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인연

부처님의 이야기속 사람들 =사리풋타. 케마. 난다.

백련암 2010. 10. 12. 00:56

                     [붓다를 만난 사람들] 9. 사리풋타

 

佛法 잘 이해하고 탁월하게 설명햇던 지혜제일

 

외도 산자야의 제자였다 부처님께 출가


교단 어려울 때마다 지혜로 화합이끌어

 

 

부처님 당시, 갠지스강 주변 일대는 그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는 대도시의 번영과 강력한

신흥대국의 출현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기존의 계급제도에서 정점을 차지하고 있던 바라문이라는 사제 대신에 국왕이나 자산가와

같은 새로운 상층계급을 만들어내는 등 인도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들의 정신세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아직 삶의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가는 주변 환경에 방황하며,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줄 만한

고차원적인 가르침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요구가 반영되어서일까. 반(反)바라문주의를 외치는 사문(沙門)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윤회와 해탈 등에 관해 독자적인 가르침을 제시하며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부처님 역시 사문이었다.

불교문헌에서는 이 무렵 활동하던 사문 가운데 대표적인 6명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른다.

 

육사외도란 불교에서 볼 때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을 설하는 6명의 외도를 가리키지만, 당시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육사외도 가운데 산자야 벨랏티풋타(Sañjaya Belaṭṭhiputta)라는 사상가가 있었다. 그는 회의론자로

예를 들어, ‘내세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만약 내가 내세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내세는 존재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것과 다르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그렇지 않다고도 생각하

지 않는다. 또한 그렇지 않는 것이 아니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회피했다.

그의 주장은 뱀장어처럼 미끈미끈하여 좀처럼 붙잡을 수 없는 교설이라 하여, 만론(鰻論)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산자야에게는 250여명의 바라문 제자가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주로 지식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점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세가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당시의 새로운 사상가들이 즐겨 논한 논제였는데,

사실 이는 그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어찌 보면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가 우스운 것인지도 모른다.

산자야는 이와 같은 애매한 답변 형식을 통해 헛된 논의를 반복하고 있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조소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16세 때 친구 목갈라나와 출가

산자야의 제자 가운데 특히 스승의 총애를 받는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리풋타(Sāriputta). 어머니의 이름이 루파사리

(Rūpasārī)였기 때문에 ‘사리의 아들’이라는 의미에서 사리풋타라 불렸지만, 때로는 우파팃사(Upatissa)라고도 불렸다.

작은 체구이지만 이목구비가 매우 아름다운 미소년이었다. 그는 라자가하의 북쪽에 위치한 한 마을에서 거부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

났는데, 16세 때 동네 친구인 목갈라나(Moggallāna)와 함께 산자야 밑으로 출가했다.

어느 날 목갈라나와 함께 산정제(山頂祭)를 보러갔다가 ‘이 화려한 축제도 100년 후에는 무엇이 남으리….’하고 문득 무상함을 느껴

친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친구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당시 크게 번영하고 있던

산자야의 교단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누구든지 먼저 깨달음을 얻게 되면 다른 한 사람을 인도해 주자는 약속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열심히 수행 정진했다. 그러나 산자야의 교설을 이해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고, 이해한 후에도 그들은 여전히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라자가하를 거닐고 있던 사리풋타의 눈에 한 사문의 모습이 들어왔다. 가지런히 가사를 갖추어 입고 단정하

게 발우를 들고 있는 그 사문은 걸음걸이에서도 시선에서도 움직임에서도 당당한 위의를 느낄 수 있었다. 사리풋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 세상에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람이리라.” 그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제자 앗사지(Assaji)

비구였다. 부처님께서 초전법륜의 대상으로 삼은 5비구 가운데 한 명이다. 앗사지가 식사를 끝내자 사리풋타는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 밑으로 출가했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누구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있습니까?” 앗사지는 대답했다.

“석가족의 집으로부터 출가한 위대한 수행자입니다. 저는 그 분 밑으로 출가했습니다. 저의 스승은 그 분입니다.

