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인연

부처님의 이야기속 사람들 = 밧다 카필라니, 파타차라, 수닷타

백련암 2010. 10. 28. 01:32

[붓다를 만난 사람들] 12. 밧다 카필라니

 

대가섭의 아내…나란히 출가해 깨달음 얻어

 

출가 전 결혼해 12년 간 부부 인연
빼어난 외모로 언제나 세간의 관심

 

 

어느 날, 왓지국의 수도 웨살리에서 연화제(燃火祭)라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넘쳐나는 인파와 볼거리 속에서 한 바라문이 황금으로 된 미인상을 넣은 제단을 끌고 다니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가씨들, 이리 와 보세요. 여기에 공양을 올리면 멋진 사람을 만나게 된답니다.”

 

온갖 장신구로 치장한 어여쁜 소녀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굴리며 여기저기서 몰려들었다. 그 속에는 밧다라는 소녀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제단 가까이로 다가가자, 제단의 미인상은 순간 빛을 잃은 듯 색이 바래보였다. 그녀의 빛나는 아름다움에 상대적으로 빛을 잃은 듯 보였던 것이리라. 여하튼 이 모습을 본 바라문은 이 아이야말로 핍팔라야나의 배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부모를 만나 라자가하에 사는 대부호 바라문의 아들인 핍팔라야나와 부부의 연을 맺어 주자고 청했다.

 

이 바라문이 황금의 미인상을 넣은 제단을 끌고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그는 핍팔라야나라는 청년의 아버지의 스승으로 아들의 결혼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던 제자를 돕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핍팔라야나는 대부호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일찍부터 출가에 뜻을 둔 탓에 세속적인 것에 별 관심이 없었다.

 

장성한 그에게 날마다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님을 포기시키기 위해 그가 내보인 것은 황금으로 만든 미인상.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을 데려온다면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아들을 앞에 두고 난감해하는 제자를 위해, 바라문은 미인상을 모신 제단을 끌고 다니며 핍팔라야나의 신부감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이 바라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밧다와 핍팔라야나는 성대한 결혼식을 치르고 부부가 되었다.

 

그런데 핍팔라야나는 물론이거니와 밧다 역시 이미 출가에 뜻을 두고 살던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후에도 한 방에서 각자의 침대를 쓰며 서로 살을 맞대는 일 없이 살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하나의 침대만 남겨 두고 치워버렸지만,

핍팔라야나가 자면 밧다가 일어나고, 밧다가 자면 핍팔라야나가 일어나서 경행하는 등 몇 년의 세월이 흘러도 두 사람은

동침하지 않았다. 어느 날 자고 있는 밧다의 손에 독사가 기어오르려는 급박한 상황을 눈앞에 두고도 핍팔라야나는 그녀와의 피부 접촉을 피해 옷으로 그녀의 손을 치울 정도였다.

이렇게 두 사람은 12년 동안이나 한 방에 살면서도 서로 접촉하는 일 없이 청정한 생활을 했다.

 

결혼 생활 중에도 청정 지켜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가업을 이어받게 된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다가 기름 짜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기름을 짜라는 밧다의 명을 받은 하녀들은 “기름을 짜면 많은 벌레들이 죽게 되는데, 이 살생의 죄는 주인인 밧다에게 가겠지”라며 수군거렸다. 우연히 이를 듣게 된 밧다는 즉시 기름 짜는 일을 멈추게 한 후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 무렵 논과 밭을 돌아보고 있던 그녀의 남편 역시 힘들게 일하는 노예와 혹사당하는 소의 모습 등을 바라보며, “아, 모든 중생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구나”라며 우울해하고 있었다. 함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출가.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연락하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남편 핍팔라야나가 먼저 집을 나섰다.

