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 부처님의 향기

<님의 침묵>의 백담사

백련암 2011. 8. 18. 13:08

백담사는 만해스님이 있었기에 존재한 사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해스님이 있었기에 백담사는 한국불교의 정신적 혁명의 사찰이 되었으며, 가장 아름다운 서정적 사찰이 되었습니다.

 

백담사의 돌탑계곡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

읊어본 순간 당신은 시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 자리(화엄실)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흔적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찰측이 기념하기 위해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거하던 곳 입니다’라는 팻말을 붙여 놓았습니다.

 

만해 스님은 민족와 국민을 위해 그곳에서 민족의 얼을 되살리는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집필을 하였다면,

전두환 전대통령 부부는 이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참회를 하였다 합니다.


 

극락보전   

목조 삼존불상과 복장유물은 현재 보물 제1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단에는 설법인(說法印)을 결한 아미타불을 주존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

불단의 오른쪽에는 지장보살상과 지장탱화를 봉안하였으며 왼쪽에는 신중탱이 걸려 있다.  

 


麟蹄 百潭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인제 백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  보물  제1182호    시대 = 조선



木造阿彌陀如來坐像(목조아미타여래좌상)



아미타불 복장물 중 저고리 안 명문


    

저고리의 앞면과 뒷면


백담사 극락보전 안에 주불(主佛)로 모셔져 있는 이 목불좌상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푼다는

아미타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조선 영조 24년(1748)에 만들어졌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다.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며 가는 눈, 작은 입, 오똑한 코로 인해 독특한 인상을 나타낸다.

넓은 가슴과 둥근 어깨가 당당한 인상을 주는 상체는 다소 평판적이며, 하체는 넓고 큼직하여 상체와 조화되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 불상이 당시의 나무로 만든 불상 가운데 대표작임을 알려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꺼운 편으로 옷주름이 곡선으로 처리되고 있으며, 가슴에는 U자형의 중복된 주름을 보이는데

이러한 주름들은 조선 초기의 특징이 이어진 것이다.

18세기 전반의 불상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목불상은 불상의 조성연대를 알려주는 발원문(發願文)과 많은 복장물이 있어 특히 주목된다.

<문화재청 글>



목조 삼존불상은  현재 보물 제1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좌우에 협시하고 있는 목조 삼존상인데,

1m 남짓한 아미타불은 고개를 조금 숙여 아래를 굽어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신중탱화

 


신신각

맞배지붕에 앞면과 옆면 1칸씩의 최근에 지은 산령각이 있다. 설악산의 산신이 그 어느 산의 산신들보다 격이 높다고 하여

‘山神閣’이라 하지 않고 ‘山靈閣’이라 편액하였다고 한다.

 


산령각 산신 탱화


 

산령각까지 내려온 멧돼지 2 마리 사람들이 모이자 풀을 먹다 가버린다.


 

 


금강문  =  문수보살

 


보현보살


647년(진덕왕 1년)에 자장 율사가 창건하였다. 그러나 창건 당시에는 절이 현재의 위치에 있지 않았다.

자장 율사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한 다음, 절 이름을 한계사(寒溪寺)라 하였던 것이다.

 

창건한 지 50여 년 만인 690년(신문왕 10년) 한계사는 불타버렸고, 30년 가까이 빈터만 남아 있다가 719년(성덕왕 18년)에 중창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는 이 때의 중건과 관련되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785년(원성왕 1년)에 다시 불탔으며, 종연(宗演) 광학(光學) 스님 등이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5년 만에 절을 중건하고

운흥사(雲興寺)라 하였다. 그러나 987년 심원사(深原寺)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년) 네 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아래로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를 세우고 선구사(旋龜寺)라 아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

그러나 1455년의 여섯 번째의 화재로 영축사가 불타자, 이듬해 재익(載益) 재화(載和) 신열(愼悅) 스님이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고 지금처럼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년) 겨울에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最鵬) 태현(太賢)? 태수(太守) 스님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香閣)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 하였으며, 1783년(정조 7년) 절 이름을 백담사로 다시 바꾸었다.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될 때까지 7차에 걸친 화재를 당한 연유로,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으로부터 먼 곳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의 백담사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거듭되는 화재로 고심을 하고 있던 사승(寺僧)의 꿈에 어느 날 노승이 나타났다.  

현몽한 노승은 대청봉에서 1백 개째에 있는 웅덩이[潭] 옆에 절을 세우라고 하였다.

이튿날 스님은 노승이 점지한 대로 절터를 잡아 중건하고 절 이름 또한 웅덩이 ‘潭’자를 넣어 백담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백담사에는 오랫동안 화재가 없었다.


그러나 1915년 겨울밤에 일어난 화재는 불상과 탱화 20여 위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과 경전과 범종까지 모두 태웠다.

당시의 주지 인공(印空) 스님은 오세암에 머물면서 백담사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기호(基鎬)와 인순(仁淳) 스님 등이

강원도 일대를 다니면서 받은 시주금으로 1919년 4월 법당 20칸과 화엄실(華嚴室) 25칸을 지었으며,

1921년 봄에는 법화실(法華室) 16칸을 비롯하여 응향각(凝香閣)사무실 등 30칸을 이룩하고, 종과 북을 새로이 주조하여 낙성법회를 열었다.

한용운 스님이 백담사사적을 편찬한 1928년 당시의 백담사는 복구가 끝나고 정리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근대에 이르러 백담사는 한용운 스님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사상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57년 대웅전과 법화실 화엄실을 중건하였다.

 

특히 이 절은 1988년 12월 전직의 전두환 대통령이 은거하여 2년 동안 머물게 됨에 따라 일반인에게도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양갱이 먹는 다람쥐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갈 경우 = 상봉터미널에서 50분 간격으로 있는 백담사 행 직행버스를 이용한다. 50분 간격으로 운행이 되고 있으며

시간은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자가용으로 갈 때

서울에서 갈 경우 6번 국도로 양평에 이르러 44번 국도로 70.7km를 가게 되면 한계리 민예단지 휴게소가 나타나는데 그 앞 삼거리에서 미시령 방면 46번

국도를 탄다. 헌병 교통초소가 있는 한계리 삼거리에서 12.3km 정도를 가면 외가평 삼거리에 이르게 되는데, 외가평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1.5km 정도를 더 가면 설악산국립공원 관리소에 도착한다. 공원관리소에서 7km를 더 가야 백담사에 도착한다.

 

※일반 관람객 차량은 여기에서 통제를 하므로 매표소에서 백담사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 요금은 백담사까지 편도로 2,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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