저는 그 분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사리풋타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의 스승은 무엇을 주장하고 무엇을 설합니까?”

“저는 아직 출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르침과 계율을 이제 막 배우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그 분의 가르침을

상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요점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 발생하느니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한다.

모든 법이 소멸하는 것에 관해서도 여래는 또한 그와 같이 설한다.’”

이를 들은 사리풋타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산자야 밑에서 수행을 하면서도 뭔가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이제야

진정 추구할 만한 길을 찾은 느낌이었다. 사리풋타는 환희했다. 그 길로 달려가 친구 목갈라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의기투합

한 두 사람은 부처님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스승인 산자야에게도 함께 갈 것을 권했지만 거부당하고, 결국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

는 산자야의 제자 250여명의 바라문과 함께 부처님이 계신 죽림정사로 향했다. 제자들이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산자야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통분했다고 한다.

 

한편, 저 멀리서 사리풋타와 목갈라나가 동료수행자들을 이끌고 걸어오고 있는 모습을 보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기 두 명의 벗이 오고 있구나. 그들은 언제가 내 제자들 가운데서 쌍벽을 이루며 가장 훌륭한 두 제자가 될 것이다.

부처님 앞에 다가온 두 사람은 부처님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예를 올리며 이렇게 말씀드렸다. “존귀한 분이시여, 저희들은 존사

밑에서 출가하고 싶습니다.” “잘 왔구나, 비구여. 가르침은 잘 설해졌다. 괴로움의 올바른 소멸을 위해 수행하여라.” 부처님의 말씀

은 곧 구족계가 되었고, 이렇게 해서 그들은 불교승단의 수행자로 다시 태어났다.

 

“가르침을 전하는 장군” 칭송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수행했고, 점차 부처님의 예언대로 불교교단을 대표하는 수행자가 되어

갔다. 그러나 처음에는 우여곡절도 많았던 것 같다. 특히 사리풋타는 매우 온화하고도 순수한 성품의 소유자였기에 다른 비구들로

부터 불이익을 당하거나 놀림을 받는 일도 있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라자가하로부터 사왓티의 기원정사를 향해 가시던 어느 날이었다. 해가 지자 서둘러 비구들이 숙소를

차지하는 바람에 늦게 온 사리풋타는 잘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근처의 한 나무 밑에서 잠을 청했다. 이른 아침 부처님께서 밖으로

나와 기침을 하시자 때마침 저쪽 나무 밑에서도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있는 자는 누구냐?” “부처님, 사리풋타입니

다.” “사리풋타냐. 그런데 너는 왜 거기 있느냐?” 사정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을 소집하여 법랍, 즉 출가한 햇수에 따라 와좌

처 등을 분배할 것을 제정하셨다고 한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불법을 처음 알려준 앗사지 비구의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하고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사리풋타는 죽는 날까지 앗사지가 머물고 있는 곳을 향해서는 발을 뻗고 자지 않았다. 이 연유를 잘 모르는 일부 비구들은

외도에서 전향한 사리풋타에 대한 일종의 비아냥으로 그를 방향숭배자라 놀리곤 했지만, 그는 굳이 이유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비구들이 다 남쪽으로 발을 뻗고 자고 있는데 혼자서만 북쪽으로 발을 뻗고 자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다른 수행자들의

눈에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앗사지 비구에 대해 진정 감사의 마음을 느끼고 있던 사리풋타에게 있어

다른 비구들의 조롱쯤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던 것이다.

지혜로운 사리풋타는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결국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서도 첫 번째로 거론될 만큼 유력한 사람으로

‘가르침을 전하는 장군’이라는 말로 칭송될 정도에 이르렀다. 지혜제일로 평가되는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설하는데 탁월

한 능력을 보였고, 이 점은 부처님으로부터도 충분히 평가받았다. 한번은 세라(Sela)라는 바라문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누가 당신의 장군입니까? 스승의 상속자인 제자는 누구입니까? 이 굴려진 법륜을 이어서 굴릴 자는 누구입니까?”