 

그 후 머지않아 밧다 역시 집을 나섰다. 어디 한 곳 의지할 데도 없이 좀처럼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채 방황하던 그녀는

어느 날 한 유행외도를 만나 그 밑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그녀는 열심히 수행·정진했지만, 욕정에 눈먼 이들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이성을 잃고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외도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그녀는 푸라나라는 외도들의 스승을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호소했지만, 푸라나는 “나는 이

외도들로부터 존경받으며 많은 이익을 얻고 있다. 만약 그들을 처벌한다면 모두 내 곁을 떠나 버릴 것이다. 그러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구나”라며 발뺌을 했다. 밧다는 애욕의 더러움으로 가득 찬 축생과도 같은 무리들 속에서 하루하루 지옥과도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남편인 핍팔라야나는 부처님을 만나 귀의하고 소욕지족의 두타행자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바로 마하캇사파, 즉 대가섭이다. 캇사파 가문은 인도에서도 명문에 속하는데, 핍팔라야나는 캇사파 출신이었다. 그런데 승단에는 캇사파 3형제라 불리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구별하기 위해 마하캇사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마하캇사파는 석가족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 모습을 보며 세속에 두고 온 밧다를 떠올렸다. 좋은 스승을 찾게 되면 연락하겠노라 그녀에게 남긴 약속도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선정에 들어가 관찰해보니 밧다는 한 외도 밑에서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깨달음을 얻은 한 비구니를 불러 부탁했다. “갠지스강 주변에서 한 외도 밑에서 수행하고 있는 밧다 카필라니라는 수행자에게 가서 ‘당신의 남편 캇사파는 나와 같은 스승 밑에서 출가하여 수행하고 있습니다. 당신도 지금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저희 스승 밑에서 함께 수행합시다’라고 말해주시오.”

 

밧다 앞에 나타난 비구니는 마하캇사파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밧다는 물었다. “당신의 스승은 어떤 분이십니까?” 많은 외도들을 대하며 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경멸감을 느끼고 있던 그녀였기 때문이었을까. 미지의 스승에 대한 불안감과 호기심이 담긴 질문이다. 비구니는 대답했다. “제 스승님은 32대인상(大人相)으로 몸을 장엄하고 계시며, 80종호·16불공불법·10력·

4무소외·대자대비를 구족하고 계십니다. 스승님의 모든 성문 제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안도감을 느낀 밧다는 그녀를 따라 나섰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을 만나게 된 밧다는 부처님에 의해 마하파자파티 고타미의 비구니승가로 보내져 구족계를 받게 되었다.

 

세세생생 선업 깨달음도 빨라

 

그런데 출가 후에도 눈에 띄는 아름다운 미모로 인해 그녀는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발우를 들고 탁발을 하러 다니는 절세미인의 모습에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출가했을까?” 이 말을 들은 밧다는 이후 탁발하러 마을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가 탁발을 그만둔 이유를 전해들은 마하캇사파는 “만약 부처님께서 내가 걸식한 음식의 반을 밧다비구니에게 줄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 비구들로부터 이 말을 들으신 부처님은 “나누어 주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라며 허락해 주셨다. 그리하여 그는 걸식으로 얻은 음식의 반을 밧다에게 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때 츌라난다라는 비구니가 이를 보고 조소하며 빈정거렸다. “성자 마하캇사파는 출가하기 전에 밧다랑 한 집에서 12년이나 함께 살면서 범행을 닦았다고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삿된 정이 남아 걸식한 음식을 반반씩 나누어먹고 있구나.”

 

이 말을 들은 마하캇사파는 밧다를 찾아가 더 이상 음식을 나누어 줄 수 없으며, 이 상황은 밧다 스스로가 이겨내고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설했다. 밧다는 그의 말을 듣고 대용맹심을 일으켰다. 걸식하러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밤낮으로 정진한 그녀는 멀지 않아 법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신통력을 얻었으며, 안락을 얻었다. 훌륭한 한 명의 수행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밧다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심은 특별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와 더불어 승가

최고의 비구로 손꼽히는 마하캇사파의 세속시절의 아내가 아니던가. 게다가 빼어난 미모로 인해 언제나 눈에 띄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수행자들의 궁극적인 목표인 깨달음도 빨리 얻자 더욱 더 관심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비구니는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드렸다. “밧다비구니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는지요?”

부처님께서는 그녀가 전생에 쌓은 갖가지 공덕에 대해 설하시며 이미 오랜 과거생에 원을 세우고 세세생생 선업을 닦아왔다고 말씀하셨다.

