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유등등(無有等等)"이란 말이 있다. 이는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다’는 뜻인데,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無等山)을
이러한 불교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무등산에 솟아 있는 여러 봉우리의 이름 또한 불교적이다. 삼존석(彌勒ㆍ觀音ㆍ如來)이나 의상봉(義湘峰), 규봉의 법화(法華)ㆍ설법(說法)ㆍ
능엄(楞嚴) 등 여러 대(臺)의 이름과 함께, 천왕봉을 비로봉(毘盧峰), 인왕봉을 반야봉(般若峰)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 무등산이 지닌 속성에 불교적 세계관을 부여하여 표현한 것이겠지만, 하나도 낯설지 않다.
증심사는 이러한 무등산을 배경으로 서쪽 산록에 자리하고 있다. 신라시대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고 고려시대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한 뒤 조선 초기에는 오백전을 건립, 오백나한과 십대제자를 봉안하여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해왔다.
증심사에는 비로전에 모셔진 보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비롯하여, 무등산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오백전(五百殿), 원통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조보살입상과 3층석탑 등이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그 외에 독특한 석탑과 부도ㆍ비석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창건배경 및 연혁
무등산의 서쪽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증심사는 신라시대인 860년(헌안왕 4)에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 798~868)이 창건하고,
고려시대인 1094년(선종 11)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창하였다.
절 이름을 살펴보면, 1530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이나 1574년 고경명(高敬命)이 지은 『유서석록(遊瑞石錄)』 등에는
‘증심사(證心寺)’라 기록되어 있으나, 1856년의 「중수약사전기(重修藥師殿記)」나 1925년의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징심사(澄心寺)’라
적고 있어 언제 어떤 이유로 ‘징심사’라 일컫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혜조국사의 중창 이후 조선시대에는 1443년(세종 25) 김방(金倣)이 중창하였는데, 이 때 500나한과 16제자상을 조성하여 오백전에 봉안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인해 불타버린 뒤 1609년(광해군 1)에 석경(釋經)ㆍ수장(修裝)ㆍ도광(道光) 등 세 분의 선사가 네 번째 중창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한ㆍ일 불교의 공동원류설이 제창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한용운(韓龍雲) 등이, 일본은 염불종ㆍ조동종
이 주류를 이루면서 신도(神道)와 융합된 반면 한국은 임제종(臨濟宗)을 이어받아 두 나라 불교의 뿌리가 전혀 다르다는 논지를 펼침으로써,
한국불교의 정통을 천명하고 임제종운동을 펼친 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4창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면서 근년에까지 이르렀으나, 6.25로 인해 오백전과 노전을 제외한 대웅전ㆍ명부전ㆍ극락전ㆍ회승당ㆍ취백루 등
조선 중기의 건축물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근래에 와서는 신도들의 노력으로 1971년 대웅전을 복원하였으며, 잇따라 지장전ㆍ비로전ㆍ적묵당
ㆍ행원당ㆍ일주문ㆍ범종각 등을 새로 건립하였다.
증심사는 6.25 때 그 원형을 잃어버린 아쉬움이 있으나, 무등산이라는 빼어난 산세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어,
광주지역의 대표적 사찰로 손꼽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호남의 빼어난 명승으로 꼽았으며, 『광주읍지』 등에도 무등산의 정기를 함축하고 있는 곳으로 찬탄하였다.
이러한 역사성을 고려하여 증심사 일원은 현재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왼쪽 언덕에 줄지어 선 비석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1912년 이래 1975년까지 증심사 중수에 공덕이 많은 신도와 스님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3기의 부도와 17기의 비석이 있다
증심사 전경
적묵당
경사진 축대 위에 와벌대 기단을 두고 원형 다듬돌 초석을 놓은 뒤 배흘림기둥을 세운 1980년대 건물이다. 팔작지붕에 겹처마이며, 익공식 포작으로 다포식이다.
건물의 기능상 벽면을 대신해 창살을 세웠으며, 정면에 용곡(龍谷) 조기동(曺基銅)이 쓴 ‘범종각(梵鍾閣)’ 편액을 달았다.
6.25 때 불탄 것을 1971년에 중건하였다.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존상으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배치하였다.
일반적으로 석가삼존상이면 석가모니불과 좌우 협시로 문수ㆍ보현보살이 오는 것이 상례인데, 여기에서는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봉안하였다.
석가모니불은 나발의 머리와 볼록한 정상계주에 방형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를 갖추고 있다.
