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비로자나 부처님과 청자향로, 청자어룡주전자, 월광대사 원랑선사 탑비,

백련암 2011. 5. 27. 02:41

용산 중앙박물관 앞 거울연못

 

 

부처 = 鐵造 佛 坐像 : 고려시대(高麗時代) 10세기,  보물(寶物) 제 332호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 절터 출토(京畿 河南 下司倉洞 寺址 出土)= 현재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하사창리의 절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철불 좌상이다. = 옛날


 

쇠로 만든 이 부처는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의 한 절터에 있던 것을 1911년에 옮겨온 것이다.

지금도 하사창동의 절터에는 돌로 만든 대좌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이 부처는 높이가 2.88m에  무게가 6.2톤에 달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철불이다.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형식의 옷차림과 손갖춤을 하고 있으나, 허리가 급격히 가늘어진 부자연스러운 조형감과 추상화된 세부 표현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불상을 계승한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부처의 양 무릎에는 딱딱하게 굳은 옻칠의 흔적이 남아 있어, 원래 불상 전체에 두껍게 옻칠을 한 다음 도금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얼굴은 둥글지만 치켜 올라간 눈, 꼭 다문 작은 입, 날카로운 코의 표현에서 자비로움이 줄어들고 관념적으로 변해가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으나 가슴까지 내려와 목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짓지 않고 있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만 감싸고 있는 옷에는 간결한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당당한 어깨와 두드러진 가슴은 석굴암 본존불의 양식을 이어 받은 것이며, 날카로운 얼굴 인상과 간결한 옷주름의 표현은

고려 초기 불상의 전형적인 표현 기법이다.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의 전형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의문? 모든 조각에 설명에 내용은 분명하게 잘 보이도록 기록을 해놓았는데 왜 국가에서 지정한 고유<보물, 국보 등>에 표시는 잘 보이지 않게 해 놓았는지 궁급하다.

 

 

비로자나불 = 石造 毘盧遮那佛 坐像(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 統一新羅時代 9세기

 

비로자나불은 온 누리에 가득 찬 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이다. 우리나라에서 비로자나불상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하였는데,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여래(여래 = 부처를 다른 말로, "진리의 체현자" "열반에 다다른 자"라는 뜻)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 비로자나 불상은 동그랗고 친근감 있는 현실적인 얼굴, 계단 모양의 규칙적인 옷주름, 둔화된 불신에 비해 오히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광배와 대좌로보아 통일신라 후반기 석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부처 = 금동 불 좌상(金銅 佛 坐像) : 통일신라(統一 新羅時代) 7세기

 

 

칠보무늬 향로 = 청자 투각 칠보문 향로(靑磁 透刻 七寶文 香爐) : 高麗 12세기 國寶 제 95호

뚜껑, 향을 담는 연꽃 대좌, 받침으로 구성된 향로이다. 여기에 다양한 기법으로 정교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돋보이는 점은 향로를 받치는 앙증맞은 세마리 토끼이다.

최소한의 크기로 향로 무게를 지탱하도록 만든 장인의 솜씨가 뛰어나다.

 

고려 전기의 청자 향로로, 높이 15.3㎝, 대좌지름 11.2㎝의 크기이며 뚜껑과 몸통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은 향이 피어올라 퍼지도록 뚫어서 장식한 구형(球刑) 부분과 그 밑에 받침 부분으로 되어 있다.

구형 부분 곳곳의 교차 지점에는 흰 점이 하나씩 장식되어 있다. 몸통은 두 부분으로 윗부분은 둥근 화로 형태인데, 몇 겹의 국화잎으로 싸여있고 다시

커다란 국화잎이 이를 받치고 있다. 아래 부분은 향로 몸체를 받치고 있는 대좌로, 3 마리의 토끼가 등으로 떠받들고 있다. 대좌의 옆면에는 덩굴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토끼의 두 눈은 검은 점을 찍어서 나타냈다. 유약은 회청색으로 은은한 광택이 난다.

이 작품은 상감청자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고려 청자에서는 드물게 다양한 기교를 부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적인 섬세한 장식이 많은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이 잘 잡힌 안정감 있는 뛰어난 청자 향로이다.

