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설
고려시대에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유행하였다. 풍수지리설이란 땅속에 흐르는 기운이 사람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으로서,
산천의 형세를 잘 살펴 도읍이나 사찰, 주거, 분묘등의 위치를 정할 때 많이 활용되었다.
백제 온조왕이 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피고 도읍을 정했다고 한 것처럼 이미 삼국시대부터 고유한 풍수지리적 관념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보다 체계화된 이론으로서의 풍수지리설은 통일신라 말기에 당나라에 다녀온 선승들이 들여온 것으로 보인다.
선승 도선(827~898년)은 이러한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전국을 답사하면서 우리의 풍토에 맞는 한국적 풍수지리설의 근간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고려시대를 통하여 사찰이나 이궁의 건설, 천동 논의 등에서 도선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풍수지리설을 집대성한 도선의 초상화 : 선각국사 도선 초상(先覺國師道詵肖像) 寶物 제 1506호(복제품)
조선 순조 5년(1805년) 도일비구 그림, 선암사 소장
통일신라 말기의 선승인 선각국사 도선(827~ 898년)의 초상화이다. 본래 화엄종 승려이던 도선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개조 혜철의
문화에서 선종으로 개종하였고, 이후 전국산천을 돌아다니며 당시 선종과 함께유행하던 풍수지리설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서의 고전으로 여겨지는『도선비기』『송악명당기』『도선답산가』『삼각산 명당기』등이 도선의 저작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초상화는 1805년 도일비구가 대각국사의 초상화와 함께 그린 것으로, 서안과 발받침대, 돗자리 등의 형상이 다소 사실적이 않지만,
전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과 안정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
본래 통도사에 보존되어 있는 삼성각안에 3폭의 초상화로, 각각 우측 벽에 지공화상[?~1363] 진영을 중심으로 그 왼쪽에 나옹화상[1320~1376],
오른쪽에 무학화상[1327~1405]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나란히 봉안하였다.
이들은 고려 후기의 개혁파로 잘 알려진 승려들로서, 지공은 나옹에게, 나옹은 무학에게 불법을 전하였는데, 이들 세 명의 인물을 그린 초상화가
『통도사 삼화상 진영』이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한 대상이 되어 여러 곳에 그들의 초상화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3폭의 초상화는 지공의 상을 중앙에 안치하고 그 오른쪽에 나옹을, 왼쪽에 무학을 안치하였는데 세 분 모두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좌상이다.
고려 후기의 개혁파로 잘 알려진 승려들이다. 모든 불사에 증명법사로 모시는 인도의 지공, 고려 공민 왕사 나옹, 조선 태조 왕사 무학『통도사 삼화상진영』은 다른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지공화상·나옹화상·무학화상의 진영 등에 비해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작품의 품격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지공대 화상(指空大和尙)
화면 향좌측 상단에는 ‘서천국박달탄존자지공대화상(西天國搏達坦尊者指空大和尙)’이라는 화제명이 적혀 있다.지공은 머리에 금색 관을 쓰고 오른손에는 아홉 알의 굵은 염주를 쥐고 있으며 약간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왼손으로 긴 불자를 들고 있으며 얼굴은 인자한 모습이다.
인도 출신의 승려로서 고려 말에 활동한 지공화상(指空和尙 ?- 1363년) 의 진영이다.
상단에 기록된 "서천 108대 조사 지공대화상(西天百八代祖師指空大和尙)"는 지공화상이 가섭존자(迦葉尊者)로부터 시작되는
인도 선종 계보에서 108대 조사임을 가리킨다.
지공화상은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 1376년)에게, 나옹은 다시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가 되어 조선 건국에 기여한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 1405년)에게 법을 전수하였는데 이후 지공, 나옹, 무학의 삼화상 진영은 하나의 세트로 그려지는 경향이
생겨났다 지공화상은 머리에 관을 쓰고 의자에 앉은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특징이다.
나옹 대화상(懶翁大和尙)
의자에 앉아 우안칠분면의 모습을 하고 있다.
