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사 [僧伽寺]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북한산 비봉 동쪽 중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했으며 당 고종연간(高宗年間:649~683) 연간에 장안(長安)의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며 생불(生佛)이라고 칭송되었던 승가대사를 사모하는 뜻에서 절이름을 승가사라 했다고 한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하고, 1090년(선종 7)에는 영현(領賢)이 중수했다.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하고 불당을 중수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가 있었으며,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로 일부 당우가 다시 중건되었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1957년 도명(道明)이 대웅전·영산전·약사전을 중창했으며, 그뒤를 이어 상륜(相侖)이 불사를 계속하여 산신각·동종각·대방·요사채
등이 있다. 승가굴 안에는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僧伽寺石造僧伽大師坐像:보물 제1000호)이 있다.
삼각산중수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記) - 이예(李預)
대개 들으니 항성(恒星)의 숨은 빛은 허공에 이상한 징조를 나타내며, 둥근 달의 단아한 얼굴은 아름다운 광채를 현세(現世)에 비친다. 힘써 마귀의 무리를
배제하고 홀로 하늘과 인간의 스승이 되었다. 인간으로의 몸이 장차 사라진 뒤에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만한 것이 없어질 것을 민망하게 여기었다.
그러므로 금으로 만든 불상은 한(漢)나라 황제의 꿈에 날아와서 들어와 고하였고, 패엽(具葉 조개조각)에 기록한 불경의 말씀은 인도(印度)에서 전하여 거듭
번역되었다. 이러한 모든 법에 의하여 저 여러 중생을 인도 하였으니, 우레소리를 듣고 귀가 트이고 뜨거운 것을 잡았다가 물에 손을 넣는 것과 같다.
이로 인하여 여러 사찰이 서로 솟아 있어 세계의 방방곡곡에 크게 널려 있으며, 거룩한 중이 종종 나타나서 차츰 지도하는 방법을 넓혔다.
이를테면 강회(康會)는 오왕(吳王)의 궁정에 들어갔고, 도안(道安)은 진제(晉帝)의 수레에 올랐다. 석씨(石氏)의 조(趙)나라에서는 도증(圖澄)이 있었고,
요씨(姚氏)의 진(秦)나라에서는 구마라집(鳩摩羅什)이 있었으니, 이들은 모두 승려 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다. 양대(梁代)의 보지명공(寶誌明公)은
모두 감화시킨 행적이 기이한 것이 많고, 또한 명성(名聲)도 매우 위대하였다. 그러나 생전과 죽은 뒤에 모든 사람을 제도함이 다름이 없고, 이 땅이나 다른
지방에서 귀의(歸依)하는 정성을 바침이 다르지 않은 사람은, 곧 이씨(李氏)의 당대(唐代)의 승가대사(僧伽大師) 한 분일 것이다.
대사가 세속에서 쓰던 성은 하씨(何氏)인데 서역(西城)의 어느 나라 사람이다. 나이 30에 지팡이를 휘두르고 동쪽으로 당(唐)나라에서 놀았다.
이 때 용삭(龍朔) 초년에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에 이름을 걸고 있다가, 후에 사주 임회현 신의방(泗州臨淮縣信義坊)에 토지를 구하여 표를 세웠다.
그 표의 밑에다 절을 지으려 했는데 그 곳을 파다가 옛날 향적사명기(香積寺銘記)와 금불상 하나를 얻었는데, 불상 위에 보조왕불(普照王佛)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드디어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경룡(景龍) 2년에 중종(中宗) 황제가 사절을 보내어, 대사를 대궐 안에 있는 도량(道場)으로 맞아들여 높여서 국사(國師)로
삼고, 황제와 백관이 제자로서의 예절을 행하고 스승으로 섬기었다.
