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본사와 사찰 벽화 이야기

해인사 벽화 이야기= 1

백련암 2009. 11. 13. 22:46

 

=해인사 창건 벽화=

 

순응, 이정 = 해인사 창건 이야기

 

중국 양무제 때 지공화상께서 임종에 동국답산기라는 책을 제자들에게 건네주면서「내가 죽은 얼마 후에 신라에서 두 명승이 찾아와 법을

구할 터이니 이 책을 전하라」 유언하시고 열반하셨다.
그 뒤에 과연 신라에서 순응과 이정 두 스님이 와서 법을 구하거늘  지공화상의 제자들이 반기며 스승의 유언을 말씀드리고 동국답산기를 전했다.


두 스님은 너무나 감격하여 지공화상의 탑묘(塔墓)에 찾아가「사람에게는 고금(古今)이 있을지언정 진리에서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하는 가르침을

생각하며 일주일을 밤낮으로 기도하며 법문을 청하였더니 탑속에서 지공화상이 모습을 나타내어 두 스님의 구도심을 찬탄하고 의발(衣鉢)을 전해주면서

이르기를「너희나라 우두산(지금의 가야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그곳에 대가람을 창건하라」 하시고는

다시 탑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응, 이정 두 스님은 탑묘를 향하여 다시 한번 예배드리고 고국 신라로 돌아왔다


중국에 가서 구법의 길을 마치고 고국 신라에 돌아온 두 스님은 바로 우두산을 찾아 나섰다.
맑은 물이 흐르고 산세가 빼어난 곳에 이르러 그곳에 자리를 깔고 풀밭에 앉아 선정(禪定)에 들었더니 문득 이마에서 광명이 발하여 하늘로 뻗쳐올랐다.
그때 마침 나라에서는 제40대 애장왕의 왕후께서 몹쓸 명을 얻어 백방으로 약을 써봐도 효험이 없자 신하들을 널리 보내어 도승(道借)을 구하게되었다.
한 신하가 우두산 근처를 지나다가 하늘에 뻗쳐 오르는 신령한 빛을 찾아 숲길을 헤쳐가니 선정삼매 속에서 방광(放光)하는 두 스님을 뵙고

예를 올린 후 여기까지 찾아오게 된 내력을 이야기하자

오색실을 내어주면서 실의 한끝은 궁전 뜰 앞의 배나무 가지에 매고 한끝은 병실의 문고리에 매어두라고 일러주었다.


신하가 돌아가서 왕에게 사실을 말하고서 두 스님이 시키는 대로 시행해 보았다. 그랬더니 궁전 뜰 앞의 배나무가 말라 죽으면서 왕후의 오랜 병이 완쾌되고

소생하였다.  애장왕과 왕후 그리고 여러 신하들이 크게 기뻐하고 또한 놀라와 하였다. 왕은 은혜를 크게 느끼고 친히 우두산에 오셔서 두 스님을 찾아 뵙고

 그 자리에 대가량을 창건하니〈신라 40대 애장왕 3년(802) 임오(王午) 10월 16일〉 가야산 해인사의 시초이다.

 

 

 

= 관음 , 대세지 보살 =

  아득한 옛적 인도 남쪽에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에 장나(長那)라는 부자가 예쁜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 근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몇 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는 것이었다.
하루는 부인이 제단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이시여! 옥동자 하나만 점지하여 주시옵소서.」하며 지극정성으로 기도하고 빌었다.

기도를 잘 모신 영험인지 그 후로 태기가 있어 옥동자를 낳고 삼년이 지나 또 한 아들을 낳게 되었다.
장자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잔치를 베풀어 이웃사람들을 대접하였다.
또 예언가를 청하여 두 아이의 장래운명을 말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예언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아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다음「두 형제는 용모는 단정하고 고우나 부모와의 인연이 박해서 일찍 부모를

여윌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이런 연유로 해서 형은 조리(早離), 동생은 속리(速離)라고 이름하였으니 일찍이 부모를 여윈다는 뜻이다.

 

그 뒤 몇 해가 지나 형은 열살, 동생은 일곱살이 되었는데 그해 삼월에 어머니는 홀연히 병이 들어 백약이 무효로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어 갔다.
어머니는 두 아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조리야! 속리야! 엄마는 아무래도 병이 낳을 것 같지 않구나 사람이 한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누구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죽는 것은 무서울 것이 없다마는 너희 어린 형제를 남겨놓고 떠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몹시 아프고 쓰리구나.

