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개운사(開運寺) = 안암동

백련암 2016. 8. 28. 14:45

안암동 = 개운사(開運寺)

자기의 운명을 연다는 뜻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운명을 개척한다는 뜻이 다분히 있을것같다
개운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운명을 개척한다는 뜻이 더 마땅할 것 같다
 

조선 태조5년(1396)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시초인 안암산 기슭에 창건하고 영도사(永導寺)라 부른 유서 깊은 사찰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영도사가 개운사로 절 이름을 바꾸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료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많은 의문을 가지게 한다.  

 

정조 3년(1779)에 동쪽으로 조금 옮겨 지으면서 개운사로 개칭하였다.  정조의 후궁인 원빈 홍씨(洪嬪)가 세상을 떠나자 애뜻하게

여겨 홍빈(洪嬪)을 위한 사당인 명인원(明仁園)을 절 옆에 쓰자 인파축홍(仁坡竺洪)이 동쪽으로 0.8km 떨어진 곳에 절을 옮겨 지었다.

 

 

조선말 고종 10년(1873)에 명부전을 세우고 나서 7년 후인 1880년에는 이벽송(李碧松)대사가 대웅전을 중건하고,

 그 후 여러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을 비롯한 여러 당우가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운사는 근대기를 거치면서 승가 교육을 주도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1926년부터 근대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朴漢永) 스님이 머물면서 강원을 이끌어 나갔던 일이 그 시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강원의 운영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음을 일주문 옆에 줄지어 있는 비석 가운데에서 찾을 수 있다.

 

1981년부터 김포로 학사를 옮겨가기 전까지 약 20여 년 간 이곳에 중앙승가대학이 자리하여 승가교육의 구심점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개운사는 승가의 교육도량으로 자리매김하여 근·현대사 속에서 한국불교를 이끌어 나갈 많은 인재를 양성했던 산실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開運寺 一柱門(개운사 일주문)

개운사의 정문인 일주문은 울퉁불퉁한 나무를 그대로 살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맞배지붕을 올린 것이다.

정면에는 주원영(朱源榮)이 쓴 개운사 현판(開運寺 懸板)이 걸려있다.

 

 

碑石群(비석군)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는 줄지어 서 있는 19개의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이 비석들은 1930년대부터 1940년에 걸쳐 개운사에 토지를 기증했던 시주들과 1926년부터 근대불교의 대석학이었던 박한영(朴漢永) 스님이

머물면서 강원을 이끌어 갈 때 시주를 했던 스님들의 공적을 영원토록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개운사의 계절변화에 의한 다양한 전경들

1979년 석주(昔珠)스님이 쓴 개운사(開運寺) 편액, 1922년 이정만(李正萬)이 쓴 대각루(大覺樓) 편액,

박대은신(朴大恩信)이 쓴 석수노지(石壽老池) 편액이 걸려있다. 그리고 기둥에는 부착면을 원형으로 한 주련 10개가 걸려있다.

 

 

앞마당인 주차장에 오색의 초파일등이 달려있다.

 

 

 

 

 

 

 

 

    

박대은신(朴大恩信)이 쓴 석수노지(石壽老池) 편액                                                      1922년 이정만(李正萬)이 쓴 대각루(大覺樓) 편액

 

 

 

 

 

 

종루밑으로 아치형 입구가 있고  앞에 대웅전이 보입니다.

 

 

鐘樓(종루)

대각루와 맞닿아 있는 2층 누각형 건물로 1층은 콘크리트 아치형구조이며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사모지붕을 한 범종각이다. 범종각에는 1982년에 조성한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이 봉안되어 있다.

 

 

    

 

 

노천에 모셔져 있는 관세음보살

 

 

    

 

 

 

 

1979년 석주(昔珠)스님이 쓴 개운사(開運寺) 현판이다.

 

 

石造觀音菩薩立像(석조관음보살입상)

대각루 아래 언덕에 삼층석탑과 함께 세워져 있는 관음보살입상으로 왼손으로는 보병을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병의 목을 잡고 있다.

 

 

 

 

감로수가 담아있어야 할 곳에 물도 없지만 물길 자체가 없습니다. 

 

 

開運寺 三層石塔(개운사 삼층석탑)

대각루 아래 언덕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으로 2층 기단에 삼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갖추고 있다.

 

 

    

 

 

 大雄殿(대웅전)

밖으로는 용머리를 안 쪽으로는 용 꼬리가 조각되어 있다.

불단에는 석가삼존불을 모시고 있으며, 뒤에는 영산회상탱(靈山會上幀)이 걸려 있다.

그 외에 감로탱(甘露幀), 신중탱(神衆幀), 팔상도(八相圖),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 등의 탱화와 의식법구인 소종(小鐘)이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의 좌우의 모습

좌측 댓돌에는 返本還源(반본환원) 즉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참된 지혜를 뜻한다.

