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지관스님이 계시던 경국사 = 1

백련암 2012. 1. 23. 03:36

정릉에 있는 경국사

 

정릉천을 끼고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경국사는 1325년(고려 충숙왕 12) 자정국존(慈淨國尊)이 창건한 청암사(靑巖寺)가 그 시초이다.

그 후 1669년(현종 10) 조선태조의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 묘소인 정릉이 복원이 되면서 근처에 있던 약사사(봉국사), 흥천사와 함께

능묘의 원찰로 지정되어 경국사로 절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절은 1325년(고려 충숙왕 12)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하고 절이 위치한 곳이 삼각산의 청봉(靑峰) 아래였으므로 지명을 따서 청암사(靑岩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창건이후 1330년경에는 무기(無奇)스님이 이 절에 머물며 천태종의 교풍을 크게 떨치기도 하였고,

이듬해인 1331년(충혜왕 1)에는 고려 말의 권신 채홍철이 당우를 증축하여 선승들의 수도를 뒷받침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 경국사는 숭유억불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점차 퇴락의 길로 접어들어 중종(1506~1544)초 무렵에는 전각이 허물어지고

황폐한 모습으로 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545년(인종 1) 왕실의 도움으로 중건이 이루어지고, 다음해인 1546년(명종 1)에 가서는 문정왕후가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대대적인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다.

 

 

『경국사사적기』에 의하면 이 시기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청암사를 경국사(慶國寺)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사찰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름이 바뀌게 되는 것은 그 뒤의 일이라고 여겨진다.

즉, 1669년(현종 10) 조선태조의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 묘소인 정릉이 복원이 되었다.

이에 따라 근처에 있던 약사사를 봉국사로 중창·개명하고, 흥천사와 함께 능묘의 원찰로 삼았는데, 이때 청암사도 원찰로 지정되어

경국사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후 1698년(숙종 19)에는 연화 승성(蓮華昇城)스님이 절을 중수하고 천태성전을 세웠다. 천태성전은 독성을 모신 전각으로 이때 기록한 「천태성전상량문」

이 지금도 남아 전각에 걸려있다. 1737년(영조 13) 낙암 의눌(洛巖義訥)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절을 중수하였고, 1793년(정조 17)에는

천봉 태흘(天峰泰屹)스님이 이곳에 머물며 크게 중수하였다.

 

1855년(철종 6)에는 예봉 평신(禮峰平信)스님이 법당을 다시 세웠고, 1864년(고종1)에는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재를 열기도 하였다.

1868년(고종 5)에는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회를 열었는데 이때 왕실에서 범종을 보시하였다.

그리고 1870년(고종 7)에는 큰방을 고쳐지었다.

 

 

1878년(고종 15)에는 함홍 치능(涵弘致能)스님이 고종의 도움으로 여러 요사를 중수하고, 철종의 왕비 김대비(金大妃)의 49재를 지냈다.

1887년(고종 24)에는 석찬(碩讚)스님의 화주로 팔상탱, 지장탱, 신중탱, 현왕탱, 감로탱을 조성 봉안하였다.

 

20세기 들어서는 1914년 기송 석찰(其松錫察)스님이 극락보전을 다시 세웠고, 1917년에는 계곡 위에 반야교를 놓았다.

그 후 1921년부터는 단청과 불화에 일가를 이루었던 보경(寶鏡)스님이 주지로 머무르면서 절을 새롭게 변모시켜 나갔다.

1921년 각 건물을 단청하고, 1924년에는 큰방에 아미타후불탱, 구품탱, 조왕탱 등을 봉안하였다. 1930년에는 영산전과 산신각, 큰방 등을 중수하고,

1936년에는 영산전 석가모니후불탱과 신중탱, 18나한탱 4폭, 범종 등을 조성, 1939년에는 삼성보전에 미륵탱, 약사탱, 칠성탱 등을 봉안하였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대통령이 절에 들렀다가 보경스님의 인격과 태도에 감화되어 이후 몇 차례나 더 오고 가기도 했으며,

1953년 11월에는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자 그를 절에 안내하기도 하였다.