붉은 가사에 녹색 장삼을 착용하였으며, 왼손에는 목장자를 쥐고 오른손은 의자를 잡고 있다. 화면
향좌측 상단에 ‘고려공민왕사보제존자나옹대화상(高麗恭愍王師普濟尊者懶翁大和尙)’이라는 화제명이 적혀 있다.
나옹은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돌려 중앙을 향하고 있는데 왼손으로 긴 주장자를 비껴들고
먼 곳을 주시하면서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하다.
무학대화상(無學大和尙)
반면 무학화상 진영은 좌안칠분면의 모습으로, 붉은 가사에 녹색 장삼을 착용하였다.
왼손은 의자를 잡고, 오른손에는 목장자를 쥔 모습이 나옹화상 진영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역시 화면 향좌측 상단에 ‘한양태조왕사묘엄존자무학대화상(漢陽太祖王師妙嚴尊者無學大和尙)’이라는 화제가 적혀 있다.
무학은 얼굴과 몸을 오른쪽으로 돌려 지공이 있는 중앙을 바라보게 하였으며,
오른손으로 주장자를 비껴들고 왼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잡고 있다.
예리한 두 눈과 꼭 다문 입에서 수행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 작품으로, 1807년(순조 7)에 제작된 것이다.
각 폭은 길이 146㎝, 폭 75㎝의 크기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다.
다른 사찰에 봉안되어 있는 이들의 상에 비해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작품의 품격도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2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양산 통도사 '환성지안(喚醒志安)진영'
현재 통도사에 보관된 이 그림은 ‘嘉慶四年己未仲夏 圖眞 良工玉仁(가경사년 기미중하 도진 량공옥인)’이라는 화기가 남아 있어 1799년이라는
제작연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진영의 양식적 시대구분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진영을 제작한 화사 옥인(玉仁)은 법호가 혜월(慧月)로 1775년에 그린 통도사 시왕탱 가운데 제4 오관대왕(五官大王)도를 맡았고, 1798년 역시 통도사의
미륵불 그림도 그렸다. 그 다음 해에 이 진영을 그린 것이다. 그는 이어서 1801년에 추파 대명(秋波大明)의 진영을 그렸는데 특히 이 그림은 세부의 사실적
묘사나 색채 선택에 이르기까지 어느 부분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 진영 가운데서도 우수작이라고 할 만하다. 다만 이 진영에 찬문이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옥인은 1807년에도 통도사에서 삼성각에 봉안할 지공․나옹․무학 등의 삼화상 진영을 그릴 때 여러 다른 화가들과 함께 참여
하기도 하였으니, 가히 진영 전문화가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 그림이 환성 지안의 진영이 백퍼센트 분명한지에는 약간의 의문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이 그림은 앞면에 찬문이나 제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뒷면에 적혀 있는데(이런 경우가 더러 있다), 이 그림의 소장처인 직지사에서 발행한 도록에 보면 주인공의 이름이 ‘喚惺’이라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림 뒤까지 확인할 상황이 못 되는 나로서는 ‘喚惺’이 지안의 법호인 ‘喚醒’의 단순 오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없지만 일단 도록을 존중해서 ‘喚惺’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그렇다면 법호가 喚醒인 지안과는 분명 다르므로, 확실하게 동일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그림이 소장된 통도사의 역대 고승 가운데 ‘喚惺’이라는
법호와 법명을 가진 이가 없고, 묘사된 주인공의 모습으로 볼 때 지안과 같은 고승일 수밖에 없으며, 또 찬문의 내용도 지안의 법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
므로 이 진영은 환성 지안을 그린 것이 거의 틀림없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한문에서는 한자의 음이 같으면 새김이 다른 글자라 하더라도 곧잘 통용하여 썼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惺과 醒의 차이는 무시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지안 스님의 입적 후 70년 뒤에 그렸으니, 그 전에 따로 그려진 진영이 있어서 그것을 보고 모사한 것이 아니라면 화가의 완전한 상상으로
그렸다고 봐야한다. 실제로 그림의 여러 부분들을 보면 그러한 면이 두드러지는데, 말하자면 이 그림은 상상으로 그리는 진영의 한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을 보면 다른 진영과는 달리 매우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것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특히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은, 원효․의상 또는 지옹․나옹․무학, 그리고
서산대사․사명대사․기허대사와 같은 고승 중의 고승에서나(드물게는 그 사찰의 창건주일 경우도 있다) 표현하는 패턴인 것으로 볼 때 후대 사람들이 지안
스님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주인공이 앉아 있는 의자는 꽤나 도식적이다. 하지만 등받이의 녹색 천에도 보상화문을 빽빽하게 그려 넣은 것은 다른 진영의 의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장식으로, 이 그림을 꽤나 공들여 그렸다는 또 하나의 반증일 것이다. 이런 장식성은 이 그림 곳곳에서 보인다. 주인공 뒤에 있는 작고 둥근 꽃무늬가 촘촘하
게 박힌 밤색의 칸막이도 다른 그림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치다.
