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 = 국보 제 101호 시대 : 고려
이 승탑은 고려시대의 고승 지광국사(智光國師. 984년~1067년)의 묘탑으로 원래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사 터에 있던 것인데,
1912년에 일본인이 몰래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발각이 되어 3년 후인 1915년에 되돌려 받아 경복궁에 세워지게 되었다.
탑의 받침대에 해당되는 기단부(基壇部)에는 여러 단을 두어 꽃, 상여, 신선, 장막 등을 장식하고
탑의 몸체에도 페르시아 풍의 창문을 내고 드림새 장식을 하였으며, 지붕과 꼭대기도 불보살상(佛菩薩象), 봉황, 연꽃등의
화려한 무늬로 장식되었다.
이 승탑은 지광국사의 장례(葬禮)때 사리(舍利)를 운반하던 화려한 외국풍의 가마를 본떠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승탑은 고려시대에 들어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새롭게 고안된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광국사는 고려 전기(高麗 前期)의 이름난 고승으로 현종 임금과 문종 임금으로 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는데,
특히 문종(文宗) 임금은 지광국사를 왕사(王師)로 삼았다가 훗날에는 국사(國師)로 임명하였다.
이 승탑은 선종(宣宗) 2년(1085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탑이 너무 많이 부식되어있어 안타까움이 먼저 와 닿는다. 4면이 똑 같은것 같으면서도 모두 다르다.
매우 정교하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좌측의 갑석문양
뒷편 갑석문양
맨 위 부분은 모두 같아 보이나 뭔가 틀린것 같음
상륜부
기단부와 기잔 안상문양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 = 초겨울의 모습, 국보 제 101호 시대 : 고려
이 탑은 고려시대의 승려 지광국사 해린(984∼1067)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원래 법천사터에 있던 것인데 일제시대에 일본의 오사카로
몰래 빼돌려졌다가 반환되었으며, 현재는 경복궁 경내에 있다.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8각을 기본형으로 만들어진 것에 비해, 이 탑은 전체적으로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바닥돌은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같은 조각을 두어 땅에 밀착된 듯한 안정감이 느껴지며, 7단이나 되는 기단의 맨윗돌은 장막을 드리운 것처럼
돌을 깎아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탑신에는 앞뒤로 문짝을 본떠 새겼는데, 사리를 모시는 곳임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지붕돌은 네 모서리가 치켜올려져 있으며, 밑면에는 불상과 보살, 봉황 등을 조각해 놓았다.
머리장식 역시 여러 가지 모양을 층층이 쌓아올렸는데, 비교적 잘 남아있다.
법천사터에는 지광국사의 탑비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탑비를 세운 때가 고려 선종 2년(1085)이므로 묘탑의 조성시기는 국사의 입적 직후인
1070∼1085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탑 전체에 여러가지 꾸밈을 두고, 4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등 자유로운 양식에 따라 만들어졌는데도, 장식이 정교하며 혼란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민 장식으로 인해 엄숙한 멋을 줄어들게 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다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우수한 작품이다.
안타깝게도 기단의 네 귀퉁이마다 1마리씩 놓여 있던 사자상은 일찍이 도둑맞아 지금은 한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이때만해도 지금만큼 상하지는 않았던것 같다. = 2011- 11 - 7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法泉寺 智光國師 玄妙塔) = 봄에 모습 2009- 5 - 9
자연과 함께 있을때 = 경천사지 10층 석탑 국보 제 86호=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답다 이런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경천사 십층석탑♣
부처, 보살, 사천왕과 신중들, 나한.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의 세계를 그려낸다면 어떻게 표현해볼 수 있을까요? 수평적인 모습일까, 아니면
수직적인 모습일까요? 시대마다 국가마다 사람들이 생각했던 불국토의 모습은 달랐을 것입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한 국보 86호 경천사 십층석탑은 약 13.5m의 웅장한 규모의 석탑으로, 석탑 전체에 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가득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든 불교의 존상을 모은 일종의 불교적 판테온으로 고려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3차원적인 불국토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조성배경
경천사 십층석탑, 고려 1348년, 대리석, 높이 13.5 cm, 국보 86호
경천사 석탑은 1348년(충목왕 4) 건립된 석탑으로 원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중연리 부소산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고려사』기록에 따르면 경천사는 고려 왕실의 기일에 종종 추모제를 지냈던 곳으로 왕실의 왕래가 잦았던 사찰입니다.
