애불 어깨쪽의 좌우에 홈이 패여 있는 것으로 보아 불상을 보호하던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애불 오른쪽 아래에는 제작 당시에 새겨진 명문(銘文)이 남아있다.

 

 

 

 

    

마애보살좌상 왼편에 새긴 신중패(神衆牌)

 

 

보타사 대웅전

주련

佛身普放大光明(불신보방대광병)  :  부처님이 널리 펴 놓으신 대광명은

色相無邊極淸淨(색상무변극청정)  :  형색과 모양조차 없어 지극히 청정하시네,

如雲充滿一切土(여운충만일체토)  :  구름이 모든 국토에 충만하게 흐르듯이 

處處稱揚佛功德(처처칭양불공덕)  :  곳곳에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네.

 

    

 

 

법당내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이곳이 예전에 관음전이었고 보물인 금동보살좌상이 이곳에 모셔져 있었다고 합니다.

 

 

스님들이 머물러계셨던 요사채

 

 

 

 

 

 

    

李碧峰大和尙 연身 記念頌碑(이벽봉대화상▲신 기념송비)   碧峰堂 浮屠(벽봉당 부도)

▲표는 아는 자인줄 알았는데 잘못 알고 있었음,   한문은 엉뚱하게도 비숫한자가 많고 복합된자가 많아 어렵다.

 

 

벽봉당의 기념송비와  부도

 

 

 

 

2012년 가을에 대원암 선정에 든 부처님

 

 

2012년 가을에 대원암 비로자나 부처님

 

 

 

 

 

石顚 朴漢永(석전 박한영) 스님

석전 박한영 스님을 아시나요?  =   석전스님 조명 세미나 9월 20일 고창 선운사서 열려 : 2009.  9. 9.

 

위인들은 보통 당대에 평가를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후에도 후학(後學)들에 의해 선양(宣揚)되곤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말 그대로 ‘이름 없이’ 평생을 살다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승리하지 못한 사람들일 경우 승자 독식에 의해 그런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映湖禪師之顯(영호선사지현)

 

 

일제시대 조선불교 교정(지금의 종정)을 지냈고 수많은 후학들을 길러낸 당대 ‘선지식 중의 선지식’ 석전영호(1870~1948, 속명 박한영) 스님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한국 근대불교 대강백이었음에도 그를 알거나, 알아 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혹자는 “선불교 전통이 강한 한국불교 현실에서 ‘상대적으로’ 교를 많이 공부한 스님이 과소평가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도 한다.

 

수많은 제자 중의 한사람인 육당 최남선은 석전스님의 한시를 모은 <석전시초(石顚詩抄)>에서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석전사(師)를 만나매, 내전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위당 정인보도 <석전상인소전(小傳)>에서 말한다. “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를 가나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지 화제는 고갈될 줄 몰랐다.”

 

서울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퇴학당하고 방황하던 자신을 중앙불교전문학교 제자로 받아들여준 석전스님에 대해

미당 서정주는 “나의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고 부르며 평생 존경의 마음으로 모셨다고 한다.

 

백파 문손으로 선운사와 인연 깊어

 

석전스님은 전주 위봉사 말사인 태조암으로 출가해 백양사, 선암사 등을 거쳤고,

추사 김정희가 하사해 선운사 백파 문중에 내려오던 호인 석전을 물려받아 선운사와 인연을 맺었다.

 

 

 

 

스님은 장성 백양사 환응(幻應)스님에게 사교를, 선암사 경운(擎雲)스님에게 대교를 이수했다.

1895년 순창 구암사에서 설유(雪乳)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

석전스님은 1908년부터 만해(卍海), 금파(琴巴)스님 등과 불교개혁에 나섰으며, 1910년 만해, 성월(惺月), 진응(震應), 금봉(錦峯)스님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헤 조선불교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이것은 당시 일제가 자국의 조동종을 끌어들여 불교를 왜색화 하기 위해 진행했던 일련의 ‘작업’에 반발해 진행했던 것이었다.