 너희들은 내가 죽은 뒤라도 서로 도우며 착하게 살기 바란다.」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두 아들은 식어가는 어머니의 시체를 붙들고 통곡하였다.

장자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으로 장사를 후히 지내고 두 아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하며 몇 년을 살았을 때였다. 여러 사람들의 권유와 소개로

후처를 맞이 하였는데 새로 들어온 부인은 죽은 부인과 용모가 비슷하여 두 아들도 엄마가 다시 살아온 것처럼 좋아하였다.

새로 온 부인도 두 아이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귀엽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그런데 다음해 큰 흉년이 들어 들판의 곡식을 하나도 수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장자는 집안을 새 부인에게 맡기고 이웃나라에 가서 식량을 보물과 바꿔오기 위해 먼 길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부인은 「만일 영감이 안 돌아오면 저 아이들은 어떻게 키울 것인가 또 내가 저 아이들에게 상속해 줄 것이 아닌가. 두 아이는 장차 큰 장애가

되겠구나.」이렇게 생각한 부인은 아이들을 없애려고 뱃사공을 매수하여 두 아이들을 멀리 갖다 버리게 하였다.
영문도 모른 채 낮선 무인도에 버려진 두 아이들은 좁은 섬 안을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부모를 찾았으나 끝내 섬에는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두 형제는 목이 터져라고 엄마 아빠를, 그리고 뱃사공 아저씨를 불렀지만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조리와 속리 두 형제는 마침내 겹친 피로와 굶주림을 못 이겨 가엾게도 쓸쓸한 무인도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죽음에 임박해서 아우 속리가 사람들에게 속아서 비참하게 죽게 되는 운명을 한탄하자 말없이 듣고 있던 형 조리는 아우를 위로하며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

「나도 처음에는 세상을 저주하고 사람을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차라리 우리가 다음 세상에 태어날 때는 이 고뇌의 체험을

인연으로 삼아서 우리와 같이 비운(悲運)에 우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자. 다른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위로를 받는 길인 것을 일찍이 배우지

않았던가」이 말을 듣던 아우도 비로소 형의 말뜻을 알아듣고 밝은 얼굴이 되었다.


이리하여 형과 아우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거룩하고 크나큰 서원을 세웠다.
「우리는 여기서 죽더라도 내생에는  성현이 되고 보살이 되어 우리와 같은 처지에 놓인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 주자. 또 세상에는 빈곤하고

병든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그들에게 의복과 양식을 주고 온갖 병을 치료해 주자....」 하는 등의 서른 두 가지의 서원을 세우고

어린 두 형제는 서로 얼싸안고 숨져 갔다.

 

무인도에서 외롭게 죽어간 두 형제의 얼굴에는 조용하고 밝은 미소가 어리어 있었다고 한다.
이 섬의 이름이 보타락가산이며 형은 관세음보살이 되고 동생은 대세지보살이 되었다고 한다. 

 

 

 한산과 습득의 이야기인 소가된 스님  


한산 습득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으나 당나라 정관(貞觀 :당 태종의 연호 627~649)년 간에 천태산 (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 살았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당시 국청사에는 풍간선사라는 도인이 계셨는데, 세상에서는 국청사에 숨어 산 세분의 성자라는 뜻에서

이들 세분을 국청삼은(團淸三隱)이라고 불렀다. 이 분들을 성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세분이 모두 불보살(佛菩薩)의 화현이기 때문이다.

 

즉 풍간스님은 아미타불의 후신이요,   한산은 문수보살,  습득은 보현보살의 화현이라 한다.


비록 이 세 분이 불보살의 화현이라고는 하지만 이 분들과 같이 살던 사람들은 이들의 기이한 언행을 이해하지 못해 멸시하고 천대하기 일쑤였었다.

한산이란 이름은 국청사에서 좀 떨어진 한암(寒嚴)이란 굴속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늘 다 떨어진 옷에 커다란 나막신을 신고 다녔으며 때가되면 국청사에 와서 대중들이 먹다 남은 밥이나 나물따위를 얻어먹곤 했다.
가끔씩 회랑을 천천히 거닐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리를 지르거나 하늘을 쳐다보며 욕을 하곤 해서 절에 있는 스님들이 작대기를 들고 쫓으면

손벽을 치고 큰소리로 웃으며 가버리기도 했다.


