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 부처님의 향기

낙산사 의상대 = 의상대사와 여러 각도에서 본 의상대모습

백련암 2012. 6. 9. 10:58

낙산사 의상대 의상대사 (625~702) = 신라 중기의 승려이다.
속성은 김씨이고 20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신라 중기의 고승으로 화엄종의 시조이다.
<삼국유사> <송고승전> 등에 의상에 대한 많은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것을 통해 의상의 행적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의상의 성(姓)에 대한 의견이 김씨나 박씨로 분분 하지만 그가 왕경(王京) 출신이며, 진골의 신분이었음은 확실 하다고 한다.

진덕왕 4년(650)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가려고 요동까지 가서, 원효는 무덤 사이에서 자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닫고

먼저 돌아 가고, 의상은 혼자 계속 가던 중에 난을 당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후 661년(문무왕 1)에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에서 중국 화엄종의 시조인 지엄(智嚴)의

문하에서 현수(賢首)와 같이 화엄의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현수는 지엄의 뒤를 이어 화엄종의 제 3조가 되고, 의상은 670년(문무왕 10)에 귀국하여 낙산사(洛山寺) 관음굴에서 백일 기도를 하였다.

676년에 왕의 뜻을 받아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고 화엄을 강술하여 해동 화엄종의 시조가 되었다.

692(효소왕 1)년 현수는 승전(勝詮)이 귀국할 때, 그의 저술 화엄경 탐험기와 그 비판을 구하는 서신을 의상에게 보냈는데,

그 친필 서신이 오늘 날까지 전하고 있다.
초기 화엄종은 부석사(浮石寺)가 소재하고 있는 경북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의상의 사상 체계는 화엄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대표적인 저술인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하나가 바로 일체이며, .....

하나의 아주 작은 먼지(微塵) 속에 시방(十方)의 세계가 포함된다."고 표현하였다

일승원교(一乘圓敎)로서의 원융 사상(圓融思想)은 통합 사상이 의상의 핵심적인 사상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의상은 이러한 원융 사상을 기반으로 하면서 특히 실천 신앙을 중시하고 강조했던 인물이다.

그의 스승인 지엄(智嚴)이 의상을 가리켜 '의지(義持)'라고 한 것에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의상이 표방한 실천 신앙은 어떤 내용인가. 그것은 부석사를 창건하면서 무량수불(無量壽佛)울 주존불로 삼았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미타불 신앙 곧 내세 구원 신앙이었으며 이는 당시 원효가 표방했던 실천 신앙과 맥락이 닿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상은 내세 신앙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세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관음 신앙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에서 귀국한 직후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할 때 남긴 관음보살 설화라든가 그가 찬술한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에서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의상은 화엄학이라는 교리에 따른 작법(作法) 체계를 확립하고 중국위 화엄종과는 달리 실천 신앙으로서 아미타,

관음 신앙을 표방함으로써 부석사를 중심으로 한 화엄종을 성립하였다.

이러한 화엄종의 성립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볼 수 있다.

하나는 신라 중대 왕실의 이념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신라 중대 왕실리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진골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전체적, 중앙 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하려는 종지적인 상황과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함으로써 야기된 제반 상황 또는 통일 전쟁에 동원된 사회 제계층 가운데 지방 세력과 일반 민들의 재편 문제 등을

고려 할 때, 신라 왕실로서는 통합 사사을 중심으로 성립시킨 의상의 화엄종이 가장 적격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반 민초들의 신앙적 욕구를 일정한 신앙체제 속으로 끌여들였다는 점이다.

곧 화엄종은 당시 통일 전쟁이라는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신앙적 구원을 갈망하는 일반 민초들의 고난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이전에 왕실, 귀족들만이 전유하던 불교 신앙을 사회 전계층이 공유하는 단계로 전환되어 갈 수 밖에 없었던 역사 발전의 측면과 맥락을 함께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던 재래의 개별 분산적인 신앙 체계를 재편하려는 측면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삼국간의 통일 전쟁 과정에서 일반 민들이 일정하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또 신라 중대 왕실의 전체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의상은 해동 화엄종을 제자들에게 강술하면서 전교(傳敎)에 힘쓰다가 7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고려 숙종은의상을 가리켜 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의상의 문인으로 뛰어난 10대덕(大德: 오진,지통,표훈,진정,진장,도융,낭원,상원,능인,의적)이 있었으며,

전교의 10대찰(大刹: 부석사, 화엄사,해인사, 갑사, 범어사, 미리사, 보광사, 옥천사, 청담사) 등이 있었다.

의상의 귀국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즉 당나라는 신라 3국의 통일을 원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가 고구려 백제 양국을 공취(功取)한 것에 노하여 신라 사신 김흠순을 잡아 가두었다.

 

당 고종이 신라에 대거 출병코자 한 기미를 김흠순 등에게 들은 의상은 급히 귀국하여 왕께 고하고

명랑에게 밀단법(密壇法)을 베풀어 화를 면했다고 한다.

또한 범어사의 전설에 의하면 흥덕왕 때에 왜병이 내침한다는 소식을 듣고 금정산에 빌어서 미연에 방지하였다고 하나 근거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상의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각 1권(현존하는 저서),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팔법계품초기(八法界品초記)>,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 각 1권 등이 전해지고 있다.

 

 

= 의상대 =

 의상대(義湘臺)는 의상스님이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 곳에 이르러 산세를 살핀 곳이며, 의상스님의 좌선(坐禪) 수행처라고 전한다.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창건 이후 언제인가 이 곳에 암자를 지었는데, 그 때가 지금으로부터 천 여 년 전이라고 한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1925년에 낙산사 주지 김만옹(金晩翁) 스님이 이 곳에 정자를 새로 지었다.

정자를 지을 당시가 6월인데, 들보로 쓸 굵은 나무를 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거센 비바람이 몰아쳐 대 위에 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넘어졌고,

스님은 그 소나무로 들보를 만들어 육각형의 정자를 완성했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 곳을 의상대로 불러 왔으나 이 때 정식으로 의상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다가 이듬해 중건되었으며, 1974년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고 1975년에도 한 차례 중건되었다.

 

※근래에는 1994년 11월 강원도에서 의상대를 점검한 결과 기둥·기와 등 구조체가 10도 가량 기울었고, 기둥이 썩는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등

붕괴 위험이 있어 해체되었다가 1995년 8월에 육각정(六角亭)으로 복원되었다.

 

이 곳은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길 해안 언덕 위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워 예로부터 ‘관동 팔경’의 하나로 꼽히면서 시인 묵객이

즐겨 찾는 곳이었으며, 지금도 낙산사를 찾으면 반드시 들러 보는 곳이 되었다.

 

 

 의상대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48호

 

 

 

 

 

 

 

 

 

 

 홍련암에서 본 의상대

 

 

해수관음상에서 내려다 본 의상대

 

 

낙산사 후문으로 들어가서 의상대로 가는길목에서

 

 

주차장에서 본 의상대

 

▶낙산사 보타전 벽화 의상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하여...◀

 

 

 동해의 용에게서 여의주를 얻다

 

 

 의상대사의 귀국도 = (선묘낭자)

 

 

 화엄일승법계도(해인도)

 

 

 화엄일승법계도가 나투는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