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템플스테이와 부처님이야기

33관음성지를 찾아서 =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백련암 2010. 7. 11. 00:21

 

13]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지눌스님을 비롯하여 16명의 국사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조계산 연산봉이 병풍처럼 송광사를 둘러싸고 있다.

1182년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뜻을 같이하는 스님 10여명과 함께 고려불교를 정법불교로 바로잡기 위해 정혜결사를 서약한다.

1190년 팔공산 거조사에 다시 모여 정혜결사문을 반포하고 결사운동에 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 위해 넓은장소를 물색하던 중 전남 순천에 산세가

웅장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맑은 물이 흐르는 최적지를 찾았다.

보조국사는 1200년부터 길상사(吉祥寺)에서 본격적인 결사운동에 들어갔다. 길상사가 바로 승보사찰 송광사(松廣寺)의 옛 이름이다.

송광사는 1197년(명종 27) 중창불사에 착수, 9년 만에 전각 80여 칸을 갖춘 대가람을 조성한다. 이후 보조국사 진각국사 등, 총 16명의 국사가 배출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여 오늘날 한국불교를 지켜온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지난 6월29일 송광사를 찾았다. 오전 흐릿했던 날씨는 오후 들면서 맑게 개었다.

한 여름의 강렬한 태양빛이 경내를 비치고 있다.

‘대승선종 조계산 송광사’라는 편액이 일주문에 걸려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척주당과 세월각이 나온다.

사방 1칸씩 자그마한 맞배지붕 건물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하다. 사자(死者)의 영가(靈駕)가 지닌 때를 닦는 곳이다.

 

척추당, 세월각(滌珠堂ㆍ洗月閣)

 

영가도 속세의 때를 씻고 부처님 곁으로 다가가는데….

맑은 계곡물을 쳐다보며 속세의 때가 씻겨나가길 바라며 능허교라고 불리기도 하는 우화루를 지나 계곡을 건너간다. 우화루를 건너면 부처님 도량을 외호하는 사천왕들이 버티고 있다. 현재 천왕문을 보수 중으로 천왕문 옆에 사진으로만 사천왕들의 근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음전 안에 모셔진 목조관음보살상이 지난 6월30일 보물로 지정예고 됐다

 

 

맑은 냇물에 마음을 씻는다. 부처님께 다가가기 위해 우화루를 건넌다

 

800년된 구시통

 

범종과 법고가 있는 종고루 아래 계단을 올라서면 송광사 가람배치의 중심인 웅장한 대웅보전이 정면으로 모습을 보인다.

대웅보전에 참배 후 관음전을 찾았다.

대웅보전 왼쪽 뒤편 보조국사 부도와 사리탑으로 향하는 길에 관음전이 있다.

1903년 성수전으로 세워졌으나 1955년에 관음전으로 바뀌었다. 관음전 안에는 1662년 궁중나인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갔다 돌아온 얼마 후 세상을 떠난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 내외의 장수를 기원하며 조성한 ‘송광사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보살상은 17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조각승인 혜희스님

과 금문스님이 조각했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 불상 양식의 특징인 대중적인 깔끔한 미의식이 반영되어 높은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 절을 찾은 바로 다음 날인 지난 6월30일자로 문화재청은

이 보살상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관음보살님께 인사를 올리고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사리탑으로 향한다. 스님은 고려시대 불교가 정치세력과 지나치게 밀착함으로써 야기된 폐단과 선종과

교종 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비판하며 불교개혁을 추진했다. 그중에서도 침체된 선을 부흥시키면서 불교계를 개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스님은 이곳에서 11년간 주석하며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며 생애의 절정을 보냈다.

송광사 전경을 보기 위해 다시 절을 빠져 나온다.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오른다. 해발 887m의 조계산 연산봉이 병풍처럼 절을 에워싸고 있다.

강렬한 여름 햇살에 지붕이 반짝거린다. 조계산 산세를 따라 16명의 국사들의 법향이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듯하다.

