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인연

부처님의 이야기속 사람들 = 아자타삿투, 위사카 미가라마타, 아난다

백련암 2010. 12. 8. 14:43

[붓다를 만난 사람들] 15. 아자타삿투

 

부왕 죽인 죄 참회하며 불교 귀의

 

왕에 의해 살해당한 선인 왕자로 환생

 

불멸 후 칩엽굴 결집 후원 등 승가 외호

 

 

부처님 말년의 어느 날, ‘라자가하의 비극’이라 불리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인도의 최대강국 가운데 하나였던 마가다국의 빔비사라(Bimbisāra)왕이 자신의 아들인 아자타삿투에게 폐위당하여 라자가하 성 밖의 한 옥중에 있다 숨진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통곡했다.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주셨던 정법왕이 돌아가셨구나. 이 정법왕의 나라에서 우리들은 그 동안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던가.

죽는 날까지 부처님을 찬탄하셨던 빔비사라왕께서 돌아가셨구나.” 15세에 왕의 자리에 오른 빔비사라는 즉위 16년경에 부처님께 귀의,

이후 37여 년 동안 부처님과 친구처럼 지내며 승가의 외호자로서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자비심 깊고 현명한 처사로 세속의 왕으

로서도 뛰어난 선정을 베푼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인도의 복잡한 정치 상황과 권력·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경악할 사건으로 이어진다.


빔비사라왕에게는 케마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아자타삿투는 그 가운데 웨데히(Vedehī)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왕위를 물려줄 마땅한 자식이 없어 근심하던 빔비사라왕은 어느 날, 한 점성가를 찾아가 의논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라자가하성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비후라산에 한 명의 선인이 살고 있는데, 3년 후면 죽어 왕의 자식으로 웨데히왕후의 태내로 들어올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빔비사라왕은 어찌 3년이나 기다릴까 생각하며 몰래 자객을 보내 그 선인을 살해했다.


선인은 죽기 직전에 자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에게 내 말을 전해라. 내 목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건만 왕은 마음에 살의를 품고 입으로 명령하여 사람을 보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나 왕의 자식이 된다면, 마음에 살의를 품고 입으로 명령하여 사람을 보내 왕을 죽일 것이다.” 이 말을 남긴 채 선인은 살해되었다.


데와닷타 유혹에 왕위 찬탈


선인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웨데히왕비는 정말 임신했다. 빔비사라왕은 크게 기뻐하며 점성가를 불러 아들인가 딸인가 물었다.

점성가는 대답했다.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언젠가 왕에게 해를 가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흘려버리려 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머물던 걱정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결국 모든 사정을 웨데히왕비에게 털어 놓은 왕은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높은 누각으로 데려가 떨어뜨리자고 제안했다. 왕비는 망설

였지만 결국 왕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높은 누각에서 떨어진 아기는 새끼손가락 하나가 부러졌을 뿐 다른 곳은 멀쩡

했다. 아자타삿투란 ‘태어나기 전부터 원한을 가진 자’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빔비사라왕의 명령을 받고 온 자객에게 살해된 선인의 원한을 가지고 태어난 자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자신의 한 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아들에게 입혔을 심신의 상처를 가슴 아프게 여기며 왕은 한없는 애정을 쏟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

다. 빔비사라왕의 뇌리에서도 점성가의 예언은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자타삿투는 앙가국의 수도인 참파(Campā)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고, 이를 전해들은 빔비사라왕은 대노하여 그를 나무랐다. 앙가는 빔비사라왕에게 있어 특별한 곳이었

다. 빔비사라왕 때까지 마가다는 건립 7~8백년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대국은 아니었다. 그런데 일약 대국으로 성장할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빔비사라왕이 태자로 있을 무렵, 마가다는 앙가의 속국 상태였는데, 어느 날 앙가의 관원이 마가다에 와서 징세하는 것을 본 태자 빔비

사라는 크게 분노하며 그를 쫓아버렸다. 이로 인해 마가다와 앙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고, 승리한 마가다는 앙가를 병합하게 되었다. 이후, 빔비사라는 마가다과 앙가, 이 두 나라의 왕이 되어 양쪽 나라의 백성들로부터 칭송받는 선정을 베풀었다. 일찍이 앙가의 과다한