경천사가 폐사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20세기 초에는 이미 폐사되어 석탑만 남아 있었습니다.
비록 일부 글자가 파손되거나 마모되었지만, 석탑의 1층 탑신석 상방에는 건립 연대와 발원자, 그리고 조성배경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습니다.
명문에 따르면 석탑은 대화엄 경천사에서 1348년 3월 조성되었고, 발원자는 대시주 중대광 진녕부원군 강융(姜融), 대시주 원사 고룡봉(高龍鳳),
대화주 성공(省空), 시주 법산인 육이(六怡)였습니다.
이들은 왕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불법이 빛나고 석탑 건립의 공덕으로 일체 중생이 모두 성불하게 되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강융은 원래는 관노 출신으로 충선왕의 측근이 되어 공을 세운 인물이며, 그의 딸은 원(元)의 승상 탈탈(脫脫)의 애첩이 되어 권세를 누렸습니다.
고룡봉은 고려 환관으로 원에 가서 황제의 신임을 얻어 출세한 인물입니다.
그는 충혜왕 대에 공녀로 간 기자오의 딸이자 기철(奇轍)의 여동생을 원의 황제인 순제에게 선보여 황후에 오르게 한 인물입니다.
자정원사(資政院使)로 봉해졌는데 자정원은 기황후의 부속관청이었기에, 그는 고려에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처럼 석탑 발원자의 면모를 보면 친원 세력이 석탑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발원자의 성격 때문인지 공교롭게도 경천사 석탑의 형태는 기존의 간결한 전통적인 석탑의 외형과는 매우 다릅니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석 1층에서 3층까지의 평면은 소위 한자의 아(亞)자와 같은 형태로, 사면이 돌출되어 있습니다. (하단 사진 참조)
경천사 석탑 기단부의 모습. 기단부와 1층에서 3층까지는 몽골, 티베트계 불교에서 영향 받은 형태,
이후 4층에서 10층까지는 전통적 형태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평면은 원대에 유행한 몽골, 티베트계 불교인 라마교 불탑의 기단부나 불상 대좌 형태와 유사한 외래적 요소입니다.
반면 탑신부 4층부터 10층까지의 평면은 방형 평면으로, 경천사 석탑은 전통적인 요소와 외래적 요소의 조화 속에 탄생한 이형 석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경천사에 관한 몇몇 조선시대 문헌 기록에는 원의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삼고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
탑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당시에도 승상 탈탈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비록 이를 모두 그대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발원자의 성향이나 석탑의 형태로 미루어 볼 때 원대 장인이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이 백미
경천사 석탑에는 목조건축의 기둥과 공포, 난간과 현판이 잘 표현되어 있고, 특히 기와가 정교하게 표현된 옥개석은 마치 고려시대 목조건축의
생생한 모습을 반영한 듯합니다.
그러나 경천사 석탑의 백미는 역시 석탑 전체에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불보살의 모습입니다. 전체 구성을 살펴보면
*기단부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들, 즉 밑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 그리고 나한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1층부터 4층까지의 탑신부에는 부처의 법회장면, 즉 불회(佛會) 장면이 총 16장면으로 새겨져 있고 그 사이사이 불교 존상들이 새겨져
있으며, *5층부터 10층까지는 선정인 또는 합장을 한 불좌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존상들을 불교적 위계에 따라 층층이 표현한 것입니다.
