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33관음성지를 찾아서= 보리암, 동화사, 은해사

백련암 2010. 8. 5. 00:13

16] 남해 보리암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바다를 굽어보는 보리암 해수관음보살 
 

한려수도의 보석’은 중생 살피는 해수관음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보타산 낙가사. 그 곳을 형상화하면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성지가 있다. ‘한려수도의 보석’으로 불리는

해발 681m 남해 금산 보리암이다. 속초 낙산사, 강화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처로 유명하다.

지난 7월16일 밤 폭우가 남부지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다행히 다음 날 비가 그쳐 보리암을 향해 금산을 올랐다.

금산에 오르니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푸른 바다와 섬들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기기묘묘한 풍경과 기암절벽에 위치한 아름다운 보리암을

금산 상사바위에서 앉아 관망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산을 어느 정도 오르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산 중턱에 이르자, 갑자기 짙은 안개가 몰려왔다.

희뿌연 안개 속에도 등산을 하기 위해 등산복을 차려입은 등산객들과 관광객들, 그리고 기도를 하기 위해 찾아온 불자 등 적잖은 사람들

이 북적였다. 금산은 해발높이가 그리 높지 않지만 아름다운 비경이 무려 서른여덟 곳이나 된다고 한다.

 

 

남해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해수관음상.

 

금산 8부 능선에 위치한 제 2주차장에서 800여m 올라가면 마침내 보리암이다. 보리암은 원효스님이 683년 이곳에서 초당을 짓고 수행

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후 산 이름을 보광산이라 붙였고 주석했던 초당을 보광사라고 했다.

훗날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왕조를 열었다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찰에 당도할 무렵 안개 속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기도소리가 울린다. 
절에 도착하자 단체로 온 불자들이 계단 아래로

부지런히 내려가고 있었다. ‘관세음보살상 계신 곳으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에 무심코 뒤따라갔다. 놀랍게도 도착한 곳은 이성계가 기도

를 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성인 한 사람이 겨우 서 있을 만한 작은 동굴이다. “그토록 험하다는 설악산 봉정암에 올라도 아무 곳에서 기도한다고 다 들어주는

아니래, 기도를 들어주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고 하더라구. 보리암에선 여기서 기도하면 좋다고 하던데….”

일행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우연히 들었다.  

 

여기까지 힘들게 내려온 사람들을 위한 얘기려니 생각하고 지나치려다가, 일행이 떠난 후 동굴에 들어가 조용히 혼자 기도를했다.

다시 보리암으로 돌아와 보광전에 들어서니 법당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고 있었다. 이곳 기도소리가 도량을 가득

채우면서 금산을 울리고 있었다.

참배 후 종각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유명한 해수관음상이 남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경남 유형문화재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자리하고 있다. 안개 속에 흐릿하게 관세음보살이 모습을 나타낸다. 마치 꿈속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하는 것처럼 신비로웠고 환희심이

샘솟았다.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올린다. 그러자 바다를 굽어보고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제도하고 있는 보리암 해수관음보살님이 살짝

다정한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두 손을 모으고 한걸음 한걸음 석탑을 돈다. 남해바다 뿌연 안개 속 기도소리가 바다로 다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17] 대구 동화사


동화사 부처님(대웅전)

 

옛 신라인의 불국토 팔공산엔

1700년 불교사 아우르는 성보 즐비

 

팔공산은 수려한 산세로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영남 지방 최고 영산(靈山)으로 불리는 이유다. 신라시대 토함산, 계룡산,

지리산, 태백산과 함께 오악(五岳)의 하나로 성스러운 장소다.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들에게 추앙받던 팔공산엔 불교문화유산들이

즐비하다. 팔공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동화사가 대표적이다.

 

493년 극달화상이 유가사를 창건, 832년 현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가 진표스님이 미륵보살로부터 받은 미륵보살의 손가락뼈모시고

중창했다고 전해진다. 중창 당시 추운 겨울에 오동나무가 상서롭게 꽃을 피었다고 한다. 이후 동화사(桐華寺)로 불렸다.

 

지난 7월22일 동화사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향했다. 볕이 상당히 뜨거웠다. 보통은 동화사 왼편 비로암 쪽으로 절로 향했는데

마애부처님을 친견하기 위해 아래쪽 입구에서 도량으로 향했다. 일주문 바로 아래에 있는 보물 243호 동화사 입구 마애불좌상은 미소

를 띠며 참배객을 맞이한다.

그 미소에 더위가 한풀 꺾인다. 일주문을 지나면 시원한 청정계곡이 나온다. 계곡마다 더위를 피해 찾아온 사람들이 보인다.

 

일주문에서 통일대전까지는 10여분 거리인데 만만치 않다. 땅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피해 걷는데도 힘에 부쳐 발걸음이 더뎌

진다. 계곡 옆에 가만히 서 있으니 더위가 조금씩 사라진다. 헉헉대던 숨소리를 고르게 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내려놓으니 계곡 물소리가

훨씬 더 크고 차게 다가온다. 

 

 

 

통일 기원대전

 

1992년 남북통일을 서원하며 낙성된 통일대불과 통일대전이 일주문과 대웅전 사이에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높이 30m 화강암으로

조성된 거대한 통일대불이 팔공산을 배경으로 서 있다. 통일대전 안에 들어서면 유리문을 통해 통일대불을 친견 할 수 있다.