“세라여, 내가 굴린 법륜, 무상의 법륜은 사리풋타가 굴린다. 그는 여래를 따라 나타난 사람이니라.” 부처님의 법의 상속자로까지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리풋타에 대한 부처님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 것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사리풋타는 동료수행자들 사이에서도 점차 존경의 대상이 되어갔다. 그들은 사리풋타에 대해 ‘성내는 일 없고, 욕심도 없으며,

선하고, 스스로를 잘 제어하며, 스승의 칭찬을 받는 선인’이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부처님으로부터 최고의 신뢰를 받으면서도 결코 자만하는 일 없이 묵묵히 불법을 배우고 실천하며 불교교단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평생 노력했던 사리풋타. 데와닷타가 반역을 일으켜 500명의 비구들을 데리고 승단으로부터 떠나갔을 때 그들을 다시 데려온 것도,

부처님이 만년에 병환으로 설법이 어려울 때 대신 설법하도록 의탁 받은 것도, 아난을 부처님의 시자로 삼을 것을 권유한 것도 다름

아닌 바로 그였다. 

 

[붓다를 만난 사람들] 10. 케 마

 

부귀영화 버리고 출가.... 혜성 같은 지혜 빛나

 

제행무상 진리 깨달아 비구니 지혜제일로 뛰어난 설법으로 대중교화 적극 나서기도

 

 

“부처님께서는 미인을 싫어하신대….”
신체의 부정을 즐겨 설하시다 보니 이런 소문이 날만도 하다. 한때 마가다국에는 부처님이 미인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소문이 여인들 사이에 퍼졌다. 이 소문은 마가다국의 왕비인 케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마가다국의 사가라(Sāgala)시의 왕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미모의 소유자였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피부로 그녀는 당시 최고의 강국이었던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아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른 터였다. 케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좋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그녀는 거울을 볼 때마다 만족스러운 미소를 떠올렸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신체의 부정을 설하시며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도 감탄하는 일이 없으시다니 별로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케마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만나봐야 자신의 외모를 칭찬해 주지도 않을 것이고, 괜히 신체가 부정하다느니 어쩌느니 기분 상하는 말씀만 하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부처님을 만날 기회가 있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피했다. 부처님과 절친한 사이로 신앙 또한 깊은 우바새였던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을 뵈러 갈 때마다 함께 가자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사양했다.

 

“아름다움의 과실(過失)? 내가 왜 그런 설법을 들어야 해? 아름답게 태어나서 행복하기만 한데.”

 

케마는 부처님을 만나는 것이 정말 싫었다. 한편, 빔비사라왕은 어떻게든 아내인 케마에게도 부처님의 법을 접할 기회를 갖게 하고 싶었다. 왕과 부처님의 인연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이전부터 시작된 깊은 것이었다. 출가하여 구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마가다국으로 들어간 싯다르타는 성안에서 탁발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 모습을 본 것이 빔비사라왕이었다.

 

왕은 젊은 구도자의 온 몸에서 발하는 위광에 끌려 감탄하며 언제든 뜻을 이룬다면 자신에게 그 진리를 가르쳐달라고 청했고, 부처님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도 후 라자가하를 방문하여 왕에게 법을 설했다고 한다. 왕은 많은 제자를 거느리고 있던 부처님을 위해 라자가하의 근교에 있던 죽림(竹林)에 승원을 지어 바쳤고, 이후 부처님께서는 종종 이곳에 머무르시곤 했다. 이 곳 죽림정사에서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는 것이 빔비사라왕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다.

 

빼어난 미모로 왕비의 자리 올라

어느 날, 케마를 부처님께 데리고 갈 묘안을 떠올린 왕은 대신과 짜고는 그녀 앞에서 죽림의 아름다움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왕은 “그냥 죽림만 구경하고 올 것이다. 부처님은 절대 안 만날 테니까 걱정 말거라”고 안심시켰다. 결국 케마는 왕을 따라 나섰다.