 

 

어룡 모양 향로 = 청자 어룡개 연화형 향로(靑磁 魚龍蓋 蓮花形 香爐) : 高麗 12세기

 

 

어룡모양 주전자 = 청자 어룡형 주자(靑磁魚龍形注子) 高麗 12세기 國寶 제 61호

머리는 용, 몸통은 물고기 모양을 한 상상의 동물을 어룡(魚龍)이라고 한다.  이 주전자의 경우 용이 날고 있는 모습과 같다 하여 비룡(飛龍)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의하면 서해에 사는 물고기 일종인 호가 어룡의 모습과 비숫하다고 전해온다.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주전자로 높이 24.4cm, 밑지름 10.3cm이다.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특이한 형태의 동물을

형상화했는데, 이런 물고기모양은 옛날부터 화재를 예방하기 위한 상징적인 의미로 건축물에 많이 장식하였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용의 머리모양이고, 이빨과 지느러미, 꼬리 끝에는 백토(白土)를 발랐다. 얼굴의 털이나 지느러미들을 매우 가늘고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주전자 몸체에는 비늘이 도드라지게 표현되었고, 중앙부에는 앞뒤로 커다란 갈퀴모양의 옆지느러미가 묘사되었다. 손잡이는 연꽃줄기 모양으로 주전자의

몸체 위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고, 뚜껑은 물고기의 꼬리부분을 본떠서 만들었다.

전체적인 구조로 볼 때 기이하면서도 각 부위를 갖춘 한 마리의 상상의 동물모습을 하고 있다. 비취빛의 유약색과 더불어 지느러미와 꽃무늬에 나타난

세밀한 음각 표현은 능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 주전자는 상서로운 동물이나 식물을 모방해서 만든 상형청자 중에서도 매우 기발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수(螭首)

 

충북 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忠北 堤川 月光寺址 圓朗禪師塔碑) : 보물 제 360호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890년, 월광사 터

 

이 탑비는 신라 말의 고승 원랑선사(816- 883년)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다. 원랑선사가 입적(入寂)하자

헌강왕(憲康王)은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는 탑 이름을 내리고, 김영(金潁)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는데 글씨는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의 해서체(楷書體)이다.

거북받침(龜趺)위에 비몸(碑身)을 올려놓고 그 위에 교룡(蛟龍)을 새긴 머릿돌(螭首)을 얹는 구성으로 이러한 탑비의

모습은 통인신라와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원랑선사는 856년(문성왕 18) 당나라에 유학한 뒤 귀국하여 선문(禪門)을 널리 퍼뜨린 승려로 883년(헌강왕 9)에 입적했으며,

헌강왕은 '원랑선사'라고 추시(追諡)하고, 비명은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고 했다<보층설명>

 

 

귀부 뒷면

 

 귀부(龜趺)·

귀부의 머리는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등에는 오각형의 귀갑무늬[龜甲紋]가 장식되어 있다.

귀부의 중앙에 있는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가 힘차게 조각되어 있고, 군데군데에 변형된 연꽃무늬가 배치되어 있다.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모각되어 있고 그 위에는 복련의 연꽃이 돌려져 있다

 

 

 

 

비신(碑身)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 동창리 월광사터에 전해오던 탑비로, 1922년 경복궁으로 옮겨 왔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다.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인 원랑선사(?∼866)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이다.

원랑선사는 문성왕 18년(856) 당나라에 유학하여 11년간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 귀국한 뒤 월광사에 머물렀다. 68세로 입적하자 헌강왕이 ‘대보광선(大寶光禪)’이라는 탑명을 내려, 김영에게 비에 새길 글을 짓게 하였다. 글씨는 구양순체의 해서체로 순몽이 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거북받침은 네 발이 몹시 작고 짧은 목과 머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 나타나는

형식화된 조형이다. 머릿돌에 새긴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다.

전체적으로 탑비의 머리·몸·받침 각 부분의 비례감이 훌륭한 비로서, 단아하면서도 안정된 느낌을 준다.

 

신라(新羅) 말기(末期)의 큰스님이었던 원랑선사(圓郞禪師)는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이 탑비는 그의 사후(死後)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890)에 세워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