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 한강유역 및 수도 방어 기능을 담당하던 곳으로 단 한 번도 함락당한 적 없는 천혜의 요새다.
병자호란 때도 성문을 열고 항복한 것이지 함락되지는 않았다.
11.7㎞(본성 9㎞, 외성2.7㎞)에 달하는 성곽에 5개 옹성, 4대문이 노송군락 등 주변자연경관과 함께 아름답게 보존돼 있으며 특히 조선 시대 인조, 숙종, 영조 ·정조기의 다양한 축성기법이 잘 드러나 있다.
남한산성(사적 57호)은 병자호란 치욕의 현장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돼 있답니다.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은 후 인조가 1624년에 성을 쌓으면서 남한산성은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지요.
안팎의 침입을 막기 위해 조성한 남한산성은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이곳으로 피신하면서 굴욕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인조는 산성을 지키며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세손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1637년 1월 30일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나루터)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했지요.
임금이 거처할 행궁(行宮)과 관아(官衙) 등 국가 유사시에 대비해 각종 시설을 갖추었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동·서·남 문루와 장대·돈대·보 등 방어시설,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랍니다. 이곳에서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나와 온조왕의 성터로도 알려져 왔습니다.
※장경사는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수축시 승군의 숙식과 훈련을 위해 건립한 군막 사찰이다*
비운의 산성을 묵묵히 지켜온 고찰장경사(長慶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인 이곳은 사적 57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남한산성 안이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지키던 방어의 중요한 기지로서 장경사의 역사 역시 남한산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장경사는 조선 인조 16년(1638, 무인)에 벽암대사 각성(覺性)에 의해 처음 만들어 졌다. 당시 남한산성에서는 전국의 승려가 동원되어 산성을 축조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머물 곳으로 7개의 절을 창건하게 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장경사이며, 이때 창건한 다른 모든 절은 일제에 의해 폐사가 되었고
오직 장경사만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현재 장경사는 경기도 문화재 자료 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창건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은 많지 않으며, 건물들은 모두 후대에
중수된 것들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심당, 범종각, 삼성각, 심향각과 요사 1채가 있으며, 그밖에 팔각구층석탑 1기가 있다.
모두 근래에 들어와 지어졌으며 장경사라 쓴 편액이 걸려 있는 요사채가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옛 모습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장경사 일주문 = 일주문은 사찰영역의 시작을 알리는 건물이다. 이곳을 지나면 부처님의 세계이니 몸과 마음을 다지라는 의미를 지닌다.
거대한 2개의 기둥은 말끔하게 가공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잘라 껍질만 벗겨낸 정도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다.
대웅전과 구층사리탑
화려한 양식을 가진 대웅전
양각의 연꽃무늬를 조각해 매우 화려한 모습을 한 초석의 모습은 다른 사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형태이다.
대웅전 기둥에 한글 주련이 씌어져 있다. 주련 내용 = 온누리 띠끌 세어 알고서 큰 바다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말다 못하리
왼쪽에 있는 범종각에는 범종만 걸려 있을 뿐 운판이나 목어 등 다른 사물은 보이지 않는다. 범종은 1985년에 새로 조성한 것이며,
범종각 역시 이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기둥에는 한글로 쓴 다음과 같은 글귀의 주련을 걸어 놓았다.
종소리를 들으면 번뇌가 끊어지고 지혜는 자라나서 깨달음 생겨나네
지옥을 떠나고 삼계를 벗어나서 원컨대 성불하여 일체중생건지리다
멀리하늘 저끝까지 울려퍼지고 깊이 땅속 더 깊은 곳까지 스며드네
지장보살, 석가모니 부처님, 관세음보살
신중탱화, 신중단
대방 = 장경사에서 가장오래된 건물이다. 원래 대방채는 불전의 역할까지 겸하는 건물이었다.