 

밧다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었던 셈이다. 속세에서는 남편이었지만 이제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수행자로 거듭나 그녀를 따뜻하면서도 엄격하게 이끌어주는 동료수행자 마하캇사파, 그리고 이 두 사람의 수행자로서의 멋진 행보를 믿고 지켜보며 격려해주신 부처님.
훗날, 밧다가 읊었다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해진다.

 

“부처님의 자손이자 상속자인 캇사파는 마음이 안정되어 있습니다. 전생을 알고, 또한 천상과 지옥을 보았습니다. 마침내

성자 캇사파는 생존을 멸하고 직관지를 완성했습니다. 즉 이 3종의 명지(明知)에 의해 그는 3종의 명지를 갖춘 바라문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밧다카필라니에게도 3종의 명지가 있으며, 죽음의 악마를 물리치고, 악마와 그 군대를 함께 쳐부수고,

최후의 신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세간에 재난이 있음을 보고 우리 두 사람은 출가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은 더러움을 멸하고, 마음을 제어하고, 청량해져, 편안함을 얻은 것입니다.”

 

부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세간을 넘어 출세간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 서로를 격려하고 존경하며 수행자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목표를 나란히 성취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생연분이 아닐까.

 

[붓다를 만난 사람들] 13. 파타차라

 

핍박받는 여인들의 아픔 보듬은 자비의 보살

 

하룻밤 새 모든 가족 잃고 충격에 방황
부처님 법 의지해 슬픔 딛고 해탈 얻어

 

 

여성출가자들의 고백과 회상을 담은 『테리가타』라는 초기문헌에는 파타차라라는 이름의 비구니가 읊었다는 슬픈 내용의 게송이 전해진다.

 

“분만이 다가와 길을 가고 있었을 때, 저는 남편이 길 위에 쓰러져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출산한 후, 저는 친정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가엾은 여인의 두 아들은 죽고, 남편 역시 길 위에서 죽고, 부모도 오빠도 하나로 쌓아올린 장작더미 위에서 재로 변해갔습니다.”

 

사왓티의 부유한 상인 집에서 태어난 파타차라.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하인과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그녀의 불행은 이미 시작되었던 것일까. 당시 인도에서 여자가 하층 계급의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부모와 형제를 저버리고 사랑하는 남자와의 삶을 선택했다. 낯선 곳에서의 불안하지만 행복한 그와의 일상.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파타차라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출산을 앞두고 불안해진 그녀는 친정에 가서 아기를 낳고 싶다고 생각하며 길을 나섰지만 가는 도중에 길에서 아들을 출산하고 말았다.

 

두 번째 아기를 임신하여 산달이 다가오자 그녀는 남편과 아들의 손을 붙잡고 다시 친정으로 향했다. 그런데 또 가는 도중에 산기를 느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는 남편이 마련해준 임시 피난처에서 배를 움켜쥐며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밖에 있던 남편이 독사에게 물린 채 온 몸에 독이 퍼져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녀는 산고 끝에 또 한 명의 아들을 얻었다.

 

하인과 결혼해 가족과 결별

 

길고도 긴 밤을 보낸 파타차라는 두 아들을 품에 안은 채 남편을 만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싸늘하게 변한 남편의 주검뿐…. 자신 때문에 남편이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그녀는 자책하고 또 자책하며 통곡했다. 이제 그녀가 갈 곳은 부모와 형제가 기다리는 친정뿐이었다. 두 아들을 품에 안고 하염없이 걷다보니 강이 길을 가로막았다. 지난밤의 폭우로 강물이 가슴에까지 와 닿을 정도로 불어나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건널 수 있는 깊이가 아니라고 판단한 그녀는 큰 아이를 남겨둔 채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강을 건넜다. 어렵게 강 건너편으로 건너간 파타차라는 갓난아이를 재워두고 큰 아이를 데리러 다시 강을 건넜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중간쯤 왔을까. 매 한 마리가 갓난아이를 노리며 날아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슴까지 차올라 가파르게 흐르는 물길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도 없는 그녀는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매를 쫓아 보내고자 손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매정한 매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아이를 낚아챈 후 유유히 저 멀리 허공으로 사라져갔다. 한편 강 저편에서 파타차라의 모습을 보고 있던 큰 아이는 엄마가 자신에게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하며 말을 걸고 있다고 생각하여 물속으로 서둘러 뛰어들었다. 그렇게 그 조그마한 몸은 허우적거리며 저 멀리 탁류 속으로 흘러 사라져갔다.

