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본사와 사찰 벽화 이야기

해인사 = 대적광전 벽화 이야기

백련암 2013. 4. 22. 02:48

사문유관의 벽화 이야기

 

태자가 성 밖으로 나가 생로병사의 실상을 보는 것 = 사문밖에 나가 관찰하는 모습

7세쯤 봄 농경제에 참석하여 흙구덩이에서 꿈틀대는 벌레(지렁이)를 새가 쪼아 물고 달아나고 그 새를 큰새가 날아와 작은 새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약육강식의 비정함과 농부나 농부의 수고로 편안히 배불리 먹는 귀족 왕족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염수부(閻浮樹)아래의 정관(靜觀)이라고 한다.

 

동문에서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자를 보고, 서문으로 나가서는 상여를 보았고, 북문밖에는 사문(수도자)을 보고 출가 결심하는 모습 등이

표현되고 있다.

 

 

한밤중에 궁전을 나온 싯달타

 

태자가 마부에게 성을 넘을 것을 지시하고  성을 넘은 태자를 돕기 위해 사천왕이 태자가 탄 말을 네발로 떠 받고

마부 차익이 태자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의 금관과 용포를 가지고 궁궐로 돌아가고

밤중에 궁전을 나온 싯달타는 날이 밝은 뒤에 어느 강가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깍은 태자는 지나가던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고

출가 수행자, 즉 사문이 되었다. 수행자가 된 그를 흔히 사문 고타마라고 부른다.

 

 

마왕 파순이 딸들<열비(悅妃), 희심(喜心), 다미(多媚)>로 하여금 마녀로 변신케 하여 부처님을 유혹하는 모습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시는 부처님

 

부처님은 이 자리에서 다섯 비구 즉 교진여, 아사바사, 마하나마, 발제리가, 바사파에게 비로소 가르침을 펼치시니 이를 초전법륜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과 뱃사공의 벽화이야기♠

 

옛날 중국 진나라 때, 산동 지방에 서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때 동양 당에 갔다가 정산이라는 곳으로 돌아오는 길에 큰 강물을 배를 타고 건너게 되었다.

그런데 뱃사공이 수로를 잘 몰라서 그만 급류에 휩쓸려 뱅뱅 도는 소용돌이에 들어가서 배가 침몰할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서영은 지극한 정성으로 '관세음보살님'의 명호를 일념으로 불렀더니, 별안간 어디서인지 수십명의 힘을 합한 듯한 큰 힘이 배를 끌고 잡아당기는

소리가 나더니, 배는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위기를 모면한 배는 간신히 강 언덕을 따라 어둠을 헤치고 내려가는데, 밤은 칠흙같이 어두워 앞을 분간할 수 없으며, 배는 심한 파도에 휩쓸려 다시 엎어질

것만 같았다.

 

서영은 또 일념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웠더니, 홀연 저편 산머리에서 밝은 불꽃이 일어나 강을 비춰주니 그 틈에 배를 돌려 방향을 잡아 저편 언덕으로 무사히

건너가게 되었다.

 

배가 언덕에 닿자 불꽃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튿날 동네 사람들에게  "간밤에 산불을 보았느냐?" 하고 물으니 모두 " 모른다"고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사실조차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는 곧 서영이 지극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염송한 탓으로 '관세음보살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라고 생각된다.

 

 

아이들이 흙을 쌀로 생각하여 공양하자 부처님께서 이를 탑으로 바꾸는 장면의 벽화

 

 

선혜여인과 연등불 벽화이야기

 

연등불 앞에는 물이 질퍽한 진창이 있었다. 선혜여인은 재빨리 앞으로 가서 자기 옷을 벗어 진창에 깔고 머리를 풀어헤쳐서

그 위를 밟고지나가게 하니 연등불이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선혜여인은 도솔천에 호명보살로 태어났다

 

 

♠자장율사의 벽화 이야기

 

선덕여왕때 깊은 산중 자장율사가 정진하고 있었습니다. 나무 열매 풀 뿌리로 허기를 달래고 흐르는 물로 갈증을 면하고 그리하여 자장율사는 하루가 다르게

정진에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선덕여왕의 명으로 신하일행이 나타나서 자장율사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정승으로 삼으려고 부르십니다.

자장율사는 이미 출가한 몸인지라 국사(國事)에 나아갈 수 없는 형편임을 전해주시오, 하고 그들을 돌려 보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다  신하 일행은 자장율사를 찾아가서 왕명(王命)을 전하였으나, 여전히 성과가 없었습니다.

거듭되는 권유에도 거절당하자 신하는 칼을 뽑아 들고 왕명을 어길 참인가, 아니면 순순히 입궐(入闕)하여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고  왕명을 받들것인가

그러나 자장율사는 얼굴표정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오령 일일지계이사(吾寧一日持戒而死) : 내 하루를 계를 지키다 죽을지라도

불원 백년파계이생(不圓百年破戒而生) : 백년을 파계하고 살기 원치 않노라,    하고 읊은 다음 엎드려 목을 내밀었답니다. 

