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침과 영혼의 말씀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백련암 2008. 4. 8. 11:22
 
중국 선종 제3조 승찬(僧璨)스님

중국 선종 제3조 승찬스님(僧璨大師, ?∼606)의 출생지, 성씨 등에 대한 제대로 된 기록이 전해오고 있지 않다.

그래서 스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다만 단편적으로 전해오는 일화와 선시(禪詩) 신심명(信心銘)〉을 통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유추할 뿐이다.

2조 혜가스님이 서위(西魏)의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보리달마의 선풍을
드날리던 때에 승찬은 속인의 몸으로 혜가스님을 만난다.

승찬은 이때 이미 세속의 나이로 40을 넘은 데다 문둥병까지 앓고 있는 몸이었다.

승찬은 혜가스님을 찾아가 자기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불쑥 물었다.

“제자는 문둥병을 앓고 있습니다.

화상께서 저의 죄를 참회하게 하여 주십시오.” 스님이 말했다.

“그대의 죄를 가지고 오라. 참회시켜 주리라.” 승찬은 조금 있다가 말했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다 참회되었다.

앞으로는 불·법·승 삼보(三寶)에 의지해서 안주하라.”

 

“지금 화상을 뵈옵고 승보(僧寶)임은 알았으나 어떤 것을 불보(佛寶)·법보(法寶)라 합니까.”

“마음이 부처요, 마음이 법이다. 법과 부처는 둘이 아니요, 승보도 그러하다.”

 “오늘에야 비로소 죄의 성품은 마음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있지 않음을 알았으며,

마음이 그러하듯이 불보와 법보도 둘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혜가스님께서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아시고 곧 머리를 깎아주며 말했다.

“너는 나의 보배이다. 구슬 찬(璨)자를 써서 승찬(僧璨)이라 하라.”

그해 3월 18일 광복사(光福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으니, 그로부터 병이 차츰 나아져서 2년 동안 스님을 시봉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혜가스님은 승찬에게 옷과 법을 전한 뒤에 다시 말했다.

“그대는 내 법을 받고는 깊은 산속에 들어앉아 얼른 교화에 나서지 말라. 머지않아 국난이 있으리라.”

승찬스님은 대법을 계승한 뒤 몸을 숨겨 서주(舒州)의 환공산(晥公山)에 들어가 깊이 은거했다.

 

승찬스님은 이후 도신스님(道信, 580∼651)을 만나 그의 그릇됨을 알아보고 옷과 법을 전해주고는 곧 나부산(羅浮山)으로 가서

은둔하다가는 다시 옛터로 돌아와서 대중에게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널리 연설한 뒤에 법회하던 큰 나무 밑에서 서서 합장하고

임종(606년)하였다.

승찬스님이 혜가스님을 처음 만나던 때가 40세(563) 쯤 무렵이므로,
북주(北周) 무제(武帝, 561∼578)의 법란(573∼578)은

약 10년 후의 사건이 되고, 또 제4조 도신스님(道信, 580∼651)을 만나 법을 전한 수개황(隨開皇) 12년(592)은 법란 이후

약 20년 이후의 일이 된다.

 

따라서 3조 승찬스님은 전대 미문의 가장 비참한 폐불(廢佛)의 법난기를 체험하며 ‘달마의 선법’을 펴고 전하는 막중한

사명을 완수한 조사였다고 할 수 있다.

 

폐불에 의해서 압박을 받고 숨어 들어가게 되었으나 그로 인해 오히려 순화되고 축적된 불교적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임무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승찬스님에게는 선시 〈신심명〉이 그의 이름으로 전해진다.

〈신심명〉은 전체 구성이 4언 146구 584자의 소품이지만, 오늘날까지 선사상의 극치를 함축하고 있는 명저로 회자(膾炙)된다.

〈신심명〉의 대의는 우리가 모든 상대적인 양변의 차별견해를 모두 버리면 원융무애한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 모든 대립이나 시비·득실의 망념을 여의어 상대경계가 아닌
평등자재한 경지를 증득해 거기에 머물 것을 촉구한다.

또한 승찬스님이 〈신심명〉에서 ‘하나가 곧 일체’ 라는
상호무애를 설한 것은 화엄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

‘만법을 평등하게 관찰하면 자연 그대로 본연에 돌아간다’고 한 것은 노장(老莊)의 ‘만물일체관’과도 그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

 

결국 〈신심명〉은 선교를 막론하고 양변을 여윈 중도(中道)가 불교의 근본사상임을 표방한 중도론(中道論)이면서,

나아가 선과 중국적 사유체계가 모순 없이 회통한 사유의 극치라 하겠다.

불교신문 이덕진의 조사열전에서....

 

 

3조 승찬과 4조 도신의 만남

 

수나라 개황12년 3祖승찬에게 14세 어린 사미가 찾아와 대뜸  "큰 스님 자비를 베풀어 해탈하는 길을 열어 주소서."

"누가 너를 속박 했기에 해탈코져 하느냐?"  "아무도 저를 속박 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해탈을 구할것 없다."

사미는 그 말에 크게 깨닫고 스승으로 9년간 힘껏 모셨다.


승찬은 자주 현묘한 법으로 시험해 보다가 시절 인연이 익었음을 알고 의발을 전수하니 4祖 도신스님이 된다.

" 내 스승은(2조혜가) 내게 법을 전하시고 다른곳에 가 30년간 교화하시다 
입적하셨느니라.

 

나도 네게 법을 전했거늘 어찌 여기에만 있으랴."

승찬은 나부산과 서주 산곡사에서 크게 설법을 폈다.


그의 간결한 설법 신심명은 그래서 유명하다

"지극한 도는 멀리 있는게 아니요. 깨치기 어려운 것도 아니요. 다만 이것인가 저것인가 우리가 간택하려는게 병이요.

 

간택하려 들지 마라."

얼마후 그는 법회하던 큰나무 밑에서 합장한채로 임종하니 수양제 2년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