 

이제 혼자가 된 파타차라. 자신이 왜 살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깊은 절망감에 휩싸인 그녀는 이제 홀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이 걸어왔다. 그녀의 친정 가까이에 살던 사람이다. 가족들의 안부를 묻자 그는 대답했다.

 

“지난밤의 폭풍우로 집이 무너져 내려 아가씨의 아버님도 어머님도 그리고 오빠도 모두 깔려 죽어버렸습니다. 지금 한창 화장되고 있습니다. 저 멀리 연기가 보이시지요.”
측은한 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멍하니 응시하며 그녀는 주저앉았다.

 

하룻밤 사이에 남편도 두 아들도 부모도 형제도 모두 잃어버린 너무나도 가엾은 여인은 자신의 몸을 두르고 있던 천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른 채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녀가 ‘옷을 입고 걷지 않는 여인’이라는 뜻의 파타차라라 불리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알몸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실성한 여인에게 사람들은 동정은 커녕 쓰레기나 오물 등을 던지며 비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부처님께서 제타숲에서 설법을 하고 계실 때, 마침 파타차라가 그 곳을 지나갔다. 법을 듣기 위해 모여 있던 군중들이 그녀를 쫓아내려 했지만, 그녀에게서 지혜가 성숙되어 있음을 보신 부처님께서는 그녀를 데려오게 하셨다. 부처님의 목소리에 제정신이 든 파타차라는 아무 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누군가 옷을 던져주자 받아 걸친 그녀는 부처님 앞으로 나아가 구제를 청하였다.

 

“누구나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고 있나니, 아들이든 친족이든 의지처가 되지는 못하느니라. 생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구하여라.”

 

부처님의 말씀은 가족을 잃은 슬픔으로 만신창이가 된 파타차라의 심신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조금씩 그녀의 슬픔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자신이 집착하던 슬픔의 실체를 여실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지혜도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생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겠노라 다짐하며 출가를 청했다. 그렇게 출가수행자의 길을 걷게 된 파타차라는 이후 그 누구보다 열심히 수행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파타차라는 발을 씻으며 그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발을 씻은 물을 천천히 부어버리자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물줄기가 흘러갔다. 그 물의 흐름을 응시하며 마음에 안정을 얻은 그녀는 등잔불을 손에 들고 승방으로 들어갔다. 누울 자리를 살피며 침상으로 다가가 바늘을 쥐고 등의 심지를 내렸다. 순간 등잔불이 사라지듯 그녀에게는 마음의 해탈이 일어났다. 기름에 담긴 심지에 불을 붙이면 불꽃은 타오르고 등의 심지를 내리면 불꽃은 사라진다.

 

마치 등불처럼 반복되는 생사의 고통. 불꽃을 일으키는 기름과 불을 여의고 사라진 등잔불처럼 모든 집착과 욕망을 떠난 그녀의 마음에 열반의 경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파타차라는 생사를 초월한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찬다 비구니 등 수많은 출가자 지도

 

이후 파타차라는 자신처럼 친족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많은 여인들을 위로하며 그들을 생사로부터 벗어나는 길로 인도했다. 부처님의 만년, 아버지인 파세나디왕을 폐위시키고 코살라국의 왕이 된 비두다바는 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로, 특히 석가족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외가인 카필라성에 갔다가 어머니의 출신 성분이 낮다는 이유로 큰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석가족은 비두다바에 의해 멸망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석가족의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잃고 친족을 잃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들에게 파타차라의 가르침은 최고의 위안이 되었던 듯하다. 파타차라는 설한다.

