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북도 = 천년!.. 감동..그리고.

가야산 해인사 원당암

백련암 2012. 7. 16. 22:04

가야산 해인사 원당암

 

원당암은『해인사 1번지』같은 상징적인 암자다 . 해인사와 형제처럼 역사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당앞에 보물 518호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는 석탑과 석등에도 암자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은 공주의 난치병이 낫자

부처의 가호(加護)로 여기고 해인사의 창건을 발원한 순응(順應)대사를 몸소 크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왕은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에 임시로 작은 집을 지어 절 공사를 독려하고 정사(政事)를 보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원당암이라는 것이다.

암자가 다시 활기를 찾게 된것은 혜암(慧菴)스님이 머무른 이후 부터였다고 한다.

혜암스님은 해인사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할 수 있는 해인총림방장(1993년 ~ 1996년)스님을 지내시고 1999년 4월 조계종 제 10대 종정스님을 추대되었다.

또한 원당암에서는 스님들과 똑 같이 일반인들도 여름과 겨울 한철씩 안거(安居)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국내 제일의 재가불자 참선도량으로 변모되었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 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 선수희언 각성 등이 있다,

또한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 희랑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해인사 원당암 경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및 석등. 석탑 높이 2.4m 석등 높이 2m. 보물 제 518호. 석탑은 해인사에서 계곡을 건너 마주보이는

원당암의 보광전 앞에 건립되어 있는데 현 재의 위치가 원위치로 추측된다.

이 석탑은 탑신부의 전 부재가 점판암으로 이루어진 이른바 청석탑으로서 특수한 석탑에 속한다.

청석탑은 고려시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는데 이 석 탑은 신라하대의 것으로 보인다. 이 다층석탑 옆에는점판암으로 조성된 석등이 건립되어 있는데

이 석등은 하대석과 상대석의 옥개석만 점판암으로 되어 있고 다른 부재는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화사석은 결실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다층석탑의 건립시기와 같은 때인 신라 하대로 추 정된다.

석탑은 점판암으로 건조한 청석탑이 간혹 남아 있으나 석등을 점판암으로 건조한 예는 드문 일이다.

 

◎건립배경◎

고대에 속하는 유물은 대부분 원당암이라 불러지는 산내(山內) 속암(屬庵)에 있다. 물론 청량사라고 불려지는 가까운 거리의 사찰에도 중요한 석조유물이

상당 수 전해지고 있지만 이보다는 원당암이 해인사와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찰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이 절의 본래 이름이 봉시사(鳳棲寺)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신라 제 51대 진성 여왕 대에 와서부터 각간(角干)위홍(魏弘)의 원당(願堂)으로 되었기

때문에 원당암이라고 하는 별칭이 생겨난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진성 여왕과 각별한 관계에 있던 각간 위홍이 진성 여왕 즉위2년(888)에 죽자, 그를 혜성대왕으로 추존하고 해인사를 혜성대왕 원당으로 삼았던

데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진성 여왕은 즉위 11년이 되는 897년 6월에 왕위마저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북궁(北宮)해인사에 머물다가

12월에 세상을 떠나자 이웃한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또한 진성 여왕은 즉위 전에는 이미 북궁공주(北宮公主)라고 불려졌고,

또한 이때의 북궁은 신라 서울의 북쪽에 위치한 해인사를 가리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보아 원당암에 있는 중요 유물들은 대체로 진성 여왕대에 와서 위홍을 위한 원당으로 지목되면서부터 이곳이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제작은 888년에서부터 897년에 이르는 약 10년 사이의 기간으로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현존하는 중요 석조 유물로는 보물 제 516호 원당암 다층석탑석등 그리고 배례석을 비롯하여 보광전의 축대 등을 지목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보광전 전방에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먼저 석탑은 특이한 청석탑이다.

