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경기 = 心 마음의 길을 찾아서

도봉산 제일의 명찰(名刹) 망월사(望月寺)= 낙가보전, 월조당사리부도탑, 범종각. 고불원, 천봉당대선사탑비와 태흘탑, 문수굴

백련암 2012. 9. 24. 13:32

 도봉산 제일의 명찰(名刹) 망월사(望月寺)

*이 망월사는 개산한 이래 지금까지 한번도 화를 입은적이 없는 특이한 사찰이라고 합니다.

이른 가을날씨에 불연듯 망월사가 그리워 도봉산으로 향했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모습과 둘레길을 만들어 놓아 걷는길이 예뻐졌다.

천천히(내가 빨리못감) 주변을 살피면서 걷는다면 포대능선입구까지 2시간 10분(가파르다)대이며 망월사까지는 1시간 40분걸린다.

망월사는 옛부터 수많은 운수납자가 거쳐간 선원으로도 유명하다.  고려시대의 혜거(慧炬), 조선시대의 천봉(天峰), 영월(暎月)스님,

그리고 근대의 도인으로 숭앙받는 만공(滿空), 한암(漢岩), 성월(性月), 춘성(春城)스님 등 헤아릴 수 없다. 오늘날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종립특별선원으로 항상 30여명의 선객(禪客)들이 정진하고 있는 도량이기도 하다.

 

망월사는 신라 때인 639년(선덕여왕 8년)에 해호화상[海浩和尙])이 왕실의 융성을 기리고자 창건한 절집이다.

절의 이름은 대웅전 동쪽에 토끼모양의 바위가 있고, 

남쪽에는 달 모양의 월봉(月峰)이 있어 마치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망월사(望月寺)"라 유래하였다고 한다.

또는 "절집이 자리한 도봉산에서 당시 신라의 수도 월성(月城, 현 경주)를 바라보며 삼국이 통일과 왕실의 융성을 기원하였다." 하여

"망월사(望月寺)로 불렸다고도 한다.

1913년 "보운 본섭(寶雲 本葉)"스님의 '망월사 사적기'에도 주변 풍경의 아름다움을 사적기에 담았습니다.

 "절 뒤의 바위는 천축불(天竺佛)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고, 그 앞에는 옥토끼가 끓어 앉아 대면하고 있으니, 이는 천태(天台)를 그려내어

스스로 관세음보살의 거처인 보타(보타)와 같은 모습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절집의 역사를 기록하는 공간에 까지도 도봉산의 아름다움을 기록해 놓았다.

 

고려시대에는 1066년(문종 20년) 혜거국사(慧拒國師, 899년 - 974년)가 중창하였으나 이후 조선시대까지의 연혁은 공백으로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의 "천봉(天峰, 1710년 - 1793년)"스님,  1794년에는 천봉선사부도를 서쪽에 세우고, 3년 뒤 1797년에는 천봉선사탑비를 세웠다.

근대에 들어서는 도인이라 불리는 "만공(滿空, 1871년 - 1964년)"스님,  "한암(漢岩, 1876년 - 1951년)", "성월(性月, 1886년 - 1979년)"스님이 있으며,

일명 욕쟁이 스님으로 불리는 "무애도인 춘성(無碍道人 春城, 1891년 - 1977년)" 스님등이 거쳐간 절집이다.

 

1800년에는 영월(暎月) 스님이 선월당을 절의 왼쪽으로, 영산전을 법당 옛터로 옮겨 중건하였으며,

1818년(순조 18년)에는 칠성각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다시 1827년에는 절 전체를 중수하였다.

 

1846년(헌종 12)에는 대희선사(大羲禪師)가 보국(輔國) 이경순(李慶純)의 시주를 얻어 절 동쪽에 낙가암(洛迦庵)을 창건하였다.

1880년(고종 17)에는 완송선사(玩松禪師)가 칠성각을 중건한 뒤, 1882년 영산전을 다시 세웠다.

1884년 인파대사(仁坡大師)가 독성각을, 1885년에는 완송선사가 약사전을 건립하였다.

이렇듯 18세기 이후 꾸준히 사세를 유지해 오던 망월사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두 불타버리는 비운을 겪고 말았다.

그 뒤 몇 차례 중창이 있었으며, 1969년 주지 춘성(春城) 스님이 퇴락한 선실을 철거하고 2층의 석조 대웅전을 지었다. 1972년에는

주지 도관(道觀) 스님이 본래 있던 염불당과 낙가암을 헐고 현대식 건물의 낙가암을 새로 지었다.

그리고 1973년에는 정영(靜影) 스님이 범종을 주성하고 범종각을 새로 지었다.