 

“그 아이가 어디에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면서 당신은 ‘오, 내 아가’라며 슬퍼하는구려. 그 아이가 왔다가 다시 떠난 길을 당신이 알고 있다면 그를 위해 슬퍼하지 마시게. 살아있는 모든 것의 운명이니…. 청하지도 않았는데 그는 저 어딘가에서 찾아와, 또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곳을 떠나가는구려. 그 어딘가로부터 와서 그저 며칠 머문 후에…. 그는 이곳에서 또 다른 곳을 찾아 옮겨가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죽어 윤회하며 스쳐지나가는 것이니, 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떠나가는구나. 이를 한탄한들 무엇 하리오.” 파타차라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은 말했다.

 

“아아, 당신은 제 가슴에 깊이 박힌 화살을 빼주셨습니다. 당신은 슬픔에 빠져 있는 저로부터 슬픔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화살을 뽑아내고, 집착을 여의며, 평안을 얻었습니다. 이제 저는 부처님과 그 가르침 그리고 승가에 귀의하겠습니다.”

 

콜레라로 남편도 자식도 친족도 모두 잃고 홀로 7년 동안이나 떠돌며 걸인처럼 살아온 찬다(canda) 비구니도 파타차라로 인해 불법을 만난 여인 가운데 한 명이다. 어느 날 파타차라가 다른 비구니들과 공양을 하고 있는 곳에 한 여인이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찬다였다. 파타차라를 비롯한 비구니들은 지난날의 자신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아낌없이 음식을 내주었다. 그 따뜻한 마음에 감동한 찬다는 공양 후 이어지는 파타차라의 설법을 들었고, 생사의 반복을 설하는 가르침에 마음이 움직여 출가를 청했다. 그리고 파타차라의 지도하에 열심히 수행 정진한 찬다는 불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 여성은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에게 철저히 자신을 맡긴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 생사를 반복하며 탐진치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완전한 의지처가 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죽음이라는 이름 앞에 무릎을 꿇기도 하고, 때로는 애욕과 집착으로 인해 그녀들을 괴롭히는 짐승으로 돌변하기도 하며, 때로는 폭력으로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 어디서도 위안을 얻지 못하는 그녀들에게 부처님은 완전한 의지처를 구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는 길을 열어주셨다. 파타차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삶의 실상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발견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지혜를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그 시대의 다른 여성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나누어줌으로써 더불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 수많은 여성출가자들이 그녀를 존경하며 추종했던 이유이다. 

 

[붓다를 만난 사람들] 14. 수닷타

 

기원정사 건립 등 승단 외호 앞장선 부호

 

차별 없는 자비 실천으로 ‘보시제일’ 칭송
오계 수지해야 고용하는 등 전법에도 적극

 

 

부처님께서 활동하시던 기원전 5~6세기 무렵, 갠지스강의 중류 지방으로 이주해 온 아르야인들은 적극적인 개간을 통해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상공업의 발달은 생활 물자의 풍요, 화폐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이는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의 형성을 초래했

다. 도시에 막대한 부가 축적되자 상공업자들은 다수의 조합을 조직하여 도시 내부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로 인해

막대한 재산을 지닌 자산가들이 사회의 새로운 실세로 등장하게 된다.

 

특히 조합장과 같은 위치에 있던 장자(長者, seṭṭhi)라 불리는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자산을 지닌 이들로 때로는 몇 개의 조합

을 소유하며 대단한 세력과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초기불교문헌에서는 이들이 초기불교교단의 교화 거점을 제공하는 중요한 지원자로

거론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성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부처님은 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로 들어가 빔비사라왕이 보시한 죽림에 머무르고

계셨다. 이곳에는 아직 정사라 불릴 만한 건물은 없었기 때문에, 부처님을 비롯한 제자들은 그저 대나무 숲 안에 있는 나무 밑이나 돌 위

에 앉아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산책을 즐기다 이곳을 지나가게 된 라자가하의 한 장자는 수행승들의 위의

있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다가가 물었다.

