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본사와 사찰 벽화 이야기

조계종단 교구본사 = 해인사, 쌍계사, 범어사

백련암 2010. 7. 9. 15:54

  대한불교조계종 제 12교구 본사 해인사

禪之宗刹 海印叢林 海印寺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16일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되었다.

해인사에 관한 종합적인 문헌으로 「가야산 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이 있는데, 이는 해인사의 연기(緣起), 실화(失火)와 중창의 역사,

대장경의 인경(印經)에 관한 여러 사적과 문헌들을 모아 고종 11년(1874)년에 판각한 것이다.

이「가야산해인사고적」에 수록된 문헌가운데 똑같은 이름의 「가야산해인사고적」(고려 태조 26년에 이루어진 것)과 신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신라가야산해인사선안주원벽기(新羅伽倻山海印寺善安住院璧記)」의 두 기록은 해인사의 창건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하게 전해주고 있다.

 

*신라 가야산 해인사 선안주원벽기=

조사(祖師)인 순응대덕은 신림(神琳) 석덕에게 법을 배우고, 대력(大曆) 초년(766, 신라 혜공왕 2년)에 중국에 건너갔다.

마른 나무에 의탁하여 몸을 잊고 고성이 거처하는 산을 찾아서 도를 얻었으며, 교학을 철저히 탐구하고 선(禪)의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영광스럽게도 나라에서 선발함을 받았다.
곧 탄식하여 말하기를 "사람은 학문을 닦아야 되며 또한 세상은 재물을 간직함이 중하다. 이미 천지의 정기를 지녔고 또한 산천의 수려함을 얻었으나,

새도 나뭇가지를 가려서 앉는데 나는 어찌 터를 닦지 아니하랴"하고 정원(貞元) 18년(802) 10월 16일 동지들을 데리고 이곳에 절을 세웠다.

산신령도 묘덕(妙德)의 이름을 듣고 청량한 형세의 땅을 자리잡아 주었으며 오계를 나누어 꾸며서 일모(一毛)를 다투어 뽑았다.

이때에 성목왕태후(聖穆王太后)께서 천하에 국모(國母)로 군림하시면서 불교도들을 아들처럼 육성하시다가 이 소문을 듣고
공경하며 기뻐하시어

날짜를 정하여 귀의하시고 좋은 음식과 예물을 내리셨다. 이것은 하늘에서 도움을 받은 것이지만 사실은 땅에 의하여 인연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안개처럼 돌문으로 모여들때 스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하여 이정 선백(利貞禪伯)이 뒤를 이어 공적을 세웠다.

중용의 도리를 행하여 절을 잘 다스렸고 주역 대장(大壯)의 방침을 취하여 건축을 새롭게 하였다.

구름처럼 솟아오르는 듯, 노을이 퍼지는 듯,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좋았다. 그리하여 가야산의 좋은 경치는 도를 성취하여 터전에 알맞게 되었으며,

해인의 귀한 보물은 지대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하략)


이 기록에 의하면 순응은 신림의 제자였는데 766년,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가 돌아온 뒤 신라 애장왕 3년(802)에 가야산에 해인사를 창건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목왕태후가 불사(佛事)를 크게 도왔는데 갑자기 순응이 입적하게 되자 그의 뒤를 이어 이정이 이 절을 크게 완성하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창건 이후 해인사의 중창에 관한 기록은 최치원이 쓴 「신라 가야산 해인사 결계장기(結界場記)」에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해인사는 창건 당시 터가 험하고 규모가 작았는데 약 100년이 지난 효공왕 1년(897) 가을 다시 중창할 것을 합의하고

90일 동안 참선한 뒤에 3겹의 집을 세우고 4급의 누(樓)를 올려서 사역을 확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중수에 관한 기록은 창건으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고려 건국 초기의 『균여전』에 보인다. 이곳 기록에 의하면

해인사의 희랑(希朗)대사는 신라말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한 대가로 경중봉사(敬重奉事)하여 전지(田地) 500결(結)을 시사(施事)하고 옛 사우(寺宇)를 중신(重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고려 태조 때 해인사는 창건 이후 희랑대사에 의해 확장되고 새로워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였다. 그 때가 바로 930년 경이였다.

