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본사와 사찰 벽화 이야기

해인사 벽화 이야기= 2

백련암 2009. 11. 13. 23:42

 

 

대장경 이운(1)

 

고려 고종 23년(1236) 몽고병의 침입을 국민의 단합된 힘과 부처님의 가호로 물리치기 위해 당시의 천도지(遷都地)인 강화도에 대장도감(大藏都監)

본사(本司)를 두고 진주, 남해에 분사(分司)를 두어 대장경판을 새기는데 전 국력을 쏟아 고종 38년(1251)까지 16년간에 걸쳐 완성하여

강화도에 판당(板堂)을 짓고 봉안하였다가 다시 강화읍 남쪽에 있는 선원사(禪源寺)에 옮겨 모셨던 팔만대장경판은 언제 어떠한 경위를 거쳐서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옮겨 모시게 되었을까?


이 문제는 4가지 정도의 사실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 가야산 해인사는 대장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각국사 의천이 주석(住錫)하던 인연깊은 곳이라는 사실과
둘째, 고려말과 이조초의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 앞에 강화도는 이미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
셋째, 해인사가 대장경판을 보관하는데 지리적 조건의 우수성과 가야산이 명산이어서 신령스럽게 믿어진 사실
넷째, 해인사는 교통이 불편한 심산유곡이어서 아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일치되어 조선 태조 7년(1398) 5월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서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임시로 옮겨 모셨다가 다시 해인사로 옮기게 되었다.


요즈음 8톤 트럭 35대분이 훨씬 넘는 대장경판을 사람의 힘만으로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 옮기는 일은 온 국민이 힘을 기울였을 것이다.
운반행렬의 맨 앞에는 동자가 향로를 들고 길을 맑히면 많은 스님들이 독경을 하며 길을 인도하고 그 뒤로는 소중하게 포장한 경판을

소달구지에도 싣고, 지게에도 졌는가 하면 부녀자들은 머리에 이고 팔만대장경판의 정대(頂戴) 공덕과 부처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서울에서 해인사까지 팔만대장경판의 운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일설에는 서울에서 한강에 배를 띄워 대장경판을 싣고 해로(海路)를 통해 낙동강 줄기인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개포마을에 배를 대고

해인사까지 운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개포마을의 예전이름이 경(經)을 풀었다는 의미에서 개경포(開經浦)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태조 7년 (1398) 5월에 시작된 경판의 대이동은 이듬해 정종 원년(1399) 정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인사에 옮겨 모셔져, 70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습기나 좀이 생기지 않고 뒤틀리지도 않았는데, 사용한 목재는 강화도에 좋은 나무가 없어 남해지방의 거제도, 완도, 제주도 등지에서 많이 생산되는

자작나무(白樺木) 원목을 베어 바닷물에 3년간 담갔다가 꺼내어 판을 짜서 다시 소금물에 삶아서 그늘에 3년간 말린후 양면에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로

 양각하고 방충을 위하여 옻칠을 하였다.


경판은 모두 81340판인데 양변에 새겨져 있어 162680연으로 한 면에 글자가 322자 씩이나 글자 수만 해도 52382960자로 원고지로 치면 30만장쯤의

분량이 된다.  경판 1창당 평균 무게는 약 3.5kg이며 걸이는 67cm, 너비 23 cm, 두께 3cm로 사각이 뒤틀리지 않도록 각목(角木)으로 마구리를 달고

이음새는 동제(鋼製)로 장식하였다.


해인사에 봉안되어있는 팔만대장경판은 부수(部數)로는 1516부요 책으로 엮으면 6815권으로 하루 1권씩 읽는다고 해도 18년이상 걸리는 방대한 양이다.


여기서 또한 특기할 것은 온 국토가 몽고병에 짓밟히고 강화도에 피난한 상태에서 대장경판을 새기기 위해 원고를 수집하고 사본을 정리하면서 교정하고

조판하는 일도 짧은 시일에 이뤄질 수 없거니와 판목(板木)을 다듬고 경을 쓰고 글자를 새기는 이 모든 일이 16년의 세월에 이루어 졌다는 것은 불가사의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팔만대장경판을 새기는 불사(佛寺)에는 조정대신과 전국민의 일심단합된 협조 아래 몇 백명의 명필과 수천명의 조각사가

동원되었으리라 상상하지만 경판의 글자가 오자(誤字)나 탈자(脫字)없이 정자로 쓰여지고 꼭 한 사람의 필적같이 분담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경탄하는 바이다.


특히 지금까지 세계에 남아 있는 30여종의 대장경판 중에서도 고려대장경만큼 체제가 광범위하고 부수가 완비하며 교정이 엄밀한 것은 그 유를

찾아볼 수 없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이요, 우리 조상들의 호국의 얼이 깃든 팔만대장경판은 나라의 보배(國寶)일 뿐만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법보(法寶)이다.