 

“제가 만약 방사 같은 것을 만들어 드린다면 그 곳에 머무시겠습니까?” 아직 방사에서 생활해 본 적이 없던 비구들은 망설이며 부처님께

 장자의 뜻을 전했다. 부처님께서는 흔쾌히 허락하셨고, 장자는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하룻밤 사이에 60개의 방사를 지어 기진했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 장자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승원 짓고자 동산 황금으로 덮어

 

그는 라자가하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장자로 다른 나라에서 무역을 위해 찾아오는 장자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그 중에는 코살라국의

사왓티에서 온 수닷타라는 장자도 있었다. 수닷타는 라자가하를 찾을 때마다 이 장자의 집에 머물며 친하게 지냈는데, 장자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더 친밀해졌다. 수닷타가 부처님을 알게 된 것도 이 장자 때문이었다.

 

사업차 라자가하를 찾은 수닷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장자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와는 달리 몹시 흥분한 모습

으로 장자가 온 집안사람들에게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죽을 끓이고 음식을 만들어라. 국을 끓여라. 맛난 과자를 만들어라”며

손수 공양 준비의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를 본 수닷타는 ‘예전에 이 사람은 내가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오로지 나와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겼는데 오늘은 무슨 일일까’라고 생각하며 “형님, 도대체 무슨 잔치를 준비하기에 이리도 요란스럽게 음식 준비를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장자는 대답했다. “내일 붓다와 그 제자들을 초대하기로 했다네.” “붓다라고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정말 붓다라고 하셨지

요?” 수닷타는 세 번이나 되물으며 확인한 후, 이렇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붓다라 불리는 자는 그 음성을 듣는 것조차 어려운 일입니

다. 지금 당장 그 분을 뵈러 가도 될까요?” 내일 아침 적당한 때를 보아 가라는 장자의 권유에 일단 잠자리에 들었지만, 내일이면 붓다를

만날 수 있다는 설렘에 수닷타는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날도 채 새기 전에 부처님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닷타가 부처님을 찾아갔을 때 부처님은 한림에 머무르고 계셨다. 한림이란 시체를 매장하는 곳으로 당시 도시의 주변에 있던 한적한

곳이었다. 썩어가는 사람의 육체를 관찰하며 부정관을 닦기에도 좋고, 또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쉬고 있는 곳이므로 마음의 평안을

얻기에도 좋다 하여 명상을 위한 최적의 장소로 생각되고 있는 곳이었다.

 

부처님께 다가간 수닷타는 예를 갖춘 후 이렇게 물었다. “간밤에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부처님은 대답하셨다.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청정하고, 집착이 없으며, 모든 장애를 여읜 자는 항상 어디서든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법이니라. 일체의 집착을 끊고, 마음의 고뇌를

제어하고, 평안함에 도달하고, 마음의 적정을 얻은 자는 편안하게 자느니라.” 이어 부처님은 보시, 지계, 생천의 가르침 그리고 여러

가지 욕망이 초래하는 재난과 해악, 더러움 그리고 출리의 뛰어난 이익을 설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수닷타가 건전한 마음과 유연한 마음,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마음, 기뻐하는 마음, 맑은 마음이 된 것을 꿰뚫어 보시고는 고집멸도의 진리를 설하셨고, 수닷타는 마치 한 점의 얼룩도 없는 새하얀 천이 물들 듯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며 그 자리에서

진리를 보는 눈을 얻었다고 한다.

 

우바새가 된 수닷타는 내일 자신이 준비한 공양에 부디 꼭 참석해 달라는 말을 남긴 채 장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맛난 음식을

준비하여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대접한 수닷타는 “부처님, 부디 제자들과 더불어 사왓티에서 우안거를 지내주십시오”라며 내년에는

꼭 제자들과 함께 사왓티를 방문해 달라는 청을 올렸다. 그리고 자신은 사왓티를 향했다.

 

사왓티를 대표하는 장자로 아는 사람도 많았던 수닷타는 지인을 만날 때마다 “승원을 만드시게. 정사를 세우시게. 보시를 하시게.

이 세상에 붓다가 출현하셨다네. 그 분은 내 초대를 받아 이 길을 지나가실 것이네”라며 권유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권유대로 승원을

만들고 정사를 세우고 또 보시를 했다.

