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통도사의 전설 = 2

백련암 2010. 5. 3. 03:43

통도사

 

 

금강계단

신라 선덕여왕 재위중인 64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로 꼽히는 큰 절이다.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와 금란가사를 봉안하여 불보(佛寶)사찰이라 불린다

신라 때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를 하고 부처의 숭고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부처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 꿈에 훌륭하게 차려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주었다.

"동국에 부처님을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신라의 어느 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자장율사스님께서는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양산읍에서 좀더 들어가는 영축산에 이르러 보니 큰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변이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있었다.

자장율사스님께서 인근의 경치를 살펴보니 송림이 울창하고 산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둘러쳐져 있었으며 검푸른 못물은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했다. 율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다시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유명한 통도사이다.

 

*금강계단(金剛戒壇)

통도사 창건에 기본정신은 부처님의 사리(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금강계단)에 있다.

이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사 후 가장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 하기 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 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을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이 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선덕왕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율사스님께서 당에서 모시고 온 불두골(佛頭骨), 불치(佛齒), 불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는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다.

자장율사스님께서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 알,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 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축서산(鷲栖山 : 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을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리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귀국하여 선덕여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셨다.

그런 뒤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설치 하셨다.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통도사가 창건되기 이전의 그 땅은 매우 큰 연못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경내 상노전 구룡지와 하노전 못의 수면을 보면,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속전(俗傳)에 의하면 자장율사스님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굳게 맹세하였으므로 자장율사스님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을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불과 너댓 평의 넓이에 지나지 않으며 깊이 또한 한 길도 채 안 되는 조그마한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이 와도 전혀 수량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금강계단의 역사

금강계단은 연못을 메우고 건립한 통도사의 대웅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이며 가람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실로 통도사는 이 금강계단이 있음으로 해서 삼보 사찰 가운데 불보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라는 말은 금강석(金剛石), 곧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어떤 물건이라도 금강석을 깨뜨릴 수 없지만 금강석은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서는 이러한 금강석의 강인한 특징을 반야(般若)의 지혜를 표시하는 은유로 써왔다.
 

곧 반야의 지혜로 모든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끊어 버리므로 그 반야의 지혜가 금강석과 같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이 삼학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계율의 실천에 있다. 계율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계율이란 그릇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깨질 우려가 항상있다. 그래서 계의 그릇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삼학의 결정체이며 반야의 화현(化現)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며 그 사리를 모신 계단은 금강계단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장율사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기 이전에 철저한 계율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는 그의 철저한 계율의 정신은 문수보살로부터 사리와 가사를 받은 사실로 나타났고 이 불신(佛身)이 통도사에 안치됨으로써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일은,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므로 통도사는 계율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오늘에 와서도 그 금강계단은 승려들의 유일한 정통을 잇는 수계(受戒)의 장소로 되어왔다.

불법에 귀의함에 있어서 첫째 요건은 계율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불문(佛門)에 들어서기 위해서 비구는 250가지 계율인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하고 재가신도는 오계(五戒)를 받으므로써 참다운 불자(佛子)로서의 일보를 걷게 되는 것이다. 비단 출가자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일상 생활에는 항상 계율을 지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승려는 승려대로 청정한 모습으로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하며 재가신도는 그 나름대로 철저한 윤리의식 속에 이 사회를 정토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율이 단순한 금계(禁戒)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겠다 하는 보살계(菩薩戒)로 확산될 때 대승불교의 참된 이상(理想)이 이땅에 펼쳐지리라고 본다. 이것이 바로 자장율사스님께서 이 땅에 금강계단을 설치한 참된 의미이다.

 
이제 금강계단의 초창과 중건사실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중수 연대 화주(化主) 문헌(文獻)
초창 신라 선덕왕 15년(646) 자장율사(慈藏律師) 삼국유사
제 1 중수 고려 우왕 5년(1379) 월송대사(月松大師) 동문선 제73권
제 2 중수 조선 선조 30년(1603) 의령대사(儀靈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3 중수 조선 효종 3년 (1652) 정인대사(淨仁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4 중수 조선 숙종 31년(1705) 성능대사(性能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5 중수 조선 영조 19년(1743) 산중제덕(山中諸德) 불종찰약사
제 6 중수 조선 순조 23년(1823) 홍명선사(鴻溟禪師) 금강계단중수기
제 7 중수 조선 헌종 4년(1838) 산중제덕(山中諸德) 불종찰약사
제 8 중수 조선 고종 9년(1872) 구봉화상(九鳳和尙) 불종찰약사
제 9 중수 서기 1911 구하선사(九河禪師) 금강계단 현판
 
▣ 고려시대의 금강계단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초에 사리와 가사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곧 민간에 유포된 당시의 이야기로는 고려초의 관직을 뜻하는 안렴사(按濂寺)가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뚜껑을

들어내고 사리를 들여다 보니 처음으로 긴 구렁이가 사리를 보관한 석함(石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 뒤로는 감히 돌뚜껑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때인 고종 22년(1235)에 상장군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돌뚜껑을 들어내고 예를 표했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공(庾公)이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한다.