얼마 후에 천복사(薦福寺)에 나가서 거처하였다. 항상 방 하나에 혼자서 거처하는데 그 정수리 위에 구멍이 있어서 솜으로 막아 두었다가 밤이 되면 솜을 빼
버렸다. 그러면 그 정수리 구멍에서 향기가 나와서 연기가 방에 가득하여 특이한 향내를 풍기었다.
새벽에 향기가 다시 정수리 속으로 들어가면 또 솜으로 이를 막아 두었다. 대사가 항상 발을 씻는데 사람이 그 물을 받아 마시면 고질병이라도 모두 나았다. 중종이 하루는 내전(內殿)에서 대사에게 말하기를, “서울에 비가 오지 아니한 것이 수 개월이 되었으니, 바라건대 대사는 자비를 베풀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오.” 하였다. 대사가 곧 병에 들어 있는 물을 가지고 널리 뿌렸더니, 별안간 검은 구름이 모이더니, 단비가 많이 왔다. 중종이 크게 기뻐하여 명을 내리어
수리한 절의 이름을 임회사(臨淮寺)라 하였더니, 대사는 ‘보조왕사(普照王寺)’라고 이름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것은 자기가 얻은 불상 위에 있는 글자대로 하려는 것이었다. 경륭(景龍) 4년 3월 2일에 장안(長安) 천복사(薦福寺)에서 단정하게 앉아서 죽었는데, 얼굴빛
이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 향년(享年) 83세로 서역에서 30년, 중국에 들어와서 52년이었다. 중종은 곧 천복사에 탑을 세우고 시체에 옻칠을 하여 공양하려
하였더니, 별안간 큰바람이 일어나고 냄새가 장안에 가득히 퍼졌다.
중종이 묻기를, “이것이 무슨 좋은 징조냐.” 하니, 측근의 신하가 아뢰기를, “승가대사는 교화를 실시한 인연이 임회(臨淮)에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돌아가려
하여 이러한 변을 나타낸 듯합니다.” 하였다. 중종은 잠자코 마음속으로 그렇게 해야겠다 승낙하였더니, 그 냄새가 갑자기 없어지고 잠깐 사이 기이한 향기가
두루 퍼졌다. 곧 그 해 5월에 임회로 보내어 탑을 세우고 공양하였으니, 현재 있는 탑이 그것이다. 중종은 때로 명을 내리어 제자인 혜안(慧岸)ㆍ헤엄(慧儼)ㆍ
목의(木义) 세 사람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각기 가사[衣]와 바리때[鉢]를 주어 그의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
뒤에 만회(萬回)대사에게 묻기를, “승가대사는 어떠한 사람이냐.” 하니, 만회는 말하기를, “이는 관음보살의 화신입니다《법화경(法華經)》에 이르기를,
‘마땅히 비구(比丘)의 몸으로 제도하는 사람은 곧 모두 그대로 나타내어 설법(說法)을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송대(宋代)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장지기(蔣之奇)와 비서(秘書) 저작랑(著作郞) 유신(柳紳)과 천수사(天壽寺) 대사(大師) 찬녕(贊寧)이 각기 대사의 전기를
썼고, 중조산 거사(中條山居士) 신숭(辛崇)이 편집한 대사의 행장(行狀)이 36개 항목인데, 모두 신령하고 기이한 행적이 있었다.
모두 세상에 간행되었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최치원(崔致遠) 공의 문집을 보면, '옛날 신라 시대에서 낙적사(狼迹寺)의 중 수태(秀台)가 대사의
거룩한 행적을 익히 듣고, 삼각산(三角山) 남쪽에 좋은 장소를 골라 바위를 뚫어 굴을 만들고, 돌을 조각하여 얼굴을 묘사하니 대사의 얼굴이 더욱 우리 나라
에 비치었다.
국가에 천지의 재변이 있을 때나 수재나 한재 등 모든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에, 기도를 올려 이를 물리치면 그 자리에서 응답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절을 보내어 봄과 가을에 3일씩 재(齋)를 베풀고, 연말에는 아울러 임금의 옷을 바치는 것을 정상적인 규례로 삼았다.' 하였으니, 성인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는 말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밝으시며 또 인자함을 모두들 감탄하도다.