경천사 석탑 탑신부의 모습. 상단부로 올라갈수록 불교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존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기단부에 새겨진 『서유기』는 송대에 이미 설화가 된 중국 당대 승려 현장(玄奘)의 인도로의 구법행이 명대에 소설로 간행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기단부 부조 20장면을 살펴보면 이미 원대에 명대 『서유기』에 사용되었던 판화와 유사한 장면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유기』 장면은 이를 바라보는 불자들에게는 현장의 구법행을 통해 공덕과 깨달음에 대한 불교적인 교훈을 전하고, 『서유기』의 등장
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기단부에 새겨졌다고 추정됩니다.
탑신부의 조각은 1층부터 3층까지의 불회(佛會) 장면만을 일컬어 12회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4층의 불회 장면을 포함하여 16회로 보기도 합니다.
불회 장면 위에는 현판 모양에 각 불회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데, 현판의 명칭과 도상을 정리해보면 아래의 표와 같습니다.
남 | 서 | 북 | 동 | |
---|---|---|---|---|
4층 | 원통회 | (지장회) | (열반회) | (석가회) |
3층 | 소재회 | 전단서상회 | 능엄회 | 약사회 |
2층 | 화엄회 | 원각회 | 법화회 | 다보불회 |
1층 | 삼세불회 | 영산회 | 용화회 |
미타회 |
경천사 석탑 기단부 중대중석 남동측 남면에 새겨져있는 ‘홍해아’ 장면.
서유기의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탑의 하단 부분에 배치해 놓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러한 불회 부조의 조성 배경으로는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습니다. 우리 전통 불교와 관계 깊은 경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층별로 도상의 특징을 구분하여
*1층은 우리나라 불교 신앙을, *2층은 사상을, *3층은 밀교 관련으로 보기도 합니다. 또한 사방불회로 추정하기도 하고
*1층 남면의 삼세불회에 주목하여 새로운 개념의 삼불 도상이 출현한 것에서 도상적인 의의를 찾는 연구도 있습니다.
경천사 석탑의 정교한 조각 표현이 가능했던 이유는 경천사 석탑이 전통적인 불상이나 석탑의 재질인 화강암이 아니라 조형 작업이 쉬운
무른 재질의 대리석이기 때문입니다.
경천사 석탑이 건립된 뒤 약 120여 년이 흐른 후, 조선 왕실 발원으로 만들어진 원각사지 십층석탑에는 경천사 석탑의 형태와 도상이 그대로
재현되기도 하였습니다.
경천사 십층석탑의 수난사
약탈과 반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100여년 만에 비로소 터전을 잡았습니다.
약탈과 반환의 과정을 거치면서 100여년 만에 비로소 터전을 잡았습니다.
경천사 석탑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석탑 자체가 한국 문화재 수난사를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1907년 순종의 가례에 일본 특사로 온 궁내 대신 다나카 미스야키(田中光顯)가 석탑의 무단반출을 시도했습니다.
당시 주민들이 이를 저지했으나 헌병들이 총칼로 위협하여 수레로 부재들을 반출하였고, 다시 군수가 이를 제지 했지만 결국 한밤중에 밀반출되었습니다.
석탑 반출은 즉시 문제가 되어 <대한매일신보>에는 10여 차례 이상의 기사와 논설이 게재되어 석탑 반출의 불법성을 알려졌습니다.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월간지 <코리아 리뷰(Korea Review)>의 발행인 미국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발행인인 영국인 베델(Ernest T. Bethell)의 지속적인 기고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베델은 일본의 영자 신문과 <뉴욕 포스트(New York Post)>에도 불법 약탈을 알렸으며,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도 현지 신문에 석탑 밀반출을 폭로하였습니다.
결국 계속된 반환 여론 조성에 1918년 11월 15일 석탑은 국내로 돌아오게 되어 1919년 박물관에 귀속되었습니다.
국내에 반환된 경천사 석탑은 당시 기술로는 재건립이 어려웠기에 1960년까지 경복궁 회랑에 보관되었습니다. 1960년 국립박물관의 주도하에
경천사 십층석탑의 훼손된 부재가 수리되어 경복궁에 세워졌고, 1962년 국보 8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밀한 보존처리가 요구되었기에 1995년 석탑은 다시 해체되었고 문화재연구소에서 약 10여 년에 걸쳐 보존처리 되었습니다.