그 후, 1264년 원나라 사신들과 여러 사람들이 와서 그 돌함에 예배드리고 사방의 운수승(雲水僧)들이 몰려와서 예참했다 한다.

또한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의 지공(指空)스님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배하는 것과 금강계단의 사리와 가사에 참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고, 그는 1326년 고려에 와서 금강산에 머물면서 계를 설하고,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여 가사와 사리를 친견할 수 있는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지공은 고려에 들어올 때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되는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最上乘無生經)』목판본이 통도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생계경』이란 “모든 중생이 유무(有無)와 성상(性相)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일체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법리(法理)를 증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377년과 1378년에 와서 계단은 큰 수난을 받게 되었다.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동해변에 왜적이 침탈이 빈번해질 때였다. 당시의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 대사는 우왕 3년(1377)에 왜적이 내침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1379년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다.

 
▣ 조선시대의 금강계단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금강계단은 또다시 왜적에 의해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왜적은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靈骨)을 탈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히도 부산 동래에 사는 백옥(白玉)거사가 왜인의 포로로 잡혔다가 그 사리와 영골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넣어 은사이신 금강산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스님은 “온 국토가 침탈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고 하면서 한 함은 돌려 보내고 나머지 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葛盤寺)에 봉안하게 했다.

사명대사는 휴정대사의 명을 받고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 뒤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전해오기까지 금강계단은 계율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다해 왔다. 그 가운데 경봉스님은 아직도 우리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대선사이다.

그는 1927년 통도사의 13개 암자 가운데 선원(禪院)으로 유명한 극락암(極樂庵)에서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로 스님은 그의 문하(門下)로 찾아오는 수많은 선승들을 지도하여 극락선원을 명실공히 한국에서 제일가는 선실(禪室)로 만들었다. 스님은 수행승이나 불교학자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모든 이에게는 자상하여 공경을 받는 통도사가 낳은 위대한 선사였다.

 

1.불사리의 정신

통도사를 한국 불교의 으뜸(佛之宗家)이자 가장 큰절(國之大刹)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금강계단에 모심으로 인하여 대웅전에는 부처님을 형상화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통도사에 봉안된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는 자장율사스님께서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모셔온 것이다. 이때 당나라 황제가 하사한 막대한 양의 비단과 채색옷감, 대장경 400권, 불교용 깃발(幡幢), 꽃으로 장식된 가리개(花蓋) 등을 함께 가져와 통도사를 창건하였다. 따라서 통도사는 불사리와 가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을 봉안한 사찰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통도사가 위치해 있는 영축산(靈鷲山)은 원래 석가모니 당시 인도 마가다국(Magadha) 왕사성(Rajarha)의 동쪽에 있던 산 이름이다.

이 산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여 많은 중생을 구제하였고, 이러한 광경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하여, 불교의 가장 감동적인 장면으로 추앙받고 있다.

따라서 자장율사스님께서 이곳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절 이름을 통도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산의 모습이 인도의 영축산과 통한다(此山之形 通於印度靈鷲山形)”는 의미에서 기인한 것이다. 또한 사명(寺名)의 다른 의미로서 통도사가 신라시대의 계율근본도량(戒律根本道場)으로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爲僧者通而度之)”라는 설과, “모든 진리를 회통하며 중생을 제도한다(萬通法度衆生)”의 의미를 통도(通度)라는 이상(理想)으로 나타내어 대승불교의 이념을 표현하였다는 설이 있다.

통도사는 창건 이후 신라 · 고려시대를 거치며 왕실과 대중의 비호속에 한국 불교의 구심처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시대의 억불과 임진왜란에도 굴하지 않고 중창을 통하여 면면히 법등(法燈)을 이어왔다.

조선시대에는 전국 16개 대표사찰가운데 경상남도의 대본산(大本山)이 되었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15교구 본사(本寺)로 국내 최대의 사찰을 형성하여 구하(九河) · 경봉(鏡峰)대선사와 같은 고승이 계셨으며, 이후로는 대한불교 조계종 9대 종정이신 월하대종사(月下大宗師)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장율사스님의 계율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靈鷲叢林) 통도사는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통도사의 사격(寺格)은 신라시대에는 계율 근본도량이 되어 수사찰(首寺刹)의 위치에 있었으며, 또 고려를 지나 조선초기에는 나라에서 각 사찰을 기도장소로 지정할 때 수위사찰(首位寺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당시 정부에서 관리서(管理署)를 두어 전국 16개 수사찰(首寺刹)을 정할 당시 경상남도의 수사찰(首寺刹)이 되었고, 또 전국에 본산을 정할 때에도 선교양종(禪敎兩宗) 대 본산(本山)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으며, 불보사찰(佛寶寺刹)의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은 자장율사스님의 불사리 봉안에 따른 것이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로 경남불교를 이끌고 있으며 자장율사스님의 창사(創寺)정신을 계승하는 ‘영축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정신적 기반이 되고 있다.

