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여인들의 애환이 서린 절 청룡사는 탑골승방의 4대 비구니도량중의 하나이다.
청룡사(靑龍寺)는 고려 왕건이 922년(태조 5년) 도선(道詵, 827~898) 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명으로 창건되었다.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外靑龍)에 해당되는 산등성이에 지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청룡사라 하였다고 한다.
제1대 주지로 비구니 혜원(慧圓) 스님이 주석한 이래 줄곧 비구니 스님만이 주석한 것이 특색이다.
고려에 와서는 1036년(정종 2년)에 만선(萬善) 스님이 토락한 절을 처음으로 중창하였고 1158년(의종 12) 회정(懷正) 스님이 두 번째로 중창하였는데,
이때 이 부근에서는 청룡사 동북쪽 고개 너머에 있는 보문사(普門寺) 창건 이후로 43녀 만에 처음 세워진 절이라 하여 "새절 승방"이라고도 불렀다.
1299년(충렬왕 25) 중국 원나라의 침입으로 절이 황폐화되자 지환(知幻)스님이 중창하였다. 고려가 조선에게 망한 뒤 고려의 명신 익재 이제현(李齋賢)의 딸인 마지막왕인 공민왕비 혜비(惠妃)가 망국의 슬픔을 안고 스님이 되어 머물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성계<태조> 딸인 경순공주도 비구니가 되어 머물었다. *태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으로 어린두아들과 사위를 잃었는데 그때 과부가 된 딸 경순공주에 머리를 직접 깍아주고 청룡사로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1405년(태종 5) 무학(無學) 대사를 위하여 왕명으로 중창했다. 창건 당시 도선 국사를 위하여 창건한 이래 두 번째로 왕명에 의한 중창인 것이다. 이어서 1512년(중종 7)과 1624년(인조 2)에도 법공(法空)스님과 예순(禮順) 스님이 각각 중창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는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가 이곳에 있었다 하여 영조가 직접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을 내려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했는데, 이때 절 이름을 잠시 정업원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 비석과 비각은 현재도 절에 남아 있다. 1813년(순조 13)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묘담(妙潭)·수인(守仁) 두 스님에 의해 중창되었고 1823년(순조 23) 왕명으로 다시 옛 이름인 청룡사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1902년(고종 6) 정기(正基)·창수(昌洙) 스님이 중창하였고, 1918년과 1932년에 상근(詳根) 스님이 중창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1954년~1960년 사이에 윤호(輪浩) 스님이 전체적으로 대대적인 중창을 하였고 대웅전은 다시 1973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룡사(靑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로,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다 청룡사 올라가는길목에 정업원이 먼저보임<청룡사와 붙어있음> 청룡사로 들어가서 화장실쪽으로 내려가서 샷시문을 열고 들어가면 볼 수가 있다. 청룡사 일주문 청룡사 : 왕실의 여인들이 늙거나 권력의 힘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을때 택해야 했던 절 살이 *정업원 비각* 정업원이란 원래는 양반출신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머물던 절을 말한다. 정업원 터 (淨業院 터)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5호 시대 = 조선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 송씨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그리 멀지 않은 도성안에 있는 것인데, 성 밖에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곳에 비를 세우고 비각도 짓게 되었다. 이는 정순왕후 송씨가 동대문 밖인 이곳에서 지냈던 사실과 정업원의 주지로 있었던 일이 얽혀서 잘못 전해온 것으로 보인다. ◈정업원(淨業院) 세종때 대궐 안에 설치했던 內佛堂이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로 철폐되고 지금의 원서동으로 옮기면서 불당이름을 정업원이라 부름 이렇게 정업원은 궁중 불교와 인연이 있었으므로 대궐에서 물러난 송씨 부인이 몸담은 비구니 암자를 뒷날에 정업원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정업원 터* 비석 정면에는 정업원구기라 써 있고, 비석 뒷면에는 定業院 舊基 歲 辛卯 九月 十六日飮제書 즉 "정업원 옛터 辛卯年<영조 47년> 9월 6일 에 눈물을 머금고 쓰다. 비각현판에 글씨는 "前峯後巖於千萬年" 즉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라는 글이 있다<영조의 친필임> *비석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을 한 비각 안에 있다. ◈정업원 유래(淨業院 由來) 정업원은 21대 영조가 청룡사를 고쳐부른 이름임. 원래는 세종때 생긴 이름. 조선초기에는 궁중에 부처님을 모시는 내불당이라는 법당이 있어 왕비 이하 궁녀들이 조석으로 이곳에서 예불을 드림. 특히 소현왕후가 불교를 돈독하게 믿어 궁중에 불교의식이 성행함. 이름만 정업원으로 고쳤을 뿐 왕비나 비빈 궁녀들의 신앙적 귀의처로서의 도량으로는 변함이 없었음(장소는 금호문 밖 지금의 원남동) 이 정업원이 생긴뒤에 잠시나마 그곳에 몸을 의지하고 계신분이 정순왕후 송씨. 단종 재위4년(1455) 윤6월11일 왕위를 세조에게 선위하고 사정전에서 수강궁으로 나와있던 1456년6월 상왕으로 재위하던 1년간임 그후 단종 복위사건으로 단종은 영월로 그리고 송씨는 청룡사로 가게됨 단종은 귀양길에 청룡사에 들러 雨花樓라는 누각에 잠시머무르다 떠남 후일에, 영조는 이 고사에 연유하여 1771년 단종과 정순왕후를 위하여 옛 사원터에 새롭게 중창토록하고 왕비가 일생거처하던 곳을 일반사원의 명칭으로 부를 수 없다하여 정업원으로 개칭함 우화루 의 슬픔역사 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강원도 영월까지 유배가 결국 그곳에서 죽게 된 단종(端宗, 1441~1457)은 유배 갈 때 왕비 정순 왕후와 이곳 우화루(雨花樓)와 영리교(永離橋)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고, 이어 왕비는 영월이 있는 동쪽이 가장 잘 보이는 이곳 청룡사에서 스님이 된 비극이 서려있기도 하다. ◈이때 정순 왕후는 수강궁에서 나와 청룡사에 있었다. 귀양길에 오른 단종도 청룡사에 함께 들러 이곳 우화루에 잠시 머무르며 왕비와 최후의 작별을 하였고, 왕비는 다시 영리교까지 따라 나왔으나 다만 단종의 유배길을 뒤에서 바라만 볼 수 있을 뿐이었으니 당시의 이 애달픈 이별장면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한 이별을 나눈 우화루를 "영리정(永離亭)"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차차 와전되어 ‘영미정’이 되었으며 마침내 동네이름으로까지 변하게 되었다. 또 영리교도 역시 와전되어 "영미다리"라고 불린다. 이곳 우화루에서 단종이 영월로 떠나기전 이 생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부인 정순왕후와 하룻밤을 지새우며 이별인사를 나누었던 곳이랍니다. *우화루 내부 그 옛날 가구가 그모양 그대로 놓여져있어 그 당시의 슬픔이 전해오는것 같았습니다. 우화루 부처님
송씨는 단종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자, 정업원에 머물며 평생동안 그의 명복을 빌었다. 정업원은 여승방(女僧房)으로 원래 창덕궁에서
조선 영조 47년(1771)에 세운 비로, 비문 일부와 비각 현판의 글은 왕이 손수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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