후일 닉슨은 자기의 회고록에서 경국사에 참배했던 경험이 한국방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는 보경스님의 뒤를 이어 주지 소임을 맡은 지관스님이 관음전, 삼성보전, 영산전, 산신각, 천태성전, 환희당 등을 중수하여

경국사를 현재의 모습으로 탈바꿈 시켰다.

 

1989년에는 다시 극락보전을 확장·개축하면서 앞에 석조계단을 설치하였고, 1991년에는 보경스님의 행적비를 세웠다.

그리고 1995년에는 사적비를 세웠고, 1998년에는 삼성보전을, 2000년대에는 관음전을 새로 지었다.

최근에는 2005년에 한국불교의 율풍(律風) 진작에 헌신했던 자운스님의 부도인 계주원명사리탑(戒珠圓明舍利塔)을 경내 부도전에 세웠다.

 

 

보경스님은 1921년 주지가 된 후 60년간을 절에서 떠나지 않았고, 단청(丹靑)과 불화 조성에 일가를 이루었던 분이다.

   현재 경국사의 영산전과 명부전, 삼성보전 등의 전각에는 보경스님이 직접 그리고 조성한 불화와 불상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전등사와 낙산사, 삼막사, 연주암, 보신각, 경회루 등에도 스님의 손길은 거쳐갔다.

   또 스님은 근대기 경국사의 역사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교학과 선지(禪智)를 두루 익히고 계율에도 철저하여 승가의 귀감이 되기도 하셨다.

 

 

극락보전(慶國寺 極樂寶殿)

 

3층의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였는데 극락조와 공작, 백학이 하늘을 날고, 여의주를 입에 문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어 마치 극락세계의 한 장면인 듯하다.
이 닫집 아래에는 목조아미타삼존과 그 뒤에 보물 제748호로 지정된 아미타후불목각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오른쪽 벽면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1887년(고종 24) 조성한 신중탱을, 왼쪽 벽면에는 지장보살좌상과 근래에 조각한 아미타후불목각탱을 봉안하였다.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각탱으로 조성년대는 18세기 중엽으로 추정이 된다. 구도를 보면 중앙의 아미타불이 커다란 광배(光背)를 배경으로,

여러 층으로 된 높은 양련 대좌(仰蓮臺座) 위에 앉아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나발이 붙여 있으며, 넓적한 얼굴은 형식화가 정착된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하고,

양 어깨에 걸치고 있는 옷은 두꺼워서 신체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고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광배는 크고 화려한 불꽃무늬가 위로 솟아서 뻗쳐있고 그 안에 3위의 화불들이 각각 표현되어 있다. 본존 좌우에는 관음과 대세지보살 등 8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밑 좌우에는 사천왕 중 증장천과 지국천이 조각되어 있고, 상단에는 사천왕이 들어갈 자리에 ‘서방광목천왕’ ‘북방비사문천왕’이라 쓴 패(牌)

만 조각되어 있다. 8대보살은 지장보살을 제외하고 모두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으며, 두꺼운 옷을 입고 연꽃을 든 채 활짝 핀 연꽃 위에 서 있다.

본존과 같은 높이에 보살이 서 있고 바깥 좌우에는 나한상이 1구씩 서 있다.

 

전체적으로 조각수법이 둔중하고 양감이 결여되어 형식화된 면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조선 후기 목각탱 가운데 귀중한

자료로 현재 보물 제748로 지정되어 있다.

 

 

보물 제748호 서울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서울 慶國寺 木刻阿彌陀如來說法像)<불교신문에서 펌해왔음>

 

◈자세한 설명,◈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경국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목각탱화. 세로 177㎝, 가로 176㎝. 너비 약 30㎝ 정도 되는 판목 5매를 잇대어,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모두 13구의 불·보살을 고부조(高浮彫 :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새겼다.

본존은 커다란 광배를 배경으로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였고, 광배 위로 뻗은 광선 위에 모두 7구의 화불(化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아마도 과거칠불(過去七佛)을 나타낸 것이라 생각된다.