습득은 풍간스님이 길을 가다가 강보에 쌓여 울고 있는 것을 주워다 길렀다고 해서 그 이름을 습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부엌에서 그릇을 씻거나 불을 때주는 일을 했는데 설거지를 하고 난 뒤 남은 밥이나 음식 찌꺼기를 모아 두었다가 한산이 오면 내주곤 했다.
한번은 주지스님이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아래 목장을 지나는데 한산 습득이 소떼와 더불어 수작하고 있음이 보였다.


먼저 한산이 소떼를 향하여 「이 도반들아 소생활 맛이 어떤가? 시주밥을 먹고 놀더니 기어코 이 모양이 되었구나」 하더니

「오늘은 여러 도반들과 함께 무상법문을 나눌까 해서 왔으니 내가 호명하는 대로 이쪽으로 나오라. 

 

첫번째로 동화사 경진율사」하고 호명하니

검은 소 한마리가 ‘음매-에’ 하고 한산 습득의 앞으로 나오더니 앞발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는 한산이 지적한 장소로 가는 것이었다.


「다음 천관사 형지법사」 이번에는 누런소가 또 ‘음매-에’ 하고 대답하더니 절을 하고는 첫번째 소가 간 곳으로 걸어가는게 아닌가

 

이렇게 하기를 30여회. 백여마리의 소떼중에 30마리는 스님들의 후신이다. 말하자면 시주밥 먹고 공부 않은 과보호 빚을 갚기 위해 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지스님이 모골이 송연하여 쫓기듯 절로 올라가며 혼자 중얼거렸다.「한산 습득이 미치광이 인줄 알았더니 성인의 화신이 분명하다」


일찌기 여구륜(閒丘亂)이라는 벼슬아치가 이 고을의 자사로 부임했는데 병이 들어 앓게 되었다.  그런데 이 병이 무슨 병인지 좋은 약, 용한 의원

모두 소용없는 이른바 백약이 무효였다. 이를 안 풍간스님이 찾아가 뵙기를 청하자, 여구륜은 자기의 병세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는 풍간스님이 깨끗한 그릇에 물을 받아 주문을 외면서 그에게 뿌리자 언제 아팠더냐  싶게 금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는 것이었다. 

자사가 크게 사례하고 설법해 주기를 청하자 풍간스님은 굳이 사양하며「나 보다는 문수, 보현께 물어 보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두 보살께서는 어디에 계시온지 ?」 「국청사에서 불 때 주고 그릇 씻는 이들이 그들입니다」라고 거듭 묻는 말에 대답하고는 유유히 사라져 가 버렸다.
이에 자사가 예물을 갖춰 국청사로 한산과 습득을 찾아 갔다. 마침 한산과 습득은 화로를 끼고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간 자사가 절을 올리자 무턱대고 꾸짖는 것이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본 스님이 깜짝 놀라며「대관(大官)께서 어찌 미치광이들에게 절을 하십니까?」하고 말하자 한산이 자사의 손을 잡고 웃으며

「풍간이 실없는 소리를 지껄였군. 풍간이 아미타불인줄 모르고 우릴 찾으면 뭘하나?」라는 말을 남기고 문을 나선 뒤에는 다시 절에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여구륜이 못내 아쉬워 옷과 약등의 예물을 갖추어 한암굴로 다시 찾아 갔다. 예배를 올리고 말씀을 기다리는데 「도적놈아! 도적놈아!」라는

말을 남기고 한산 습득이 굴속으로  들어가자 돌문이 저절로 닫기는 것이었다.


이윽고 「너희들에게 이르노니 각각 노력하라」라는 말이 들리고는 돌문은 완전히 닫혀져 버렸다.
여구륜은 성인을 친견하고도 더 법문을 듣지 못한 것을 섭섭히 여기며, 숲속의 나뭇잎이나 석벽, 혹은 촌락의 벽등에 써놓은

세분의 시 (詩) 약 300수를 모아 책을 엮었다.

이 시집을 삼은집(三隨集)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한산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전해오고 있다.


(해인사 약수암 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