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황금법당(黃金法堂) 수국사의 역사

백련암 2012. 9. 4. 01:32

▶창건배경 및 역사

조선왕조의 유서깊은 원찰(願刹)로서 수많은 영험담을 갖고 있는 수국사는 1459년(세조 4)에 세조대왕이 내수사에 명하여,

큰 아들 숭(崇: 덕종으로 추존)의 왕생을 위해 고양군 동쪽 봉현(峰峴)에 왕능사찰(王陵寺刹)로 창건을 명한

정인사(正因寺)의 후신(後身)이다.

 

창건 당시 주지는 설준(雪峻)선사로 수국사의 법당에서 방앗간까지 모든 설계를 맡았는데, 1471년(성종 2)에 덕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仁粹大妃) 한씨(韓氏)가 절의 창건 당시 급히 지어서 재목이 좋지 못함을 지적하고,

판내시부 이효지(李孝智)에게 중창할 것을 명하였다.  

이에 같은 해 2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0월에 완공하였는데,

이때의 절의 규모는 총 110칸으로서 단청의 아름다움이 빼어나 봉선사(奉先寺)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수국사는 당시의 고승 신현(信玄)선사가 주석하며 왕실원찰로 발전하였으며, 1721년(경종 1)에는 서오능에 소재하는 숙종(肅宗)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신 명릉(明陵)의 능찰(陵刹)로 수국사로 불리게 되었다.

한때 잦은 전란으로 퇴락하였으나, 1897년 3월 북한산성의 총섭(總攝)인 월초거연(月初巨淵: 1858-1934)화상에 다시 중창되었다.

 

당시 월초스님은 북한산성에 있는 진관사(津寬寺)에 들러 불공을 올리다가 한쪽 구석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에 한 벌의

불기(佛器)도 없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부처님은 수국사가 비바람을 면치 못할 정도로 퇴락하여

우리 절이 가까운 곳에 있다 하여 옮겨 모셨으나, 아직까지 일향일다(一香一茶)도 공양한 일이 없다'하여

이에 그 부처님 앞에 불공을 올리고 수국사의 중창을 발원하였다고 한다.

 

이후 1900년에 고종의 태자(훗날 순종: 純宗)가 깊은 병을 앓자, 왕실에서는 월초화상에게 부탁하여 청도 운문사의 사리암(邪離庵)에서

쾌차 백일기도를 올리게 하였다. 이에 월초화상이 백일 나반존자 기도를 지극정성으로 드리기를 팔십여일이 되자,

태자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금침(金針)을 한번 놓는 사이에 태자의 아픈 몸이 씻은 듯이 낳았다고 한다.

태자의 병이 완쾌됨을 기뻐한 왕실에서는 월초화상에게 소원을 묻자 월초화상은 소원이 없다고 고사했으나,

재차 물어오는 왕실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서오능 옆 수국사가 퇴락하여 조석의 향화가 끊어진 것이 안타깝다." 라고

중창을 소망했다. 이에 고종은 '효심신심원무이(孝心信心元無二)' 라고 치하하면서 직접 화주책을 들고 왕실과 여러 대신들에게 권선하고

어용목수로 하여금 지금의 자리에 수국사를 중창하게 하였다.

또한 왕실로부터 하사된 금액과 대신들이 모금한 26만 8천량으로 고양군 지도면 내곡리, 중면 산황리 두 곳에 토지를 매입하여

사찰의 기본자산으로 삼고, 1907년에는 왕실로부터 하사된 금 1,500원으로 개금ㆍ탱화불사를 하였다.

 

또 1908년 초파일에는 통도사ㆍ범어사 등 전국 각지의 여러스님들이 월초화상의 성력(誠力)을 도와서 괘불탱화 및 금강번 31위를

조성하게 되는데, 통도사에서 1천금, 범어사에서 4백금을 모아서 불사에 쓰게 하였다.

 

그 뒤 6.25 전란으로 옛 모습은 잃었지만, 1950년 수경(守卿)스님이 주석하며 가람을 수호하였으며,

1981년부터 1992년까지는 현도(現導)스님이 주지로 역임하면서 도장의 환경을 일신하고 각종 법회를 개설하여

왕실 원찰로서의 가람을 유지 하였다.