다른 그림에서는 그 자리에 대개 병풍이 놓이는데 이것은 병풍보다는 칸막이처럼 표현되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의자 등받이 양쪽 모서리 끝에 달린
용두(龍頭) 장식이다. 이 부분의 장식은 다른 그림에서는 대부분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구름과 비슷한 모습의 이른바 영기문(靈氣紋)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 용두장식은 이 그림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또 왼손으로는 불자(拂子)를 쥐고 있는 것도 도식적이면서 매우 화려하다.
불자는 자루가 대나무로 만들어졌고 머리 장식이 용두로 되었으며, 그 끝에 아주 곱고 흰 술이 달려 있는데 오른손으로 술 끝부분을 잡고 있다. 손의 처리가
쉽지 않은 진영에서 이러한 포치는 아주 교묘한 구도인 셈이다.
‘환성의 법손 무진토록 이어지리라’
환성 스님 3대의 진영 喚惺三代影
4대 후손이 열었네 四代後孫開
천년 동안 고이 전해져 安位千載下
법손 무진토록 이어지리라 法孫濟濟來
(진영의 조성은) 영월이 주간하였다(主幹 影月).
아주 짧은 내용이지만 그 뜻은 제법 난해하다.
내 생각으로는 환성을 비롯한 3대의 법맥을 4대째 되는 제자가 조성하였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 4대째란 찬문 끝에 나온 대로 이 일을 주관한 영월(影月)일 것이다.
월송당 계준(月松堂 啓俊) : 조선후기(朝鮮後期)
상단에 "총림의 대덕 월송당 계준의 진영(叢林大德月松堂啓俊眞影)" 이라 적혀 있는 진영이다.
월송계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목으로 미루어 보아 대규모 사찰의 유력한 승려임을 추측할 수 있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진영의 대상이 광범위해지면서 사찰 단위의 고승도 진영을 가질 수 있게 된 상황을 보여준다.
배경의 벽면에 가득 베풀어진 모란문 역시 장식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던 조선 말기 불화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
재월당대선사(載月堂大禪師) : 조선후기(朝鮮後期)
진영 상단에 "재월당대선사의 진영(載月堂大禪師之眞影)" 이라고 가입하였는데, 그의 생몰년과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 수없다. 조선 후기의 고승 진영은 의자에 앉은모습과 바닥에 가부좌한 모습으로 크게 나뉘는데,
이 진영은 몸 왼쪽을 비스듬히 보이면서 바닥에 가부좌하는 일반적인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선사는 갈색 장삼 위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긴 주장자를 들고 있다.
주름졌으나 품격있게 묘사된 얼굴에서 오랜 구도의 삶을 살아온 선사의 깊은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연봉당대사(蓮峰堂大師) : 조선후기(朝鮮後期)
조선 후기의 불교의 양대 계파는 청허계와 부휴계로,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 1571년)의 두 제자 청허휴정(1520- 1604년)과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 1615년)의 법맥이 이어진 것이다.
청허계는 이후 규모가 커지면서 주류 계파로 성장하여 전국의 많은 승려들이 청허계임을 자부하였다.
이 진영 상단의 "청허의 제 10대인 연봉당대사의 진영(淸虛下 第十大 蓮峰堂大師道希之眞影)"이라는 문구 역시 그러한
자부심을 보여준다. 대사의 얼굴과 복식, 배경의 칠보문양 등 세부적인 묘사가 섬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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