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 부처님의 향기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백련암 2012. 6. 9. 01:24

낙산사는 1342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을 친결하려는 수 많은 기도불자님과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 후 어느 해에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았다. 그는 지심으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의상 스님은 기도를 통해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다고 전한다.

낙산사는 강화도 보문사와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관음성지로서, 1천년동안 국민들의 애환을 함께하여 왔다.

 

관세음보살님의 진신이 항상 머무르며 설법을 하고 계신다는 보타낙가산의 "낙산"에서 유래 되었다

의상스님은 중국 당나라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년)이었다.

대비진신이(관음보살)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洛山이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었다.

간절하게 기도한 뒤 7일 만에 자신이 앉았던 좌구를 물 위에 띄웠더니 천룡팔부의 시종이 나타나 굴속(관음굴)으로 인도하였다.

들어가서 참배하고 공중에서 떨어진 수정염주 한 벌과, 동해용이 여의주 한 벌을 주어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수행하여 드디어 관음보살의 진용을 뵈었는데 말씀하시길,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것이니, 그 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지금의 원통보전 자리이다.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흙으로 불상을 만들어 봉안하니 , 그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하다. 대나무는 곧바로 없어졌으므로 바로 이곳에 관음보살께서 상주하심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낙산사라 하였고 의상대사는 받은구슬을 법당에 모셔 두고 떠났다.

 

원통보전

낙산사의 중심법당으로서 원통보전을 포함한 절 일원이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의 건물은 2005년 4월에 화마에 의해 소실된것을 2009년에 복구된 것이지만, 예로부터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주요 전각인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양주지밀기낙산사사적(襄州地密記洛山寺事跡)』에서 보듯이 신라시대 의상스님이 관음굴에서 관음대성을 친견하고 수정(水精)을 건네 받은 뒤

관음의 계시로 흙으로 빚은 관음상을 관음전에 봉안하면서 낙산사를 창건했는데, 관음전은 곧 원통보전의 다른 이름이므로

낙산사 창건부터 원통보전이 주된 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이후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淞堀山派)의 개산조(開山祖)인 범일(梵日, 810∼889)스님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그 모습을 상(像)으로 만들어 불전에 봉안했는데, 아마도 관음보살상과 함께 봉안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려시대에 몽고군의 침략으로 관음상이 훼손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고려의 명유(名儒)인 이규보 등이 새롭게 관음상의 복장을 조성하기도

했으니, 역시 원통전이 주요 봉안 전각이었을 듯하다.

 

원통보전 안에는 관음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고, 후불탱으로 아미타극락회탱이 걸렸다.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관음상을 독존(獨尊)으로 봉안하였고, 후불탱으로 아미타극락회탱이 걸렸다.

 

신중전(원통전)

 

 원통전 정면에서 바라본 7층탑(보물 제 499호)

의상대사가 처음 세울 때 3층이던 것을 1467년(세조 13년)에 7층으로 만들어 낙산사의 보물인 수정염주(水晶念珠)와 여의보주(如意寶珠)를

봉안하였다고 전한다.

탑의 높이는 6.2m로 부분적으로 손상된곳이 있으나 상륜까지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조선 시대 다층석탑의 전형적인 시대별 특징을 갖고 있어 보물로 지정된 석탑이다. 

기단부에는 정방형 2단 지대석이 놓여 있는데 윗면의 24판 겹연꽃 무늬가 특징이고, 탑신부는  각 층의 탑신석아래  굄돌을 놓고 위에는 3단의

옥개받침을 올린 간락한 구조 형식이며, 상륜부는 노반 위에 청동 복발 보륜등을 장식하였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탑신과 원통전 원장(담장,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4호)

 

원통보전 주위에는 그 둘레를 네모 낳게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담장인 원장(垣墻)이 있다.

축조된 시기는 세조가 절을 중건할 때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이 원장은 법당을 둘러싼 성역(聖域) 공간임을 구분하면서 공간 조형물로서의 효과도 아울러 겸비하고 있다.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드문 우리 나라의 대표적 담장이며, 현재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통전 들어가는 입구에서 원통전을 바라보면서... 훼손된 부분이 보인다

 

원통전 들어가는입구 좌우로 금강신장님이 계신다

 

원통전에서 바라본 해수관음보살상

    

원통전에서 바라본 해수관음보살상

 

 

꿈이이루어지는 길... 해수관음보살상으로 가는 길...

 

빈일루(賓日樓) =  동해의 일출을 맞이하는누각이란 뜻

사천왕문과 응향각 사이에 자리한 누각이다 조선 중기 박종(1677~1750년)의 기행문인『동경유록(東京遊錄)』에 송월료(送月寮)와 함께

처음 빈일루라는 이름이 나온다.