통일대불을 지나 계곡을 옆에 끼고 오르니 당간지주와 부도전이 모습을 보인다. 보물 254호로 지정된 동화사 당간지주는 두 개의

화강암 석주만이 원위치로 추정되는 곳에 동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부도전에는 10기의 부도가 남아 있다.

대체로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부도전 옆으로 1900년 경허스님이 개원하고 수많은 납자들이 수행정진한

금당선원으로 향하는 길이 나온다. 금당선원은 심지스님이 미륵보살이 진표율사에게 전했다는 팔간자(八簡子)를 팔공산에서 던져 팔간

자가 떨어진 곳에 절을 지은 자리에 세워졌다고 한다.

 

행여 하안거 용맹정진하는 스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조용히 둘러보고 돌아섰다. 사천왕문인 옹호문을 지나 봉서루에 오르니

문창살이 유난히 아름다운 동화사 대웅전이 나온다. 조용하기만 하던 경내지만 대웅전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수많은 기도객들이 법당에서 소리 없이 기도를 하고 있다. 절을 하는 보살님의 좌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더운 기운이 법당에 가득 찼지만, 이상하게도 덥지 않았다. 기도하는 마음에 더위와 추위가 있으랴…. 

 

 

18] 영천 은해사

 

 

신라 헌덕왕 1년에 창건된 은해사는 팔공산 처처에 모셔진 불보살들이 마치 은빛 바다가 물결치듯 찬란하고 웅장한 극락정토와 같다고 해서

은해사라 이름 지어졌다.

 

은빛 바다 물결치는 극락정토서

 

번뇌 망상 누르고 온전한 존재가 되다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신라 진표스님이 ‘관견(管見)’ 이란 시에서 읊은 은해사

다. 팔공산 처처에 모셔진 불보살들이 마치 은빛 바다가 물결치듯 찬란하고 웅장한 극락정토와 같다고 해서 은해사라 이름 지어졌다.

조계종 제10교구본사로 영남지방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경산과 영천, 군위, 청송 등 4개의 행정구역에 걸쳐 있다. 40여개 전통사찰을

말사로 두고 있고 산내암자만 해도 8개가 있다. 그 중 운부암과 백흥암은 최근 한류스타 배용준이 ‘깜짝 방문’해서 “탁 트인 전경에 거울

같은 연못, 아침이면 황금색으로 빛나는 은행나무…”라며 찬탄했던 암자다. 특히 백흥암에서 그는 비구니 스님들이 손수 차려준 ‘자연산

유기농 수라상’을 받아먹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은해사 대웅전에 봉안된 아미타 삼존불. 일타스님의 영정도 모셔져 있다.

 

은해사는 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창건할 당시 사명은 ‘해인사’였다. 1943년까지만 해도 은해사에는 35동 245칸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로 거찰의 위용을 자랑했다. 현재의 은해사에는 19개동의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 4대 부찰의 하나였다는

명성에 걸맞게 대웅전을 중심으로 많은 전각들이 좌우에 포진하고 있다.

 

지난 7월22일 극한 무더위를 뚫고 은해사를 찾았다. 울창한 솔밭으로 둘러싸인 일주만에 닿으니 더위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조선 숙종

때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은해사 솔밭에 들어서니, 300여 년간 지켜온 터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오한 기운이 온몸을 감싼

다. 솔밭을 지나 80m 정도 걸어가면 왼편에 잘 정돈된 부도 밭이 참배객을 맞이한다.

 

300여년간 자리를 지켜온 은해사 솔밭 인근에는 잘 정돈된 부도밭이 참배객을 맞는다.

 

은해사가 관음성지로서 불자들의 편안한 안식처가 된 연유에는 5년 전 불교계 최초로 조성한 자연친화적 장묘 ‘수림장’이 있다. 은해사 경내 솔밭 소나무 군락지에 장지를 조성한 뒤 이를 수림장 장소로 개방했다.

수림장은 화장한 유골을 나무 아래 묻어, 나무ㆍ숲과 함께 영생하도록 한다는 자연친화적 장묘형태다. 비석과 경계석 등 일체의 인공물을 설치하지 않아 이상적인 친환경 장례방식으로 주목받아왔다. 몇 해 전 일본군 위안부의 멍에를 짊어지고 삶을 마감한 경산 출신 위안부 할머니를 이곳 은해사 수림장에 안치하고 49재까지 여법하게 모셔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은해사는 한국을 빛낸 여러 고승을 배출했다. 원효, 의상, 일연스님 등 역대 고승 이후 조선시대 홍진국사가 주석하면서 선교양종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고양됐다. 화엄학의 대강백인 영파 성규스님이 화엄교학의 본산으로 중창한 뒤 향곡, 운봉, 성철스님 등 수많은

선지식들이 은해사를 거쳐 갔다.

히 성규대사가 화엄종지를 드날릴 무렵, 추사 김정희가 경상감사로 부임한 생부를 따라 경상도 일원 명승지를 여행하다

은해사 일대도 들렀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은해사 대웅전과 보화루, 불광 등 3대 편액은 김정희의 글씨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은 추사의 편액에 대해 “무르익을 대로 익어

모두가 허술한 듯 한데 어디에서도 빈틈을 찾아 볼 수가 없다”고 호평했다.

삶도 마찬가지리라. 세월 흘러 주름살이 늘고 삶의 무게가 힘겨워져 모두가 허술해지는 듯 하지만, 무수한 번뇌 망상을 누르고 씻고

헤치고 나와 비로소 빈틈없는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 같다.  은해사 대웅전 아미타 삼존불에 참회와 감사의 삼배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