 

 

 

 

釋迦三尊佛坐像(석가삼존불좌상) 

석가삼존불좌상(釋迦三尊佛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중앙에는 석가여래, 좌우에는 화려한 보관을 머리에 쓰고 연꽃을 쥐고 있는 보살상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뒤에는 1930년에 그린 영산회상탱(靈山會山幀)이 후불탱으로 봉안되어 있다.

 

 

釋迦三尊佛坐像(석가삼존불좌상) 

 

 

千手千眼 觀世音菩薩(천수천안 관세음보살)

관음보살이 과거세의 모든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변화하여 나타낸 몸.

천 개의 손과 눈이 있어 모든 사람의 괴로움을 그 눈으로 보고 그 손으로 구제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낸다.

 

지옥(地獄)의 고통(苦痛)을 해탈(解脫)케 하여 모든 원(願)을 성취(成就)케 하는 천수관음(千手觀音)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로  42개의 많은 손을 가지고 있다. 42개의 손 가운데 합장한 두 손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 밖의 40수(手)는 그 하나하나의 손이 25유(有)의 중생을 제도하므로 40×25=1000수가 된다.

25유는 지옥부터 천상까지의 육도 중생을 보다 자세히 분류하여 25계층으로 나타낸 것이다.

 

※▶1981년부터 김포로 학사를 옮겨가기 전까지 약 20여 년 간 이곳에 중앙승가대학이 자리하였었다.

한국 불교 개혁의 근원지이고, 현재는 김포에 위치하고 있지만 불교 교육의 근본도량인 중앙승가대학이 있던 곳이다.

 

 

의식법구인 소종(小鐘)

 

 

冥府殿(명부전)

소조지장보살좌상과 도명존자상, 무독귀왕상, 시왕상, 그리고 판관상, 사자상, 동자상 등을 봉안하였다.

그런데 시왕상은 특이하게도 모두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가 아니라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불화로는 지장삼존 뒤에 1875년 조성한 지장탱과 시왕탱, 그리고 19세기 후기에 조성된 현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地藏菩薩(지장보살)과 좌우 협시인 무독귀왕과 도명존자 외에도 시왕상들이 있다.

 

 

地藏菩薩(지장보살)

 

 

시왕상은 특이하게도 모두 의자에 앉아있는 자세가 아니라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彌陀殿(미타전)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이 모셔져 있는 전각 

 

 

 

 

木造阿彌陀如來坐像(목조 아미타여래좌상)  : 보물  제1649호      시대 = 고려 후기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단엄한 상호, 세련되고 뛰어난 조각기법,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감각, 긴장감 넘치는 선묘 등이

잘 어우러진 매우 완성도 높은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이 불상은 1280년에 중수된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더불어 현재까지 발견된 고려후기 불상 중에서 1274년이라는 가장 오래된

중수원문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불상은 적어도 13세기 전반에는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이 매우 드문 현실에서

이 불상은 더욱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1m가 넘는 큰 규모에 아산 축봉사라는 원래의 봉안 장소 및 1274년의 하한연대, 우수한 조형성은 물론 현재의 보존 상태 또한 매우 좋은 편이다.

<문화재청의 글>

 

개운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은세련되고 뛰어난 조각기법과 장중하면서도 균형감 있는 조형, 긴장감 넘치는 선의 묘사 등이

잘 어우러진 매우 완성도 높은 고려후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특히 이 불상은 1274년이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수 발원문(重修發願文)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1280년에 중수된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더불어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현재 13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개운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복장(服藏) 전적 21점은 대부분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는 매우 귀중한 자료들로서

제작 시기가 대체로 신라하대로부터 고려전기로 판단되고 있다.

이 전적들은 불교경전들로서 9세기에서 13세기에 걸쳐 필사 또는 간행된 화엄경으로 진본(晉本, 60권), 주본(周本, 80권), 정원본(貞元本, 40권)등

3본 화엄경이 고루 들어 있어, 시기적으로 희귀한 자료로서의 가치뿐만아니라 서예, 화엄경 판본 연구 및 불교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로 인정됐다.

 

"갑사 삼세불도"는 18세기 초 중반 전라도를 중심으로 경상과 충청지역에서 활동한 당대 대표적 화사인 의겸(儀謙)이 제작한 불화이다.

 

 

보물 제 1649호인 개운사 木造阿彌陀如來坐像(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中幹大師 願文[중간 대사 원문]

 

현존하는 의겸이 제작한 불화는 21건 30점이며 작품을 통해서 볼 때

그의 활동 시기는 대략 1713년에서 1757년 무렵까지 약 40여 년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가운데 길이 4m에 이르는 3폭 형식의 삼불도는 갑사 삼세불도를 비롯해 운흥사 삼세불도, 화엄사 삼신불도 등 3건에 불과하며,

조선후기를 통틀어서도 이러한 대형의 3폭 삼불도 형식의 예는 희구한 편이다.

 

450cm에 육박하는대형의 화폭에 각 설법 장면을 세련되고 유려한 필치, 짜임새 있는 구도와 조화롭고 안정감 있는 색채로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게 묘사한 18세기 전반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판단됐다.