 

 

14] 구례 화엄사

 

 

 

화엄사 사사자석탑은 조형미가 뛰어나다. 탑 중앙에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며,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를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백두대간 정기 모인,   지리산 자락서,    화엄삼매에 빠져들다.

 

바닷물이 육지의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듯이 대승경전의 꽃이라 불리는 <화엄경>은 모든 다른 제경의 법문을 수용하여 융합했다.

백두산에서 발현한 강대한 기운이 활짝 꽃 핀 지리산은 한반도에서 만법을 조화하고 통일하는 <화엄경>의 사상을 바탕에 둔 대가람을 세우기는 최적지일

것이다.

 

지리산 계곡마다에는 천년고찰이 자리하여 천혜의 법을 전승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혜를 상징하는 1700m의 반야봉 정기를 이어 받아 이루어진 화엄사가

으뜸이다. 수많은 불교문화재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기도 한 화엄사는 지리산을 찾는 이는 누구나 한 번쯤 들르는 곳이다.

 

지난 9일 아직 이른 휴가철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화엄사를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니 불사중인 수련관의 모습이 보인다.

금강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2층 누각인 보제루가 나온다. 보통의 보제루는 아래가 개방돼 절의 주 전각으로 향하는 통로기능을 한다. 하지만 화엄사 보제루는

그렇지 않다. 아래쪽 기둥을 낮게 만들어 옆으로 돌아가게 만들어 놓았다.  보제루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면 화엄사의 중심 마당에 닿는다.

 

보제루 옆에 서니 웅장한 각황전(맨 왼쪽)과 대웅전(오른쪽 끝)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 번을 찾았지만 다시 작은 감탄사가 나온다. 웅장한 각황전과 대웅전 영산전 명부전 나한전 원통전과 석탑과 석등이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오랜 건축물

이 풍기는 아늑함과 포근함이 전해오면서 새삼 천년고찰의 품안으로 들어왔음을 알아 차린다.

대웅전 왼편에 서 있는 웅장한 국보 67호 각황전은 1702(조선 숙종 28)년에 조성된 2층짜리 당우다.

원래 각황전 터에는 3층 규모의 커다란 장육전(丈六殿)이 있었다고 한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670년에 장육전을 세웠다고 한다.

스님은 장육전 사면을 모두 화엄석경으로 장엄했는데, 임진왜란 때 다 파괴됐다.

현재 1만 여점이 넘는 석경조각들만 전해지고 있다. 각황전 옆에 흑매화, 장육화라고 불리는 홍매화 나무와 원통전이 있다.

원통전 안에 관음보살님이 살며시 미소 짓고 있다.

 

각황전 뒤 국보 35호 삼층사사자석탑으로 있는 효대(孝臺)로 향하는 계단길, 노보살님들이 힘겹게 올라가고 있다.

“힘들면 관세음보살님을 외쳐!” 앞서 올라가는 보살님이 힘들어 하는 보살들을 돌아보며 소리친다.

 

뒤따라 오르면서 조용히 관세음보살을 불러본다.

 

신라 자장율사가 조성한 7m 높이의 사사자석탑은 기단의 일부가 네 마리 사자가 앉은 형태로 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국내에 이와 유사한 석탑이 몇 기 있지만 단연 화엄사 4사자석탑의 조형미가 뛰어나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이는 연기조사의 어머니라고 전하며, 바로 앞 석등의 탑을 향해 꿇어앉아 있는 스님상은

석등을 이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는 연기조사의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다듬지 않은 수령 200년의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한 구층암 요사채.

 

▲비구니 덕산스님의 공덕비,  왼쪽 다시 심은 모가나무 

 

 

화엄사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대웅전 뒤편 언덕길 5분 거리에 있는 구층암이 그 곳이다.