세금 부과로 마가다의 백성들이 받았던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아는 그였기에 앙가의 국민들에게는 그런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런데 부왕의 뜻을 어기고 아자타삿투는 앙가에 중세를 부과하고자 했고, 이는 당연히 왕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왕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은 아자타삿투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에 기름을

들이붓는 계기가 생겼다. 바로 데와닷타(Devadatta)의 유혹이었다. 데와닷타는 부처님의 숙부 아들로 부처님께서 성도 후 카필라성에

가셨을 때 다른 석가족 청년들과 함께 출가한 인물이다. 신통력 등을 보여주며 아자타삿투의 마음을 사로잡은 데와닷타는, 어느 날

아자타삿투에게 출생에 얽힌 비밀을 들려주며 그의 마음을 동요시켰다.


부왕에 대한 그의 분노는 한층 커졌다. 이를 감지한 데와닷타는 제안했다. “만약 왕자님이 부왕을 죽인다면, 저 역시 사문 석존을 죽일

것입니다. 왕자님은 부왕을 죽이고 새로운 왕이 되고, 저는 사문 석존을 죽여 교단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통쾌한

일입니까.” 아버지에 대한 분노, 그리고 왕의 자리에 대한 욕망, 이 두 가지가 결합되면서 아자타삿투는 가서는 안 될 길을 선택하고야

만다.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는 인륜을 저버리는 행동을 했던 것이다.


부처님 인연으로 참회의 삶


아자타삿투는 부왕을 옥에 가두게 하고 먹을 것도 주지 말라고 지시했다. 웨데히왕후의 걱정과 슬픔은 그 누구보다 컸다. 어느 날 웨데

히는 온 몸에 꿀을 바르고 보석장식품 속에 먹을 것을 숨겨 몰래 빔비사라왕을 만나러 갔다. 이를 알게 된 아자타삿투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는 어머니마저 죽이려 했지만, “일찍이 어머니를 죽인 왕은 없습니다”라는 지와카의 충고를 받아들여 옥에 가두는데 그쳤다.

지와카란 아자타삿투와 형제인 아바야왕자와 사라와티라는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자로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위해 의료를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왕위에 오른 아자타삿투는 데와닷타에게 날마다 수레 500대분의 공양을 보내어 공양했다. 때마침 기근이 발생하여 탁발을 할 수 없었던

500여명의 비구들은 부처님을 버리고 데와닷타에게 가버렸다. 한 때 이로 인해 부처님의 지위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극악무도한 아자타

삿투의 소행이 알려지자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을 비롯한 인근 나라의 왕들이 군대를 일으켜 라자가하를 공격했다. 특히 빔비사라왕에게 시집보낸 자신의 여동생 코살라가 자비심 깊은 왕의 예기치 못한 몰락을 슬퍼하다 급사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접한 파세나디왕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대노하여 마가다를 공격, 아자타삿투를 포획하고 코살라를 시집보낼 때 지참금으로 보냈던 카시국을

다시 빼앗아 왔다. 이 전쟁으로 인해 마가다국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어버렸는데, 거기다 홍수와 역병까지 겹쳐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

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자비심 깊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파세나디는 아자타삿투가 조카라는 점을 생각하여 그를 풀어주었다. 또한 카시국도 되돌려주었으며, 심지어 바즈라공주를 함께 보내어 아내로 삼게 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며 크게 상심한 아자타삿투는 두려움과 후회로 번민했다. 한때 아들의 병을 걱정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머니인

웨데히왕후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아자타삿투야, 예전에 네가 아플 때면 너의 아버지도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단다.” 후회의 눈물

을 흘리며 아자타삿투는 서둘러 대신을 보내 부왕을 풀어주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옥중에서 기력이 다해 버린 빔비사라왕은 대신

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혹시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은 아닐까, 이 보다 더 고통스러운 형벌이 가해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움에 떨다 의식을

잃고 그대로 숨졌다고 한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부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아자타삿투는 심각한 병에 걸릴 정도로 자책하며 괴로워하다 지와카에게 부탁하여 함께 부처님을 찾았다.