현재 이 건물은 대중들이 모이고 공양을 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이 건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기둥 위의 초익공식 짜임이다. 기둥과 기둥사이에 따로 창방을 사용하지 않고 이 자리에 첨차를 꽂아 넣은 모습이 독특하다.
익공의 쇠서 형태도 매우 독창적이다. 이 건물에서는 쇠서의 하부에 연봉을 같이 조각했는데 다른 곳에서 쉽게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산신각 = 북벽에는 불단을 만들고 중앙에 칠성탱화, 왼편에 독성탱화, 오른편에 산신탱화를 모셨다.
산신탱화와 산신단
독성과 산신은 탱화만 모시지 않고 조상(彫像)을 함께 모신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칠성탱화 칠성단
칠성탱화는 1921년에 조성된 것이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나한탱화와 독성단
삼성각 내부 벽화
우측, 무심당 = 무심당은 맞배지붕에 민도리집 형식을 띄고 있으며, 장경사거사회의 모임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무심당 근처에 위치한 은행나무는 여러 참배객, 관광객의 쉼터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주련 =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좌측, 심향당 = 중심 마당 왼편에 위치한 심향당은 스님들이 거주하는 건물이다.
주련 = 霜風括地掃枯荄 : 서리 바람 땅을 감싸고 마른 나무 풀뿌리를 쓸어내네
誰覺東君令已逥 : 누구 깨달은 동군(東君)이 있어 돌이킴을 그치도록 할까
唯有嶺梅先漏洩 : 오직 영매(嶺梅) 있어 먼저 흐르니
一枝獨向雪中開 : 한 가지 홀로 눈 속을 향해 피어나네
丈夫自有衝千氣 : 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찌르는 기상이 있으니
不向如來行處行 : 여래의 가신 곳을 향하여 가지마라
=구층탑=
9층의 불사리탑이 조성되어 있다.“불사리탑건립기념비”에 의하면 1995년에 새롭게 조성한것이라고 한다.
포대화상
당말기(唐末期) 명주 봉화현(明州 奉化縣)에서 태어났으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안습니다.
몸집이 뚱뚱하고 배가 늘어져서 배불뚝이였으며, 지팡이에 큰 자루를 끼어 메고 다니다가, 주는 대로 받아 넣고,
달라는 대로 꺼내 주며, 먹을 것이라면 무엇이나 주는 대로 먹기를 잘 하였습니다.
잠은 아무데나 가리지 않고 누워 잤으며, 한 잠자리에서 거듭 지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길흉화복과 날씨 등을 미리 말하였는데(맞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본디 출가한 법명은 계차(契此)스님이지만, 큰 자루(布袋)를 메고 다녀서, 포대화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게송으로,
一鉢千家飯 한 바리때에 천 집 밥을 빌어먹고
孤身萬里遊 홀몸으로 만리를 노닌다
靑日覩人少 대낮에도 보이는 사람 드물어
問路白雲頭 갈길 을 흰구름에게 묻는다
하고 읊었습니다.
번뇌의 티끌에 젖지 않고 의, 식, 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두타행(頭陀行)을 즐긴 포대화상은,
그가 열반한 후에 미륵보살 화현으로 알려졌습니다. 오늘날에도 그의 상(像)이 많이 그려집니다.
*찾아가는 길 = 지하철, 버스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천호역에서 8호선으로 환승 = 8호선으로 승차하여 산성역 하차 = 2번출구로 나온다 =
9번버스타고 남한산성입구가 종점이다.
※ 52번 버스를 타도 된다 오히려 더 빠르다. 이 역시 종점에 하차 9번 종점과 같음, 남한산성 입구까지 10분도 안걸림
종점에서 내려서 쉬엄쉬엄 걸어가도 되고 택시를 타도 된다 하지만 요즘처럼 단풍철에는 걸을만하다 단풍이 아름답게 물 들기
시작하였다 ▶장경사 와 망월사는 삼거리에서 갈려 두절 모두 얼마 안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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