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설화 및 꽃의전설

제주도의 전설

백련암 2010. 6. 6. 18:22

한라산(:1,950m) 백록담은 남북길이 약 500m, 동서길이 600m, 둘레 약 3km의 백록담(白鹿潭)은 옛날 선인들이 이곳에서 '백록(흰사슴)'으로 담근 술을 마셨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제주도의 전설들=

 

1-1. 설문대 할망

설문대 할망은 옥황상제의 딸로서 제주도를 창조한 여신이다.
천상계에서의 생활에 무료함을 느낀 할망은 바깥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몰래 내려다 보았더니 바깥 세계는 하늘과 땅이 온통 맞붙어 있어 답답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그 것을 본 순간 할망은 그 세계를 열어 놓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할망은 하늘과 땅을 두개로 쪼개어 놓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떠받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짓누르며

힘차게 일어서서 하늘과 땅을 분리해 버렸다.이 사실을 안 옥황상제는 진노하여 그녀를 땅의 세계로 내쫓아 버렸다.

급하게 내려오는 바람에 할망은 바깥 세계를 갈라 놓을 때 퍼놓았던 흙만을 치마폭에 담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인간 세상에 내려온 설문대 할망이 맨처음 한 일은 치마폭에 담고 온 흙을 내려 놓는 일이었다.

 

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을 골라 그 흙을 내려 놓으니 그 곳이 바로 제주도가 되었다.
할망은 흙을 가지고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었는데 360여개나 되는 오름들도 이때 만들어졌다.
할망은 키가 큰 것을 늘 자랑하였다. 할망은 큰 키 자랑을 하려고 물이 깊다고 소문난 제주시 용담동
바닷가 용연물에

들어갔다. 용연물은 겨우 발등에 닿을 뿐이었다.

그 다음에는 더 깊다고 하는 서귀포시 서홍리 지장샘물(홍릿물)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서는 겨우 무릎까지 물이 올라 왔다. 마지막으로 한라산의 물장오리 물이 깊다하여 들어갔다.
물장오리 물은 터진 연못이라 설문대 할망은 나오지를 못하고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2. 설문대 할망

아득한 옛날『설문대 할망』이라는 할머니가 있었다. 얼마나 거대했던지 한라산을 베게삼고 누우면 다리는 제주시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걸쳐졌다. 이 할머니는 빨래를 하려면 빨래를 관탈섬에 놓아 발로 밟고, 손은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서서 발로 문질러 빨았다.또한 한라산을 엉덩이로 깔고 앉아 한쪽 다리는 관탈섬에 디디고, 또 한쪽은 남원읍 앞바다의 지귀섬을 디디고서 소섬(牛道)을 빨래돌로 삼아 빨래를 했다.
성산일출봉에는 높이 솟은 기암이 있는데, 이 바위는 설문대 할망이 길쌈을 할때 접시불을 켰던 등잔이라 하여 지금도

등경돌이라 부르고 있다. 이 바위는 높이 솟은 바위 위에 다시 큰 바위를 얹어 놓은 듯한 기암인데 할머니가 등잔이 얕으므로 바위 하나를 더 올려 놓은 것이다. 설문대 할망의 거대한 모습을 설명하는 설화는 이밖에도 많다.


큰 바위가 띄엄띄엄 몇 개 서 있으면 할머니가 솥을 걸어 밥을 해 먹은 바위라든지,

제주도 안에 있는 깊은 지소(池沼)의 깊이를 재 보았더니 발등이나 무릎까지 밖에 안되었다느니 하는 식의 것들이다.


이렇게 설문대할망은 키가 너무 커서 옷을 제대로 해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속옷 한 벌만 만들어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몸이 컸기 때문에 속옷을 만드는데 명주 100동(1동 50필)이 들었다.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준다는 말에 제주섬

안에 있는 명주를 모두 모았으나 99동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속옷을 만들다가 완성되지 않으니 할머니는 다리를

조금 놓다가 중단해 버렸다.