부왕이 평소에 그토록 존경하며 따랐던 정신적 지도자. 조금이라도 빨리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지금 이런 모습으로

서 있지는 않을 텐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절망하며 아자타삿투는 부처님을 마주하고 있었다.

부처님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40여년 가까운 세월을 친구처럼 지내온 빔비사라왕이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이제

그 아들이 자신에게 가르침을 구하며 이렇게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부처님은 만신창이가 된 아자타삿투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셨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과법의 도리를 설하여 그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셨다. 참회하며 아자타삿투가 떠나자 부처님은 말씀하셨

다. “아자타삿투는 실로 아까운 사람이다. 그가 만약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이 장소에서 깨달음을 열 수 있었을 것을…”

 

부처님과의 만남 이후, 아자타삿투는 승가의 외호자가 되었다. 날마다 세 번씩 부처님을 찾아 참회하고, 부처님을 맞이하며 90일 동안

궁중에서 안거를 보내시도록 하기도 했다. 또한 라자가하 근교에 포살당을 지어 불교의 흥륭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의 불사는 부처님의

열반 후에도 이어졌다. 불멸후에 그의 제자 500명이 라자가하의 칠엽굴에 모여 불전편찬회의를 했을 때도 그는 물질적인 후원을 아끼지않았다. 또한 자신의 몫으로 차지했던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라자가하에 탑을 세우기도 했다. 결국 아자타삿투 역시 인과의 도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아들 우다야밧다카(Udayabhaddaka)에게 죽임을 당하는 최후를 맞이했지만, 부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탐진치"가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결말과 인과의 도리를 꿰뚫어보며 진정한 참회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리라.

 

 

[붓다를 만난 사람들] 16. 위사카 미가라마타

 

자애로운 삶의 모습 통해 불법 홍포한 우바이
 

이교도 모진 박해, 굳은 신심으로 극복      차별없는 보시실천으로 ‘어머니’ 칭송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에는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거부 장자 5명이 살고 있었다. 조티야(Jotiya), 자틸라(Jaṭila), 멘다카(Meṇḍaka), 푼나카(Puṇṇaka), 카카발리야(Kākavaliya)가 그들이다. 이들이 축적한 재산은 상식적인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왕조차도 그들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이들 가운데 특히 멘다카는 재산도 재산이지만, 높은 인격과 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장자였다. 원래 푸라나 캇사파라는 외도를 섬기고 있었으나, 부처님께 귀의하여 열성적인 불교신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다난자야(Dhanañjaya)라 불리는 아들이 있었고, 다난자야에게는 위사카라는 무남독녀가 있었다.


7세에 깨달음 첫단계 ‘예류과’ 증득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앙가국의 한 도시인 밧디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멘다카는 사랑하는 손녀딸 위사카를 부처님께 소개하고자 마음먹었다.

멘다카는 위사카에게 말했다. “네 자신의 행복을 위해, 또한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 가서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청해 들어라.” 위사카는 500명의 시녀를 동반하고 부처님을 찾아가

예를 갖춘 후 한 쪽에 앉았다. 아직 7세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지만, 고고한 외모나 품위 있는

행동거지가 눈길을 사로잡는 위사카였다.

 

부처님은 그녀를 위해 법을 설하셨고, 아직 어리지만 총명했던 위사카는 그 자리에서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과를 얻었다고 한다.

그녀와 부처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녀가 성장해가던 어느 날, 일가가 코살라로 이주해가게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과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은 서로 여동생을 처로 삼는 등 친하게 교류하고 있었는데, 마가다의 거부 장자를 부러워한 파세나디왕이 그들 가운데 한 명을 자신의 영토로 이주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거부 장자의 이주로 인한 경제적 이익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빔비사라왕은 거절의 뜻을 내비쳤지만,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는 파세나디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멘다카의 아들인 다난자야와 상의한 끝에 그의 일가가 옮겨 가기로 했다. 파세나디왕을 따라 코살라국의 수도 사왓티로 향하던 다난자야 일족은 도중에 비옥한 땅을 발견하자 왕의 허가를 얻어 그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이 마을은 사케타(Sāketa)라 불렸다.