좌측에 협시한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화불(化佛)이 있는 보관을 쓰고, 왼손에 연꽃가지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법의는 통견의이며, 목에는 영락이 장식된 목걸이를 걸고 있다.
우측에 협시한 보살은 보관에 대세지보살의 지물인 정병(淨甁)이 표현되지 않아 정확한 존명을 알 수 없으나,
좌협시인 관음보살의 상대적인 존재로 대세지보살임을 추정할 뿐이다.
1990년 금어인 조정우(曺廷宇)가 조성한 것이다.
1936년에 조성된 높이 100cm의 범종으로 현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다. 천판 위에 용통(甬筒)은 없고 한 마리의 용이 종가(鍾架)와 종신(鍾身)을 이어주고 있다.
종신의 윗부분에는 4개의 범자와 당초문의 대(帶)가 있으며, 그 바로 아래에 4개의 유곽(乳廓)이 있다. 2위의 보살입상과 2위의 신장상이 조각되었다.
하단에도 당초문의 대가 둘러져 있다.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340cm로 비교적 작은 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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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비로전과 삼층석탑과 오백전
보물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광배(光背)와 좌대(座臺)는 잃어버렸지만 불상 자체는 완전한 편이다.
상호는 원만한 타원형이며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가늘게 뜬 눈과 우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등은 다소 근엄한 표정이며,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두 귀는 짧은 편이다.
비로전 좌측에 모셔져있는 나한상
오백전 옆 범자칠층석탑과 함께 서 있는 고려시대 석탑으로, 갑석(甲石)은 파손이 심하며 4층 옥개석과 탑신은 잃어버렸다.
기단부는 지대석이 높다란 4매의 판석(板石)으로 이루어져 하층기단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그 위에 올려진 기단부의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의 합이 각 면 셋이며 옥개석 층급(層級)받침은 각 층 모두 셋이다.
1933년 이 탑을 해체ㆍ복원할 때 탑 내에서 금동불상 2구와 오층철탑(높이 19cm), 소형 철불 2구, 수정 1점, 청옥(靑玉) 23점 등이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금동석가여래입상(높이 15.9cm)은 국보 제211호로, 금동보살입상(높이 18.2cm)은 국보 제212호로 각각 지정 되었으나 6.25로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칠층석탑으로, 탑신에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어 범자7층석탑(梵字七層石塔)이라고도 한다.
하나의 돌로된 방형의 지대석 위에 탑신을 올려놓아 기단부가 생략되었다. 탑신에는 귀기둥을 표현하고 초층 탑신의 면에는 꽃무늬를 새겼으며,
2층부터 7층까지는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옥개석은 아랫면에 통상적으로 조각하는 옥개받침을 생략하고 윗면의 물매가 완만하여 매우 납작하다.
각 층의 네 면마다 관세음보살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六字大明王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동일한 범자를 7층에서 아래로 한 자씩 새겼다.
일반적인 석탑양식에서 벗어나는 어색한 점이 있으나, 탑신 각 면에 범자를 새겨 희귀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조성연대는 조선중기로 추정된다.
지장전의 주존인 지장보살은 영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민머리에 석장을 쥐고 있다. 문관의 모습을 한 무독귀왕과 수행하는 모습의 도명존자가 협시를 하고 있다.
후불화로 지장보살화가 있는데 지장보살과 그 권속들이 표현되어 있다.
명부세계(冥府世界)의 구원자인 지장보살과 명부의 심판관인 십대왕(十大王)을 표현한 탱화이다.
화면 구성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문수보살ㆍ보현보살ㆍ관음보살ㆍ대세지보살, 시왕 등 명부중(冥府衆)이 좌우대칭으로 배치된 구도이다.
이 탱화는 1993년 불모(佛母)인 석정(石鼎)이 조성하였다.
우측 좌측시왕들
어린 아이가 오른손을 주먹쥐고 서있는 모습이다. 지장전 안에는 동자상이 6체가 있다.
현재의 산신각
산신탱화
예전의 산신각
비로전 뒤 암벽에 소규모 석조전각이다. 총 높이 178cm의 석조구조물을 보면, 암벽에 음각된 ‘서석산신지위(서石山神之位)’라는
명문을 중심으로 2개의 8각 석조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석조지붕을 얹은 소규모의 형식적인 시설이다.
◈찾아가는 길
기차, 버스 = 용산에서 KTX승차 = 광주하차하여 = 나와서 오른쪽으로 버스정류장에서 49번 증심사행 승차 = 종점 하차
은선네서는 = 경신여고 앞에서 51번버스 승차 = 종점하차 하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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