이 거대한 여신도 어느날 한라산 중턱에 있는 "물장오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재려고 그 물속에 들어섰다가 그만 빠져죽고

말았다.

 

 

2. 산방산

산방산

 

산방산에서 내다본 바다위의 떠 있는 바위 일명 용의눈이라한다.

 

산방산은 안덕면 해안에 있는 절경이 빼어난 곳이다.한라산에서 사냥하던 한 사냥꾼이 사슴을 쫓아 다니다 보니 한라산 정상까지 가게 되었다. 정상에서 한 무리의 사슴을 발견한 사냥꾼은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흰 사슴을 향해 활을 쏘았다. 급히 쏘는 바람에 활끝을 치켜들게 되었고 그 끝이 옥황상제의 엉덩이를 건들이고 말았다. 설문대 할망 때문에 화가

나 있던 옥황상제는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내던져 버렸다.

 

이봉우리가 떨어져 생긴 것이 산방산이다. 봉우리를 뽑아버린 자국은 움푹 패여 백록담이 되었다.

 

 

3. 오백장군(영실기암)

설문대 할망은 설문대 하르방과 혼인을 했는데 아들 500을 낳았다. 대흉년이 든 해였다. 대식구에다 먹는 것이 엄청나

끼니를 대기가 어려웠다. 할망이 아들들을 데리고 양식을 구하러 간 사이 설문대 하르방은 남은 양식을 다털어 죽을 쑤기

시작했다. 큰 가마솥 주위를 돌며 죽을 젓다가 발을 헛디뎌 하르방은 가마솥으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루 종일 양식을 구하러 돌아다니느라 배가 고프고 지친 아들들은 죽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허겁지겁퍼먹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에 돌아온 막내 아들이 가마솥 바닥에 남은 죽을 뜨려고 보니 뼈가 보였다. 건져보니 사람의 뼈였다. 두개골도 나왔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죽속에 빠져 죽은 것을 알고 막내는 형들을 원망하며 한경면 고산리 차귀섬에 가서 며칠을 슬피 울다가 거기서 바위가 되어버렸다. 이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한다.

 

한편 바위가 된 동생을 본 형들도 큰 충격을 받고 아버지를 부르며 통곡하다가 한라산 영실에서 모두 바위가 되니 이를 오백장군이라고 한다. 이들이 바위가 되며 흘린 피눈물은 땅속 깊이 스며들었다가 봄이 되면 철쭉 꽃으로 피어나 온산을

 

붉게 물들인다.


설문대 하르방과 아들들을 모두 잃어버린 설문대 할망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옛날부터 한라산 등반길에서 큰

소리를 지르면 갑자기 안개가 끼여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게 된다는데 이는 설문대 할망이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4. 아흔아홉 골

제주시에서 1100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한라산 자락에 '아흔아홉 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크고 작은 골짜기가 마치 밭고랑처럼 뻗어 내렸다. 골짜기가 하도 많으니 아흔 아홉개가 있다 하여 이름을 '아흔아홉 골'이라 했다. 골짜기가 하나만 더 있어 100골이 되었다면 제주도에 사자나 호랑이같은 맹수가 날 것인데, 한 골이 모자라 아흔아홉 골 밖에 안 되므로 호랑이나 사자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골짜기는 원래 100골이어서 많은 맹수들이 나와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중국에서 한 스님이 건너와서

백성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을 괴롭히는 맹수들을 없애 줄테니 '대국 동물대왕 입도'라고 큰 소리로 외치라 했다.

호랑이니 사자 따위 무서운 짐승을 없애 준다 하니 백성들이 좋아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더니 기이하게도 모든 맹수들이 이 100골에 모여들었다. 스님은 불경을 한참 외고 나서 '너희들은 모두 살기 좋은 곳으로 가라. 이제 너희들이 나온 골짜기는 없어지리니, 만일 너희들이 다시 오면 너희 종족을 멸하리라.' 하고 맹수들을 향해 소리치니 호랑이, 사자, 곰 할것 없이 모두 한 골짜기로 사라졌다. 그 순간 그 골짜기도 없어져 버렸다.