한편, 사왓티에는 미가라(Migāra) 장자가 살고 있었다. 다난자야의 재산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사왓티에서는 유명한 장자였다. 그에게는 푼나밧다나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결혼 적령기임에도 결혼을 회피하며 속을 썩이고 있었다.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에게 그가 내건 조건은 5가지 요소를 갖춘 미인을 데려오라는 것, 즉, 아름다운 머리카락,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치아, 아름다운 피부, 그리고 젊음이었다.


고민 끝에 미가라 부부는 8명의 바라문에게 돈을 주고 그런 조건을 갖춘 여인을 찾아오라고 부탁했다. 인도 곳곳을 찾아 헤매던 바라문들이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위사카였다. 인연이었던 것일까, 위사카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다난자야는 딸의 의견을 존중하여 미가라와 사돈을 맺는다. 그런데 미가라 장자가 아들 결혼식 축연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그의 집 근처의 정사에 부처님이 제자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가라는 다른 종교의 나체 수행자들을 불러 공양하려 했다. 이 나체수행자들은 자이나교도 혹은

아지비카교도라고 한다. 미가라는 불교신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미가라는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맛난 음식을 준비한 후 나체 수행자들을 초대했다. 그리고 위사카를 불렀다.


“위사카야, 이리 와서 아라한들에게 인사드려라.” 위사카는 그녀 자신 예류과에 도달한 불제자였으므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의미의 아라한이라는 말을 듣자 뛸 듯이 기뻐하며 달려왔다. 하지만 공양을 받고 있는 자들은 나체 수행자들이었다. 그녀는 아연실색하여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은 아라한이 아닙니다”라며 자신의 처소로 가버렸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난 나체 수행자들은

미가라에게 당장 며느리를 쫓아내라고 부추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미가라는 큰 의자에 앉아 금으로 된 그릇에 담긴 달콤한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마침 그때 한 비구가 탁발하러

장자의 집으로 들어왔다. 미가라에게 부채질을 하며 곁에 서있던 위사카는 자신이 직접 먹을 것을 내주고 싶었지만, 나설 자리가 아니라 생각하며 시아버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미가라는 모른 척하며 계속 주스만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위사카는 비구에게 말했다.


“스님, 부디 다른 곳으로 가서 탁발해 주세요. 지금 저의 시아버님은 오래된 것을 마시고 있습니다.” 이를 들은 미가라는 격노했다.

나체수행자들이 그녀를 쫓아내라고 했을 때 이를 만류했던 그이지만, 지금은 도저히 화를 억누를 길이 없었다. 하인들에게 위사카를

끌어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위사카의 편이었던 하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위사카는 말했다.


“아버님, 이 정도의 일로 저를 내쫓지 말아 주세요. 제가 무슨 하녀로 이 집에 와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하여

저의 아버님이 저를 시집보낼 때 8명의 상인을 함께 보내며 만약 딸에게 무슨 과실이 있다면 잘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 분들을 불러 제 과실을 조사하도록 해 주세요.”


승단에 사원 보시…포교에 큰 기여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미가라는 8명의 상인을 불러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그들의 판단을 구했다. 사실여부를 묻는 그들에게 위사카는

대답했다.


“저는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탁발승이 문 앞에 서있는데도 아버님은 달콤한 주스를 마시며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이 세상에서 보시하는 공덕은 쌓지 않고, 그저 과거에 행한 공덕으로 지금 달콤한 주스를 마시고 있구나. 말하자면 오래된 것을 마시고 있는 셈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여 말한 것입니다. 제가 잘못입니까?”


그녀의 대답을 들은 8명의 상인은 그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미가라에게 잘못은 없다고 했다. 미가라는 무언가 트집을 잡기 위해 계속 그녀를 비방했지만 결국 아무런 과실도 찾지 못했고, 8명의 장자는 아무 잘못도 없는 위사카를 쫓아내려 했다며 미가라를 질책했다. 친정으로 가겠다는 위사카를 만류하는 미가라에게 그녀는 말했다.


