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무거와 김신암

백련암 2009. 12. 27. 02:11

*문수사*

 

무거와 김신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 때의 일이다.

천년에 가까운 화려와 번영의 극치를 자랑하던 신라도 말세에 들어와서는 귀족지배 계급들의 분열과 또한 사치에 젖은

문약으로 그 국토는 경주 일원으로 줄어 들고 후백제의 군대가 신라를 침입하여 영천에 이르러도 경애왕은 고려 태조에 구원을

청 할뿐이더니 고려 태조는 강병 1만으로 구원케 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정세도 잊은 채 고려의 구원군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임금은 포석정에서 환락에 잠겼다가 쳐들어온 견훤의

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고 견훤의 손에 의해 새로이 세워진 임금이 경순왕이었다.

경순왕도 운수가 다 되어 이미 기울어지는 사직을 바로 잡을 기력이나 능력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였다.

 

또 조야의 국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왕자 마의태자 같은 사람도 나라의 운명이란 하늘에 달렸거늘

어찌 천년사직을 헛되이 할 것인가 하였으나 그 주장도 나라를 바로 잡는 데는 이미 힘이 되지 못하였다.

 

이때 경순왕은 백척 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영축산의 문수대성의 계시를 받아 결정키로 결심하고 태자와 둘째 왕자를 거느리

고 하곡현의 영축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먼저 태화사에 이르러 참배하고 또 길을 나섰는데 중도에서 길가에 한 동자승이 나타나더니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왔다고 고하였다.

왕은 다행히 생각하고 크게 만족하여 길을 따랐다.

그러나 삼호 앞에서 태화강을 건너자 얼마가지 아니하여 동자승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왕은 직감에 이 동자승이 문수보살임을 느끼고 하늘은 이미 나를 저버리는구나 하여 크게 탄식하며 이제는 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는 실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래서 왕은 발길을 돌려 월성에 환궁하여 사방의 땅이 다 타인의 소유로 돌아가고 나라의 힘은 약하고 쇠퇴하여 다시 일으키지

못함을 통탄한 나머지 고려태조에 항복하기를 꾀하였다.

이때 군신들의 의논은 제각기 찬반이 엇갈렸다.

 

왕자 마의태자는 말하되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법, 오직 나라 사랑하는 여러 충신들과 함께 민심을 크게 수습하여 나라를 굳게 하다가

힘이 다한 연후에야 말할 것이나 어찌 1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다른 나라에 내 줄 것이랴"하였다.

 

왕이 한숨지며 말하되"외롭고 위태함이 이와같아 형세는 이미 능히 온전할 수 없으니 이왕에 강하지도 못하고 또 약하지도

못하여 무죄한 백성들을 참혹히 죽게 하는 것은 내 차마 하지 못하는 바라"하고 고려에 국서를 보내어 귀부를 청하고 말았다.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하직하고 곧 개골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와 초식으로 그 생을 마치었다

또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되니 이름을 범공이라 하고 법수해인사에 머물다가  문수산 남쪽 산에 절을

지어 여기에서 살았으니 그 절 이름을 김신암이라 하였다.

이 절은 정조 10년(1780)판 읍지를 보면 문수암 남쪽 3리에 있는데 신라왕의 소창이라 하여 그때까지는 절이 실존하였다.

 

그 절로 말미암아 그 산명을 김신기산이라 불러 오다가 지금은 남암산이라 한다.

또 이 절에는 김신대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기도 하였으며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앞에든 전설은 상전하여 전해오기를 왕이 크게 탄식한 자리를 '헐수정'이라 하였으며,  동자가 자취를 감춘곳을 무거라

하여 무거동이라 하는 지명이 이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전설은 한편으로는 삼국유사의 진신수공과도 같이 전해온다. 또 이 전설의 주인공을 가르켜 무거 인근의 노인네들은

"짐부대왕"이라 하나 이는 "김부대왕"으로 경순왕의 이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