사각형에 가까운 넓적한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하고 평평한 코 등 양감이 결여된 본존의 얼굴 모습은 형식화가 정착된 조선 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얼굴에 비해 왜소하고 위축된 신체에는 통견(通肩)의 법의를 걸치고 있는데, 두꺼워서 신체의 윤곽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옷자락은 대좌의 앞부분이 불상의 옷주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현좌(裳懸座)를 이루며 대좌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광배는 주형 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윗부분에는 당초문(唐草文)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아래는 중첩된 산 모습을 조각한 퍽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광배 주위에는 도식화된 연꽃잎을 두르고, 주위에 화염문을 배열하였는데 역시 형식화되었다.

본존의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시고 있고, 그 주위를 여섯 명의 보살과 아난(阿難)·가섭(迦葉)·증장천(增長天)·지국천(持國天) 등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위쪽의 좌우에는 연화좌 위에 북방비사문천왕(北方毘沙門天王)·서방광목천왕(西方廣目天王)이라고 쓴 표지판을 올려놓아

상(像)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팔보살을 배열한 아미타팔대보살화의 구성을 이룬 것으로 생각되는데,

예천 용문사목각탱도 이러한 형식을 취하고있다.

전체적으로 조각 수법이 둔중하고 양감이 결여되어 있어 형식화된 면이 많이 보이고 있으나, 고부조로 조각되어 원각상(圓刻像)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다.

인물의 구성에 있어서 횡적 혹은 종적으로 질서 정연하고 단순하게 인물들을 배열한 다른 목각탱화들과 달리,

본존을 중심으로 권속들이 둥글게 둘러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조각 수법이나 형식 등으로 보아 19세기 말에 조성된 작품으로 보인다.

이 목각탱화가 보관된 극락전 안의 팔상도(八相圖) 및 감로왕도(甘露王圖)·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 등이 1887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목각탱화 또한 같은 해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현존하는 몇 예에 불과한 조선 후기 목각탱화의 하나로서, 당시의 아미타신앙의 일면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地藏菩薩(지장보살)

자장보살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놓고 처다봤다 물살에 빛이 들어와 표현이 제대로 안되었지만 직접가서 보면알 수있다.

 

지장보살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의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영구한 고통을 받고있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하는 보살이다.

즉, 죽음의 고통을 구제하는 구세주로 명부전의 주존으로 각광 받아 봉안되는 것이다.

 

지장보살은 민머리모습에 결가부좌하여 주존으로 있으며

양쪽의 협시로 문인의 모습인 무독귀왕(無毒鬼王)과 젊은 수도승인 도명존자(道明尊者)가 합장을 하고 서있다.

 

 

극락보전 벽화들 ↓↓

 

 

 

 

 

법화회((法華會),                     관음성전(觀音聖殿),                          화엄회(華嚴會)

 

관음전에 걸려있는 법화회(法華會) 현판과 함께 전각 양끝에 걸려있는화엄해(華嚴會)현판도 해강(海江) 김규진(金圭鎭,1868~1933)이 쓴 글이다.

좌우 양쪽에 있는 나무는 보리수 나무

 

 

관음전성전(觀音聖殿)의  관음보살(觀音菩薩)

 

 

경국사 목 관음보살 좌상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8호 경국사목관음보살좌상(慶國寺 木 觀音菩薩坐像)<불교신문에서 펌해옴>

 

이 불상은 1703년(강희 42년) 청신(淸信)이 화주가 되어 전라남도 영암 월출산 도갑사에서 조성되어 도갑사 견성암에 봉안되었던 관세음보살좌상으로,

현재는 서울 경국사 법당 향우측 벽에 봉안되어 있다.

