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북도 = 천년!.. 감동..그리고.

해인사 와 법수사지 터, 삼층석탑과 당간지주

백련암 2012. 3. 18. 12:09

법수사지 삼층석탑 (法水寺址 三層石塔)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에 창건된 사찰인 법수사에 조성된 석탑으로, 사찰은 폐사(廢寺)되고 석탑과 금당(金堂)터의 거대한

석축<石築>, 당간지주만 남아있다. 탑은 6m높이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복발(覆鉢) 위의 상륜(相輪)은 분실되었지만 그 외는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사찰이 창건된 시기나 기단이 2층인 점, 2층 기단의 가운데 기둥이 1개인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統一新羅)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창건되었다는 법수사는 한때 천 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고, 백여 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렸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법수사지 삼층석탑은 2010년 7월 5일 보물로 승격되었다.*

 

 

빈 땅, 옛 절터는 멸(滅)의 증거인가...

 

 

 

 

 

 

 

법수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 1656호

 

이 탑은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년) 에 창건된 사찰인 법수사에 조성된 높이 6m의 3층 석탑이다.

대가람으로 전해지는 법수사<法水寺>는 임진왜란 이후 폐사<廢寺>되고 석탑과 금당<金堂>터의

거대한 석축<石築>,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계자인 김황<金湟, 나주김씨의 비조>이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고

또 다른 설로는 마이태자를 찾아 금강산으로 들어갔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뒷날 고려중엽, 금당사는 법수사<法水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금당사의 "금"은 불상의 빛깔을 나타내니 불법을 뜻하는 법수사의 "법"과 마찬가지이고,

당<>은 "못"이니 수<>와 다를 바 없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금당사든 법수사든 그 뜻은 같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폐사<廢寺>되어 그 웅장하던 면모는 다시 찾을 길이 없고

은행나무로 된 23.5m의 목조불상은 해인사 대적광전으로 옮겨져 주존불로 안치되어 있다

 

 

대적광전에 모셔져계신 목조비로자나불

 

법주사는 고개넘어 해인사와 더불어 가야불교를 활짝 꽃피웠던 거찰이었다.

전각만도 9개의 금당<金堂>과 8개의 종각<鐘閣>, 도은암<道恩菴>, 보현암<普賢菴>, 백운암<白雲菴>, 일요암<日曜菴>등 

1000여칸이 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대가람이었음을 잠작해 볼 수 있다.

석탑은 이중<二重>의 기단과 3층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파손 되었다.

 

아래층 기단의 네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위층기단은 각 변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들의 모서리 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 비해 아래층 기단이 높은 것이 특징으로, 이러한 양식상의 변화를 볼때 신라 말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안내표지의 쓰여 있는 설명을 그대로 옮겨 적은 글임 사진이라 잘 안보여...>

 

 

 

 

 

 

탑에 석불대좌 원방형 석재가 뒹굴고 있다

 

당간지주에서 바라본 삼층석탑

<신라 애장왕<800~809>때 창건 <법수사>-경순왕 계자 김황 스님이 머문 절>

 

경순왕의 계자 김황(일설에는 김굉)이 스님이 되어 梵空이란 법명으로 이 절에 머물며 해인사를 오가며 산승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과

또한 마이태자를 찾아 금강산으로 들어갔었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뒷날 고려 중엽, 금당사는 법수사(法水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금당사의 ‘금’은 불상의 빛깔을 나타내니 불법을 뜻하는 법수사의 ‘법’과 마찬가지이고,

당(塘)은 ‘못’이니 수(水)와 다를 바 없다. 이름이 바뀌었지만 금당사든 법수사든 그 뜻은 같다.

 

 

가야 생수라고는 하나 물은 나오지를 않고 있었다.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잡고 있다.

절 터의 석축은 아직 여기가 절터였음을 증명이나 하듯이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경계선인 석축이 더러는 남아 있었다.

그 석축을 따라 복원을 해도 될 것 같은 빈 절터 였습니다.

 

법수사지 당간지주<法水寺址 幢竿支柱>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87호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법수사지의 거대한 축대로 부터 100m 가량 떨어진 백운리 중기마을 전방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는 3.7m이다.  법수사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년) 에 창건된 사찰로 지금은 폐사<廢寺> 되고 없으며, 절 입구에 세웠던

이 지주 외에 금당터의  석축과 삼층석탑이 남아있다.

 

장방형의 지주 두 개가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고, 지주의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없이 깍아 다듬어 올라가다가 상부에 대를 끼울 수 있는

홈을 마련하였다. 두 지주 사이에는 당간을 받치는 간<杆>을 바치기위한  간대석<杆臺石>이 남아있으며

간대석 중앙에 지름 20cm 깊이 8cm의 구멍을 내고 주위에는 연화문<蓮花紋>을 둘렀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간결 단아한 지주로 당간지주의 계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안내표지의 쓰여 있는 설명을 옮겨 적은 글임 사진이라 잘 안보여...>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면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이 깃발을 꽂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일컫는다.

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 두 기둥만 남아있다.

법수사의 옛 터에 자리한 이 당간지주는 직사각형의 돌기둥 2개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간결하며 단아한 모습으로, 당간지주의 계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당간지주가 있는 자리에 씨앗이 날아와 싹을 튀운 이 나무는 몇년이나 되었을까?

그래도 외롭지는 않았으리라 기댈 수 있고 속삭일 수 있는 나무가 항시 곁에 있어줘서...

 

 

법수사지에서 발견된 고려현판

 

법수지에서 발견된 고래시대의 현판이 있다.

1962년 경 윤용진교수가 우연히 금당지 앞 축대 아래쪽 밭에서 발견한 현판이다.

 

서체는 고려시대의 금석문에 자주 쓰인 구양순체로 숙달된 필력으로 해서되어 있었다.

일부만 남아있고 두께는 0.7센티, 세로 29.3센티, 가로14센티만 남아 있어 정확한 전체의 크기는 알 수 없고

현판에 남아있는 기문은 끝부분에 해당하는 5행에 59자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현재는 해인사 성보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아래 앉아계신 듯  당간지주도.... 이곳에 서서 저 멀리 탑을 바라보고 있는 듯...

많은 마음이 고차되는 순간이었다.

 

서울에서 한달에 한번 항상 이길을 따라 해인사를 간다 이곳을 설명하라면 난 길치라 설명을 할 수는 없다. 

또한 말 주변이 없어 설명도 잘 못한다. 다만 해인사가 좋아 한달에 한번은 꼭 가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고 큰일이 없는한 꼭 간다.

 

더구나 3월 초라 땅은 올라왔어도 아직은 푸른기가 없어 모든것을 자세히 한 눈에 볼 수가 있었다.

녹음이 우거지면 아마도 저 멀리 보이는 석축과 탑은 녹음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을것이다.

옛날의 그 화려했던 가람이 한 눈에 들어오는 듯 머리에서 생각에서 가슴으로 전해져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