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와 그외사찰 = 아름다운 곳

제주의 마지막 = 제주 4.3사건, 태고종 원당사. 천태종 문강사

백련암 2010. 9. 14. 16:05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濟州 4·3 事件)또는 제주 4·3 항쟁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유혈사태를 말한다.

 

제주 4·3 사건은 8·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을 방해하기 위해 시작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 사건의 배경에는 제주도내 남로당지부의 활동,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과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들의 폭력과 횡포에 대한

제주도 주민들의 반발 등 여러 복합요소들이 얽혀 있다. 이 제주 4·3사건은 한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2만 5천~3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이 중에는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사람도 포함되어 있으나 희생된 사람들 대부분은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단체와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였다.

 

◎사건의 경과와 학살 피해자

 

이부분의 본문은 제주 3.1절 발포사건 입니다.

당시의 제주도 상황은 해방으로 부풀었던 기대감이 점차 무너지고, 미군정당국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약 6만 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전염병(콜레라)의 만연, 대흉년과 미곡정책의 실패 등 여러 악재가 겹쳤다.

 

특히 과거 일제시대때 경찰출신들이 미군정경찰로의 변신, 밀수품 단속을 빙자한 미군정관리들의 모리행위 등이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에는 남한 단독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 계열의 좌익세력들의 활동과 군정경찰, 서북청년단같은 극우 반공단체의 횡포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

1947년 3월 1일에 경찰은 3.1절 기념식에서 다소 격해진 시위에 폭도로 오해하여 제주도민에게 총을 쏘았다.

 

미군정당국은 이 발포사건을 정당방위로 주장, 민심수습을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군정경찰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오히려 제주도민을 '폭도'로 몰았다.

 

제주도민들은 이에 항의하여 파업을 단행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정 당국이 군정 경찰과 서북청년단을 추가로 파견함으로써

제주도민들과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사이에서는 대립과 갈등이 더욱 커져 갔다. 

 

경과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는 한라산 정상과 주요 고지에 일제히 봉화를 올리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였다.   이들은 경찰관과 우익인 서북청년단원, 독립촉성국민회 소속 회원 등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되면서 엄청난 유혈사태가 되었다.

미군정은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5월 5일에는 '제주도 비상경비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이어서 미군정은 즉각 각 도로부터 차출한

대규모의 군대,경찰, 서북청년단등 반공단체를 증파하였다. 여기에 맞서는 제주도 주민들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인민 유격대를 조직하고 대항하였다.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등 극우 반공청년단체의 탄압에 대한 반감과 저항, 남한 단독선거 · 단독정부 반대와 조국의 통일독립,

반미구국투쟁을 무장 항쟁의 기치로 내세웠다.  이 제주 4.3항쟁 사건으로 제주도 일부지역에서는 5.10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고 연기되었다.  

결과

제주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희생자의 수를 정확히 알기 어려워 만 5천~2만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심지어 '8만 명 희생설'까지 나오고 있다. 3만 명은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이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그 실례로 제주 4·3학살피해자의 증언 중에는 극우청년들에게 어린이에 불과한 아들을 잃었다는 증언이 한겨레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또한, 재일 한국인들 출신구성을 보면 제주도 출신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제주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등의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지역(주로 오사카지역)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진상 규명 노력

 

제주 4·3학살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금기시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1998년 11월 23일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이 있었고,

1999년 12월 26일 국회에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법"이 통과되고,

 2000년 1월 12일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착수되었다.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폭동 논란

 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일부 우파 단체들은 4·3항쟁을 '남로당 계열의 좌익세력들이 주도하여 인민군이 주민들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이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으면서 1999년 4·3 특별법에 서명하고, 제주도 방문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한 노무현 당시 대통령을

'반역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불탑사 연결

 

 

 

 

 

 

 

 

불탑사 바로 앞 마주보고 있는 태고종 원당사

 

오름 주봉앞으로 작은길을 따라가면 시멘트 도로를 사이에 두고 두절이 마주해 있는데, 하나는 원당 불탑사(조계종)이고 또 하나는

원당사(태고종)이며, 원당불탑사경내에는 보물 1187호로 지정된 5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제주도에 유일한 불탑으로서 현무암으로 축조됐다.

 

 

 

천태종 문강사

문강사앞에는 연못이 있다 그런데 이곳이 분화구였다는 기사님의 말씀

화산폭발이 이루어지면서 그자리가 연못이 되었다고 함 

 

북두성(北斗星)의 명맥이 비치는 동쪽의 바닷가 삼첩칠봉(三疊七峰)을 찾아가 기도하면 소원을 이루리라는 도사의 말을 듣고 풍수사를

원(元)의 지배하에 있는 각 처에 보내 찾도록 했던바 마침내 탐라의 해안에서 찾아낸 것이 이 원당오름이다. 

그리해 후사가 없던 원(元)의 황실에 공녀(貢女)로 끌려간 기씨(奇氏)가 황제의 총애를 입어 제2황후가 된 뒤 기황후가 제일 먼저 마음을

썼던 일은 황자를 낳는 것이였다. 기황후는 곧 원당오름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 사자를 보낸 뒤 정성을 다한기도 끝에

황자를 얻었다 한다.

 

원당오름에는 사찰이 3곳 있다. 원당봉 굼부리에는 문강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구지(龜池)라 불리는 연못에 수련이 필때면 무척이나

아름답다. 절이 있기전에도 이곳에 자연 연못이 있었다 한다.<혹시 이곳이 門降寺,문강사 가 있는곳이 아닌가 싶다>

 

 

 

 

圓覺大祖師 法語

 

 

 

 이로서 우리의 제주여행은 끝이났다 지금부터는 제주공항으로~~ 말로태풍으로인해 우리가 탈 비행기는 이미 결항된 것을 알기에

안돼면 약천사에서 하루밤 더묵고  표가있으면 떠나기로 하고 비행장으로 가니 다행히 표가 있어 서울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