 

현재 사찰은 1992년부터 한자용(韓慈容)스님이 주석하며,'봉산(封山) 자연공원' 조성불사가 한창인데, 1995년에 완공된 외 9포,

내 15포의 108평 규모의  황금법당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황금법당 자체에 아무런 글도 없다._()_ 그 흔한 기둥에도 주련도, 벽화도 한 점이 없다.<뒷면>

 

*내 생각 : 같으면 황금바탕에 까만 주련이나 아님 벽화라도 있음 훨씬 예뻐을것 같다._()()()_

 

 

 

수국사 석조미륵불입상 전경

수국사를 들어서면 황금법당의 위용이 먼저 눈길을 끌고, 다음 하얀 백불과 오비구상의 유려함에 놀란다.

 

하얀 화강암으로 조성된 수국사 석조 미륵불입상은 2002년 자용스님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아래 팔금강이 외호하는 팔각대좌 위에 방형의 갓을 쓴 모습이다.

 

상호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한아름 자비의 미소가 흐르고 신체는 유려한 천의자락이 감싸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으로 신체에 비해 다소 큰 모습이나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멀리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어 부처님의 큰 광명이

서울의 주산을 옹호하는 듯하다.

 

 

 

 

 

 

노천의 지장보살들

 

 

 

대웅전(大雄殿)

팔작건물로 원래 종각으로 지어졌으나 현재 대웅전으로 사용되고 있다. 1995년 황금법당 신축 때 자용스님에 의해 건립되었다.

 

건물 외장은 장방형의 석축형 기단 위로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지만 건물의 평면이 아자형으로 넓어지면서 건물의 평면이 커져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합각을 설치하였다.

 

건물 내부는 동쪽을 바라보며 불단을 설치하였는데, 불단 위로 목조 지장보살좌상과 지장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이 건물은 보면서 종각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설마 대웅전이라는 생각은 없었는데 대웅전이라해 신기했다.

완주 송광사 종각이 이와 비숫하게 되어 있어 보는 순간 송광사가 생각이 났던 것이다.

 

 

 

목조 지장보살

 

가봅시다 가봅시다. 좋은 국토 가봅시다.  천상인간 두어두고 극락으로 가봅시다.

극락이라 하는곳은 온갖고통 전혀없어    황금으로 땅이되고 연꽃으로 대를지어

아미타불 주인되고 관음세지 보처되어    사십팔원 세우시고 구품련대 벌이시사

반야요선 내어보내 염불중생 접인할때……

 

왕생가(往生歌) 中에서...

 

 

 

감로탱화 수국사감로도 (守國寺 甘露圖)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245호  

 

 

감로탱은 감로(甘露)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중생을 해탈시킨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지옥에 떨어진 중생들을 구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감로탱은 화면을 3단으로 구분하여 상단 중앙에 칠여래(七如來)가 연꽃 위에 서 있고,

그 아래에는 향로ㆍ촛대ㆍ꽃ㆍ과자 등이 성대하게 차려진 제단이 설치되어 있다.

 

여래상의 좌우에는 각각 인로왕보살과 지장ㆍ관음ㆍ대세지보살이 배치되어 있다. 좌우 보살상의 아래쪽에는 성곽을 배경으로 왕과 군중들의

행차장면과  범패(梵唄)와 작법(作法)을 행하는 의식승의 모습이 각각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언덕의 능선과 구름으로 화면 상하단을 경계 짓고 있으며, 하단 중앙에는 구름과 화염에 둘러싸인 거대한 아귀 2구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지옥장면과 사당패의 줄타기장면, 싸움ㆍ전쟁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 불화는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보내는 영가천도 때 봉안된 감로도로서 1907년 강재희의 시주에 의해 강문환·김종성·원일상의

감동(監董)으로 편수 보암긍법, 편수 두흠, 금어 혜과봉감, 계은봉법, 범화정운, 금운정기, 운호재오, 재원, 상은, 상오, 기정, 법연,

범천, 행언, 현상, 종민, 원상 등이 그린 것이다.