 

이리저리 대나무 숲을 거닐며 산책을 즐기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승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케마는 설마 부처님이 계실까 하며 승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한편 케마가 올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부처님은 신통을 사용하여 천계에나 살 듯한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에게 부채질하는 모습을 만들어 내셨다. 우연히 이 모습은 본 케마는 너무나도 아리따운 그녀의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어떻게 저렇게도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비한다면 자신이 그 동안 그렇게 뽐내던 스스로의 미모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부처님께서는 천녀의 미모가 늙어가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이셨다. 이는 빠져나가고,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고, 피부는 깊게 주름이 파이며 쭈글쭈글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케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미모. 그 동안 자신이 그토록 애착을 느끼며 가꾸어왔던, 또한 자만해 왔던 미모의 끝이 저런 것이라니…. 언젠가는 자신의 신체도 저렇게 흉하게 늙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몸서리쳤다.

 

케마의 마음에 동요가 일고 있는 것을 꿰뚫어보신 부처님께서는 신체에 대한 애착을 버릴 것을 그녀에게 설하셨다.
“미모에 집착하지 말거라.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나니, 무상의 도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아름다움도 젊음도 이 천녀처럼 언젠가는 늙어 추하게 변해 가느니라.”

 

그 동안 육체의 아름다움에 매달려온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보며, 그녀는 처음으로 외모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났다. 부처님께서는 몸이라는 것이 사실상 얼마나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인가를 말씀하시며,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주시하여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아가 내부에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끄고 열반에 도달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이 가르침을 듣고 성자의 경지에 도달한 케마는 왕궁으로 돌아와 남편 빔비사라왕에게 출가의 뜻을 내비쳤다. 이전과는 달리 케마의 얼굴에서 성자의 기운을 느낀 왕은 그녀의 출가를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황금 가마에 태워 당당하게 비구니승단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출가 후 그녀의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일도 있기는 했다. 어느 날 케마는 악마가 속삭이며 유혹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는 젊고 아름답구나. 나 역시 젊고 한창때이다. 자, 케마여, 우리 다섯 가지 악기나 연주하며 즐겨보지 않겠느냐.”

 

언젠가는 사라질 이 젊음, 그리고 아름다움…. 지금 마음껏 즐기지 않는다면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케마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한 가닥 욕망이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올바른 길을 발견한 케마의 마음은 곧 제자리를 찾았다.

 

“병들고, 부서지기 쉽고, 악취를 풍기는 이 신체로 인해 나는 시달려왔으며 혐오를 느끼고 있다. 애욕에 대한 헛된 집착은 이미 뿌리째 뽑아 버렸다. 모든 욕망은 칼과 창에 비유되나니, 이들은 개개인의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의 덩어리를 난도질한다. 그대가 ‘욕락’이라 부른 것은 이제 내게 있어서는 ‘즐겁지 않은 것’이다. 쾌락의 즐거움은 모두 파괴되고, 무명의 암흑덩어리는 산산이 부서졌다. 악마여, 알거라. 너는 패배했다. 나는 올바르게 깨달은 이, 최고의 스승에게 귀의하여 그 분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났다.”

 