 

 

2.금강계단과 구룡지

통도사 창건의 기본정신은 부처님 사리(舍利)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있다. 이 계단은 통도사의 정신적인 근거가 되기도 하며, 창건이후 가장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통도사 역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은 어느 것이나 통도사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기보다는 바로 금강계단의 변천과 그 역사를 강조하기 때문에 통도사 창건은 금강계단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고 하겠다.

『삼국유사』제3권 탑상(塔像) 제4 전후소장사리조(前後所將舍利條)에 의하면 “선덕왕때인 정관(貞觀) 12년 계묘년(癸卯, 643)에 자장율사스님께서 당에서 모시고 온 불두골(佛頭骨), 불치(佛齒), 불사리(佛舍利) 100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이 있었는데 그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으며”라고 하였다.
 
 

계단은 2층으로 상층(上層)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은 석개(石蓋)를 안치하였다. 이는 곧 통도사의 불사리 금강계단과 함께

부처님의 친착가사(親着袈裟) 봉안 사실을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못이었다. 창건주 자장율사스님께서는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다.

자장율사스님께서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 알,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뼈(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사리신앙

사리는 불자가 존중하는 신앙(信仰)의 대상이다. 이 사리는 옛적부터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성취(成就)했을 때 나타나는 결정체라고 한다.

「통도사 사적기(通度寺 事蹟記)」사리영이편(舍利靈異篇)에 보면 사리의 영이함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四部大衆) 가운데 어느 누구든지 사리(舍利)를 첨례(瞻禮)하고 공양할 때에는 먼저 다섯 가지 법신(法身)의 향기가 산내에 드높아 내원(內院)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향기를 맡고 감탄하는 일이다.


둘째는 인연의 유무를 따라서 사리가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고 빛나면서 수정통(水晶筒) 가운데 붙어서 나오지 아니하며 혹은 절반만 있고 절반은 없으며 혹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며 때로는 순금색(純金色)이거나 또 순옥색(純玉色)이며 절반은 금이며 절반은 옥이며 또 크고 작음과 숨고 나타남이 같지 아니한 것이다.

셋째는 사람들이 첨례할 때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며 우천(雨天)이 홀연히 개기도 하며 검은 구름이 깔리고 우레 소리를 내며 폭풍이 갑자기 비를 내려 수목(樹木)을 쓰러뜨리기도 하여 그 길흉(吉凶)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넷째는 사람들이 첨례하기 위하여 동구(洞口)로 들어올 때면 계단 석종(石鍾) 위에서 먼저 오색광명(五色光明)이 크게 천지(天地)를 비춰 훤히 산과 골짜기를 밝히는 것이다.

 

다섯째는 사람들이 첨례(瞻禮)하여 향과 초를 태워 여러 가지로 공양하고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면 계단(戒壇)의 반상에 변신사리(變身舍利)가 모래알처럼 무수히 나타나는 것이다.

 

여섯째는 사리를 첨례하려는 사람이 몸과 마음이 부정(不淨)하여 하심(下心)하지 못하고 원문(院門)을 소란스럽게 하면 일원중(一院中)에 먼저 비우를 상하는 고약한 냄새가 나서 그 사람이 곧 광란(狂亂)하여 땅에 쓰러져 귀신의 말을 지껄이다가 결국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일곱째는 금강계단 석종 부도의 여의주석 반석 아래 움푹 파인 곳에 항상 물이 가득 차 있고 그 가운데 한 쌍의 푸른 달팽이가 매양 붙어 있는데 석종을 들 때 사람이 보면 사방으로 흩어져 간 곳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지면 잠깐 사이에 들어와서 전과 같이 있는 것이 사시(四時)에 끊어지지 아니하고 죽지 아니하여 항상 붙어 있으면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금강계단 위로는 모든 날 짐승이 그 가운데를 날아가지 아니하고 또 그 위에 오줌과 똥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덟가지로 사리에 대한 신령(神靈)스러움과 길흉변동(吉凶變動)을 사적기(事蹟記) 사리영이편(舍利靈異篇)에 기록(記錄)하고 있다.

통도사에서는 이런 사적기(事蹟記) 기록 못지않게 지금도 간혹 사리탑 계단에서는 밤중에 광명이 뻗어 올라 대낮처럼 밝아 대중이

깨어나서 첨례하는 일이 있으며 그럴때면 멀리 양산(梁山)에서는 통도사에 화재가 생겼다고 야단들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상노전(上爐殿)의 스님들이 혹시 예불시간에 일어나지 못하면 종소리와 목탁소리가 들리게 되니 이는 불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만이 갖는 특별한 영이(靈異)로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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