자식 없는 여자가 절하며 기원하면 곧 훌륭한 아들을 낳으며, 말을 잃은 노인이 정성을 다하여 고하면 바로 잃었던 말을 찾는다. 병든 사람이 애절히 간구하
면 병상에서 신음하던 소리가 곧 그치며, 벼슬을 구하는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조정에서 막혔던 벼슬길이 바로 트인다. 소금을 구하면 바닷가의 사람이 구워
가지고 오기도 하며, 갓을 원하면 서울의 여자가 만들어 바친다.
그 밖의 신기한 경험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세우신 뒤에 역대의 임금들이 모두 친히 여기에 와서 예(禮)를 올리셨다.
저 당나라의 아홉 황제가 청량산(淸涼山)에 가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귀의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대안(大安) 6년 선종(宣宗)께서 행차하시어, 굴에 나아가서 재를 올리고 보물을 희사하시어 공경을 극진히 하셨다.
눈을 돌리어 10리를 돌아보니 들보의 채색과 벽의 그림은 먼지가 결어서 시커멓게 되었고, 기왓장의 이음새와 처마의 추녀는 피해를 입어 반쯤 무너졌다.
특별히 귀산사(龜山寺)의 주지(住持)인 선사(禪師) 영현(領賢)에게 명하여, 임시로 신혈사(神穴寺)에 거주하면서 다시 수리할 사무를 맡게 하셨다.
영현공은 목수는 옛날 반이(般爾)와 같은 우수한 사람을 선택하고, 재목은 예장(豫章)과 같은 좋은 나무로만 골랐다. 곧 연장을 잡고 날마다 공사를 힘써
시켰다. 석상(石像)은 잘 받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모신 굴은 단장을 베풀어 화려함이 증가되었다. 부처님이 계시던 녹원(鹿園)과 영취산(靈鷲山)과도
비슷한 듯하였다. 인하여 신에게 명하여 중수(重修)한데 대한 기(記)를 지으라 하고 미처 나라에 아뢰지 못했었는데, 수창(壽昌) 5년 가을에 우리 임금께서
사무 담당관에게 명하여 거가(車駕)를 준비하시고 왕비(王妃)ㆍ태자(太子) 및 우세승통(祐世僧統)과 양부(兩府)의 여러 관료를 데리고 천여 명의 수행자,
만 필의 기마(騎馬)가 구름이 모인 듯, 안개가 어울리듯 땅에 가득하여 산이 채웠다.
행차가 굴에 도착하여 재(齋)를 베풀고 인하여 백은으로 만든 향그릇과 손에 드는 향로 한 벌 씩과 금강석,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 한 벌씩과 순금제인 띠
한 벌을 금화과(金花果)ㆍ수번(繡幡)ㆍ차[茶]ㆍ향ㆍ의복ㆍ비단 등과 함께 바치시어 귀의(歸依)하시며 공경을 드리는 예절을 나타내시었다.
인하여 선사(禪師) 영현(領賢)을 보내어 공사 전체를 감독하여 그 일을 완성하게 하셨다.
영현 선사는 바로 신라 시대에 이 굴의 주지였던 선사(禪師) 여철(如哲)이 창건한 신혈사(神穴寺)의 처음 조사(祖師)이며, 왕사(王師)인 자응(子膺)의 법윤
(法胤 = 불가에서 법통을 계승하는 아들)이다.
