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동국대 정각원 = 경희궁 숭정전은 창경궁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 궁궐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련암 2011. 9. 30. 11:10

동국대에 강의를 들을것이 있어 갔다가 정각원에 잠시 들렸다 왔다.

 

 동국대부속여자고등학교

 

동국대 대각전 법당

 

 대각전 관음도<법당올라가는 계단에... 좌측

 

 

우측 : 2층법당으로 올라가기전에 양쪽으로(좌, 우) 나누어져 있다

 

 

법당 내부

 

 

동국대학교 정각원의 역사 : 예전에는 경희궁 숭정전이었다.

 

원문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0호 / 시대 1620년 광해군 12년 무렵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 192-5 번지 동국대학교 교내

 

 

숭정전은 1617년(광해군 9년)과 1620년(광해군 12년) 사이 궁궐을 지을 때 세운것으로 경덕궁(慶德宮, 영조 때 慶熙宮으로 개칭)의 정전(正殿)이다.

1910년 일본인이 다닐 경성중학교를 이곳에 설립하면서 경희궁 전역은 심하게 훼손되었다.

승정전은 다른 건물보다 비교적 늦은 1926년에 남산 기슭의 조계사로 옮겨 지었고, 

1976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학교 법당인 정각원(正覺院) 으로 쓰인다.

최근 경희궁 복원 공사 때 숭정전을 옮겨 지으려고 했으나 변형이 심해 이곳에 두기로 하고, 발굴 결과를 토대로 경희궁에 새로 지었다. 

궁궐 정전에 어울리도록 이중 월대를 쌓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을 올렸으며, 기둥 위는 다포로 공포를 짜고 팔작지붕으로 마감하였다.

내부에 있던 어좌(御座)는 없어졌는데, 대신 불단을 설치하였다.  숭정전 주변은 원래 사방에 문을 내고 회랑을 둘러었다.

남쪽에는 숭정문(崇政門), 동쪽에는 여춘문(麗春門),  서쪽에는 의추문(宜秋門), 북쪽에는 자정문(資政門)이 있었다.

경희궁의 모습은 <서궐도안(西闕圖案)> 보물 제 1534호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계단밑 석등옆에 설명문을 옮겨 적은것임>

 

정각원 전경

처음 절을 보았을때 일반절들과는 지붕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거기에는 사연이 담겨 있었다.

 

경희궁은 조선 광해군 9년(1617년)부터 12년(1620년) 사이에 지어진 궁궐로 임금이 항상 머무르던 곳이 아니라 본궁을 떠나 잠시 머무르던 이궁이다.

광해군 10년(1618년)에 지어진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임금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고 공식적인 행사를 하던 곳이다.

그러나 1910년 일본인들에 의해 강제로 철거되어 1926년 조계사로 옮겨 세워졌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안의 정각원이라는 법당으로 쓰이고

있는데 내부가 불교 의례를 행하기에 알맞게 변형되어있다.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정전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다.

경희궁에 있던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지어진 장엄한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시에서는 1985년부터 5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토대로 숭정전을 6년에 걸쳐 복원했다.

 

경희궁 숭정전은 창경궁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 궁궐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법당 내부

 

 

 

 통일 찰해도 = 청정법신 비로자나불과 광명진언

 

법당안 오른쪽에는 "통일찰해도(신중탱화)" 가 있다.  통일찰해도는 고대부터 현대인들이 믿는 모든 믿음의 대상을 다 넣어 조성한

조국평화통일과  불교중흥을 기원하는 신중탱화랍니다. 

우리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에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와 같이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의 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형상화한 것이랍니다.

 

연화장세계도는 "80華嚴經"  39품 중 하나인 화장세계품에서 설명하는 바로자나불의 정토를 그린 불화입니다

 

 

 

 

 

 

 

 

 동국의 종 = 범종각

왼쪽에는 정각원을 바라보고 있는 "동국의 종"이 있는 종각이 있습니다.

1976년 10월 "이 종소리는 가장 깊은 사랑의 소리니, 꿈이거던 아름다운 꿈의 꽃피게 하고 생시거던 온통 밝은 사랑의 빛 되게하며,

이 누리의 목숨들 영원히 도아 울려라. 우리동국 간절한 소원 가득가득 울려라"  라고 미당 서정주 교수가 지은시를

서예가 김진상님이 몸통에 쓰고, 비천상과 "섭심, 도세, 자애, 심실"의 교훈을 사방에 새긴 "동국의 종" 이 전통적 방식으로 주조되어 종각에 안치되어 있다.

 

이 범종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울리며, 입학식과 졸업식 및 중요한 학교행사와 법요식 때에 타종된다고 합니다

 

 

정각원의 또 다른 모습

 

 

惟政 四溟大師 像(유정 사명대사)

 

 

신경림의 시비

 

장충단 비

 

장충단비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호 / 시대 : 1900년 (광무 4년)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 197번지

 

장충단비는 을미사변 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장충단에 세워졌던 비석이다.

1895년(고종 32)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었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죽었다,

고종황제는 1900년(광무 4)에 아들을 위하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세웠는데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1910년 한일병합과 함께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다. 1920년대 후반에는 이곳에 벗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이곳을 "장충단 공원"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奬忠壇)'글씨는 당시 황태자였전 순종황제가 쓴것이다.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비석의 뒷면에 새겨진 비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기리는 것이다.

 

수표교(水標橋)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18호 / 시대 : 조선 전기 (태종 ~ 세종 연간)

소 재 지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2가 197 - 1번지

 

이 다리는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수위를 측량하던 관측기구인 수표(水標)를 세우면서 수표교라 불렀다.

한양 도심을 흐르는 개천(開川, 지금의 청계천)의 다리는 조선 초 토교(土橋)나 목교(木橋)로 지었다. 하지만 태종 연간부터 석교로 교체 했는데,

수표교도 태종 ~ 세종 재위 기간에 돌로 개조했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시작하면서 철거하여 처음으로 옮겼다가, 1965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디리 길이는 27.5m에 폭은 7.5m, 높이 4m이며, 재료는 모두 화강석이다.

교각 하부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만들었다. 1441년(세종 23)에 다리 서쪽에 나무로 만든 측우기를 설치하였다가 성종때 돌로 교체하였다.

1760년(영조 36)에는 교각에 경진지평(庚辰地坪)이란 글자를 새겨 네 단계로 물 높이를 측정함으로써, 다리 자체가 수량을 측정한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로

발전하였다. 수표교와 함께 있던 수표(보물 제 838호)는 장충단까지 같이 왔다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청동오리의 움직임을 찍으려 기다려 보았으나 허탕치고 왔다.

 

 

 

찾아가는 길 = 지하철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동국대 입구역 하차하여 6번출구로 나오면 왼쪽으로 동국대로 이어지는 에스켈레이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