이같은 청석탑은 국내에서 흔치 않는 이른바 점판암 계통의 석재를 이용한 공예적 소탑이 주종을 이룬다. 이 탑 역시 현재의 총 높이는 240cm에 지나지

않는다. 석탑의 구조는 지대석을 포함하여 3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대리석 탑신부를 마련하였고,

탑신의 네 모서리에는 독립된 석주를 배치하여 상부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초층 탑신부는 공간을 형성하여 내부에 사리 장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초층 탑신 상부에는 각층에 옥개석을 받쳤던 탑신석이 본래부터 없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석탑의 체감률이 거의 없어 옥개석을 포개 넣은 듯하다.

곧 연화문 갑석위에 모두 10매의 옥개석을 차례로 쌓아 두었고, 최상부에는 약간 불완전한 노반이 놓여 있다.

그리고 석등 역시 특이한 형태였다고 짐작된다. 곧 점판암을 이용한 희귀한자료로서, 견고한 화강석 간주(竿柱)를 이용하여 시각적으로 단조롭게 처리되었다.

불을 켜는 화사석은 결실되어 알 수 없으나 이 석등의 본래의 모습은 우아한 기품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간석을 받치고 있는 6각 점판암의 하대석 역시 6면에 6엽의 복련을 아름답게 조각하였고, 시원하게 솟은 6각의 간석 위에는 연화문을 지닌 상대 받침석

과 옥개석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석등이 화사석이 없어져 현재는 전테 높이 180cm에 불과 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 그 유래를 찾기 여려운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그것은 점판암과 화강석을 혼용하여 높이 솟은 화강석 간석 위에 화사석을 배치한 혼용의 석재를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하대석 아래의 화강석 지대석은 이 석등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적 배려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상하에 적용된 연화문 조각은 그 기품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청석탑 좌측에 있는 배례석은 보광전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 그것은 이 돌 위에서 예배하는 상징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건립 초기부터 이렇게 길이로 놓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배례석의 상부 판석 중앙에는 직경 22.5cm의 연화문을 두텁게 양각하였고, 다시 7.5cm의 연꽃 자방(子房)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이 위에서 예배하기에는

매우 불편할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법당을 향하여 길게 놓이는 배례석도 있으므로 배례석의 용도는 그 위에서 예배하기보다는

향료와 촛대등 의식 용구를 배치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곧 배례석이 위치하는 곳이 석탑의 전면인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에 의식 용구를 놓고 법요(法要)를 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곧 큰 법요 때에는 그 전방 누각 건물에서 의식을 집행한 조선시대 이후의 사례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이 배례석의 전체 길이는 93cm에 폭 47cm, 그리고 높이 33cm의 한 돌로써 제작되었다. 배레석의 측면에는 안상을 조각하였는데  이들은 전후에 각각 두 구

그리고 측면에 한 구를 새겨 그 아름다움을 더 하였다. 따라서 그 크기로 미루어봐서도 배례석 위에서 직접 예배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원당암의 주된 법당인 보광전의 축대를 주목해야겠다. 이 축대는 보광전 전면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특이한 작품으로서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보기 어렵다. 그 높이는 약 40cm에 불과한 나지막하지만 정성이 스민 품격있는 작품이다.

상부에는 아름다운 몰딩과 연꽃모양을 지닌 머릿돌을 넓은 판석으로 배치했고, 그 아래 면석은 폭 약 51cm, 높이 약 27cm의 아름다운 안상을 조각하였다.

안상의 형태는 배례석의 형태와 동일하다. 이같이 보광전의 축대에까지 안상과 연화문을 새겨 존엄을 표현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 것 역시 어쩌면

진성 여왕의 여성적 섬세함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다.

이상 보광전의 석조물의 성격은 모두 위홍 각간을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하여 조성한 진성 여왕의 배려가 도처에 엿보인다 하겠다.

따라서 이곳의 중요 석조물은 모두 신라 왕실의 배려 아래 조성되었음은 물론, 그 가운데에서도 청석탑을 비롯하여 석등, 배례석 그리고 보광전의 축대에

이르기까지 그 조형 양식 등은 모두 자그마한 원당적 성격을 배경으로 하여 조성되었다고 하겠다.