훌륭하도다. 진리를 숭상하는 조정에서 여기에 복을 심는 터전을 경영하셨으니, 성스러운 태양은 오래도록 빛날 것이며, 인자한 바람은 영원히 퍼지게 되리로
다. 가벼운 옷이 돌로 변할지라도 자비스러운 집은 오히려 남아 있을 것이며, 푸른 바다에 먼지가 날릴지라도 공덕의 수풀은 오히려 무성하리로다.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보살의 신통한 조화와 절을 수리한 내력을 마땅히 돌에 새기어 멀리 후세에 전하여 나의 불민(不敏)한 솜씨로도 영원한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라.” 하시었다. 내가 재주가 부족하나 요행히 과거에 합격하였고, 다행히 좋은 시대를 만나서 외람되이 문장을 맡은 관료에 뽑혀, 명을 회피할 길이
없어 곧 불가 사찰의 훌륭한 업적을 찬양하였다. 때는 건통(乾統) 6년 병술(丙戌) 10월 일(日) 삼가 기(記)를 적는다.
약사전(藥師殿)
자연석굴법당인 약사전은 신라시대부터 승가굴로 널리 알려졌으며, 조선시대에 세종대왕비 소헌왕후의 쾌유로 세상에서 약사전으로 통칭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상이 봉안되어 있다.
석조승가대사상(石造僧伽大師像) : 보물 제 1000호 시대 : 고려 현종 15년(1024년)
석조승가대사상(石造僧伽大師像)
석조승가대사상(石造僧伽大師像)
인도출신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에서 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던 승가대사의 모습을 새긴 상이다.
결가부좌한 거의 등신대에 가까운 이 상은 두건을 쓴 머리, 넓적하면서 광대뼈가 나온 얼굴, 평판적인 체구 등의 특징에서
사자빈신사지석탑의 석상과 같은 고려초기의 석조 승상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또 긴 상체라든가 넓은 무릎 등은 고려초기의 철불과도 비슷한 특징을 보여준다.
광배는 큼직한 배 모양의 이른바 주형거신광배(舟形擧身光背)인데, 중간 이하의 신광은 신라 광배의 갸름한 모양과는 달리 둥근 원형으로 되어 있다.
또 머리 뒤의 두광(頭光)도 신광과 한쪽이 겹쳐지면서 둥글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 연꽃무늬를 두르고 그 밖을 덩굴무늬와 모란꽃 무늬를 둥글게 새겨 넣었다.
또한 거신광의 테두리에는 전체적으로 불꽃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광배 뒷면에는 태평(太平) 4년, 곧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스님이 동량이 되고 광유(光儒) 등이 조각했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고려초기의 확실한 조각으로서 당시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손꼽히는 작품이다.
상의 높이는 76cm, 광배 높이는 130cm로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석조승가대사상(石造僧伽大師像) : 보물 제 1000호 시대 : 고려 현종 15년(1024년)
이 像(상)은 삼각산의 석굴 안에 모셔져 있는 스가대사의 석상이다. 석상의 광배 뒷면에 1024년(고려현종15년)에 조성되었다는 명문(銘文)이 있다.
승가대사는 원래 서역의 스려로 7세기에 당나라로 와서 활동하였는데 수행이 뛰어나고 교리에 밝으며 송주(誦呪)에 능하여 많은 신도들이
그를 존숭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죽은 뒤에 십일면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숭배되었는데, 비를 내리고 홍수를 다스리며 병응 낫게 하는 영험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통일신라말에 승가대사의 신앙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나라에서 봄, 가을로 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 상은 머리에 두건(風帽)을 쓰고 몸에는 가사를 입은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왼손은 가사 속에 넣었고 오른손은 검지를 펴고 있는데, 이것은 변설(辨設)
을 상징하는 손짓(手印)이다. 광배에는 연화문, 당초문, 보상화문, 화염문 등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다.
이 승가대사상은 고려중기에 유행한 승가대사 신앙을 알려 주는 거의 유일한 예로 정확한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다.