이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재개관 시 현재의 전시실에서 재조립되어,
100여 년 만에야 비로소 석탑의 그 웅장한 위용을 다시 드러낸 것입니다.
경천사 석탑은 전통과 외래적 요소를 조화롭게 만들어 새로운 양식을 만든 우리 문화사의 기념비적 석탑이며, 동시에 굴곡진 우리의 근대사를
반추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 경천사지 10층 석탑 국보 제 86호=
하늘과 땅 중 무엇이 더 가치가 높을까? 이것은 본질적으로 답이 있을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런 부분들에 대한 가치를규정해 놓았다.
천(天)/지(地) · 홀/ 짝 · 남(男)/여(女)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앞에 언급되는 가치가 더 우월하다. 특히 현재는 흔히 가로 세로로 라고 하지만 이의 한자는 종횡(縱 =세로종, 橫 =가로횡)즉 세로와 가로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왜 탑의 수직과 수평이 홀수와 짝수가 되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천(天= 하늘) - 홀 - 종(縱= 세로) - 남(男). 지(地= 땅) - 짝 - 횡(橫= 가로) - 여(女)
『주역』「계사전(繫辭傳」에는 "천존지비(天尊地卑)"라 하여, 하늘은 높고 따은 비천하다는 언급이 있다.
이 말은 후일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다"라는 말로 변형되어, 우리문화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된다.
또 우리의 전통명절인 설날(1월 1일). 삼짇날(3월 3일). 단오(5월 5일). 칠석(7월 7일). 중량절(9월 9일)은 모두 홀수가 겹치는 날이다.
즉 하늘을 내포하는 상서로운 길한 의미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탑의 층수가 홀수라는 것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문화재 중에는 <경천사지 10층석탑(국보 제 86호)이나 원각사지 10층석탑(국보 제 2호)>과 같은 "10층이라는 예외성이 존재한다.
이러한 예외가 유독 10에서만 나타나는것은, 십진법체계에서 10이 완전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0×10인 백(百)에는 "온전"과 "모두"의 의미가 내포된다.
즉 탑에서 나타나는 10층은 기존의 홀수적인 관점과는 다르지만 이 역시도 완전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삼국유사』의 사리와 관련된 기록인「선후소장사리」조에서는, 고려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사리가 왕궁의 "십원전(十員殿)"에 모셔져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기 이전 남송과 금나라라는 중국 대륙의 치열한 대립구도 속에서, 황제국의 위상을 가졌던 것과 관련해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붓다를 지존의 예로서 중국 청나라의 하늘에 대한 제례공간인 천단(天壇)과 같은 건축구조물에 모셨을 개연성이 있다는 말이다.
바로 이와 같은 극존중의 문화에서 10이라는 숫자를 우리는 살펴볼 수있다. 물론 여기에는<경천사지 10층석탑>의 건립 시점이 원간섭기라는 점에서,
역사상 유래가 없는 세계제국 몽고의 영향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양식들은 동아시아의 일반적인 전통문화와는, 다른 관점에 의한 시대적 요청을 예술이 수용한 결과라는 의미가 된다.
우리는 이부분에서, 자연스럽게 테오도오 아도르노의 "예술은 사회를 반영한다."는 말을 상기해 볼 수 있다.
3층에서 내려다 본 석탑
'불화이야기=고려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앙박물관의 부처님의 다양한 모습들 (0) | 2011.05.27 |
---|---|
비로자나 부처님과 청자향로, 청자어룡주전자, 월광대사 원랑선사 탑비, (0) | 2011.05.27 |
개성 경천사 십층석탑. 국보 제86호. 시 대 = 고려시대 (0) | 2011.05.26 |
파고다 공원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 = 국보 2호 (0) | 2011.05.26 |
일본 스님 덕에 돌아온 ‘조선 불화’ 와 수월관음도 (0) | 2010.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