출가 15일만에 아라한과 증득

이미 육체의 무상을 꿰뚫어 본 케마는 헛된 욕망의 즐거움에 빠져 고통 받는 길을 단호히 거부했다. 비구니가 된지 15일째 되는 날, 포살 중에 눈앞에 놓인 등잔불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게 된 그녀는 이후 타고난 총명함과 성실한 수행으로 비구니 제자 가운데 ‘지혜제일’로 평가받을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수행과 교리, 두 가지 모두에서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그녀를 비구들조차 당할 길 없어, 그들은 케마가 있는 승단에 교계(敎誡)하러 가기를 꺼렸으며, 설사 길에서 만나도 모두 피해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와 교리적 문답을 나눈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도 부처님과 그녀의 대답에 한 구절의 차이도 없다는 점에 놀라며, 케마의 불법 이해 내지 설법 능력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그녀를 지혜제일로 칭찬받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편 케마는 웁파라반나라는 비구니와 특히 절친하게 지냈다. 웁파라반나는 출가하기 전 어머니와 남편을 공유하고, 딸과 남편을 공유하는 기구한 운명을 살았던 여인이었는데,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부처님으로부터 비구니제자 가운데 ‘신통제일’이라 평가받을 정도로 뛰어난 비구니로 거듭났다. 부처님은 케마와 웁파라반나야말로 비구니의 척도이자 모범이라 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마치 비구들 가운데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의 관계처럼 이 두 사람은 친자매와 같은 두터운 우애를 지니고 있었다.

 

살아온 삶도 정반대였고, 미모로 인해 겪은 운명도 서로 달랐지만, 미모와 애욕이 야기하는 과실에 대한 이해에는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일까.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몹시도 더운 어느 여름날, 사왓티 근교에서 수행을 하던 케마와 웁파라반나는 잠시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그 모습을 본 악당들이 들이닥쳐 폭행하려 했다.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도 없는 상황임을 안 두 사람은 자신들의 두 눈알을 파내어 악당들에게 들이대며 제행무상의 가르침을 설했고, 이 모습을 본 악당들은 감복하여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행동은 신통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여지는데, 여하튼 애욕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꿰뚫어본 이들이기에 실행 가능했던 것이리라.

 

왕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누구나 부러워하는 미모로 한 나라의 왕비까지 된 여인 케마. 아름다운 미모와 권력, 부에 대한 애착을 끊는 일이 어찌 쉬울까마는, 그녀는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무상의 진리를 깨달고 헛된 집착을 벗어던지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그녀의 버림이기에 더 위대하다.

 

다듬고 다듬으며 감추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추하게 늙어가는 이 육체, 또 언젠가는 형체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질 권력과 부. 그 허망함을 알면서도 이들로부터 가차 없이 버림받기 전까지는, 아니 버림받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좀처럼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들의 행로이건만, 케마는 이 모든 것들의 허망한 실체를 적나라하게 들여다본 순간 미련 없이 애착을 벗어던졌다. 이 위대한 용기야말로 그녀를 부처님의 비구니제자 가운데 최고라 칭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리라. 

 

[붓다를 만난 사람들] 11. 난다.

왕궁의 부귀 버리고 포살·설법 대가 거듭나

부처님 설법 듣다가 얼떨결에 출가
천상 쾌락도 덧없음 깨닫고 정진행

 

 
삽화=김재일 화백.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각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슛도다나왕은 여러 차례 부처님께 사람을 보내어 카필라성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성자가 된 아들의 모습, 아니 그냥 있는 그대로의 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늙은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부처님은 청을 받아들여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친족들을 위해 설법을 하셨다. 첫째 날도 둘째 날도 그렇게 시간을 보낸 후 3일째 되는 날, 부처님은 난다가 카필라성의 태자로 책봉되어 새로 마련된 궁전으로 들어간다는 소식, 그리고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으셨다. 난다는 부처님의 이복동생이었다.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인 슛도다나왕은 마야부인의 동생이었던 마하파자파티를 후비로 간택했는데, 바로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난다였다.

소문을 들으신 부처님은 난다를 제도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는지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부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난다가 기다리다 나와 보니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위해 빈 발우를 들고 계셨다. 부처님께 음식을 드리고자 빈 발우를 받아들자, 부처님께서는 아무 말도 없이 그 길로 오던 길을 되돌아가셨다. 당황한 난다는 발우를 돌려드리기 위해 황급히 뒤를 쫓았다. 결국 부처님의 처소에까지 따라가게 된 난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다 얼떨결에 출가하고 말았다.

