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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 천년고찰 관촉사(灌燭寺) : 미래불인 은진미륵불입상, 미륵전, 사적비들, 윤장대

백련암 2013. 3. 9. 00:29

천년고찰 관촉사(灌燭寺) : 미래불인 은진미륵불입상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이다. 968년(광종 19) 혜명(慧明)에 의해 창건될 때 조성된 석조미륵상이

발산하는 빛을 좇아 중국에서 명승(名僧) 지안(智眼)이 와 예배했다고 하여 관촉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법당은 1386년(우왕 12) 건립해 1581년(선조 14)과 1674년(현종 15)에 중수했으며 1735년(영조 11) 다시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관음전·삼성각(三聖閣)·사명각(四溟閣)·해탈문·현충각 등의 당우가 남아 있으며, 석조보살입상(보물 제218호)과

석등(보물 제232호)을 비롯해 사리탑·연화배례석·사적비 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으로 흔히 ‘은진미륵’이라고 불리며 높이가 18m에 이르는데, 당시 충청도에서 유행하던 고려시대의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고려 말 이색(1328~1396년)이 남긴 시와 조선 중엽 편찬된<동국여지승람>, "은진(恩津) 불우조(佛宇條)"에서 관련 기록을 볼 수 있다.

보다 자세한 연혁은 1743년(영조 19년) 경내(境內)에 세워진 "관촉사 사적비명"에 들어있다.

그러나 이들 기롣도 석조보살입상에 대한 이야기로 일관할 뿐 사찰 창건에 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창건에 대한 유추가 완전히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고 은진미륵이 968년(고려 광종 19년)에 조성되기 시작했으므로 적어도

이 무렵부터 사찰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관촉사가 역사의 무대에 자신을 드러낸 것은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論山 灌燭寺 石造彌勒菩薩立像) : 보물 제 218호

머리에는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이며,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에서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옷주름선이 간략화되어 단조롭다.

불상의 몸이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느낌을 주며, 대형화된 신체에 비해 조각수법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조미륵보살입상(石造彌勒菩薩立像) : 보물 제 218호

관촉사의 상징이라할 만큼 매우 중요한 불상으로 전체높이가 18m에 달하는 거대한 고려 초의 불상이다.

 '은진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얼굴의 표현이 이마가 좁고 턱이 넓으며 코와 귀, 입을 다소 크게 나타냈다.

눈은 양옆으로 길게 새기고, 귀 역시 어깨에까지 닿을 만큼 길다. 미간사이의 백호에는 근래에 가공한 수정을 넣었다.

머리에는 간략하게 보발을 나타냈고, 그 위에 방형의 2중 보관을 올렸다. 아래 보관에는 8엽의 연꽃으로 장식하였고, 네 귀퉁이에는 청동방울을 매달았다.

목은 무척 굵다. 거대한 불두를 지탱하기 위한 배려이다. 삼도의 표현이 뚜렷하고, 어깨에는 통견의 법의를 걸쳤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근처까지 올려 금속으로 만든 연꽃가지를 들었고, 왼손은 가슴앞에서 엄지와 중지를 맞댄 아미타여래의 중품하생인이다.

신체는 별다른 굴곡없이 직선적으로 표현하였고, 법의가 길게 내려와 U자 모양의 주름을 이룬다.

 

조성 시기는 '관촉사비명'에 따르면 970년(광종 21)에 시작하여 1006년(목종 9)에 이르기까지

혜명대사가 석공등 인부 100명을 데리고 37년의 공사끝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의 백호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묵기(墨記)에는 968년(광종 19)이라는 기록이 있다. '관촉사사적비명'이 조성당시와 거리가 먼

조선후기의 기록임을 감안하고, 묵기가 불상의 조성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이므로 불상의 조성시기는 968년 설이 보다 믿을만하다.

 

 

불상은 자연암반을 대좌삼아 딛고 서 있다. 투박한 솜씨로 암반위에 불족을 조각하였다. 불상에 사용된 화강암 석재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즉 암반대좌, 다리에서 허리까지, 그 위에서 불두까지, 그리고 2매의 보관으로 구분된다. 불상 뒷면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다.

조성 당시에는 뒤까지 입체적으로 조각하려 했는지 정으로 쪼은 자국만 남아있다.

 

 

 

 원통형의 높은 관(冠)을 쓰고 있고, 그 위에는 이중의 네모난 갓 모양으로 보개(寶蓋)가 표현되었는데, 모서리에 청동으로 만든 풍경이 달려 있다. 

 

 

미륵보살입상이 완성된 후 많은 영험담이 있었다. '관촉사사적비명'에 몇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불상이 세워지자 하늘에서는 비를 내려 불상의 몸을 씻어 주었고, 서기가 21일 동안 머물렀다. 미간의 옥호에서 발한 빛이 사방을 비추었는데

중국의 승려 지안(智眼)이 그 빛을 쫓아와 예배하였으며, 그 광명의 빛이 촛불의 빛과 같다고 하여 절이름을 관촉사라고 하였다.

중국에 난이 일어 적병이 압록강에 이르렀을 때, 이 불상이 삿갓을 쓴 스님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물이 얕은 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중국의 장수가 칼로 그 삿갓을 내리쳤고 후에 이 흔적은 불상에 나타났다.