“아버님,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앙하는 집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저희들은 승가 없이는 생활할 수 없습니다. 만약 마음껏 승가를 돌볼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저는 떠나지 않겠습니다.” 미가라는 대답했다. “알겠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네가 존경하는 스님들을 돌보아라.”


어느 날 위사카는 부처님을 초대한 후, 시아버지에게 오시라는 전갈을 보냈다. 나체 수행자들의 방해로 미가라는 천막 밖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부처님의 목소리는 마치 각각의 한 사람을 위해 설법하는 듯 했다. 마치 달이 하늘 한 가운데로 왔을 때 모든 사람이 자기 위에 달이 있다고, 달이 자신을 비추고 있다고 여기듯이, 부처님은 그 누가 어디 있든 그 사람을 마주하고 법을 설하시는 것만 같았다. 천막 밖에서 듣고 있던 미가라의 귀에도 부처님의 설법은 도달했다. 그리고 그 역시 깨달음의 첫 번째 단계인 예류과를 얻고 부동의 신심을 갖추고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마음이 견고해졌다. 환희심을 일으킨 미가라는 며느리 위사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부터 너는 나의 어머니이다.”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과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이후, 위사카는 ‘미가라의 어머니’라는 의미의 ‘미가라마타’라 불렸다고 한다. 미가라는 부처님 앞으로 다가가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지금까지 보시의 공덕을 몰랐습니다. 며느리 덕분에 이제야 그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났습니다. 위사카가 우리 집에 들어온 덕분에 저는

여기 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 미가라의 집은 불법으로 충만했고, 위사카도 더욱 더 보시 등의 선행에 힘썼다. 수닷타 장자가 우바새 가운데 보시제일이라면,

위사카는 우바이 가운데 보시제일이었다. 그녀는 부처님과 승가를 위해 보시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사왓티 동쪽 성 밖에 있던 풉바라마(Pubbārāma)에 세웠던 정사는 당시 수닷타가 사왓티 남서쪽에 세웠던 기원정사와 더불어 코살라국의 2대 교화 거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불심 깊은 집안에서 자라 7세에 할아버지인 멘다카의 권유로 부처님을 만난 그녀. 그녀의 신심이 허술한 것이었다면, 결혼 후 시아버지와의 갈등에 좌절하며 그 신심의 끈을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보고 또 그 진리의 실천 속에서 다시 진리를 보았던 그녀는 불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부처님과의 만남을 권유하며 멘다카가 말했듯이 그녀와 부처님의

만남은 그녀뿐만이 아닌, 그녀 주위의 모든 이들을 행복으로 이끄는 길이었다.

 

위사카를 보는 사람들은 말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저 아름다운 모습을 언제까지나 보고 있고 싶구나. 그 모습만 보아도 마음이 정화되다니 정말 신기하구나.” 인간으로서 최상의 조건을 지니고 태어난 그녀가 그저 부잣집 딸로 자신의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이기적인 삶을 추구했다면, 그 보다 더 아까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시의 공덕을 알고 있던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자애로운 삶을 살았고, 이런 그녀의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삶의 위안이 되었다. 

 

 

[붓다를 만난 사람들] 17. 아난다

 

25년간 부처님 시봉…경전 편찬 주도한 다문제일〈多聞第一〉

 