석조승가대사상(石造僧伽大師像) = <문화재청 글>
경덕왕 15년(756년)에 수태(秀台)가 창건한 승가사에 모셔져 있는 이 상은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에 와서 전도에 전념하여
관음보살로까지 칭송받았던 승가대사의 모습을 새긴 초상(肖像) 조각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있고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광대뼈가 튀어나와 전형적인 시골 노인같은 인상으로 지방색이 짙게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평판적인 체구와 함께 충북 제천군 한수면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에 있는 석탑석상 등의 고려 초기 석조 승상과 비슷한 면을 보여준다. 또 긴 상체에 비해서 유난히 넓은 하체는 고려 초기의 철불과 유사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주름선이 굵으면서도 간결해 당시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배(舟) 모양의 광배(光背)는 승상에 비해서 넓고 큼지막하며, 머리광배와 몸광배로 나뉜다.
머리광배에는 연꽃무늬와 덩쿨무늬, 모란무늬를 새겼으며, 둥근 원형의 몸광배에는 덩쿨·보상화무늬를 새겼다.
광배 뒷면에는 태평 4년(고려 현종 15년, 1024)에 지광스님이 중심이 되어 광유 등이 조각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고려 초기의 확실한 초상 조각으로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각광을 받던 석굴(石窟)과 함께 크게 주목된다.
석조승가대사가 모셔져 있는 약사전 안에 있는 감로수
명부전(冥府殿)
건물의 앞 쪽에 큰 바위가 있는 관계로 전면에 문은 현재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목각탱으로 조성된 지장보살탱이 봉안되어 있다.
화기에 의하면 원담스님이 증명을 하였고, 화사는 김원각, 김석담이며, 1983년에 조성되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각이다.
지장보살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하늘의 육도(六道)의 윤회에서 헤매이는 중생을 구원하고자 서원을 세운 보살이다.
명부전 불단(冥府殿 佛壇)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지장보살목각탱이 봉안되어 있다.
비스듬하게 반가좌를 하고 중심으로 무독귀왕과 도명존자가 협시를 이루고 시왕, 판관, 녹사등이 에워싸는 구도를 하고 있다.
지장보살은 육도윤회의 고통에서 헤메이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서원을 세운 보살이다.
이 바위가 무슨모양일까요?? 스님은 호랑이상 이라고 말씀하시던데 그런것같기도 하고요
산신각 뒤 바위입니다 호랑이라고 생각을 안했을땐 와불인가 생각했었고 혹은 다른것도 상상해 봤습니다.
산신각(山神閣)
산신을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산신은 칠성각과 함께 민간신앙이 불교에 수용된 경우이다. 산신은 호랑이의 변화신이므로 호랑이와 함께 등장한다.
내가 20년전쯤 여기에 왔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다 예전에는 법당에 모셔져 있는 칠성탱과 나한탱과 산신탱이 지금 이자리가 아닌
다른곳에 함께 있었고 그 당시 대웅전은 가보지도 못하고 산신각만 들러 기도하고 간적이 있다 지금은 너무나 웅장하고 불사가 잘 이루어져
감명이며 다른곳엔 금불사로 모든 전각이나 목각탱이나 목각불상과 법당을 보면 좀 못마땅하였으나
승가사에서 본 금불사는 말 그대로 웅장하면서도 너무 잘 되어있다. 스님의 기도가피가 느껴집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스님_()()()_
산신각 목각탱(山神閣 木刻幀)
산신각 안에 봉안되어 있는 산신도로 나무에 개금한 산신목각탱이다.
심산유곡을 배경으로 나무 아래 도인의 모습으로 부채를 들고 앉아있는 산신을 중심으로 등뒤에는 호랑이를 거느리고 오른쪽에는 동자 2명이 새겨져 있다.
약사전앞에 있는 비좌(碑座)
비석을 받치던 비좌인것 같다. 화강암으로 3단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넓직한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누구의 비석의 하단부분인지는 모르나 고려 중기 승려인 탄연(坦然, 1070년 ~ 1159년)이 쓴 승가굴 중수비(重修碑)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신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파괴되지 않았나 그 때 상단에 있던 비신(碑身)과 이수(螭首)이 사라진것같다고 한다.
뭐라 쓰여있는지를 모르겠음
승가사 올라가는 길목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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