전체높이가 60cm에 달하는 중형의 보살상으로서, 복장(腹藏)에서 발견된 발원기에 의하면 색난(色難)을 수조각승(首彫刻僧), 순경(順瓊)을 부조각승으로

하여 행원(幸垣), 대원(碓遠), 일기(一機), 추☐(秋☐), 대유(大裕), ☐척(☐陟) 등이 함께 조성하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보살상은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하여 두부(頭部)가 큰 편으로, 머리를 약간 숙이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는데, 장식 등이 잘 남아있다. 정상부에는 높고 길죽한 보계가 표현되었으며 이마부분에는 빗으로 빗은 듯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표현되었고, 보발은 귀의 중간부분을 감싸고 흘러내리다가 어깨 위에서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팔뚝 위로 흘러내렸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깝지만 턱 부분에 살이 올라 부드러워 보인다. 미간에는 백호가 선명하며, 활형[弓弧]의 가는 눈썹과 약간 위로 치켜뜬 긴 눈,

오똑한 콧날, 꾹 다문 얇은 입술 등은 조선후기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신체는 안정감있고 균형이 잘 잡혀있는 편으로, 어깨 폭이 넓지 않아 아담하면서도 단정해 보이며 결가부좌한 무릎 폭도 적당하여 안정감을 준다.

양 어깨에는 법의가 걸쳐져 있는데, 법의는 목 뒷부분이 약간 접혀있으며 왼쪽의 법의는 왼쪽 어깨를 완전히 가리고 어깨에서부터 무릎부분까지 내려오면서

무릎 위에 놓인 왼손을 손목부분까지 완전히 덮고 있으며,

오른쪽 법의는 어깨를 덮은 뒤 오른쪽 팔꿈치 아래로 하여 배 부근으로 내려가 왼쪽에서 내려온 법의 안쪽으로 여며진 모습이다.

이와 같은 착의법은 넓게 트인 가슴, 수평 또는 연꽃형의 군의 표현과 함께 조선후기 불상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올려 첫째와 셋째손가락을 마주잡고 있으며, 왼손은 왼쪽 무릎에 대어 길죽한 정병을 잡고 있다.

한편 좌세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오른쪽 발이 완전하게 드러나 있으며, 무릎 앞쪽으로는 옷자락이 물결치듯이 좌우로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보관은 장식과 관대 등이 잘 남아있다. 영락장식과 화염보주 등으로 화려하면서도 치밀하게 장식된 보관에는 아미타화불은 표현되지 않았다.

특히 귀 옆으로 율동감있게 뻗어 내린 관대자락은 강렬하면서도 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 보살상은 조선후기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장인 색난(色難)이 1703년에 조성한 보살좌상으로, 신체에 비하여 다소 큰 듯한 얼굴이라든가

안정감있는 좌세, 오똑한 코, 수평으로 가로지른 군의의 표현, 단정한 결가부좌의 자세 등이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존상태도 양호하며 17세기 목조보살상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海上騎龍 普祥生(해상기용보상생)    관음성전 벽화

 

馬郞魅 0無常覺(마랑매 0무상각)

 

千手千眼廣度0(천수천안광도0)  = 벽화엔 천수천안 관음도 좌우보처인 용왕과 남순동자가 모셔져 있다

 

衆生寺 降保幼兒(중생사 강보유아)

 

甘露放注 衆生前(감로방주 중생전)     관음성전 벽화 끝

 

 

경국사 일주문

 

불법의 세계를 들어서는 첫번째 관문인 일주문은 일심(一心)을 상징하는 문이다.

정사각형의 지대석이 귀꽃장식이 된 초석을 받치고 용이 승천하고 있는 모습의 돌기둥을 세워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올린

일주문은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다.

 

 

가산불교대장경 석판  (불교 대사림편찬 발원문)

 

 

 

1월 2일 입적한 지관 스님은 유훈에서도 <가산불교대사림>의 완간을 당부할 정도로 많은 애정을 나타냈다.

스님은 유훈을 통해 “속가와 불가에 대해 부끄러울 뿐 미련은 없다.

다만 가산불교대사림이 지금까지 12권이 출간됐고 아직 남은 8,9권을 정리해 부처님께 고하고 죽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소망이다”고 밝혔다.

스님은 1983년 <가산불교대사림> 편찬을 발원하고 경국사에서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렸다.