특권 버리고 부처님 시중·법문 기억에만 최선
여성 출가 청원…따뜻한 성품으로 칭송 자자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지 20년째 되는 해, 그러니까 아마도 부처님의 나이 55세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리풋타, 목갈라나, 마하캇사파, 아누룻다, 밧디야 등 내놓으라하는 대제자들과 더불어 라자가하 근처에 머물고 계시던 부처님께서는 어느 날 그들을 불러 모은 후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나보다. 몸도 늙고 힘도 예전 같지 않구나. 요사이 부쩍 시자가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아졌다. 내 시중을 들어줄 만한 시자 한 명을 골라주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그가 여러모로 나를 돌보아줄 것이고, 또 내가 사람들에게 설법할 때는 그가 그 요점을 잘 기억해 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 가는 육체, 그리고 기억력….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이제 곁에 머물며 일상생활을 돌봐주고, 또 자신이 설하는 법을 기억해 줄 누군가 특별한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끼신 것이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제자들 사이에서는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구보다 존경하고 사모하는 스승이건만 어찌 그분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드리지 못했단 말인가.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바로 콘단냐였다. “제가 시자가 되어 부처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콘단냐는 초전법륜의 대상이었던 다섯 비구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깨달음을 얻었던 제자였다. 그런 그가 부처님의 시자를 하겠다는데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콘단냐야, 너 또한 나이 들지 않았느냐. 육체 또한 많이 늙었다. 너 역시 시자를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의 제안은 정말 고맙지만 받아들일 수는 없구나.”


생각해보니 부처님과 거의 같은 나이. 더 이상 우길 수도 없어 콘단냐는 물러났다. 이어 사리풋타와 마하캇사파를 비롯하여 몇 명의 제자들이 시자를 자청하고 나서보지만, 부처님은 콘단냐와 같은 이유로 모두 거절하셨다. 자신들도 누군가의 시중을 받아야 할 노인들이건만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애틋한 마음에 시자 되기를 자청하며 나서는 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의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고맙지만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노인들에게 시자 역할을 맡길 수 없다며 거절하시는 부처님. 이렇듯 서로를 생각하는 스승과 제자들의 마음이 오고갔다.


그때 목갈라나는 이 모습을 쭉 지켜보며, 과연 스승이 원하는 시자는 어떤 사람일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신통제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지니고 있던 목갈라나는 부처님의 마음을 조용히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마음에 두고 계신 사람이 다름 아닌 아난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몇 명의 비구와 상의한 후, 목갈라나는 아난다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부처님의 시자가 되어 일상생활의 시중을 들어 드리고, 또 법을 설하실 때면 그 요지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다. 아난다는 펄쩍 뛰었다.


데와닷타·아누룻다 등과 출가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제가 시자가 되어 부처님을 모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도저히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의 의향이 그러하다는 대선배들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아난다는 부처님의 시자 역할을 받아들이고 만다.


단, 자신의 세 가지 바람이 허락된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이었다. 그 세 가지 바람이란 첫째, 새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부처님을 위해 만들어진 옷은 입지 않을 것, 둘째, 부처님을 위해 마련된 식사는 먹지 않을 것, 셋째, 때가 아닌 때에 부처님을 뵙지 않을 것이었다. 아난다의 이 세 가지 조건에는 자신이 시자로서 받을 수도 있는 특별한 혜택을 결코 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부처님의 시자가 되면 부처님께 공양된 옷을 나누어 받을 기회가 있을 수도 있고, 부처님을 위해 마련된 공양식을 함께 먹을 수도 있다. 또 시자가 되면 때가 아닌 때라도 마음대로 부처님을 만날 기회도 있다. 시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누릴 수도 있는 이런 모든 특권들을 자신은 누리지 않겠노라, 오로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상생활의 시중과 가르침의 기억만을 위해 시자가 되겠노라 스스로 원을 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겸허한 태도인가. 아난다는 부처님의 시자라는 지위를 결코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자리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이었다. 부처님은 아난다의 이 세 가지 바람을 기꺼이 받아들여 주셨고, 이렇게 해서 아난다는 부처님의 시자가 되었다. 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명이었을 아난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동경하며 바라보던 스승. 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관계를 넘어 이후 두 사람은 마치 하나의 몸처럼 25여년의 세월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그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히 아난다를 원하셨던 것일까.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난다가 자신보다 20살 이상이나 어리며, 또 친족이었다는 점이 먼저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난다는 부처님의 아버지인 슛도다나왕의 남동생의 아들로, 말하자면 부처님과는 사촌 형제였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고향 카필라왓투를 찾았을 때, 아난다는 동생 데와닷타 그리고 이복형제인 아누룻다 등 석가족의 양가집 청년들과 더불어 출가했다.