만해 한용운의『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 )에 1800년대 후반과 1900년대 초 두번에 걸쳐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05년 산불로 훼손된 이후로 발굴된 유구와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로, 전면은 팔작지붕, 후면은 맞배지붕 형식의

누각을 세웠다.  2009년 10월 12일 낙성하였으며 누각의 일부 기둥은 지난 2005년 화마를 견딘 느티나무를 손질해서 세웠다.

현판은 총무원장을 지낸 지관스님이 쓰셨다. 

 

 

 사천왕문

여의주 = 증장천왕(남쪽)                                                                                                        보탑 = 광목천왕(서쪽)

 

비파 = 다문천왕(북쪽)                                                                                                    칼 = 지국천왕(동쪽)

 

 보타전

보타전(寶陀硯)은 해수관음상과 더불어 낙산사가 관음신앙의 성지요 우리 나라의 대표적 관음도량임을 상징하는 전각임

 

안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천수관음(千手觀音) · 성관음(聖觀音) ·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 · 마두관음(馬頭觀音) ·

준제관음(准堤觀音) · 불공견색관음(不空寇索觀音) 등 7관음상과 천오백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

앞면 중앙에 천수관음을 비롯해서 좌우로 6관음, 그리고 뒤쪽으로 천오백관음상이 있다.

천수관음은 입상이며, 나머지 6관음은 좌상이다. 낙산사 천수관음은 32관음신상으로도 불려지는데, 그 뒤쪽으로는 목각 후불탱이 조성되었다.

보타전 안에는 그밖에 동종과 금고(金鼓)가 있다.

 

보타락

 

지장전

 

지장보살

 

범종루

동종 = 보물 제 479호로 지정되너 고향실 옆 종각에 있었으나 2005년 산불로 소실. 용해되어 2006년 10월에 복원하였다.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함으로써 중창이 시작된 것을 기리기 위해 1469년 예종(睿宗)의 명으로 주조되었다.

종명(鐘銘)에 제작연원과 주조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종 꼭대개 장식인 용류(龍鈕)에는 쌍용이 서로 뒤엉켜 머리를 반대로 두고

다리로 천판(天板)을 밟고 있는 모습의 용맹스럽게 묘사되었다. 종신(鐘身) 가운데 3줄의 횡대(橫帶)를 둘러 상하로 양분하였다.

종신 위쪽에는 연꽃잎 무늬의 띠(蓮辦紋帶)를 두르고 보살 입상 4구와 범자(梵字)를 양각하였다.

종신 아래에는 장문의 명문을 양각하고 그 아래에 파도(波濤)무늬의 띠를 둘렀다.

 

 

 

 

응향각

 

 

 낙산사 산불재난 안전 체험장 안내도

 2005년 4월 4일 23시 53분 양양읍 화일리 도로변 임야에서 발화한 산불이 강한 강풍으로 인해 급속도로 동쪽으로 확산 되면서

4월 5일 15:10분경 낙산사를 덮쳐 보물 제 479호 낙산사 동종을 비롯하여 홍예문, 원통보전, 근행당, 신검당 등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화마로 소실되었습니다.

 

이번에 산불로 소실된 문화재의 흔적을 전시하여 산불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고 문화재의 중요성과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낙산사 산불재난 안전 체험장을 설치하게 되었다고한다.

 

 

 

 

 

 홍예문 안쪽애서 = 무지개 모양의 석문(石門) = 누각은 소실되어 다시 복원한것임

 

홍예문은 위는 누각(樓閣)이고 그 아래가 무지개 모양을 이룬다. 홍예문은 1467년(세조 13)에 축조되었다고 전하며, 그 위의 누각은 1963년 10월에 지은 것이다.

 

축조 방식은 먼저 문의 기단부에 거칠게 다듬은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화강석으로 된 방형의 선단석(扇單石) 3개를 앞 뒤 두 줄로 쌓아

둥근 문을 만들었다. 선단석은 홍예문 등에 사용되는 맨 밑을 괴는 모난 돌을 가리킨다.

문의 좌우에는 큰 강돌로 홍예문 위까지 성벽과 같은 벽을 쌓아 사찰 경내와 밖을 구분했다.

 

 

이 홍예문에는 장방형으로 26개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에서 석재 하나씩을 내어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혹은 사용된 돌은 강현면 정암리 길가의 것을 가져다 쌓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홍예문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33호

 

 = 세심대 =  마음을 씻는 곳입니다.

 

 

일주문에서 올라가는 길입니다

 

찾아가는 길 = 자가용으로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판교 나들목에서 호법 나들목으로 간 다음 다시 만종 나들목에서 강릉 분기점점으로 빠진다.

여기에서 현남 나들목으로 나와 양양으로 향하면 낙산사 표지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중교통 = 양양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속초 행 시내버스를 이용하여 낙산사에서 내린다. 속초에서 간다면 양양 행 버스를 타고 낙산사에서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