그 후로부터 제주에는 맹수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맹수가 나오지 않게 되자 또한 왕이나 큰 인물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5. 비양도

한림읍 협재리 앞바다에 비양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섬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비양도는 중국 쪽에서 조류에 떠내려 한림읍 앞바다에까지 와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 이때 임신한 해녀가

바다에 들어가 해초를 캐다가 난데없이 큰 섬이 떠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해녀는 이상히 생각하여 섬에 올라가 잠시 쉬다가 소변이 마려워지자 그 자리에서 소변을 보아 버렸다. 그러자 떠다니던 섬이 그 자리에 딱 멈추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아무리 조류가 세어도 섬은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한다.

 

 

6. 백록담

아득한 옛날부터 한라산은 신선이 놀던 산이다. 신선들은 흰 사슴을 타고 여기저기 절경을 구경하고 정상에 있는 백록담에 이르러 그 맑은 물을 사슴에게 먹였다. 그래서 백록담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지금은 한라산을 이웃집 출입하듯 오르고 있지만 옛날에는 신선밖에 올라 갈 수 없었다. 사람이 반쯤만 오르면 안개가

순식간에 꽉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한다. 이것은 선경에 인간이 올 수 없도록 신선이 조화를 부리기 때문이었다.

 


백록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말이나 마찬가지어서 사냥꾼도 잡지 아니 하였다. 만일 백록을 쏘았다고 하면 그 사냥꾼은

천벌을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옛날 안 포수라는 사람이 백록을 쏜 일이 있었다. 그는 104살까지 살았는데 일생 포수로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짐승이 보였다 하면 백발백중 맞혀 잡았다.

어느날 산중을 돌며 짐승을 찾는데 저쪽 숲에서 사슴이 한 마리 내달았다. 안포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휙 하고 활을

쏘았다. 맞았는가 확인할 필요도 없이 순간적으로 달려가서 사슴 위로 덮치며 칼을 빼어 사슴의 배를 찔렀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백록이었다. 안포수는 순간 정신이 아찔하여 '몰라 뵈었습니다. 잘못 봐 가지고 이런 대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며 머리를 땅에 박고 극진히 빌었다. 그래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만일 그렇게 빌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고 한다.

 

 

 

한라산 백록담

 

 

7. 혼인지

삼성혈에서 솟아난 세 신인이 수렵을 하며 성산읍 온평리 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우연히 바다를 보니 무엇이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들은 해변으로 갔다. 자세히 보니 석함이 떠오는 것이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귀중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세 신인은 일제히 쾌성을 올렸다. 그래서 온평리 바닷가 이름을 '쾌성개'라고 한다.'쾌성개'에서 쾌성을 지른 세 신인은

석함이 떠오는 바닷가로 내려가니 물결에 출렁이며 석함이 뭍으로 떠올라왔다. 석함이 떠왔다고 해서 이곳을 '오통'이라 한다.


석함이 열리자 사신이 말을 타고 먼저 올라오고, 이어서 세 처녀가 오곡의 씨와 송아지, 망아지 등을 이끌고 올라왔다. 사신이 올라오면서 첫발을 디딘 말 발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다. 바닷가 물결이 출렁대는 평평한 바위에 흡사 발자국 같이 패어 있는 곳인데 이곳을 '몰성개'라 한다.

 
온평리에서 남쪽으로 약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횐죽'이라는 못이 있다. 세 신인은 세 처녀와 더불어 이 못에 가서 목욕을 하고 혼인식을 올렸다. 그래서 이 못을 혼인지라고 한다. 혼인지 바로 곁에 자그마한 굴이 있는데, 여기는 세 신인들이 혼인하고 같이 잠을 잔 곳이라고 전해 온다.

 

 

8. 용머리

안덕면 화순리 산방산 밑 바닷가에 용머리라고 하는 언덕이 있다. 산방산의 줄기가 급히 바다로 떨어져 기암절벽을

이루면서, 언덕이 되어 기다랗게 바다로 뻗어 내린 곳이다.