스승과 제자라는 점에서 사실 친족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시중은 역시 친족에게 부탁하는 것이 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아난다는 부처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기 때문에 시중을 들게 하기도 편하고 또 오랫동안 부처님을 모실 수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이 아난다를 시자로 선택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어질고도 성실한 아난다의 성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입멸 직전, 아난다를 칭찬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처님 열반 곁에서 지켜


“비구들이여, 과거제불의 시자는 지시받은 일만 했다. 하지만 아난다는 내가 눈짓만 해도 이미 내 마음을 다 읽고 알아서 일을 해 주었다.”


불교경전 곳곳에서 아난다의 따뜻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을 접할 수 있다. 한때 부처님께서 위사카 미가라마타라는 우바이가 세운 동원녹자모강당에 계실 때였다. 목욕 후 등을 말리고 있는 부처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난다는 부처님의 육체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그 등을 어루만지며 슬퍼했다고 한다. 또한, 부처님의 양모인 마하파자파티가 출가를 원했지만 부처님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 그녀의 출가가 받아들여지도록 부처님께 청을 올린 것도 그였다. 이렇듯 배려 깊은 아난다였기에, 그는 출·재가를 불문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사왓티의 재가불자들은 집안에 경사가 있어 특별한 행사를 할 때면 항상 아난다를 초대했다. 또한 코살라국의 파세나디왕의 부탁으로 아난다는 말리카왕비를 비롯한 여러 왕비들을 위해 후궁에 들어가 법을 설하는 중책을 맡기도 하였다. 코삼비에도 친분이 깊은 사람이 많아, 그 곳의 사마와티(Sāmāvatī)왕비로부터는 500벌의 옷 보시를 받았다. 남편인 우데나왕이 비구가 그렇게 많은 옷의 보시를 받다니 너무 사치스럽다고 비난했지만, 오히려 사마와티는 아난이 얼마나 물건을 소중히 하는 사람인지 그 예를 들어 설명했고, 이를 들은 왕은 500벌의 옷을 더 보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따뜻한 아난다의 태도는 여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고, 이로 인해 아난다는 입장이 난처해지는 일도 있었다.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일부 비구들의 눈에는 이런 아난다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특히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마하캇사파는 항상 아난다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무시하는 발언을 했는데, 비구니들이 이런 마하캇사파의 행동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때로는 침까지 뱉으며 야유를 퍼부은 탓에 마하캇사파와 아난다의 관계는 더욱 더 나빠졌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아난다는 부처님의 시자로서 조금도 손색없이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부처님의 만년, 쿠시나라를 향한 마지막 유행길도 아난다는 부처님과 함께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힘겹게 쿠시나라의 말라족 영토인 우파왓타나 동산의 사라숲에 도착하신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나를 위해 저 사라쌍수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향하게끔 자리를 펴다오. 너무 피곤해서 좀 눕고 싶구나.”


아난다가 자리를 펴자 부처님은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고 발위에 발을 포개신 후 조용히 누우셨다. 쿠시나라로 함께 여행을 하며 항상 마음 졸여왔던 아난다. 스승과의 이별이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한쪽에서 눈물을 흘리며 서있는 아난다를 보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울지 말거라. 슬퍼하지 말거라. 아난다야,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친한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헤어지고, 떠나며, 변화된다는 것을…. 어찌 그것을 피할 수 있겠느냐. 아난다야, 모든 것은 멸하기 마련이다. 한번 태어난 것이 언제까지나 파괴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니라.”
아난다는 부처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측은한 듯 지켜보시던 부처님께서는 말을 이으셨다.


“아난다야, 너는 참으로 오랫동안 사려 깊은 행동과 말과 배려로 나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잘 시봉했다. 아난다야, 너는 많은 복덕을 지었다. 앞으로 더욱 더 정진하여 빨리 번뇌를 멸한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라.”

 

부처님과 함께 했던 25여 년의 세월. 아난다는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부처님과의 추억을 안고 아난다는 제1결집에서 경(經)을 편찬하는 대 임무를 맡게 된다. 마치 시자로서의 임무를 완성이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