동시에 그것은 혜성대왕 원당이 곧 진성여왕의 원찰(願刹)이었던 시대적 배경속에서 이룩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혜암스님

" 나는 그렇다. 이번 생에 깨닫지 못하면 다음생에, 다음 생에 못하면 그 다음 생에 성불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수행하고 있다.

이번 생에 노력한 만큼 다음 생으로 연결되어 성불에 다가가지 않겠느냐?

나는 오늘 이시간, 이번 생에서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_()()()_

 

초파일때 원당암 전경

 

원당암 미소굴 (법우님이신 선강거사님의 사진)

 

미소굴 앞(혜암스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

 

선방

 

보광전과 다층석탑과 석등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 (陜川 海印寺 願堂庵 多層石塔 및 石燈) : 보물  제518호, 새대 = 통일신라

소재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1-22 (치인리) <문화재청의 상세설명>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호국신앙의 요람인 해인사의 원당암 안에 있는 다층(多層) 석탑이다.

탑신(塔身)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靑石塔)으로,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석재이다.

땅과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3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받치는 기단(基壇)과 지붕돌은 점판암으로 구성하였다.

기단은 1단으로 밑면에는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윗면은 네 모서리에 대리석 돌기둥을 세웠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남아있지 않고 지붕돌만 10층이 쌓여 있다.

지붕돌은 경사진 4면이 매우 평평하고 얇으며 밑면엔 낮은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려 올라갔다.

탑의 꼭대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낮게 있고, 그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만이 높직하게 남아 있다.

청석탑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지만 이 석탑은 신라 말에 만들어져 청석탑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석등은 탑의 옆에 있으며, 탑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작품이다. 땅과 맞닿은 6각형의 바닥돌 위에 아래받침돌과 중간받침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아래받침돌과 지붕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고 다른 부재는 화강암이다. 현재는 지붕돌 밑의 불을 밝히던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이 남아 있지 않다.

중간받침돌은 가늘고 긴 편으로 아래위에 상(上)·하(下)의 글자가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6각형으로 윗면은 편평하며, 머리장식은 원기둥 모양의 돌 하나가 얹혀있을 뿐이다.

   :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願堂庵 多層石塔 및 石燈) 보물 제 518호

 

이 석탑은 하대석만 화강암이고 기단부와 몸돌을 청석(靑石)이라 부르는 점판암을 사용하였다.

기단의 구성은 네 매의 판석을 세워 면석으로 삼고 네 귀퉁이의 우주(隅柱)는 별석이다.

옥신부는 모두 없어졌고 비교적 얇고 평평한 지붕돌만 십층으로 놓여있다.

 

옥개부분이 없어져 원래의 모습은 잃었으나 상승감(上昇感)이 느껴지는 세장(細長)한 탑이었다고 생각된다.

석등은 화사석이 없어져 원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간석(竿石)은 화강암이며 화사석 받침과 지붕돌은 탑과 마찬가지로 점판암이다. 간석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비교적 길고

짖붕돌은 평박(平薄)하다. 석등 역시 탑과 동일한 조형감각을 지녔던 것으로 짐작된다.

재질이 점판암이란 점, 공예성이 풍부한 탑과 석등이란 점이 특징으로 제작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말엽으로 짐작된다.

 

영당

 

 

이 세상에서 제일 수지 맞는 일 중 하나가 공부하다 죽는 일인데 목숨 내놓고 정진하다 보면

"견성이 가까워오고 죽음은 멀어집니다." 

 

"도시에서 살거나 산에 들어가는 것을 문제로 삼지 마십시오.

공부는 아무 때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공부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어디서나 못하겠습니까."

 

혜암스님의 공부하다 죽어라란 법문은 많은 불자들로 하여금 전률을 느끼게 하셨다. 

 

원당암에서... 

원당암에서 본 가야산 상왕봉 

 

선강거사님의 설명으로 저곳이 상왕봉이란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혜암스님 사리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