 

천불전과 좌우 요사채만 있는 작은 암자지만 자연을 닮은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요사채의 모과나무 기둥은 자연스러움의 으뜸이다. 다듬지 않은 수령 200년

의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했는데 자연에 순응하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임란 때 불타버린 요사를 새로 지을 때 마당에서 자라던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썼다고 한다. 지금 천불전 앞에 기둥이 된 모과나무 대신 새롭게 자란 모과나무

들이 푸른 잎을 뽐내고 있다.  

 

15] 쌍계사

대웅전

쌍계사 법당 

 

                    범패 가락 마냥             구슬픈 계곡물소리

                           세파에 시달린              심신을 달래주네

 

섬진강를 따라 가다가 화개(花開)를 거쳐 쌍계사로 향한다. 꽃이 핀다(花開)는 마을이름답게 화개에서 쌍계사 입구까지 6km 구간은 벚꽃나무 1200여 그루가

터널을 이루어 상춘객들에게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꽃은 떨어졌지만 푸른 나뭇잎들이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고 있다.

 

쌍계사 매표소를 지나면 깊은 숲과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 절반 이상은 절로 올라갈 생각보단 일단 더위를 식힐 요량으로 계곡으로

내려가고 있다. 쌍계(雙磎)는 두 개울이 만나 쌍을 이룬다는 말이다.

두 개울이 만나고 좀 더 지나면 경상도 사람들과 전라도 사람들이 만나는 화개장터가, 화개장터를 지난 물은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광양만에서 바다와 만나게

된다.

 

숲과 계곡이 선사하는 싱그러운 향기와 시원함을 만끽하며 절로 향한다. 삼신산 쌍계사 현판이 붙어 있는 일주문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삼신산은 두륜산, 방장산과 함께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 중 하나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곧바로 금강문, 천왕문, 팔영루가 나온다.

 

우리나라에 범패를 처음으로 전한 진감선사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길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까지 경사가 완만하게 이어지면서 상승의 느낌을 갖게된다.

팔영루를 돌아서면 대웅전이 정면으로 보인다. 대웅전 아래 마당에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가 중심에 서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지만 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단아하면서도 생동하는 필체로 촘촘히 새겨진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 있다.

신라시대 최고의 문장가인 최치원이 진감선사 혜소스님의 덕을 기리기 위해 887년 왕명을 받아 비문을 짓고 글을 썼다.

 

쌍계사는 선(禪), 차(茶), 범패의 근본도량이라 부른다. 이 모든 것인 진감선사와 연관이 있다. 스님은 804년 당나라에 갔다가 830년 귀국, 쌍계사에서 선종을

일으키고 850년에 입적했다.

 

스님은 중국에서 불교음악인 범패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스님은 범패를 잘해서 ‘구슬프고 상쾌한 곡조를 내니 천상의 신이나 부처님도 모두 기뻐하는 것 같았

다고 했다. 또한 쌍계사의 옛 이름인 옥천사를 중창하고 차나무를 심었다고 쌍계사지에 기록되어 있다.

 

탑비를 지나 계단을 올라 대웅전으로 향한다. 2007년 1월 새롭게 보수를 마친 대웅전은 1641년 벽암 각성스님이 중건한 이래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명부전 옆에 조성된 마애부처님의 자비로운 미소.

 

현재 보물 제5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앙에 석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불과 아미타 여래불을 사이사이에 관음, 세지, 일광, 월광 등 4대 보살님

도 모셔져 있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니 대웅전 오른쪽 명부전 옆에 있는 마애부처님과 눈을 맞춘다. 1.35m 높이의 아담한 마애부처님은 풍만한 얼굴에 소박한 표정을 간직하고

있다. 너무나 정감어린 표정에 한걸음에 달려가 반갑게 인사를 올렸다. 자비로운 미소로 반겨주는 듯 하다.

 

진감선사는 중국에서 공부를 한 후 3년 동안 사방으로 뻗은 거리에 앉아 짚신을 삼아 널리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자신을 한껏 낮춘 스님의 미소가 이런 표정

이 아닐까. 바람이 삼신산 숲을 흔들자 스님의 아름다운 범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벽에 계신 삼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