이와 더불어 1730년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거의 완전한 형태의 불화복장(佛畵服藏)을 남기고 있어 불상복상(佛像服藏)과 함께

불화 복장 의식을 연구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 1649호인 개운사 木造阿彌陀如來坐像(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崔椿 願文[최춘 원문])

 

 

보물 제 1649호인 개운사 木造阿彌陀如來坐像(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발원문

(天正 惠興 願文[천정 혜흥 원문])

 

 

보물 제 1649호인 개운사 木造阿彌陀如來坐像(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

(2010년 국보, 보물 지정보고서)

 

 

보물 제 1649호인 개운사 木造阿彌陀如來坐像(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및 발원문

(2010년 국보, 보물 지정보고서)

<발원문은 모두 문화재청에서 퍼옴>

 

 

아미타불의 수인

개운사엔 건칠불좌상은 높이 1.18m의 고려시대 불상이다.

건칠불이란 = 나무나 종이. 천(베布)을 재료로하여 불상을 만든 후 옻칠을 하고 도금한 불상을 말하며 보통 지(종이紙)불이라고도 함

 

고려시대 말기에 종이로 조성한 여래좌상으로 왼손을 평행하게 하여 하품중생인의 수인을 취하고, 길상좌를 하였다.

통견의 불의(佛衣)는 왼쪽 어깨에 네 가닥의 옷주름이 표현되었고, 여기서 팔로 내려간 일곱 줄의 옷주름으로 번잡해진 오메가형(Ω) 주름이다.

또 무릎 앞면과 왼쪽 무릎에 팔의 소맷자락이 늘어져 있으며, 승각기의 치레와 띠매듭이 사라지고 주름이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1274년이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수(重修·수리하거나 고침)발원문을 남기고 있어 13세기 전반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불상에서 나온 복장 전적인 <화엄경>도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는 귀중한 자료로,  신라 하대부터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문화재청은 판단했다.

 

 

2010년에 불상과 별도로 보물 제 1650호로 지정됐다. =  개운사 아미타부처님께 봉안된 화엄경 첫 공개

 

 

2010년에 불상과 별도로 보물 제 1650호로 지정됐다.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20권에 달하는 <화엄경> 중 9세기로 추정되는 대방광불화엄경 권 24,

2010년에 불상과 별도로 보물 제 1650호로 지정됐다.

 

서울 개운사 아미타부처님께 봉안됐던 20권의 <화엄경>은 대부분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는 성보로 제작시기 또한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전기까지 올라가는 희귀 자료로 꼽힌다.

발견 당시 세간의 큰 화제를 모았을 뿐 아니라 <화엄경> 판본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돼 불상과 별도로

2010년에 보물 1650호로 지정됐다. 이러한 진귀한 성보를 가까이에서 친견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

 

 

 

 

三聖閣(삼성각) 

독성상과 산신상, 그리고 1957년 보경(寶鏡)스님이 그린 칠성탱과 독성탱, 산신탱을 봉안하였다.

 

 

삼성각 = 산령각. 금륜전. 천태각 = 한지붕 세가족

 

 

山靈閣(산령각) = 산신단

 

 

 

 

天台閣(천태각) = 獨聖(나한)

 

 

 

 

박대은신(朴大恩信)이 쓴 석수노지(石壽老池) 현판

 

 

1922년 이정만(李正萬)이 쓴 대각루(大覺樓)

 

 

 개운사(開運寺) 현판은 근대기 서화가인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작품

 

 

대각루(大覺樓)의 개운사(開運寺) 현판은 근대기 서화가인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작품이다.

 

 

 1916년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 쓴  芬陀利鄕(분타리향)

분타리향(芬陀利鄕) : 흰 연꽃이 피어있는 마을을 뜻합니다.

뿐다리까(분타리향) = 바로 이 현판입니다. 분타리향이라고 되어 있지요. 흰 연꽃이 피어 있는 마을이라고 해석이 되나요.

그런데 이 뿐다리까라는 말이 경전에서도 사용이 되고 있거든요.  바로 묘법연화경의 이름에 쓰이고 있지요.

 

인도말로 삿달마 뿐다리까 수트라 가 바로 묘법연화경입니다. 가운데 연화가 바로 뿐다리까였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분타리향이라는 말은 법화경의 깨우침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고 깨우침을 얻은 단계를 분타리향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이 뿐다리까라는 말이 사찰 이름으로도 쓰여지고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가 이것에 해당이 된다고 할 수 있겠고,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 중의 하나인 분황사의 분이 바로 이 뿐다리까입니다.

 

 

선방에 걸린 현판

1925년 이집천(李集仟)이 쓴 사해백련(四海白蓮)

四海白蓮(사해백련) : 법화경에 나오는 말로 깨달음의 지혜를 뜻합니다. 

四海白蓮(사해백련) : 온 세상에 법화경의 가르침이 가득하고, 법화경의 가르침이 세상을 올바로 이끌어 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