 

1926년 개운사 대원암에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초청 받은 석전스님은 이후 20여년간 불교인재 양성에 주력했으며,

여기서 많은 제자들을 만나고 또 길러냈다.

석전스님은 1929년 1월에 개최된 조선불교승려대회에서 7인의 교정(敎正)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대되었으며,

그후 조선불교 최고지도자로서 20여년간 종단을 이끌었다.

 

유교법회에서 <범망경>, <유교경> 강의

 

1941년 2월 26일부터 3월 13일까지 열흘동안 서울에서 열린 유교법회에서는 <범망경>과 <유교경>을 강의했다.

유교(遺敎)법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이어가자는 취지에서 열린 것으로

만공스님, 한암스님, 석상스님, 서응스님, 동산스님, 청담스님, 석주스님 등 당대의 고승 30여명이 참여해 진행한 것이었다.

 

 

1941년 3월 13일 유교법회 직후 찍은 기념사진.

앉아 있는 스님들 중 왼쪽에서 세번째가 석전스님이다. 석전스님 오른쪽 바로 옆은 만공스님.

 

사진 설명

유교(遺敎)법회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곧게 이어가자는 취지에서 열린 것으로

만공스님, 한암스님, 석상스님, 서응스님, 동산스님, 청담스님,

석주스님 등 당대의 고승 30여명이 참여해 진행한 것이었다.

 

 

해방 후인 1945년 9월22~23일 양일간 불교계는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총독부의 사찰령과 조계종총본사태고사법 등을 폐지하고,

초대 교정으로 석전스님을 추대했다.

 

이러한 근대불교 역사에서의 업적과 함께 스님은 항일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1919년 4월 2일 석전스님은 지암 이종욱 등과 함께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불교계의 대표로 한성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했다.

1946년 2월에는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준비위원회(己未獨立宣言記念全國大會準備委員會)”의 부회장직을 맡아 맡아

3.1절의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계승(繼承)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스님은 1945년 초 정읍 내장사로 자리를 옮겨 매곡(梅谷)스님에게 “여기서 세상 뜨려고 왔네”라며 만년을 보낸다.

그리고 3년 후인 1948년 4월 8일 내장사에서 원적했다. 세수 79세, 법랍 61세.

 

 

 석전스님이 제자 운기스님에게 준 전강게

 

 

항일에도 적극 참여 … 지관스님 등 대부분 석전스님 강맥 이어

 

석전스님 강맥은 운허용하, 운기성원, 운성승희, 고봉태수, 성능복문, 철운현종 스님 등으로 이어졌다.

운허스님 맥은 지관, 월운, 홍법, 묘엄스님 등으로, 운기스님은 혜남, 도형스님 등으로 계승됐다. 운성스님은 지운, 일귀스님 등에게 강맥을 전했다.

또한 고봉스님 맥은 우룡, 고산스님과 비구니 일현스님이 받았다. 성능스님의 강맥은 명성, 자민스님에게 이어졌다.

월운스님의 맥은 지안, 홍법스님의 맥은 종범스님이 계승하는 등

석전스님의 강맥을 이어받은 후학들은 현재 한국불교 교학(敎學)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수많은 족적을 남긴 석전스님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 ‘석전 영호 대종사의 생애와 사상’이

9월 20일 오전 10시 전북 고창 선운사(주지 법만스님)에서 열린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통도사 율주 혜남스님이 ‘석전영호스님의 강맥’을 주제로 강연을 하며 노권용 원광대 교수가

‘석전 박한영의 불교사상과 그 유신운동’, 효탄 스님이 ‘석전 영호 대종사의 계율사상’,

오경후 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이 ‘영호 박한영의 항일운동,’  김상일 동국대 교수가 ‘석전 박한영의 문학관’,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의 김호귀 박사가 ‘석전 박한영의 선사상과 관련한 선종사적 배경 고찰’  등의 주제를 발표한다.