오늘날의 세계에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야말로 사람답게 살고자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지혜롭고 자비롭게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주는 문헌이라

사실을 생각할때 가장 풍부한 불전(佛典)의 원판(原板)이 소장된 해인사야말로 한국의 법보사찰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인류의 성지(聖地)가

될 것임을 굳게 믿는 바이다.

 

 

 

보경당 = 인생(2)

 

끝없이 황량한 벌판에 한 나그네가 가고 있었다. 가도 가도 인가는 보이지 않고 길도 없는 벌판이었다.

그러한 나그네 앞에 한 마리의 사나운 코끼리가 나타나 달려 오고 있었다.

산더미같이 큰 코끼리가 단번에 밟아 죽일 기세로 달려옴으로 이 나그네는 살 구멍을 찾아 달아났다.

무작정 달아난다고 해서 코끼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겁에 질려 죽을 힘을 다해서 도망치던 나그네는 다행히도 한 우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그 우물은 빈 우물이었고 그 우물가에는 한 줄기의 넝쿨이

우물 안으로 내리 뻗어 있었다. 코끼리에게 쫓겨 어쩔 줄을 모르던 그 나그네는 급히 나무뿌리를 타고 우물 안으로 들어가 나무뿌리에 매달려 몸을 숨겼다.
당장에라도 밟아 죽일 듯이 뒤쫓아 왔던 코끼리는 좁은 우물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기에 우물 주변을 맴돌 수 밖에 없었다.
코끼리의 위험에서 몸을 피할 수 있게 된 나그네는 나무뿌리에 매달려 우선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우물 속을 휘둘러본 나그네는 소스라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윗쪽으로 쳐다보니 검은 쥐 흰 쥐 두 마리넝쿨의 윗 부분을 갉아 먹고

있었다.  나그네가 생명처럼 매달려 의지하고 있는 그 나무뿌리를 두 마리의 쥐가 갉아 먹고 있으니 오래지 않아 그 나무뿌리는 끊겨 밑바닥으로

떨어질판이었다. 그리고 사방의 우물 안 벽에는 네 마리의 독사가 나그네를 향하여 독을 뿜으며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고,

또 아랫쪽 우물 밑바닥에는 무서운 독룡이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겁에 질린 나그네가 급히 우물 밖으로 나갈려고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는 보이지 않고

  우물 입구쪽에 연기가 자욱하고 불꽃이 튕겨 오르는것이 보였다. 들불이 일어나 휩쓸고 있는 것이었다.

 

윗쪽으로도 아랫쪽으로도 또 옆으로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한 줄기 덩쿨에만 의지하고 매달려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머리 위에서 두 마리의 쥐가 덩쿨을 감아 먹고 있으니 언제 끊겨 독용이 있는 밑바닥으로 떨아지게 될지 몰라 나그네는 불안에 떨고있었다.

마침 그때 다섯 방울의 꿀물이 나그네의 입술에 똑 똑 떨어져 입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나그네는 그 달콤한 꿀맛에 지금까지의 모든 두려움과 괴로움을 잊고 꿀물이 떨어진 쪽을 쳐다 보았다.

거기에는 꿀벌집이 있었다. 나그네는 입을 벌리고 꿀물이 떨어지기를 바랐다.
그때 나무가 흔들리는 바람에 꿀벌들이 놀라서 날아다니며 나그네의 얼굴과 머리를 쏘았다.
나무뿌리를 잡고 있는 손을 놓는다면 밑으로 떨어져 독룡에게 먹히고 말 것이며, 벌을 피하여 머리를 휘젓고 몸을 뒤틀다가는

네 마리의 독사에게 물릴 것이다.  성난 코끼리와 들불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다. 나그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지경이다.



이 이야기는 사람이 사는 참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가르침이다. 이 비유에 나오는 나그네는 바로 우리들 인생이며,

황량한 벌판은 무명의 긴밤(無明長夜)에 비유하고     코끼리는 무상(無常)에,     우물은 생사의 험난한 이 세상에,  

한줄기 덩쿨은 생명에,     검은 쥐 흰 쥐 두 마리는 낮과 밤에,     덩쿨을 쥐가 갉아 먹는 것은 순간순간 늙어가는 것에

네 마리 독사는 우리의 육신을 구성하는 사대(四大; 흙, 물, 불, 바람의 네가지 요소)에,

다섯 방울의 꿀은 오욕(五欲; 재물, 애욕, 음식, 명예, 수면 등의 다섯가지 욕망)에,

벌은 삿된 생각에,     들불은 노병(老病)에,     독룡은 죽음에 각각 비유한 것이다.


위의 이야기는 불설비유경(佛說醫輸經)에 나오는 인생에 대한 비유이다.
우리들 어리석은 안생은 삶의 참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잘못되고 그릇된 생활에 흠뻑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그것은 마치 우물속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을 잊고 꿀물 빨아먹는 데에 정신을 잃는 나그네와 같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