가로 261.0cm, 세로 157.5cm에 달하는 화면의 하단에는 아귀 2마리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그 위로는 많은 음식과 공양물이 차려진 제단과

칠여래(七如來)가 표현되어 있다. 가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는 칠여래가 합장을 한 채 나란히 서 있으며, 좌측에는 아미타삼존과 아난ㆍ가섭존자,

왕후장상(王侯將相), 선왕선후(先王先后),북채를 든 뇌신(雷神), 우측에는 지장보살과 인로왕보살 등이 구름 위에 서 있다.

칠여래의 아래로는 제단의 좌우에 높은 기둥을 세운 후 南無百億化身佛(석가모니), 南無淸淨法身佛(비로자나), 南無圓滿報身佛(노사나)의

삼신불번(三身佛幡)을 늘어뜨리고 갖가지 꽃과 공양물을 가득 배설하였는데 바람에 휘날리는 삼신번이 현장감을 준다.

또 제단 위에는 대황제폐하, 황태자폐하, 영친왕전하, 의친왕전하 등을 적은 위패 모양의 불전패가 놓여 있다.

제단으로 이르는 돌계단 아래 좌우에 놓인 커다란 화병 안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이 가득 꽂혀있어 화려하게 치장된 당시 제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으며, 제단의 우측에는 흰 천막을 치고 스님들이 나란히 모여 앉아 독경하는 모습과 스님들이 큰북과 바라 등을 두드리며

의식을 집전하는 모습, 승무를 추는 모습, 커다란 공양물을 머리에 이거나 들고서 제단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표현되었다.

화면의 하단 중앙에는 서로 마주보고 꿇어앉은 한 쌍의 아귀가 크게 그려져 있다.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입과 가는 목, 불룩한 배 등 아귀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으나 얼굴표정 등에서 다소 희화적이다.

아귀의 좌우로는 수목으로 분리된 화면 속에 한복 입은 남녀들이 춤을 추거나 싸우는 장면, 대장간에서 일하는 장면, 악사들의 반주에 맞춰

광대가 거꾸로 서는 묘기를 부리고 초랭이가 부채를 들고 춤추는 장면, 죽방울 놀이 하는 장면, 무당이 굿하는 장면 등

세속의 다양한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는데, 음식을 먹거나 술을 받는 모습, 물건을 파는 모습 등은 당시 장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듯하다. 여기에 표현된 풍속장면들은 주로 장례나 영가천도 등의 행사와 관련된 장면을 중심으로 표현되어,

수륙화로서의 감로도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화면 우측으로는 뇌신을 표현한 화염 아래로 우산을 쓴 인물과 뱀에게 쫓기는 장면 등《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구제난(救濟難) 장면과 더불어 농사짓는 모습, 공부하는 모습, 병자를 진료하는 모습, 소고 등을 갖고 무리지어 노는 모습,

일하러 가거나 장터에 가는 모습 등의 다양한 일상생활과 죄인들을 벌하는 모습, 전쟁장면 등을 표현하였다.

채색은 전체적으로 적색과 황색, 흰색, 청록색 등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분홍색과 청회색, 금박, 금니 등도 함께 사용되었다.

금박과 금니는 칠여래의 신광을 비롯하여 화면 부분 부분에 사용되어 화려하면서도 호화로운 느낌을 준다.

이 작품은 수락산 흥국사 감로도(1868년), 개운사 감로도(1883년), 봉은사 감로도(1892년) 등 서울, 경기지역의 19, 20세기에 제작된

감로도의 도상과 동일한 도상을 취하고 있는 작품이다. 전체적인 구도 표현에 있어서 다소 번잡스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화면은 산수와 구름으로 잘 경계 지워져 있고, 풍속화적인 면이 충실하게 묘사되었다.

인물들의 형태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필치가 안정되고 다양한 색감에 의한 충실한 풍속 묘사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용뉴

 

 

대웅전 범종

불구로는 높이 60㎝, 구경 33㎝의 범종과 소형북이 있다.

 

 

 

산신각 

불단 좌측에는 1960년 주지 상국(尙國)스님이 화주가 되어 편수 김재범(金在範)이 조성한 산신탱

 

대웅전에 있던것을 이곳 가법당에 모셔다 놓은 것 같다.  아마도 단독으로 삼성각을 지으시려나

아님 이번 백중기도에 법당이 비좁아 임시로 옮겨놓으셨는지...