 

사왓티로 돌아온 수닷타는 주변을 돌아보며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머물 만한 토지를 물색했다. 마을로부터 그리 멀지도 않고, 지나치게

가깝지도 않으며, 왕래하기 편하고,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접근하기 쉬우며, 소음이 적고, 인적이 드물며, 번거롭지 않고, 명상하기 적합한 그런 곳을 찾아 헤매던 수닷타는 어느 날 마음에 꼭 드는 곳을 찾아냈다.

 

그것은 사왓티성 밖의 남쪽에 있는 동산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 토지는 코살라국 파세나디왕의 아들인 제타태자의 소유지였다.

수닷타는 자신이 보시할 이상적인 절의 후보지로 이 토지보다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곳은 없다고 생각하며 기타태자를 찾아가 “왕자님,

저에게 이 동산을 주십시오. 승원을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불자 아니면 사돈 맺기도 거부

 

태자는 농담 삼아 “원하는 땅 위에 황금을 깐다면, 그 만큼의 토지를 그 황금과 교환하여 너에게 팔겠노라”고 조건을 내걸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어 내건 조건이었으나, 수닷타는 매우 기뻐하며 토지 위에 황금을 깔아갔다. 대부분의 땅을 황금으로 뒤덮었는데, 마지막에 황금이 모자라 약간의 땅이 남았다. 이를 보고 있던 태자는 수닷타의 신심에 놀라며 나머지 땅은 자신이 보시하겠노라고

했다. 수닷타가 땅 위에 깔았던 황금은 당시의 가치로 18억금이었는데, 그는 또 18억금을 내어 정사를 세우고, 18억금을 더 내어 승가에

공양했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정사는 다양한 시설을 구비한 이상적인 불교 사원이었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19회나 안거를 보내셨다고 한다.

당시 사왓티는 바라문이나 자이나교, 아지비카교 등과 같은 이교도의 세력이 강했던 곳으로 불교교단이 정착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기원정사의 건립을 계기로 교화의 거점을 확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수닷타는 신심이 매우 깊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 집안과는 사돈을 맺지 않을 정도였다. 또한 자신의 집에 오는 자는 모두 청정한 신앙을 얻어, 죽은 후 천계에 태어나는 자뿐이라고 자신했다. 부처님께서 그 연유를 묻자 “저희 집에서 일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먼저 삼귀의를 시키고 또 오계를 준 후 일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수닷타는 ‘잘 베푸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인데, 가난한 사람이나 고독한 사람, 사문·바라문과 같은 종교인들에게 한없는 자선을 베풀었기 때문에 ‘고독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자’라는 의미의 아나타핀디카(Anāthapiṇḍika)라 불렸고, 언제부턴가는 본래의 이름보다 이 말이 더 자주 사용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보시제일’이라 칭하며 칭찬하셨다고 한다.

 

당시 인도의 새로운 시대의 기수이자 대표적인 사회적 존재였던 장자들. 막대한 부의 축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는 최고의 위치에 있던 그들이지만, 정신적인 면에서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각자(覺者)와의 만남을 고대하는 그들 앞에 부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 속으로 뛰어들었다. 재물이란 쌓이면 쌓일수록 그만큼 욕망도 늘어가는 법. 재물의 노예가 되어 눈앞의

이익만을 쫓으며 살아갈 수도 있는 그들을 부처님은 올바르게 재물을 사용함으로써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주셨다.

 

“노력하여 부를 얻었다 해도 자신만이 그 재산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재산을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의 망자(亡者)로만 남아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 재산은 살려서 사용해야 한다. 재산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막대한 부를

얻어도 스스로 즐길 줄도 모르고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지도 못하다 결국 몰수당하거나, 도둑맞거나, 화재나 홍수로 잃거나,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속인에게 빼앗기곤 한다. 올바로 사용하지 않는다면 재산이란 이렇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재산이 적다해서 못 베푸는 것도, 재산이 많다해서 더 베푸는 것도 아니다. 공덕을 쌓기를 원하며 올바르게 진리를 꿰뚫어보는 자야말로

베풀 수 있는 법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