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靑龍寺)
922년(고려태조) 도선국사의 유언에 따라 왕건이 어명을 내려 창건 慧園비구니를 주지로 임명하여 조석으로 종을 울려 삼국통일을
축원토록함 풍수지리적으로 한양의 외청룡에 해당하는 산등에 지었다하여 절이름을 청룡사라함
1036년(정종2년) 만선 비구니스님이 퇴락한 절을 더음 중창 이후 10여차례중창
청룡사는 특히 왕비와의 인연이 깊은 사찰로 조선초부터 왕실 지친의 여인들이 비구니로 출가하면 거처하던 곳
즉, 태조가 즉위하자 공민왕의 惠妃가 나라를 잃고서 승려가 되어 이절에 주석함 .
태조 7년 왕자의 난으로 계비강씨의 딸 경순공주도 부왕의 지시로 이 사원에 들어와 삭발, 1813년(순조13)사원 全燒하여, 1814년 중창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뒤 얼마 안 있어 왕권을 찬탈한 숙부 수양대군 세조에 의해 영월로 유배 갔다가 그곳에서 비참하게
죽은 단종의 애사(哀史)는 역사의 뒤안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준다.
그러나 처형되지는 않았어도 단종을 잃은 슬픔으로 이곳에서 외롭게 살다간 정순 왕후의 애달픈 사연도 또한 속인들의 마음을
저미게 한다. 단종과 정순(定順, 1440~1521) 왕후의 비극은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폐위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나온 지 1년 만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고
사육신이 전부 처형당하면서 그 모의에 연루되었다 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강원도 영월 청랭포(淸冷浦)라는 곳으로 귀양 가게 되었다.
이때 정순 왕후도 수강궁에서 나와 청룡사에 오게 되었다.
정순 왕후는 단종과 이별하던 곳에서 단종을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영월 쪽이 가장 잘 보이는 낙산 상봉의 이곳 청룡사로 올라가
머물게 된다. 왕후는 출가하여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며 이때 왕후와 함께 온 일행 5명도 전부 비구니가 되었다.
왕후는 청룡사에 온 뒤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일념으로 기도하는 한편 절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댕기, 저고리, 깃, 고름,
끝동 등의 옷감에 자주물을 들여서 내다 팔았다.
자주물을 들일 때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곤 하였으므로 그 바위를 "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우물을 "자주우물"이라 하며
또 그 마을이름을 "자주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한양의 아낙네들은 이를 팔아 주기 위해 일부러 자주끝동을 달아 입었다고 한다.
정순 왕후는 청룡사에서 수도 정진하는 한편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청룡사 앞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단종이 유배 간 동쪽을
바라다보았으므로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동망봉(東望峰)"이라고 불렀으며, 훗날 영조는 "동망봉"이라는 글을 써서
그곳 바위에 새기도록 했다고 하는데, 현재 바위에 새겼다는 글씨는 일제 때 비행장을 닦으면서 깨져 없어졌다고 한다.
왕후는 청룡사에서 65년간을 수도하다 82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었다.
그 뒤1698년(숙종 24)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왕후도 함께 복위되었고 그의 능도 사릉(思陵)이라 추상(追上)되었으며
신위도 종묘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영조는 정순왕후가 지낸 청룡사 경내에 "정업원구기"라는 친필을 내려 비각을 세우게 하는 등
정순 왕후의 슬픔을 위로하기도 했다.
소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네요
신중단
심검당
심검당 : 청룡사의 선방이라 합니다.
괘불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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