1986년부터는 주지 능엄(楞嚴) 스님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1987년에 지금의 자리에 영산전을 지었고, 대웅전을 헐고 선방을,

그리고 관음전, 요사채 등을 신축하였다. 1993년에는 천중선원과 낙가보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드디어 망월사 경내에 들어섰다.

 

 

가람배치도

 

 

월조당(月照堂) 계총선사(桂叢禪師) 사리부도 탑[조선말기] 

망월사 안내판 옆, 즉 무위당 축대 아래에 있는 이 부도는 행적을 알 수 없는 월조계총(月照桂叢)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다.

지대석과 하대석으로 구성된 기단부 위에 타원형의 탑신과 사각형의 옥개석 및 상륜부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부도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으나 뒤쪽 바위 면에 “월조계총지탑(月照桂叢之塔)”이라고 새겨놓아

이 부도가 월조계총(月照桂叢)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여여문과 금강문

 

 

아래층에는 무위당과 여여문을 지나 관음전이 있습니다.

 

 

  如如門(여여문)

 

 

  如如門(여여문)  (낙가보전으로 들어가는 문)

여여문의 여여는 금강경에 나오는 여여부동 귀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 뜻은 "세상의 모든 존재는 한결 같아 여여하여 변함이 없다."는 뜻이랍니다.

 

현판에 보이는 두 번째 글자는 뜻을 가진 글자가 아니고  한문에서는 같은 글자를 잇따라 쓸때  점을 콕 찍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여로 읽어야 한답니다.

 

 

낙가보전(落迦寶殿)

옛 낙가암(洛迦庵) 자리에 1993년 새로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 있던 낙가암은 1846년 대희대사(大羲大師)가

보국(輔國) 이경순(李慶純)의 시주로 창건하였다.

건물의 정면에는「낙가보전(洛迦寶殿)」과 「적광전(寂光殿)」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으며,

외벽에는 1994년 화공 이연욱(李連旭)이 그린 팔상도와 나한, 또는 신선들의 모습을 그려 장엄하였다.

그리고 각 문살에는 투각으로 대나무와 새, 벌 꽃 등을 조각하였고, 기둥에는 6개의 주련이 걸려있다.

 

 

금강문으로 나가면 두 갈래길이 나오면서 왼쪽길로 가면 포대능선과 의정부쪽으로 빠지는 사패산길이 나옵니다.

절집에선 이 금강문을 통과함으로써 사찰안에 들어오는 모든 악귀가 제거된어 가람의 내부는 청정도량이 된다는 것입니다.

 

 

道峰山頂秋月春花(도봉산정추월춘화)     欲識大聖感應有實(욕식대성감응유실) 

도봉산정에 가을 달 봄꽃일세

 

◈그 어떤 절집의 문살과 다르게 각 문살에는 투각으로 대나무와 새, 벌 꽃 등을 조각하였다.   매우 아름답다.

 

欲識大聖感應有實(욕식대성감응유실)     示現此土漚和無方(시현차토구화무방)

그 분의 감응이 헛되지 않음을 알고자 하는가

 

 

示現此土漚和無方(시현차토구화무방)    仍號觀音跡居寶陀(잉호관음적거보타) 

이땅에 나타나시니 그 방편이 끝이 없으라,    

 

 

仍號觀音跡居寶陀(잉호관음적거보타)    聞勳聞修金剛三昧(문훈문수금강삼매)

그로 인해 관음이라 불리면서 보타산에 계시며,      

 

 

曾於觀音如來會上(증어관음여래회상)    聞勳聞修金剛三昧(문훈문수금강삼매)

일찍이 관음여래회상에서 금강삼매를 닦으셨네,

 

 

관세음보살좌상과 협시인 용왕과 선재동자

이 전각의 주존인 관음보살좌상과 용왕 · 선재동자입상을 협시로 봉안하였다. 그리고 뒤로는 42수관음목각탱을 봉안하였는데

좌우의 목탱에는 무수히 많은 관음보살의 화신이 표현되어 있어 중생의 고통에 부응하여 구제하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외에는 근래에 조성한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중앙부분의 천수천안의 십일면 관세음보살

 

 

좌우의 목탱에는 무수히 많은 관음보살의 화신이 표현되어 있어 중생의 고통에 부응하여 구제하는 것을 나타내었다.

 

 

중앙부분의 천수천안의 십일면 관세음보살

 

 

좌우의 목탱에는 무수히 많은 관음보살의 화신이 표현되어 있어 중생의 고통에 부응하여 구제하는 것을 나타내었다.

 

 

신중탱화

 

 

인등 = 참 이색적이다 한지로 만들어져있다.