삶의 고통이나 깨달음에 대한 열망, 그 어느 것도 일찍이 느껴본 적 없는 난다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왕의 아들로서 그 무엇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아온 그이다. 앞으로는 또 어떠한가? 앞날을 예기할 수 없는 것이 삶이라고는 하지만, 그에게는 왕이라는 지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그에게는 카필라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다는 자나파다칼야니라는 매력적인 아내가 있었다. 이제 막 신혼의 단꿈을 즐기려던 참인데 출가라니…. 출가해야 할 이유도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깨달음을 얻어 성인이 되어 고향을 찾은 형의 권유를 차마 뿌리치지 못해 저질러버린 일이었다.

결국 출가는 했으나 난다의 심신은 여전히 카필라성의 태자로 머물러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나도 고된 출가생활은 그를 더욱더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난다는 출가하기 전에 아내가 헤어지면서 남긴 ‘빨리 돌아오세요’라는 한 마디를 잊지 못한 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혼자 실없는 웃음을 짓거나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공상을 하며 넋을 잃고 앉아 있곤 했다. 또 왕자 시절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채 온 몸을 치장하기를 좋아했으며, 때로는 좋은 옷과 발우를 든 채 희희덕대며 시내를 걸어 다니기도 하는 등, 출가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여 부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곤 했다.

 

원치 않은 출가로 부처님 원망도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서도 꽃미남 중의 꽃미남이었던 난다였기에 그의 행동은 더욱 더 눈에 띄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또렷한 느낌의 단정한 모습은 부처님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우 유사한 모습이었다. 형제이니 닮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저 멀리 난다가 오는 모습을 본 비구들이 그를 곧잘 부처님으로 착각하여 일어나서 예를 갖추고 맞이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여, 훗날 그를 위한 특별한 색의 옷을 만들어 입힐 정도였다고 한다. 오죽하면 ‘아름다운 난다’라는 의미의 ‘순다라난다(Sundarānanda)’라고까지 불렸겠는가.

이 잘생긴 난다는 자신이 두고 온 권력과 부, 그리고 아름다운 아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채 깊이 방황했다. 게다가 그의 너무 왕성한 성욕 역시 골칫거리였다. 결혼하자마자 부처님의 손에 이끌려 출가 생활을 시작한 그는 솟구치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했다. 이처럼 난다는 세속의 보통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모든 요소를 다 갖추고 있었다. 권력과 재물, 잘생긴 외모, 건강, 게다가 아름다운 배우자까지…. 부처님의 뜻을 어기지 못해 반강제로 출가한 난다는 화려한 세속생활을 꿈꾸며 자나 깨나 환속할

궁리 만 했다.

그러나 부처님 역시 질세라 그가 밤중에 도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정사의 문을 잠그게 하기도 하시고, 또 음욕이 초래하는 재난을

적극적으로 설하시는 등, 그의 환속을 막고자 필사적인 노력을 하셨다. 그러나 난다의 머리속에는 하루라도 빨리 환속하여 아내가 있는 궁전으로 돌아가 예전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난다를 데리고 히말라야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는 그 곳에 있는 늙은 암컷 원숭이를 가리키며 ‘네 아내인 자나파다칼야니는 매우 미인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이 늙은 원숭이와 네 아내 가운데 누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난다는 어이 없어하며 대답했다.

‘부처님, 제 아내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어찌 저런 늙은 원숭이와 비교하십니까?’그러자 이번에는 그를 데리고 천상계로 올라가 그 곳 궁전에 살고 있는 500명의 천녀들의 모습을 보여주시며 ‘난다야, 이 500명의 천녀들과 네 아내를 비교하면 어떠하냐? 누가 더 아름다우냐?’라고 물으셨다. ‘늙은 원숭이와 제 아내를 비교할 수 없었듯이, 이 천녀들과 제 아내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제 아내에 비해 이 천녀들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서 법제자로 거듭