 

선운사 주지 법만스님은 “근대 불교의 거목인 석전스님을 기리고 추모하는 사업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고 시작할 계획”이라며

“향후 다양한 세미나와 사업을 통해 석전스님이 본래 위치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운사는 오는 9월 19일 ~ 20일 선운문화제를 개최한다.

사진은 지난해 문화제에서 보은염 이운을 재현하고 있는 모습.

 

◈▶ 한국학(韓國學)의 큰 스승 석전 박한영 스님 :  2012. 9. 22.

 

-한국불교 근대화의 문을 연 석전 스님-   

-100년 전에 치세의 근본이 소통에 있음을 역설-

 

일제의 폭력과 수탈로 나라와 겨레가 신음하며 칠흑같은 어둠 속을 헤매던 그 때, 그 어둠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 겨레를 빛이 보이는 미래로 이끌었던 세 분의 스님이 계셨다. 바로 만해스님과 용성스님, 그리고 석전스님이십니다.

 

해인사주지 이회광과 불교신문, 동국대학의 권상로같은 자들은 아예 친일의 길로 나섰고, 만공, 한암, 효봉 등의 스님들은

여전히 산중에서 참선수행에만 정진하고 있을 때에 이 세분 스님은 시정(市井)에 뛰어들어,

어둠 속에서 범부중생들과 더불어 함께 씨름하며 어둠을 밝히는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세 분 스님 가운데 한 분이신 박한영(朴漢永 : 1870~1948)스님은 선암사의 금봉스님, 화엄사의 진응스님과 더불어

근세 한국불교의 3대 강백(講伯: 요즈음 말로 유명 강사 )으로 손꼽히는 어른으로서, 선사로 널리 알려진

만암스님, 청담스님, 운허스님, 경보스님 등이 모두 이 석전스님의 제자입니다.

오늘날의 불자들이 큰스님으로 우러러 보는 백양사의 서옹스님과 성륜사의 청화스님은 만암스님의 제자이니,

석전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은 스님들이십니다.

 

우리나라 불교 근대화를 이끌었던 선각자이자 석학이었던 석전 스님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학계에도 많은 제자들을 남기셨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이 육당 최남선과 위당 정인보, 미당 서정주입니다. 이들이 근세 조선의 석학삼당(碩學三堂)으로 불릴 만큼

박학다식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스승인 석전스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대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했던 육당 최남선은 석전스님의 한시(漢詩)를 모은 <석전시초 石顚詩抄> 발문에서,

“석전사(師)를 만나매, 내전이고 외전이고 도대체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박식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볼 것이 없는데, 석전선생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위당 정인보도 <석전산인 소전 石顚山人 小傳>에서, “한영과 함께 길을 갈라치면 한국 땅 어디를 가나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

산에 가면 산 이야기, 물에 가면 물 이야기---, 이른바 사농공상(士農工商) 무엇에 관한 문제를 꺼내든지 화제는 고갈될 줄 몰랐다.” 고 술회했습니다.

 

항일학생운동으로 말미암아 서울중앙고보와 고창고보에서 퇴학당하고 방황하던 자신을 중앙불교전문학교 제자로 받아들여준 석전스님에 대해

미당 서정주는 “나의 뼈와 살을 데워준 스승”이라고 부르며 평생 존경의 마음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석전 스님은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정인보, 오세창, 이동영, 이능화 등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이 정신적 스승으로 모셨던 인물이며,

만암, 청담, 운허, 운성, 운기, 남곡, 경보 스님 등 출가자와 이광수, 서정주, 신석정, 조지훈, 모윤숙, 김동리, 조종현, 김영수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도 모두 석전 스님의 제자였습니다.

 

석전 스님은 1870년 9월14일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읜 스님은 아홉 살 되던 해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열여섯 살에 이미 서당의 학동들을 가르칠 만큼 배움이 깊었습니다.

