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본사와 사찰 벽화 이야기

조계종단 교구 본사 = 마곡사.수덕사. 직지사

백련암 2010. 7. 2. 15:29

대한불교조계종 제 6교구 본사 마곡사(麻谷寺)

 

=마곡사 5층탑 =  

 

태화산(泰華山) 천년고찰 마곡사(麻谷寺)의 연혁 및 문화재

마곡사는 길지(吉地)에 자리잡은 유서깊은 고찰이다. 마곡사는 643년 자장스님이 창건했다는 설도 있고, 840년 보조 체징 스님이 창건했다고도 전한다.

창건이후에는 847년 사굴산문의 개창자인 범일국사, 고려의 도선, 보조국사 지눌, 조선시대 각순스님등에 의해 중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곡사 창건이후 가람은 그 사역에 있어 희지천을 사이에 두고 교화가람지역과 수행가람지역, 즉 북원과 남원으로 양분화된 특징을 가지며,

선교양종 대본산으로서의 규모를 보여주고 있다. 마곡사의 창건연대나 사력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지리지나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우나

사찰내의 유적과 유물을 고려하면, 적어도 고려시대에 이 사찰이 조성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적기나 창건기는 살펴보기 어렵다.
다만 사찰에 대한 기록은 1851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필자미상의 태화산 마곡사 사적입안이 있을 뿐이다. 

이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당정관 17년(643)[다른기록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9년(640)에 신라의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사명유래(寺名) = 麻谷寺의 寺名에 관해 의견이 분분하다. "麻谷寺"라는 절 이름의 연원에 대해 3가지 설이 있다.

 

1번째 = "청양 장곡사"와 이곳 "마곡사"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예산 안곡사"의 셋을 이지역에서는 삼곡사라고 불렀다 하니

            "긴골" "삼골" 이란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장곡" "마곡"으로 단순히 바꾼 것이 절 이름의 연원이다라는 설과

 

2번째 = 이 절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이 설법 전도할 때 모인신도가 삼밭에 갈대 같다고 하여 마곡사라 지은 것이라 한다라는 설과

 

3번째 = 성주 산문의 개창자인 낭혜 무염이 중국 마곡사에서 법을 이어 왔다고 하여 마곡사라는 별칭이 생기게 되었다는 설등 3가지 설이 있다.  

 

*찾아가는길  ◈마곡사 가는 교통편 =  동서울 고속터미널에서(2호선 강변역) = 공주버스터미널하차

                                      공주버스터미널에서 = 마곡사까지 7번시내버스 종점하차 (06:00∼20:30, 40분소요)

 

 

 

        대한불교조계종 제 7교구 본사 수덕사(禪之宗刹 德崇叢林 修德寺)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 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낭자의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

하였다는 전설이다.

 


수덕사는 덕숭산에 자리잡고 있는 절로,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 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 나라에

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4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양식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

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寺) 등

 12개 사찰이 전하지만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제사찰인 수덕사의 창건에 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수덕사 경내 옛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와당은 백제시대 창건설을 방증할 수 있는 자료이다. 문헌에 수덕사가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三國遺事)' 와 '속고승전(續高僧傳)'으로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이 수덕사에서 주석하며 법화경 (法華經)을 지송하고 삼론(三論)을

 강(講)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 수덕사의 사격(寺格)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554~597년(백제 위덕왕) - 지명법사가 수도 사비성 북부에 수덕사를 창건.
601년(백제 무왕 2) - 혜현법사가 수덕사에 처음 주석하며 <법화경>을 독송하고 <삼론>을 강론함.
627년(백제 무왕 28) - 혜현이 58세로 입적함.

 

찾아가는길 = 기차 = 장항선 용산역 에서 = 홍성역하차 (2/10분소요)

수덕사 가는 교통편 = 홍성버스터미널에서 시내버스 탑승 =  수덕사 하차 **택시 =\12000원(20분소요)

 

 

 대한불교조계종 제 8교구 본사 직지사

 

  

     

=비로전=


고려 태조때 능여 조사에 의해 처음 세워진 비로전은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므로 천불전이라고 한다.
 임진왜란떄 병화를 모면한 3동의 건물중 하나로 근년에 개수하였다. 정면 7간,측면 3간의 맞배지붕이며 크기는 53평에 금단청을 하였다.
천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성되었으며 과거,현재,미래의 삼천불 중 현겁 천불을 모신 것으로 1992년 개금 불사가 완료되었다.

또한 비로전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측백나무가 있다.
(직지사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자료입니다 )

 

한국불교 1600년의 역사와 그 세월을 같이하다. 서기 418년 아도화상에 의해 세워진 1천 6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고

우리민족의 가슴속에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심어온 직지사는 아름다운 경내가 뭇 사찰중에서도 으뜸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신라시대인 418년(눌지마립간 2)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곳에 절을 지으라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과

 성주산문의 조사(祖師) 무명대사가 머물렀던 심묘사에 부속된 절로 남종선의 가르침인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을

표방한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이 절을 세울 때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다고 해서 직지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645년(선덕여왕 14) 자장율사가 중창한 이래로 930년(경순왕 4), 936년(태조 19)천묵대사(天默大師)와 능여대사가 각각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출가하여 득도한 절로도 유명하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1735 중건)을 비롯하여 천불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1661 창건)·약사전·극락전·응진전·명부전·사명각(泗溟閣) 등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동6각사리함(국보 제208호), 석조약사불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앞3층석탑 2기(보물 제606호),

비로전앞3층석탑(보물 제607호), 대웅전삼존불탱화 3폭(보물 제670호), 청풍료앞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등이 있다.

 

황악산(黃岳山) 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직지사는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본사(本寺)로부터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경부선(京釜線)을 비롯하여 태백산(太白山), 삼척(三陟)등 동해방면(東海方面)으로도 연결되는 한반도(韓半島) 교통의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길상지지(吉祥之地)로 전해져 내려오는 곳에 직지사는 정좌(定座) 하고 있다.

 

황악산은 대체로 3대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능여계곡(能如溪谷), 내원계곡(內院溪谷), 운수계곡(雲水溪谷)이 그것이다.

능여계곡에는 그 옛날 능여 대사(能如大師)가 황악산 계곡의 원천(源泉)을 찾았다는 멱원대(覓源臺)를 비롯하여 많은 대(臺)와 소(沼)가 있고,

두 곳의 폭포와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은 능여천(能如泉)과 법수천(法水泉) 등의 약수가 있어 더욱 유명하다.

 

찾아가는 길 = 기차편 =

 서울역 출 = 김천역 하차 = 김천에서 버스로 직지사행 탑승할 것 "꼭" 직지사행 확인할 것(추풍령으로 가는버스도 있음)

                                        김천에서 택시로 직지사행 = 약 \1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