 

낙가보전(落迦寶殿)의 주련

증어관음여래회상(曾於觀音如來會上) 일찍이 관음여래회상에서

문훈문수금강삼매(聞勳聞修金剛三昧) 금강삼매를 닦으셨네

잉호관음적거보타(仍號觀音跡居寶陀) 그로인해 관음이라 불리면서 보타산에 계시며

시현차토구화무방(示現此土漚和無方) 이 땅에 나타나시니 그 방편이 끝이 없으라

욕식대성감응유실(欲識大聖感應有實) 그분의 감응이 헛되지 않음을 알고자하는가

도봉산정추월춘화(道峰山頂秋月春花) 도봉산정에 가을 달 봄꽃일세.

 

관음전 벽화들의  일부이다.

 

 

 

 

 

 

 

 

 

 

 

망월사 천중선원

 

 

천중선원 들어가는 월조문

예전엔 이곳에 대웅전이 있었답니다. 1986년부터는 주지 능엄(楞嚴) 스님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선방을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답니다.

 

 

범종각(泛鐘閣)

원래 망월사 범종각은 1973년 정영(瀞影)스님이 천중선원 앞에 세웠었다. 그러던 것을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면서

능엄스님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범종각 안에는 1975년에 조성한 높이 130cm의 범종이 하나 봉안되어 있다.

 

 

고불원(古佛院)

천중선원 뒤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익공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삼세불인 석가 · 약사 · 아미타좌상을 봉안하였고, 그 뒤에 역시 삼세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고불원(古佛院)  망월사 목조불삼존상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271호   시대 = 조선

 

삼세불인 석가모니 · 약사여래불 · 아미타좌상을 봉안하였고, 그 뒤에 역시 삼세불후불탱을 봉안하였다.

삼세불좌상은 모두 나발의 머리에 정상에는 육계가 솟았고, 얼굴은 방형의 모습이다.

상호는 이마에 백호가 있으며, 반원형 눈썹과 반쯤 뜬 듯한 두 눈, 입술 위에는 인중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고,

법의는 모두 두 어깨를 감싼 통견의이다.

 

수인은 석가여래좌상은 오른손을 펴서 무릎위에 올려놓은 항마촉지인이며, 약사여래좌상은 왼손을 들어 올려 결인한 손바닥이 바깥으로

보이게 하였고,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위에 올려 놓았다. 아미타여래좌상은 약사여래좌상과 반대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 삼세불좌상은 전형적인 조선후기의 조각양식을 보여준다.

 

본 목조불삼존상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전체적인 비례가 적절하며, 옷주름의 처리가 매우 실적이고 입체적으로 처리된

수준높은 불상으로  비록 조성발원문이 발견되진 않았지만, 상호의 표정과 법의의 표현 등을 통하여

조선시대 17세기 후반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횡삼세불상으로서 조선시대 후기의 불교 신앙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으로 가치가 인정된다.

 

 

고불원(古佛院)  망월사 목조불삼존상  

 

 

  고불원 신중탱화

 

고불원(古佛院) 풍경

 

 

아마도 이 곳은성각인것 같다 지금은 보수중이다. (2012년)

안에는 칠성탱 · 독성탱 ·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한다. 건물기둥에는 "釋門儀 範(석문의 범)"

칠성단 예경을 구절로 주련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이번 다시 망월사를 찾았다 이번에 가보니 칠성각이 보수가 모두 끝나있었다.↓(2013년 3월)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천중선원 뒤에 자리하고 있다. 칠성각 오른쪽 큰 바위면에는 “가경무인건차성각(嘉慶戊寅建此星閣)”이라는 음각 명문이 있는데,

이로보아 1818년(순조 18) 칠성각을 처음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은 「봉은본말사지 망월사」조에도‘순조18년(1818년) 무인 절의 승(僧)이 칠성각을 지었다.’라고 적혀 있어 확인할 수 있다.

건물은 정면을 제외한 3면은 흙과 돌을 이용하여 벽체로 쌓았으며, 그 위 벽면에 주악비천, 용, 호랑이, 달마 등을 그렸다.

그리고 각 기둥에는 석문의범(釋門儀範) 칠성단 예경에 나오는 구절로 주련을 달았다.

=주련=

자미대제통성군(紫薇大帝統聖君) 뭇 별을 이끄시는 자미대제와

십이궁중태을신(十二宮中太乙神) 십이궁 가운데의 태을신,

칠정제림위성주(七政齊臨爲聖主) 칠정이 모두가 성왕되시고

삼태공조작현신(三台共照作賢臣) 삼태는 함께 비추어 어진 신하되시네.

아직은 주련이 달려있지 않다.