 

1886년 17세에 출가해 승려로서 배워야 할 바를 익히기 시작한 스님은 1890년 장성 백양사 운문암 김환응 스님 문하에서,

그리고 1892년 당대 최고 강백으로 손꼽히던 선암사 김경운 스님에게 경학을 배우고, 건봉사와 명주사에서 여러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구암사에서 설유처명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아 당호를 영호로 정했습니다. 이때 석전 또는 석전산인이라는 법호를 설유처명 스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 법호는 일찍이 추사 김정희가 지기지우로 교유하던 백파스님에게

“훗날 법손 가운데 큰 도리를 깨쳐 나라의 기둥감이 될 재목이 나올 터이니 이 호를 전하라!”고 부탁하며 전하여 준 것이었습니다.

 

미당 서정주는 그의 글 <질마재 신화>에서 스승으로부터 들은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입구에 가 보면 추사가 글을 지어 쓴 백파의 비석에는 대기대용 (大機大用)이라는 말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부탁한 법호 '석전 石顚'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써서

전하는 것을 알고 추사도”야! 단수 참 높구나! 하고 탄복한 것이겠지요."

이 법호가 백파스님의 법손인 설유처명에게 전해졌다가 마침내 박한영 스님에게 전해진 것이니, 선운사 백파문중에서는 박한영 스님을,

추사가 생전에 말한 “큰 도리를 깨우쳐 나라의 기둥이 될 재목”으로 인정한 셈입니다.

 

석전 스님은 평생 4만 권에 가까운 도서를 구해 읽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선운사에 보존되어 있는 스님의 장서에는,

우리나라 고서를 비롯하여 중국 및 일본에서 출간된 서적들이 있는데, 특히 중국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 담사동이 1896년에 저술하여,

1899년 일본과 중국에서 처음 출간한 <인학 仁學>을, 스님께서 1913년 번역해서 해동불보에 연재한 일은 스님의 독서량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알게 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 나선 박-문-안 세 후보가 모두 “국민과의 소통”을 역설하기 이전

이미 100년 전에, <인학>을 번역 연재하면서, 치세(治世)의 근본이 “인(仁)과 통(通)”이라고 역설하며

“불인(不仁)과 불통(不通)한 것은 제거해야 한다”고 하신, 스님의 천리안(千里眼)이 실로 놀랍습니다.

 

석전 스님은 옛어른들의 서책을 그 누구보다 많이 읽으셨지만,

 “옛 것이 훌륭하고 뛰어나지만 지나치게 옛사람의 학문을 숭상하는 것은

오늘을 낮추는 실마리가 되며, 오늘날 뛰어나고 생명을 이롭게 해주는 말과 글이

옛 사람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릇된 것”

이라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 역시 잘 받들어야 함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석전 스님은, 기미년 독립만세행진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1919년 4월23일 인천 만국공원 집회에서 발족한

 <한성임시정부>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할 만큼 항일독립정신이 강했습니다.

석전스님은 1908년부터 만해(卍海), 금파(琴巴)스님 등과 불교개혁에 나섰으며, 1910년 만해, 성월(惺月), 진응(震應), 금봉(錦峯)스님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해 조선불교 정체성을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당시 일제총독부가 일본의 조동종을 끌어들여 불교를 왜색화 하기 위해 진행했던 ‘불교통합정책’에 반대하며 진행했던 것입니다.

 

스님은 또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33년, 일본이 강요한 천장절 기념 학교행사에서 연단에 올라,

“아아! 그런디, 오늘이 바로 일본천황 생일이여, 그러니 잘들 쉬여”라고 한마디 하고는 바로 내려와

학생들이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등 수시로 반일감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석전 스님은 단행본 형식의 역서와 저술 9권을 비롯해 100여 편이 넘는 논설과 수필을 남겼습니다.