사진은 경국사에 마련된 가산불교대장경 석판을 바라보고 있는 지관 스님

 

 

▲ 치아 사리 5과와 원형 사리 3과 등 2재에서 공개된 지관 스님 사리.

 

 

보경당보현대종사행적비명과 사리탑

 

이 사적기는 1930년대에 공덕주 보경화상에 의하여 씌어진 것입니다. 사적기에 의하면, 경국사는 처음에 청암사(靑岩寺)라는 이름으로

고려 말인 1327년 (충숙왕 12)에 자정(慈淨)국존이 창건한 절로 자정은 법명이 자안(子安)으로 고려말기 법상종의 고승이었다.

청암사가 경국사로 이름이 바뀐 것은 17세기 현종때의 일이며, 1693년(숙종 19)에 연화선사가 천태성전을 창건하였다고 적혀있다.

 

 

 자운대율사계주사리탑

 

경국사 일주문을 들어서 100여m 지점에는 한국불교의 율풍(律風) 진작에 헌신했던 자운(慈雲 :1911~1992) 대율사(大律師)의 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이 사리탑은 2년간의 준비와 제작 끝에 2005년 완성된 것으로, 2단 기단 위에 석조형 탑신을 올린 계단형 사리탑이다.

 

자운율사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계율을 무시하고 대처육식을 하는 등 청정승단의 전통 지계정신이 흐려진 것을 보고 이를 아타깝게 여겨

불교중흥을 위해 노력했다. 자운율사는 1940년부터 서울 종로구 봉익동 대각사에 머무르면서 율장과 그 참고자료를 찾기 위해 2년여 동안

매일 도시락을 준비해 국립중앙도서관에 갔다.

이곳에서 스님은 《만속장경(卍續藏經)》에 수록돼 있는 오부 율장(五部 律藏)과 그 주소(註疎)를 모두 필사하여 깊이 연구했다.

 

이후 스님은 1948년 봉암사에서 처음으로 보살계 수계법회를 열었으며,

1949년 천화율원 감로계단을 설치하고 서울 대각사에서 한문본 『범망경』,『사미율의』, 『사미니율의』,『비구계본』,『비구니계본』등의

간행을 준비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부산 감로사에서 다시 율문(律文)을 준비, 한문본 2만 5000권을 포함 ‘한글본’까지 총 4만 8000여권을 간행 유포해 현대 한국불교

율(律)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1981년부터 단일계단 전계대화상에 추대돼 1991년까지 수많은 사미·사미니·비구·비구니들에게 계를 주었다.

이처럼 계율중흥과 교단발전을 위해 매진하던 자운스님은 1992년 2월 7일 해인사 홍제암에서 세수 82세, 법랍 66세로 열반에 들었다.

 

 

  

 

자운대율사 계주원명탑비

 

경국사 사적비 = 사리탑 뒤 좌측

 

1995년 지관 스님이 비문을 짓고 세운 것으로 현재 자운대율사계주원명사리탑 뒤에 보경스님의 부도와 나란히 서 있다.

비문에는 경국사의 전신인 청암사의 창건에서부터 1990년대 지관스님이 대대적인 중창을 이룩한 시기까지의 역사가 담겨있다.

 

 

慈雲大律師律風振作戒珠圓明塔碑

 

 

 

 

만월당은 스님들이 공부하는곳

 

 

관음전의 오른쪽에는 이승만 전대통령이 절에 들려 쓴 글로 '경국사(慶國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찾아가는 길 = 대중교통 = 지하철과 버스

*2호선이나 5호선은 동대문 역사박물관에 하차하여 4호선으로 환승 =  당고개 가는 방향으로 성신여대 입구역 하차 하여 1번출구로 나와 143번 버스를 타고

 정릉 4동사무소 앞에서 하차 하여 길을 건너서 차가 간 방향으로 조금만 올려다 보면 경국사 이정표가 바로 보인다.

 

참고로 갈 때는 길음역에서 하차하여도 되는데 올땐 길음역에 정차를 안함. 성신여대 입구역에선 지선버스는 없고 162번도 있는데 잘 안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