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제일 樹林에 자리잡은 敎宗 首寺刹 봉선사(奉先寺)
서울에서 포천으로 가는 길. 그 길에서 왕숙천을 따라 나 있는 일동길을 따라가다보면, 서북쪽으로 갈라지는 자그마한 숲이 나온다.
이 곳은 광릉 길로 들어가는 초입으로 바로 울창한 아름드리 잣나무숲이 있어 절을 찾아 가는 이들을 반긴다.
또한 이 길은 우리나라 유일의 국립수목원이 있는 곳으로, 봉선사로 들어가는 길 초입에 늘어선 원시림의 자태와 향기로운 내음은 이 곳에 대찰이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봉선사를 부르는 애칭은 교종의 수사찰, 교종의 갑찰, 역경의 산실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으며, 가람의 초입부터 대찰로서의 위용을 보이는데, 단연 가람 역시 세조의 능침사찰로서 위엄을 가지고 있다.
봉선사가 자리한 운악산은 1927년에 편찬된 『奉先本末寺誌』「奉先寺誌」조에 한국의 5대 명산 중(동쪽 금강산, 서쪽 구월산, 남쪽 지리산, 북쪽 묘향산,
중앙 운악산)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또한 중국의 五岳을 모방하여 경기지방에도 五岳을 설정하였는데 개성의 松岳, 과천의 冠岳, 연천의 紺岳, 가평의 花岳 등과 함께 봉선사가 있는 양주의 雲岳이라 하였다.
현재 운악산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울창한 산림이 있고, 다양한 수종의 동식물 이 분포하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 창건된 봉선사와 조선 제7대 임금인 世祖와 왕비인 貞熹王后를 모신 光陵이 자리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고 있다.
이러한 운악산에 자리한 봉선사는 고려시대 창건이후 조선시대 초에 이르기까지 절의 역사를 전하는 자료가 없어 어떤 종파에 속하고, 어떤 사상적 특성을
지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1469년(예종 1) 세조의 妃인 정희왕후의 발원으로 크게 중창되면서부터이다.
이때에는 1424년(세종 6) 7개의 종파를 禪敎兩宗으로 조직한 이후 禪宗判事가 머무르는 사찰로서, 또한 세조의 陵寢寺刹로 지정되어 願刹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1551년(명종 6)에 敎宗의 首寺刹로 지정되어 교종의 僧科考試를 치르고, 승려들이 모여 교학을 익히는 도량으로 변모를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인하여 오늘날 봉선사는 한국불교에 있어 교종의 大本山으로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790년(정조 14) 정조에 의해 용주사가 창건되면서 불교가 부흥되기도 했는데, 이 때 봉선사는 전국 5糾正所의 하나로 지정되어 함경도 일원의 사찰을 관리하였다.
1902년에는 元興寺가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 되면서 봉선사는 전국 16개 수사찰 가운데 하나가 되어 경기도내의 본산이 되었다.
1911년에는 일제의 사찰령 시행으로 전국사찰이 31본산 체제로 나눌 때 敎宗本山으로 지정되어 경기도내 23개 사찰을 관장하게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196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가 된 이후 17개 지역 72개 사찰을 관장하며 경기 북부 지역의 불교진흥에 힘쓰고 있다.
봉선사가 오늘날‘敎宗大本刹’로서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현대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데에는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명진학교를 설립한 月初 스님과 한국불교역경사에 있어 빛나는 업적을 남긴 耘虛龍夏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1551년 교종의 수사찰로 지정된 이래 머물렀던 수많은 敎宗判事들과 근대의 월초스님, 현대의 운허스님의 노력은 오늘날 봉선사를 敎宗大本刹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삼성각
산신각
칠성각
독성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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