이런 스님의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방대한 독서와 글쓰기는 당대 한국불교와 겨레 현실의 어려움을 헤치고 미래로 나가기 위하여,

온 몸과 정신의 역량을 쏟아 붓는 열정과 염원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기일회(一期一會)의 한 평생을 한국 불교와 겨레 사랑으로 일관했던 석전 스님은 1945년 일흔여섯 살에 이르러 주지 매곡 스님에게

“나 여기 세상 뜨려고 왔네” 라며 정읍 내장사로 자리를 옮겼고, 조선불교 초대 교정(지금 조계종의 종정)으로 추대됐음에도

한 번도 산문 밖을 나서지 않은 스님은 1948년 4월8일 세속의 나이 일흔아홉 살, 법랍 예순한 살에

내장사에서 신병 하나 없이 좌선 입정하여 육신을 벗으셨습니다.

 

석전스님은 당대의 고승(高僧)으로 추앙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대 지식인들이 큰스승으로 섬길 만큼,

동-서양의 학문에도 통달하셨고, 특히 우리 한겨레의 뿌리를 밝히는 한국학(韓國學)의 태두(泰斗)라고 불리었습니다.

 

스님은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선생의 학문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金石學)을 깊이 탐구했고, 이를 현장체험하기 위해

1924년 7월부터 제주도, 금강산, 호남지방 등의 명찰을 수차례 답사했고, 특히 한철학과 한국학의 본향인 백두산에는 일곱 번이나 올랐습니다.

스님의 백두산행에 수행한 최남선은 이 때 스님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의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후일 최남선이 고육지책으로 일제의 <조선사 편수작업>에 참여하는 한편으로는

일제의 조선사 편수 목적에 대항하는 <불함문화론>을 쓰게 된 바탕이 바로 석전 스님의 백두산 등정 강설입니다.

 

 

다음은 스님께서 백두산에 올라 읊으신 한시(漢詩)입니다.

 

曉日天池浴(효일천지욕) =  천지에서 몸을 씻고 솟아나는 새벽해

虹霓斷復連(홍예단복연) =  무지개는 끊어 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光風吹瀨急(광풍취뢰급) =  햇살 실은 바람이 급한 여울처럼 불어오더니

蕩破西峯煙(탕파서봉연) =  서쪽 봉우리의 안개를 몽땅 쓸어버리는 구나.

 

 

아래는 스님께서 다산선생의 유적지를 탐사하며 남해안 일대를 답사할 때 다도해의 노을을 바라보며 읊으신 詩입니다.

 

多島亭亭映日斜(다도정정영일사) =  다도해 곳곳마다 노을 빛 쏟아지니

姻雲錯落似奇花(인운착락사기화) =  저문 구름 붉게 피어 한 송이 꽃처럼 지고

波光岸影隨帆轉(파광안영수범전) =  파도 빛과 뭍 그림자 돛배 따라 흐르니

身世蒼凉等落霞(신세창량등락하)이 내 몸 쓸쓸하여 저녁노을과 한가지네

 

 

다음은 석전 스님이 정읍 내장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제자 하나가 스님께 못 보던 과자를 드렸습니다.

“그 과자 맛이 아주 좋구나.”

 

“그건 오징어를 다시마로 싼 것입니다. 오징어를 드셨으니 계를 범하셨지요. 바로 그 점에 대한 법문을 듣고 싶어 스님께 드린 겁니다.”

제자의 말을 듣고 스님은 미소를 지으며,

“오징어를 먹인 것은 너희들이니 계를 범한 쪽은 바로 너희들이니라.”

“그래도 잡수신 분은 스님 아니십니까?”

“허허, 어른이 갓난아이에게 뜨거운 인두를 덥석 쥐어주면 과연 누구의 잘못인고, 순진무구한 갓난아이의 잘못인고, 아니면 어른의 잘못인고?”

 

이같이 석전 스님은 쉬운 말로 지계(持戒)의 뜻을 일깨웠습니다. 지계는 깊은 사려를 포함합니다.

사려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계율은 건물의 기초와 같습니다.

