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금산사 대장전 벽화 | |||
중국 선종 제6조 혜능스님 ‘머무는 바 없이 마음 낼지니’… 그러나 아버지가 남해(南海) 신주(新州)로 귀양 오게 되어 신주에서 태어났다. 3살 때에 아버지를 잃게 되어 어머니가 수절하며 길렀는데, 자라면서 점점 가세가 궁색해져 땔나무를 해서 팔아 겨우 늙은 편모를 봉양할 수 있었다. 몹씨 빈궁하다보니 몰골은 말이 아니고 누구하나 가까이 상대해주는 사람조차 없을 정도였다. 스님은 24세 되던 해 어느 날 나무를 여관에 배달하는 길에 탁발 독경하는 스님을 만났다. 그리고 스님의〈금강경〉읽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응무소주 이생기심......"(응당 머무는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그 중에서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應無所住而生其心)”라는 경전의 말씀을 들었을 때 마음이 맑아져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그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방금 외우신게 무슨 경전 말씀인가요,?” "그 말씀을 듣고 참 기쁘니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 금강경을 스님은 어디서 배우셨나요.?" "나는 호북성 기주 황매현의 동(東) 빙무산(憑茂山)에 동선사란 절에서 공부하는 스님이요. 그 절엔 홍인대사르는 道 높으신 스님(5조 화상)이 계신데 제자 만도 천명이 넘지요 "나는 그곳에서 홍인 화상으로부터 ‘한 권의〈금강경〉을 손에 든 것만으로도 곧 견성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옛날 달마조사께서 멀리 천축국에서 오셔서 禪의 도리를 전하신 후 홍인대사가 5대 조사가 되셔 많은 납자들을 가르치고 계신다오. 대사는 늘 제자에게 이 금강경을 읽게 하시고 자기 스스로 自性을 깨치라고 일러주셨소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하며 禪을 닦는다오." 나무꾼은 그 말을 듣자말자 홍인스님과의 사이에 숙세(宿世)의 인연이 있음을 알게 된다. 스님 말씀에 더욱 감동돼 당장이라도 홍인대사께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슴만 답답하였다. 그의 마음을 꿰 뚫어 보았는지 스님은 측은한 표정을 짓더니 자비어린 소리로 물었다. 집에는 늙으신 노모가 계셔서 저는 갈수가 없답니다. 제가 집을 떠나면 그냥 굶어 돌아 가시게 되지요...." "사정을 알만 합니다. 마침 내게 은자 약간이 있으니 이걸 드리지요. 용기를 내십시요." "그래 얘야. 내걱정은 말고 가그래이." 황매산은 멀고 멀어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한달만에야 겨우 동선사에 닿을 수 있었다. 나무꾼은 홍인대사 앞에 나가 인사를 올렸다. "무슨일로 왔는가" "오직 부처짓기를 구하며 다른것은 고하지 않나이다.” 홍인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남방 출신의 오랑캐여서 불성(佛性)이 없거늘 어떻게 부처가 되려고 하는가?” "썩 물러가라. 이놈" 홍인조사는 나무꾼에게 호통을 쳤지만 그가 여지껏 기다리던 큰 법기(法器)임을 알았다. 나무꾼이 대답했다. “사람에게는 남쪽과 북쪽의 차이가 있겠지만 불성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나무꾼의 대답을 들은 홍인스님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느라고, <주위의 제자들 눈초리를 의식한 5조 홍인조사는 "가서 방아찧는 일이나 하거라." 고한다.>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렇게 대답하느냐”라고 꾸짖으면서 방앗간으로 보내어 주야로 방아를 찧고 장작 쪼개는 일을 시켰다. "예 스님" 새벽부터 밤까지 천명스님의 식량을 찧는 일은 여간 고달픈일이 아니다. 하찮은 시골뜨기 행자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거룩한 道心 즉 불성이 자라고 있었다. 8개월이 지난 어느날 홍인조사가 들렀다. "고생하는구나. 내 너의 불성을 인정하나 악한 무리들이 시샘하여 해칠까 염려하는 뜻을 짐작하겠느냐?" 얼마후 5조 홍인조사는 그의 법통을 전해줄때가 왔음을 알고 제자를 불러 모았다. 스님이 방앗간으로 보내진지 8개월 후 홍인스님은 문하의 수행자들에게 불법의 큰 뜻을 깨달은 게송(偈頌)을 지어서 보인 사람에게 가사와 법을 전하겠다고 말한다. "세상 사람의 생사문제가 크거늘 너희는 종일토록 복전만을 구하고 생사고해에서 헤어날 생각은 없는것 같구나.
너희는 각기 돌아가서 게송을 지어 오너라. 만약 깨친 사람이 있으면 의발을 전하여 6조 조사로 삼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