 

그 꼴이 마치 용이 머리를 들고 바다로 내려가는 것 같아 '용머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용머리에는 고종달이의 전설이 얽혀 있다.


옛날 진시황 시절의 이야기다. 진시황은 천하를 얻어 만리장성을 쌓아놓고, 외적이 꼼짝 못하게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웃 나라에 제왕감이 태어난다면 마음 놓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진시황은 이웃 나라에서 제왕감이 태어나고 있지나 않을까 항상 탐색하고 있었다.


어느 날 소식이 들리기를 제주도에 왕후지지가 있어 제왕이 태어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진시황은 곧 그 대책을 의논하고 풍수에다 술법이 능한 고종달이를 보내어 그 맥을 끊어 버리라고 했다. 고종달이는 제주도에 들어와 왕후지지를 찾아

헤맸다. 며칠만에 왕후지지를 찾아내었다. 그것은 바로 산방산에 있었다. 고종달이는 산방산 일대를 샅샅이 돌며 끊어야 할 맥이 어딘지를 찾았다. 그곳이 바로 용머리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용이 살아 있기 때문에 왕후지지가 되는 것이니

요놈만 끊어 버리면 문제 없게 되는 것이었다. 고종달이는 먼저 용의 꼬리 부분을 한칼로 끊고 이어서 잔등이 부분을

두 번 끊어 버렸다. 끊자마자 바위에서 피가 흘러 내리고 산방산은 드르르하게 신음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리하여 제주도에는 왕이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 용머리는 꼬리 부분, 잔등이 부분의 바위가 묘하게도 가로로 똑똑 끊어져 있는데, 이것은 그때 고종달이가 끊어버린 자국이라는 것이다.

 

 

9. 절부암

한경면 용수리 포구 곁 고목이 울창한 속에 '절부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옛날 이 용수리에는 강씨 총각과 고씨 처녀가 살고 있었다. 강씨 총각은 조실부모하여 남의 집에서 자라고 고씨 처녀도 역시 조실부모하여 남의 집에서 심부름하며 자랐다. 총각,처녀가 다 착실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나이가 15,6세가 되어 가니 강씨 총각을 데려 사는 주인이나 고씨 처녀를 데려 사는 주인이 모두 앞길을 걱정하게

되었다.

 

어느 날 두 주인은 이 처녀 총각이 다 같은 처지요 또한 얌전하니 부부를 맺어 주자는 의논을 했다.
드디어 처녀 총각은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다. 혼인 잔치를 지낸 지 일주일도 못 된 어느날 남편인 고씨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 가난한 새살림이라 부지런히 일을 해서 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다로 나간

남편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불행히도 풍랑을 만나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었다. 아내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바닷가를 돌며 시체가 떠오르기를 하늘에 빌었다. 석 달이 되어 가도 시체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는 체념하고 남편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여 지새포 포구 곁 절벽 위의 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그날 저녁 이상하게도 남편의 시체는 바로 그 절벽 밑으로 떠올랐다. 동네사람들은 애처로운 이 광경을 보고 당산봉 양지 바른 곳에

두 시체를 안장하여 주었다. 


그때 신제우라는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내가 벼슬을 했다면 이런 갸륵한 영혼에게 열녀비라도 세워주겠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후 신제우는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갔는데 낙방이 되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실의에 차 있을 때, 어느날 꿈에 고씨가 나타나 다시 한번 과거를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신제우는 고씨의 묘에 참배하고 다시 과거를 보러 갔더니 이번엔 급제하였다. 신제우는 돌아와 고산리와 용수리에 각각 엽전 서른량씩을 나누어 주어 매년 3월 15일에 열녀제를 지내도록 하고 열녀비를 세워주었다. 
그 후 고씨가 목매어 죽은 절벽을 절부암이라 부르게 되었고, 매년 3월 15일에는 그의 묘에서 열녀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10. 김녕사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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