수행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계율을 지키는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몸에 두른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늙음을 허무하다고 하는 말은 죽음과 삶을 깊게 모르는 입에서나 나오는 법,

한지에 먹물 번지듯 햇살이 창에 들듯 죽음은 삶에 스며드는 법,

밝고 따스하게 스미는 죽음의 이치를 알고 나면 늙음도 더 이상 두려운 게 아니지,

죽음을 알고 나면 지혜로움만 남기에, 오히려 태평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네!'

 

육당 최남선이 노년에 이른 스승 석전 스님으로부터 들었다고 전하는 스님의 생사관(生死觀)이 제 것이 되기를 발원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 펌

 

 

 

 

魚山作法(어산작법)

불교어산작법이란  :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게송에 곡을 붙인 노래인 범패 발상지를 뜻하는 어산과 재를 올릴 때 추는 춤을 이르는 작법을 말한다.

 

어산(魚山) =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로 "범패"는 인도(梵)의 소리(唄)라는 뜻입니다. 불교이전의 브라만교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한국에는 830년(태화 4년) 당나라에서 돌아온 진감대사(眞鑑大師)에 의하여 들어왔다. 즉 목소리로 불전(佛前)에 공양드리는 것

즉 불가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와 절 밖에서 시주를 걷으며 축원하는 노래로 나뉘는데  재(齋)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는 다시

안채비소리와 겉채비소리로 나뉘어진다.

안채비소리는 절안의 병법(秉法)이나 법주(法主)와 같은 학식이 많은 승려가 부르는 노래로, 유치(由致) 나 청사(請詞) 같은 축원문을 요령(搖鈴)을

흔들며 낭송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염불이라고도 하며 <着語聲[착어성]><唱魂[창혼]><由致聲[유치성]><편界聲[편계성]><疏聲[소성]>

<祝願聲[축원성]> 등이 있다.

겉채비소리란 범패를 전문으로 하는 외부 범패승의 노래로 큰 재를 올릴 때 초청하여 부르게 한다.

 

겉채비소리는 세련되고 복잡하여 음악적으로도 높이 평가되는데 대개 리듬과 화성이 없는 단성선율이며 유장한 느낌을 준다.

이는 다시 그 음악적인 스타일에 따라 홋소리 · 짓소리 · 화청(和請) · 회심곡으로 분류가 됩니다.

 

작법(作法) = 불교의식의 골자인 재(齋)를 올릴 때 추는 모든 춤의 총칭으로 불교 무용이라고도 한다. 범패(梵唄)가 성음(聲音)으로 즉 목소리로 불전(佛前)에 공양드리는 것이라면, 작법은 신업(身業) 즉 몸동작으로 공양드린다는 뜻으로서 범패에 대응되는 말로 범무(梵舞)라고도 한다.

춤의 동작과 형식 등에 따라 나비춤 · 바라춤 · 법고춤으로 나뉜다.

 

나비춤은 나비모양의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나 원래의 이름은 착복무(着服舞)이다. 경우에 따라 반주 없이 추기도 한다.

완만하고 느린동작으로 일관되는 춤이다.  춤이 쓰이는 용도에 따라<道場偈作法[도량게작법]> <頂禮作法[정례작법]> 등 15가지가 있습니다.

 

바라춤은 양손에 바라를 들고 빠른 동작으로 전진 후퇴 회전하며 추는 춤인데 그 종류로 "천수(千手)바라춤" "명(鳴)바라춤" 등 6가지가 있습니다.

 

법고춤은 불교 4법악기(四法樂器) 중 하나인 법고(法鼓)를 두드리며 추는 춤으로, 대개 일정한 장단 없이범패를 반주로 하여 춥니다.

법고를 치는 동작을 내용으로 하는 법고춤과 복잡한 리듬을 내용으로하는 홍구춤의 두 가지로 나뉩니다.

즉 어산작법(법음작법)은 불교의식에서 함께 행하여지는 춤과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사람이 돌아가신 49일 후에 죽은 자의 천도를 기원하며 드리는 영산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