이 대답을 들으신 부처님은 난다에게 열심히 수행하면 목숨이 다한 미래세에 이 천녀들과 즐기며 살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난다는 열심히 수행하기는 했지만 그 수행은 애욕을 근본적으로 끊기 위해서가 아닌 천상에 태어나 천녀들과 즐거운 날들을 보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난다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부처님은 그를 다시 지옥으로 데려가셨다. 가마솥에 펄펄 물을 끓이는 모습을 본 난다는 옥졸에게 다가가서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부처님의 동생인 난다를 위해 끓이는 물이라고 대답했다. 천녀들과의 즐거운 삶이 끝난 후에는 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난다는 아연실색했다. 천녀들과의 즐거운 삶이 끝이 아닌 것이었다. 홀연히 깨달은 바가 있었던 난다는 지난날의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뉘우치며 열심히 정진했고 멀지 않아 깨달음을 얻었다.

난다의 이런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비구들은 그가 아직 출가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난다에게 그 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해 난다는 ‘이제 저는 더 이상 재가생활에 미련이나 집착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비구들이 부처님께 난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아뢰자, 부처님께서는 예전에는 난다의 성품이 허술하게

지붕을 이은 집과 같았으나 지금은 지붕을 잘 이은 집과 같다고 하시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으셨다.

 

“허술하게 지붕을 이은 집에 비가 새듯이, 탐욕은 평정과 통찰의 수행을 닦지 않은 마음에 스며드는 법이다.

지붕을 잘 이은 집에 비가 새지 않듯이, 탐욕은 평정과 통찰의 수행으로 잘 닦은 마음에는 스며들지 않느니라.”

 

난다 역시 예전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며 이런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

“나는 올바르게 사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치장에 빠지고, 들떠 있었으며, 희희덕대고, 애욕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태양의 후손이며 능숙하게 인도하는 부처님의 도움으로 나는 올바르게 실천하여 미혹의 생존으로 향하는 마음을 뿌리 채 뽑아버렸다.”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도 난다를 걱정하여 방문했다가 난다의 굳건한 마음을 확인하고는 안심하며 ‘이제 난다존자가 아라한이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없다’고 말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이를 들은 부처님은 단정한 비구로 난다를 이길 자 없다고 하시며 그를 ‘감관을 제어한 자들 가운데 최상의 자’라고 평가하셨다. 깨달음을 얻은 난다는 왕성한 성욕을 제어하여 두 번 다시 성욕에 지배당하지 않았으며,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이었다.

난다는 설법교계에도 상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설법교계란 보름마다 한 번 있는 포살일마다 한 명의 비구가 비구니승가에 가서

설법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설법교계 능력에 대해 부처님은 ‘난다야, 네가 비구니를 교계하는 것이 나와 전혀 다를 바가 없구나’라고 칭찬하셨다. 또한 비구니들도 그의 설법을 매우 즐겨 한번은 기원정사에서 법을 듣던 중 날이 저물어버려, 사왓티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늦어 성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문 밖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훗날 난다는 홀로 조용히 명상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시는 것은 마치 우담바라꽃이 피듯이 진귀한 일이다. 게다가 그 여래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희귀하고도 희귀한 일이다. 모든 것이 휴식하듯 그 분 덕에 나는 번뇌를 남김없이 멸할 수 있었다.” 진리의 세계를 미처 알지 못했을 때, 그는 자신을 반강제적으로 출가시킨 부처님을 죽도록 원망했을 것이다. 왜 원하지 않는 자신조차 출가시켜 이런 고통을 받게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눈뜬 난다는 이제야 부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해 주신 부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다.

부처님의 애정 어린 가르침이 없었다면, 평생 실체 없는 무상한 것들에 집착하며 고통 받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을 것을, 그 분의 인도로 심신의 평안을 얻고 이제 완전한 정신적 자유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우 난다의 변화가 부처님은 또 얼마나 기쁘셨을까. 무상한 재물의 상속이 아닌, 영원한 법의 상속이 이루어짐으로써 부처님과 난다는 피를 함께 나눈 세속의 인연을 이어 다시 한 번 성자로서의 끈끈한 인연을 나누게 되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