 

안에는 1973년 조성한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과 석고독성상이 봉안되어 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와 독성상

 

 

칠성각 벽화 비천상

 

 

칠성벽화 달마

 

 

칠성벽화 비천상

 

 

칠성벽화 백호상

 

 

해탈문 = 이곳은 문수전과 영산전으로 올라가는 문이다

 

 

천봉당대선사탑비(望月寺 天峯堂大禪師塔碑) = 경기도 문화재지료 제 67호

조선 후기의 승려인 천봉선사 태흘(1710∼1793)의 탑비로, 옆에는 그의 사리를 모신 부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탑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신(碑身)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단한 모습이다.

 

1791년(정조 21)에 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수관거사 이충익(李忠翊)이 짓고 썼는데 필치가 매우 맑다.

비 뒷면에는 그의 동문과 문제자(門弟子) 및 신도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 의하면 선사는 황해도 서흥 사람 김두필(金斗弼)의 아들로 16세 때 유덕사로 출가하여 명탁(明琢)의 제자가 되었다.

도원(道圓)에게 계(戒)를 받았으며, 20세 때 우점(雨霑)에게 배운 뒤 여러 곳에서 참선하다가 배천 호국사에 들어가 풍계선사(楓溪禪師)의 법을 이었다.

입적한 이듬해 호국사·월정사·망월사 등에 사리탑이 세워졌다. 현재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어있다.

 

태흘 선사는 16세에 유덕사라는 절에 들어가 명탁의 제자가 되었다. 20세 때 우점에게 배운 뒤 여러 곳에서 참선하였으며 백전 호국사에 들어가

풍계선사의 뒤를 이었다. 입적한 다음해에 호국사, 월정사, 망월사 등에 선사의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간단한 모습이다. 조선 정조 21년(1797)에 비를 세워 놓았으며,

비문은 이충익이 글을 짓고 글씨를 썼는데, 단아한 필체가 돋보인다. 비의 뒷면에는 그의 동문과 제자 및 신도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천봉당 태흘탑(望月寺 天峯堂泰屹塔) =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66호)

조선시대의 승려 천봉당 태흘(天峯堂 泰屹, 1710년 ~ 1793년)팔각원당형부도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는 기단 ·  탑신 · 지붕이

모두 팔각형이고 단층인 부도로 지붕과 기왓골 등 세부는 목조건물의 양식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1793년(정조 17) 속세의 나이 84세로 입적하였다. 이 후 배천 호국사, 문화 월정사와 함께 이곳 망월사에 사리탑을 세워 그 유골과 사리를 봉안하였다.

탑은 넓은 바닥 돌 위로 기단(基壇)을 두고,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바닥 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각 모서리마다 다섯 개의 구슬무늬를 세로로 두어 장식하였다.

길쭉한 탑신의 몸돌은 아래에 작은 잎의 연꽃을 두르고, 윗부분에는 큼직한 잎을 가진 연꽃을 둘러 새겼다.

가운데 부분에는 탑의 이름과 함께 조성연대를 세로로 기록해 두었다. 지붕돌은 윗면의 여덟 모서리가 꽤 두툼하게 표현되었고,

역시 두꺼워 보이는 처마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꼭대기에는 연꽃을 새긴 둥근 돌 위로, 꽃봉오리 모양의 돌이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천봉당 태흘탑과 부도의 뒷모습

옆에있는 천봉선사 태흘의 부도 탑비이다. 탑비는 어떤 사적이나 글을 새겨 후세에 오랫동안 전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불교에서는 선종이 유행하면서 승려의 행적을 남기기 우해 부도와 함께 건립된다.

이 탑비는 지대석 위에 비몸(碑身)과 개석(蓋石)을 올린 간단 형식이다.

 

 

문수굴(文殊窟)

바위를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동굴이 있는데, 여기에 목조전실을 짓고 문수굴이라 이름 지었다.

안에는 여의를 들고 반가부좌한 문수보살을 봉안하였다.

 

 

 

 

반가부좌한 문수보살

바위를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동굴이 있는데,  안에는 여의를 들고 반가부좌한 문수보살을 봉안하였다.

 

 

문수굴 옆모습 굴을 이용하여 지붕을 만들고 참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굴이 꽤 깊다. 이층으로 되어있음

 

 

▶ 찾아가는 길

지하철 1호선 의정부행이나 소요산행을 타고 망월사역에서 하차하여 신흥대학쪽으로 올라갑니다.

약 1시간정도 올라가심되고 나이가 되신분들은 2시간정도 오르시면 됩니다. 올라가 보시면 고생스러워도 너무 잘 왔다고 생각하실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