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광석면 석불보살 유래 |
신라-고려를 거치는 동안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우리나라 전역에는 미륵신앙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난다. 미륵부처님은 고통 받는 민초들의 귀의처이자 피난처였다.
마을마다 미륵부처님 한 분쯤은 모셨을 정도로 미륵신앙이 전국에 골고루 분포돼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들이 시대의 흐름 속에 사라지고 있다.
그 속에 얽힌 이야기도 그러한다.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항월3리에 모셔진 석불보살과 그곳에 깃들어 있는 이야기는 그래서 소중해 보인다.
부처님 위신력으로 호열자<콜레라>를 물리치
역병 창궐해 마을 사람들 죽자 老 스님 나타나 키 크는 미륵석불 모셔다 놓고‘기도하라’당부
지금도 매년 음력 1월2일 기해 마을제사 올려
옛날 우리나라에는 호열자(虎列刺, 콜레라)가 창궐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자 민심도 흉흉해졌다. 여기저기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자 나라에서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도 몰라 우왕좌왕했다. “이거 큰일 나지 않았는가?
이렇게 역병이 돌아도 나라에서는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야.” 백성들은 마을 입구에 새끼줄로 만든 금줄을 걸어 외부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다니는 일도 일체 하지 않고 오로지 집안에서만 하루하루를 보냈다. “호열자라는 병은 쉽게 전염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우리는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말고 꽁꽁 숨어 지내듯이 하자고.” 하지만 무서운 속도로 전국을 뒤덮은 호열자는 논산 항월리 마을에까지 퍼져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당황해 어쩔 바를 모르고 벌벌 떨었다.
시신을 치우기가 무섭게 다른 사람이 죽어 나가니 마을 뒷산에서는 호열자로 죽은 사람의 무덤이 늘어만 갔다. “허허, 이러다간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죽게 생겼어. 무슨 방도가 없을까?”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런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은 공포와 굶주림에 떨었다. 그런던 어느 날 항월리로 이름 모르는 노스님이 지나가게 되었다.
불심(佛心)이 많은 마을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차에 스님이 지나가자 승복을 잡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스님, 우리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실천해 온 착한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이 몹쓸 호열자가 창궐해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올려 우리 마을에서 호열자를 쫓아 내 주십시오.” 삿갓을 쓴 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을을 한 바퀴 눈으로 돌아본 뒤 대답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제가 이 마을에 깃든 액운을 쫓아 내 보겠습니다.”
이 한마디를 남긴 스님은 어디론가 휑하니 가 버렸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스님이 자신도 호열자에 걸릴까봐 도망을 갔다고 생각하고 스님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중생 위한다는 스님이 도망을 치다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것 또한 우리의 업보가 아니겠는가.”
마을 사람들이 자포자기해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스님이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라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스님 앞으로 달려갔다.
“스님, 돌아와 주셨군요. 우리 마을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은 차분하게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소납이 여러분들을 위해 의미 있는 것을 가지고 왔으니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마을 사람들은 다시 돌아온 스님에게 부처님 대하듯 예를 올리면서 귀를 기울였다.
“제가 마을 입구에 자그마한 석불보살님(미륵부처님)을 모셔다 놓았으니 여러분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그곳에 가서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시오.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오.”
이 말을 남긴 스님은 마을 입구 느티나무 아래에 작은 돌조각 하나를 세워 놓고는 사라져 버렸다. 아무도 희망의 메시지를 주지 않았던 터라 마을 사람들은 그저 감격하며 스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래, 스님이 우리를 지나쳐버리지 않는 걸 보니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것이야. 어서 느티나무 아래로 가 보세.”
마을 사람들은 우르르 느티나무 아래로 가 보았다. 그곳에는 손바닥만 한 돌조각이 세워져 있었다.
크기가 너무 작아 조금 실망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 돌조각이 마을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고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정성껏 마련한 공양물을 가지고 느티나무 아래로 갔다. 그곳에 제단을 만들어 각자 가져 온 재물을 올려놓은 뒤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석불보살님, 석불보살님. 저희들이 이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우리 마을에 창궐한 호열자를 어서 빨리 내쫓아 주옵소서.”
그렇게 며칠동안 기도를 올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자그마한 석불보살님이 조금 커져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이 보게. 석불보살님이 자라고 있어!” 또다시 며칠이 지나자 석불보살은 좀 더 커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석불보살은 1m가량 커졌고 바위 윗부분이 얼굴모양으로 변했다. 그 사이에 마을에 창궐했던 호열자는 서서히 사라져 평온을 되찾았다.
“그래, 부처님이 우리 마을을 외면하지 않으셨어.” 석불보살의 위신력으로 역병을 몰아 낸 마을 사람들은 더욱 정성을 쏟았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 호열자를 고치려는 사람들의 발길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석불보살에 기도한 사람들 모두가 호열자를 깨끗이 고쳐 돌아갔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야. 나라에서도 손쓰지 못한 일을 석불보살님이 해 냈단 말일세.” 호열자가 나라에서 모두 없어지자 사람들은 자신들의 개인 소원을 빌기 위해 석불보살을 찾아왔다.
그 중에서도 아들을 갖지 못해 고통 받았던 여인들이 석불보살을 찾아 기도해 소원을 이뤘다. 그러자 ‘아들을 점지해 주는 영험있는 부처님’으로 알려지면서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호열자를 물리친 사건을 기념해 매년 음력 1월2일이면 석불보살에 재물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때가 되면 제사를 관장하는 제주(마을 사람들은 유사라고 부름)는 일체의 육식을 금하고 몸을 정갈하게 한다. 제사가 있는 날은 집집마다 장독대나 대문 앞에 황토를 올려 놓고 액운을 물리치는 의식을 행한다.
*논산=여태동 기자 *이시영 충남지사장
찾아가는 길 / 1) 서울에서 갈 때는 천안-논산 민자고속도로에서 논산 나들목으로 나와 연무읍을 거쳐 1번 국도로 논산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노성대교를 지나 윤증선생 고택 쪽으로 가다가 우측 항월리 방면으로 빠져 300여m를 올라오면 항월3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큰골마을(대동부락)을 찾아 들어가면 마을입구에 느티나무 아래 석불보살이 서 있다.
2)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올 때는 서대전 나들목을 나와 1번 국도를 거쳐 논산으로 들어와 23번 국도를 타고 노성대교를 지나 윤증선생 고택 쪽으로 가다가 우측 항월리 방면으로 나오면 된다.
참고 및 도움 / <논산시지>(논산시지편찬위원회, 2005), 광석면 항월3리 주민 남팔성(60)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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