그 후 고려시대에 들어와 해인사는 균여(均如)대사, 대각(大覺)국사 등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사우(寺宇)의 중수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실록을 보관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2년(1393)에 정중탑을 중영(重營)하고 해인사는 여러 차례 중수를 한다. 이는 조선 왕실이 해인사에 힘을 기울인 결과라 생각된다.

 특히 태조 때 고려대장경판이 해인사에 봉안 되었다. 태조실록 7년(1398)에는 강화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을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고 정종실록 원년(1399)에는 해인사에 대장경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태조 때 장경판이 해인사로 이운(移運)되고 이때부터 법보종찰로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세조 3년(1458)에 임금이 죽헌(竹軒)에게 명하여 대장경 50벌을 인경(印經)하고 신미(信眉), 학조(學祖) 두 스님에게 장경판전을

시찰하게 하고 그 결과 보고에 따라 판고가 비좁고 허술하므로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판전 40칸을 다시 짓게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세조가 1468년 승하하자 정희(貞熹)왕후는 해인사를 중건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83년 세상을 떠난다.

해인사가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시기는 대체로 성종 12년(1481)에서 21년(1490) 사이라고 본다.

성종 19년(1488) 덕종의 비 인수(仁粹)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仁惠)왕비가 선왕의 뜻을 받들어 도목수 박중석(朴仲石) 등을 보내어 학조(學祖)대사로

하여금 판전 30칸을 짓게 하고 보안당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490년까지 많은 전각과 요사 등 160여칸을 완성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종 22년(1491) 조위(曺偉)가 쓴 『해인사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해인사는 임진왜란 때도 전화(戰禍)를 면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화재를 입었다.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숙종 21년(1695) : 동쪽의 많은 요사와 만월당, 원음루 화재.
숙종 22년(1696) : 서쪽의 여러 요사와 무설전 화재.  영조 19년(1743) : 대적광전 아래 수백칸 당우 화재.
영조 39년(1763) : 화재                                          정조  4년(1780) : 무설전 화재.
순조 17년(1817) : 수백칸 당우 화재.                       고종  8년(1871) : 법성요 화재.

이와 같이 1695년 이후 1871년까지 해인사에는 일곱 번의 큰 화재가 있었으나 판전 건물은 피해가 없었다.

해인사에서 비교적 오랜 건물은 대적광전, 응진전, 퇴설당, 구광루, 해탈문 등이며 대장경판전 외에는 모두 순조 17년(1817) 직후의 건물이고

나머지 건물은 훨씬 후의 건물들이다.

 

 찾아가는 길 

   기차 이용 시 = 동대구역 또는 대구역 하차 → 지하철 1호선(대곡방향) 승차후 성당못역에서 하차 →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행 시외버스(1시간 40분 소요) 승차 → 해인사 앞 하차


○ 경부선을 이용할 시 : 대구까지 운행하는 기차는 수시로 있습니다.


○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행 시외버스 승차 = 배차시간 : 06시40분 ~ 20:00 (40분간격)

 

    버스 이용 시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수시) → 대구 → 서부시외버스터미널에서 해인사행 승차
서울 (남부시외버스터미널) → 고령 → 해인사행 승차

 

 

     대한불교조계종 제 13교구 본사 쌍계사

 

 

구층석탑


 

쌍계사(雙磎寺)는 신라 성덕왕 21년(722년)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께서 선종(禪宗)의 六祖이신 혜능스님의 성상을 모시고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 눈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 곳을 찾아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 귀국하신 혜소 진감(眞鑑)선사께서 퇴락한 삼법스님의 절터에 옥천사(玉泉寺)라는 대가람을

중창하시어 선의 가르침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시었으니 후에 나라에서 "쌍계사"라는 사명을 내렸다. 

그간에 벽암, 백암, 법훈, 만허, 용담, 고산스님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고색창연한 자태와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쌍계사는 국보 1점(진감국사 대공탑비-국보47호), 보물 3점(대웅전-보물 500호, 쌍계사 부도-보물 380호, 팔상전 영산회상도 보물(925호)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청학루, 마애불, 명부전, 나한전 등의 많은 문화유산, 칠불암, 국사암등의 암자가 있다. 

