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찰, 백제, 원당즉 왕실사찰로 창건, 창건자 미상, 창건된지1412년이 되었다.
귀신사는 백제 법왕(法王, 재위 599년) 때 원당(願堂), 곧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가 백제 왕실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또한 귀신사는 백제 왕실의 원당이었다는 글이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처음으로 세웠다는 것이며, 당시의 사찰명은 국신사(國信寺), 혹은 국신사(國神寺)였다고 전한다.
최치원(857 - ?)은 이곳에서 <법장(法藏)화상전>을 편찬하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는 대사찰의 면모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원명(圓明, 1090-1141)국사는 1120년대에 절을 중창하였는데, 이 당시에 귀신사의 이름은 구순사(口脣寺), 혹은 구순사(狗脣寺)로 불렸다고 한다.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인 것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고려말인 1376년(우왕 2) 무렵 왜병 300여기가 이 지역에 쳐들어와 성을 함락시키고는 이 절에 주둔하였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격퇴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건물과 암자가 즐비했던 대찰이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의 정책 탓인지 초기에는 절은 매우 퇴락된 듯하다. 그것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진 김시습(1435 - 1493)이 이 절을 찾은 뒤에 지은 시문인 “귀신사허(歸信寺墟)”라는 시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에 보면 ‘탑은 무너지고 비석은 끊어져 있다.’라고 하는 내용이 써 있어서 조선초기에 이미 황폐화된 것으로 보인다.
두감 스님이 주석하면서 절은 새롭게 중창의 기운을 얻었다. 스님은 대중을 모으고 널리 시주를 받아 1707년(숙종 33)에 여러 전각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해에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서 1715년에 팔상전을 짓고 이듬해에 불상을 봉안하였다.
전봇대에 있는 귀신사 이정표
귀신사 일주문 같은 입구 계단이다 기둥같은 대리석에는 글씨의 흔적이 남아있다.
대적광전 보물 제 826호
귀신사 대적광전<歸信寺>= 지혜의 빛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사찰 경내에 들어서자 마자 눈에 띄는 중심 전각이 대적광전이다. 이 대적광전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물 재826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2005년 현재는 인간문화재 대목장 최기영 보유자에 의해 3년여의 긴 세월동안 수리 복원되고 있다.
2006년 이후에는 웅장한 대적광전의 모습을 보면 부처님이 머물고 계신 곳에 대해 법열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 대적광전 내부에는 이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석가모니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이 건물은 진리의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중심부처로 모신 법당으로 대적광전의<대적>은 이 부처가 발하는 깊은 고요 즉 정적을 뜻한다.
본래 2층 7칸 건물이었으나 후대에 현재의 단층 건물로 고쳐 지었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스님이 처음 세웠다고 전한다. 주변에 7~8개의 암자가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서 승병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대적광전 안에는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아미타불(向左)과 약사불(向右)을 배치한 삼불형식으로 흙으로 빚어만든 소조상이 있다.
건물 앞면에는 빗살무늬 창을 달아 예스러운 멋을 느끼게 한다.
대적광전의 뒷모습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노사나불(보신불). 석가모니불(화신불)= 삼불좌상 보물 제 1516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과 약사여래불 등 커다란 세 구의 불상이 있는데, 모두 흙으로 빚어 만든 정말 훌륭한 조선시대 불상이 모셔져 있다.
문화관광부에서 해설해 놓은것과*아미타불 약사불, 사찰내 안내표지판의 해설과는 약간다르다.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중앙 비로자나불. 좌측 아미타불 우측. 약사여래불.
신중전
나한전
법당의 내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귀신사삼층석탑 = 정면
삼층석탑은 높이 4.5m의 화강암재 석탑으로서,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고려 초의 석탑 양식을 보이면서도 백제탑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이탑은 고려시대에 만든것으로, 꼭대기 부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층마다 탑 몸체 귀퉁이에 기둥모양을 새겼다.
각층 지붕은 넓고 귀퉁이밑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다. 받침부와 1층 몸체, 각층 지붕은 여러 개의 돌판을 짜 맞추어 만들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2호인 귀신사삼층석탑 = 뒷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귀신사석수와 사자상<백제 왕실에서만 볼 수있는 석물>
경내 북쪽에 위치한 석수는 이 절터의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과 함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주목된다.
석수의 등 중간에 남근 같은 석주가 꽂혀 있고 기도하려는 듯한 석수의 모습에는 당당한 위용이 엿보이고있다.
남서쪽 솔개봉을 향하여 엎드려 있는 이 사자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이다.
평평한 타원형의 받침돌 위에 앉은 사자상은 머리를 치켜들고 앞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사자의 등 위에는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마디진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돌기둥을 얹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사자상은 이 곳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게 하기 위해세웠다고 한다.
영산전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좌상이 모셔져 있고, 그 좌우에는 합장을 하거나 두 손을 모은 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다.
그 양 옆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입상이 서있으며, 각각 8명씩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맨 가장자리에는 시자가 각각 1명씩 서 있으며, 들어가는 입구에는 인왕상이 각각 서 있다. 불화는 후불탱으로서 영산회상탱이 모셔져 있다.
중앙 =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좌상.
좌우에는 합장을 하거나 두 손을 모은 보살상이 협시하고 있고, 양 옆으로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입상이 서있다.
좌우로 8명씩 16나한상을 봉안하고 있다
명부전 = 지장보살과 시왕이 모셔져 있다
육환장을 들고 있는 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의 좌우로는 도명존자와 시왕이 세워져 있는데,
시왕마다 연꽃을 들거나 문서를 들고 있는 동자상들이 각각 시립해서 서 있으며 입구에는 금강역사 1쌍이 세워져 있다.
인법당
탑재= 석탑, 석등 부재 등을 모아 삼층석탑 형태로 쌓아놓았는데, 통일신라, 고려 등 여러 시대의 여러 석재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배례석= 경내 풀밭에 놓여졌는데, 산뜻한 형태라든가, 조각된 안상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품으로 추정된다.
여러시대, 여러석재가 한데 어우러져있다.
경내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항아리들<비구니스님들이 계신다>, 풍요롭고 정겨운 장독대이다...
주변을 잘 돌아보면 기타 건물지 곳곳에 장대석, 주초석, 가단석등이 흩어져 있다.
찾아가는 길 = 기차와 버스
용산역에서 김제까지 기차를 타고 김제역에서 대각선 방향을 바라보면 파출소 보임 건너편에서 버스 5번 을 타고 종점에서 하차함
버스요금 \1400원, 소요시간 30분, 배차시간 30분 간격(금산사까지)
금산사까지 가서 귀신사 이정표쪽으로 3.8km 택시요금 \5000원 정도면 갈 수있다. 도보로 1시간 20분정도 걸림,
가는 길목 주변엔 아기자기한 여러 이야기거리가 많아 둘러둘러 보고 걷다 보니 시간가는줄 모르고 걸었다. 금산사까지 다시 올땐 택시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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