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천은사 금동불감
성보, 빛으로 기록하다
불감(佛龕)에는 불상을 모신다. 작은 크기로 만들어져 집이나 방에도 부처님을 모실 수 있다. 크기가 작아 옮기기 편해 ‘이동식 법당’의 역할을 한다. 예불이나 의식 때 불감의 문을 열고, 평상시에는 닫아 놓는다.
구례 천은사 금동불감은 2구의 금동불이 모셔져 있고, 안쪽 벽면에 비로자나삼존상과 10대 제자상을 돋음 새김 하였다.
보물 제1546호이다.
실제 불감의 높이는 43cm로 지면에 실린 사진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메인 조명은 카메라 렌즈와 가능한 나란히 맞춰 그림자가
생기지 않게 했다. 지붕에는 조명을 따로 비춰 입체감을 주었다.
[불교신문 2815호/ 5월9일자]
국보급 ‘석가영산회도’ 국내 환수
421년만에 환국한 석남사 석가영산회상도.
상궁 시주, 왕실 발원 추정
조선 초기 영산회도 드물어
임진왜란 당시 약탈 당한 국보급 조선불화가 고국으로 돌아왔다.
조선 선조 25년(1592년) 조성된 불화 ‘석가영산회도(釋迦靈山會圖)’가 421년만에 국내로 환수됐다.
영산회도는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으로 조선 전기로 연대가 규명된 영산회도는 7ㆍ8점에 불과하다.
특히 이번 석가영산회도는 불화 중 화기(畵記·조성기록)가 명확히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시주자에 왕실 상궁 명호가 있어 조선 초기
왕실 발원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가영산회도 환수는 일본 교토(京都)의 한 사찰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을 주승진 ‘고미술연구소 무유헌’ 대표가 설득해 매입을 성사시켰
다. 주 대표는 2년 넘게 정성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환수된 석가영산회도를 연구한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만력(萬曆) 20년 임진년 원월(元月·1월)에 백족산(百足山) 석남사(石楠寺)
에서 완성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3개월 전에 불화가 그려진 것”이라며 “임진왜란 당시 석남사가 위치한 장호원에 왜군이 침입해 석남사가
불탄 기록을 감안하면 이때 왜군이 일본으로 강탈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문 명예교수는 “조선 초기 영산회도는 희귀할뿐더러 시주자에 왕실 상궁이 있는 것을 보아 왕실 발원 본으로 까지 볼 수 있다”며 “불화
재료 자체도 금니 등을 사용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 졌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당시 영산회도 중 사료로서 명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데다 예술적으로도 독특한 매력이 풍부해 최소 보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다”고 평했다.
노덕현 기자 | noduc@hyunbul.com 승인 2013.05.28 14:0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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