 

쌍계사는 여러 문화재외에도 차와 인연이 깊은 곳으로 쌍계사 입구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茶始培追遠碑)'가 있고,

화개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벚꽃길에도 '차시배지(茶始培地)' 기념비가 있다.

차는 신라 선덕여왕때 당나라에서 처음 들여왔는데 흥덕왕 3년(828년)김대렴(金大簾)이 당나라에서 차나무 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지리산 줄기에

 처음 심었다고 한다.  김대렴이 차를 심은 이후 진감선사가 쌍계사와 화개 부근에 차밭을 조성, 보급하였다고 한다.

 

현재 혜능대사의 성상이 모셔진 금당(金堂)에 금당선원이 있어 눈푸른 납자들의 정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전통강원(傳統講院)과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설치되어 바야흐로 선맥과 강맥, 그리고 율맥의 법통이 바로선 수행도량의 명성을 떨치고 있다. 

 

=찾아가는 길 =  기차여행 할 시에 = 구례에서 하차 = 쌍계사행 버스이용, 25분간격 운행(21Km)-완행 12회 
                     버스로 이용할 시엔 =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화개행 하루 6회

 

 

대한 불교 조게종 제 14교구 본사 범어사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동래현 북쪽 20리에 있는 금정산 산마루에는 금빛을 띤 우물이 항상 가득 차 있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속에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고 하여 '금샘'이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금빛고기와 황금우물 그리고 산 이름을 따서 금정산 범어사라고 절 이름을 지었다.

 

신라 문무황(678년) 의상대사가 해동의 화엄십찰중의 하나로 창건 하였다. 화엄경의 이상향인 맑고 청정하고 서로돕고 이해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삶을 지상에 표현하고자 설립된 사찰이다.

범어사는 역사적으로 많은 고승대덕을 길러내고 도인을 배출한 수행사찰로 오랜전통과 많은 문화재가 있는곳이다.

 

범어사는 창건 이후 고려와 조선 중엽에 이르기까지 그 면모를 유지해 오다가,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의 병화를  만나 모두 소실되어

10여년 동안 거의 폐허나 다름이 없었는데 선조 35년(1602년)에 관(觀) 선사가 중건 하였으나 얼마있지 않아 또 다시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그 후 광해군 5년(1613)에 묘전(妙全) 스님 등이 대웅전, 용화전, 관음전, 나한전, 일주문, 심검당(현 원주실)을 건립하였다.

또한 1684년에는 해민(海敏) 화상이 비로전을, 1700년에는 명학 화상이 팔상전, 종루, 불이문, 보제루, 천왕문건립하였다.

이후에도 사세의 확장에 따라 크고 작은 개수 및 중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근세의 고승인 경허 스님은 1900년에 범어사에 선원을 개설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범어사 주지 성월 스님은 1899년 범어사 금강암에 선원을 창설하고

 다음해에는 안양암에, 1902년 4월에는 계명암에, 1906년 6월에는 원효암에, 1909년 1월에는 안심료에, 1910년 10월 대성암에 선원과 선회를 창설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시켰다.

 1966년 2월 28일에는 대웅전 건물이 보물 제434호로 지정되었으며, 1969년에는 대웅전의 일부 목부가 교체되고 마루는 고쳐졌다

 

선찰대본산

선찰대본산이란 마음을 닦는 맑은 도량이라는 뜻이다 참선을 통해서 마음속에 일어나는 갖가지 잡념과 망상을 쉬게하고 

자신의 내면세계의 참다운 불성을 깨닫게 하도록 마음을 수행하는 근본도량이라는 뜻이다.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영남의 3대 사찰이다

 

양산 통도사는 불보종찰이요 합천 해인사는 법보종찰이며 순천 송광사는 승보종찰이다.  범어사는 네번째인 선종본찰로서 

마음의 근본을 궁구하는 수행도량이어야 한다 이것이 선찰대본산의 의미다 

 

찾아가는 길 =  기차 이용시 = 부산역 하차

부산 지하철 1호선 = 범어사역 하차 5번, 7번,출구 = 도보 5분이내 = 범어사행 90번버스승차 = 범어사하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