현재 한쪽 기퉁이가 깨진 채 남아있는 것은 바로 이 때의 상처라고 한다.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 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도 전한다.

 

 

  

이러한 불상의 존명에 대해서는 미륵상이 아니라 관음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한국불교사의 정립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던 이능화선생의 지적이다.

'세간에서 불상을 미륵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이고, 명주사사적(明珠寺事蹟)에 고려의 혜명(慧明)과 대주(大珠) 두 대사가

관촉사의 석관음상을 조성하였다고 적혀있다'고 하였다. (『조선불교통사』하, 379면) 그러나 올바른 주장이 아니다.

불상의 존재를 처음 언급한 이색의 시에서는 분명히 '대석상미륵존(大石像彌勒尊)'이라 지칭하였고,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석미륵'이라 표현하였다. 사실 불상의 존명은 매우 중요해서 그 이름 여하에 따라 사상과, 신앙 등 전체적인 배경이 달라질 수 있다.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석가여래인가 아미타여래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논란도 이러한 중요성 때문이다.

 

 

 

석조 대 미륵보살 입상 바로 정면에 있는  석조불단

전체 길이가 730cm, 높이 94cm, 폭 100cm이다. 이 불단은 제작 수법으로 보아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옆으로 긴 형태로 구축된 이 석단은 석불상에 공양을 올릴때 사용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다른 곳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시설물이다.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구성 되어있다.

 

 

미륵보살 입상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반듯반듯하게 서 있는 입석들 하나하나에 글들이 새겨져 있다.

아마도 시주자들의 이름을 써 놓은것 같다

 

 

그러나 관촉사의 경우는 논란의 여지없이 미륵임이 확실하다.

문헌에 의해서도 그렇고, 고려시대이후 미륵신앙이 서민의 대중적 신앙으로 유지되면서

서민적 삶을 그대로 닮은 투박하고 인간적인 돌미륵이 곳곳에 조성되었다.

그래서 미륵불하면 세련된 장식이나 고귀함보다는 거친 듯하면서도 친근한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관촉사의 불상은 가장 미륵불답다.

많은 대중들에게 차별없는 지혜와 자비를 주기 위해 소박하지만 커다란 모습으로 늘 거기에 서 있는 것이다.

 

 

미륵전

미륵보살이나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 전각을 '미륵전(彌勒殿)' 또는 '용화전(龍華殿)'이라고 한다.

보통 다음 세상에 메시아로 강림하는 미륵부처님을 모시면 용화전, 도솔천에 모셔진 미륵보살을 모시면 미륵전이라고 한다.

'미륵전'이라는 적은 현판 글씨는 연제(蓮齊) 이용현(李鎔泫)이 쓴 것이다.

 

 

미륵전과  앞의 오층석탑

 

 

미륵전 안에서 미륵보살입상을 바라본 모습

 

 

신중단 신중탱화

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선신(善神)을 도상화한 그림을 신중탱이라 한다.  많은 신들을 배치하여 그리므로 다양하고 복잡한 구도를 보이는

신중탱은 일반적으로 제석(帝釋)과 위태천을 중심으로 주위에는 무장을 한 신중들을 배치한다.

 

 

윤장대(輪藏臺)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에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관촉사 사적명((灌燭寺 事蹟銘)

사적비의 측면에 관촉사 사적명()이라 큰 글씨로 새겨있고 비문 내용은 석불을 조성하게 된 경위와 오랑캐가 쳐들어왔을 때 스님으로 화신하여

나라를 구한 일, 후일에 석불과 절 주변을 보수 정비 한 사항 등이 새겨져 있다.

 

 

  

 

 

관촉사 사적비

이 사적비는 1743년(영조 19)에 각혜(覺慧) 스님과 속인으로 구성된 불량계원(佛粮契員) 다수가 참여하여 조성한 것으로

이를 통해 미륵보살입상의 자세한 조성경위와 절의 연혁을 알 수 있었다.

이 비는 귀부와 비신, 옥개석을 모두 갖추었지만 그 양식은 무척 단순하다.

따라서 유물적인 가치보다는 비문을 통해 귀중한 절의 역사를 알게 해 준 문헌적 의미가 더 크다.

 

 

시주비

시주비는 비명과 시주자 전태현(全泰賢)이라는 이름만을 새기고 조성시기를 밝히지 않았다.

또 비명에 '금강회상도리회상옹호회상(金剛會上瀟利會上擁護會上)'이라고만 적혀 있어 비의 정확한 명칭을 알 수가 없다.

다만 비명과 한 사람의 시주자 이름만을 적었으므로 시주자의 공덕을 남기기 위해 조성한 공덕비라고 생각된다.

비좌와 비신, 그리고 옥개석이 잘 남아있어 그 양식으로 볼 때 조성시기는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般若山)에 있는 절 관촉사(灌燭寺).

*KTX를 타고 논산역에서 내려 거리가 얼마안되어 택시를 탔다 택시비는 \4200원 입구에서 내려 걸어갔다 동네 가운데 대로변에 있어 찾기도

  가기도 쉬웠다 시내버스도 논산역에서 타서 관촉사 앞에서 하차면  바로 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