 

 

 

칠성탱화 

불단 좌측에는 1960년 주지 상국(尙國)스님이 화주가 되어 편수 김재범(金在範)이 조성한 칠성탱,

칠성탱화도 마찬가지로 대웅전에 있던것을 이곳 가법당에 모셔다 놓은 것 같다. 

 

 

 

 

  목탁새가 기거한다는 목탁

 

 

대웅전 왼쪽 귀처마에는 초여름이면 찾아 와 목탁새가 기거한다는 커다란 목탁이 걸려 있다.

 

 

 

현재 가람은 1992년부터 시행된'봉산(封山) 자연공원'조성불사로 말미암아 사찰이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가람은 옛날 대웅전을 중심으로 요사채가 ㄷ자형 모양으로 둘러싸여 있던것을 1995년자용스님에 의해 조경은 물론 건물ㆍ석조물 등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건물은 1995년 봉산 중턱에 신축된 황금법당을 중심으로 대웅전과 요사채ㆍ불교회관ㆍ미륵불입상 등

다양한 건물과 석조물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모두 북한산을 바라보며 동향하고 있다.

 

가람구조는 황금법당과 미륵불입상을 중심으로 요사와 석조물이 북쪽으로 줄지어 서 있으며, 남쪽으로 봉산 자연공원이 가람을 감싼 모습이다.

 

지금은 옛 가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으나, 북한산과 삼각산을 바라보는 수려한 경관과 주위 봉산을 감싼 아름드리 수림으로 인하여

도시민에게 도심 속 편안한 쉼터가 되고 있으며, 황금 찬란한 법당의 위용과 더불어 옛 왕실가람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외에도 수국사 삼각산수국사비와 수국사 괘불 등이 있다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수국사비는 못찍어왔음   

 

수국사 괘불(守國寺 掛佛)=

1907년 제작된 괘불로서 장방형의 화면에 삼신불을 그린 모습이다.

높이 690㎝, 폭 414㎝의 소형 괘불로, 화면 중앙에 입상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왼쪽)와 석가모니(오른쪽)가 시립한

삼존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본존은 높게 솟은 육계를 군청으로 채색하고, 육신은 가장자리에 황색을 바르고 붉은색 법의를 입은 모습으로 삼존 모두 20세기 초

도식화된 경기지역 괘불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색상은 대체로 밝고 화사한 홍색과 녹색을 기본으로 사용했고,

거기에 금색을 혼용하여 단조로운 불신의 모습을 장엄하였다.

 

전체적으로 간략화된 구도에, 조선후기 불화에 나타나는 간결하면서도 장중한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제작연대는 화면 아래에 있는 화기를 통해 알 수 있는데, 융희이년(隆熙二年)이란 기록을 통해 1907년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의친왕과 의친왕비 그리고 영친왕의 안녕과 천수를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화기에는 당시 중창주인 월초스님이 화주가 되어 범어사ㆍ통도사에서 시주를 받은 기록과 함께 구하천보(九河天輔)ㆍ환명보문(幻溟普門) 등

당시 본사의 주지스님ㆍ상궁 등이 기록되어 있어 근대 수국사 중창연혁을 화기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삼각산수국사비(三角山守國寺碑)=

수국사 초입에 세워진 비석으로 오석에는'三角山守國寺碑'라는 비명과 연혁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1930년에 세워진 것으로 구산후학(龜山後學) 영호정호(映湖鼎鎬)가 짓고, 성당거사(惺堂居士) 월성(月城) 김돈희(金敦熙)가 썼으며,

김창웅(金昌雄)ㆍ정한경(鄭漢景)이 각자(刻字)하였다.

 

 

찾아가는 길-

지하철 : 6호선 구산역 3번출구로 나와 서오릉방향으로 계속 직진 1km 지점에 위치 (20분정도 소요) 천천히는 30분정도 걸림

 

버스 : 752, 751, 7022, 7720, 752, 751, 7022 선진운수 종점에 하차해서 도보로 5분 거리정도 올라오면 수국사 이정표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