 

신하가 어찌 할 수가 없어 입궐하여 선덕여왕에게 전후 사정을 고하자 선덕여왕은 자장율사가 수도에 전념토록 적극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후일에는 왕궁

에 모셔다가 대승경론을 강설하도록 하는가 하면,  대국통(大國統)으로 삼아 계율을 맡아 처리하도록 하여 불교계의 기틀을 다지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무외삼장과 혜통선사 벽화 이야기

 

무외삼장은 인도(마갈다국)사람으로 포교를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나라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승려이며 밀교(密敎)의 권위자이다.

 

혜통(惠通)은 진언종을 연 신라의 고승입니다.[진언종(眞言宗)의 초조(初祖)] 출가하기 전의 일입니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 은천에 살았었습니다. 어느날 시내에서 놀다가 수달[獺] 한 마리를 잡아먹고 그 뼈를 동산 안에 버렸는데, 이튿날 보니

그 뼈가 없어졌습니다.  주위에 핏자국이 있어 따라 가보니 전에 살던 굴에 뼈만남은 수달이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있었습니다.

 

놀라고 감탄하며, 살생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깊이 느끼고,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게 됩니다.

 

이 무렵 당나라에 무외삼장(無畏三藏)이라는 훌륭한 스님이 있어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게 되는데 '동방의 오랑캐가 어찌 불법을 담을 그릇이 되겠는가?'

하며 거절합니다.

혜통은 무외삼장의 그 말에 이렇게 답합니다 '사람이 사는 지방이야 동서가 있겠지만 진리에 어찌 동서가 있겠습니까?' 라고 반문을 합니다

 

 

혜통은 쉽게 물러서지 않고 3년 동안이나 부지런히 섬겼습니다.

 

그래도 무외(無畏)가 허락하지 않자 신심을 보이는데 화로를 머리에 이고 무외삼장에게로 갔습니다.

조금 지나 불기운으로 정수리가 터지는데 소리가 천둥과 같았다고 합니다.

삼장(三藏)이 이 소리를 듣고 와서 보고 화로를 치우고 손가락으로 터진 곳을 만지면서 신주(神呪)를 외우니 상처는 이내 아물었습니다.

그러나 흉터가 생겨 왕자(王字) 무늬와 같으므로 왕화상(王和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외삼장의 법을 전수받고 신라로 귀국하여 진언종을 열고 불법을 널리 펼쳤습니다.

 

혜통은 신통력이 뛰어나 여러가지 기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나라 공주가 병들어 무외삼장(선무외)를 청하므로 혜통이 대신 가서 밀법으로 공주의 병을 고쳐준 적도 있습니다.

문무왕5년(665년)에 견당사 정공과 함께 귀국하여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신통력이 뛰어나 가뭄에 비를 내리고도 했고 어느때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에게 청하여 주문을 외우니, 그 자리에서 병이 나았습니다.

혜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전생에 재상의 몸으로 장인(臧人) 신충(信忠)이란 사람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으셨으므로 신충이 원한을 품고 윤회환생

(輪廻還生)할 때마다  보복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등창은 그래서 생긴 것이니 신충을 위해 절을 세워 그의 명복을 빌어 원한을 풀게 하십시오.

 

왕이 옳다고 생각하여 절을 세워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고 했다.  절이 다 이루어지자 공중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나는데

왕이 절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습니다.

 

왕은 소리가 난 곳에 원한이 끊어졌다 해서 절원당(折怨堂)을 세워 주었다고 합니다. 

 

아래는 혜통을 찬(讚)한 시입니다.

 

산도(山桃)와 계행(溪杏)이 울타리에 비쳤는데,

한 지경 봄이 깊어 두 언덕 꽃이 피었네.

혜통이 수달을 한가로이 잡은 때문에,

마귀(魔鬼)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네.

 

 

달마대사 갈대잎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

 

=달마이야기=

달마대사님은 옛날 인도 향지국 사람으로 부처님 이래 법을 전수받은 28대 조사 이시며 중국 선종의 1대 조사 이시지요.
달마도 의 대사님 존상은 한마디로 좀 못생기셨습니다
그러나 원래 대사님은 인도 향지국 왕자로서 아주 잘 생기셨고 인물이 뛰어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달마도는 왜 못생긴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요.

달마대사님 이 중국으로 법을 전하러 가는 길에 어느 동네를 지나가는데 코를 틀어 막아야 할 만큼 고약한 냄새가 나더랍니다.
그 냄새때문에 동네에 사람이 살지 못 하였다네요.
스님은 이 냄새가 어디서 나는지 알고 싶어 찾아 가 보니 어마어마하게 큰 이무기가 죽어서 썩어 냄새가 나는거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이무기를 치우기로 하였습니다.
스님은 유체 이탈을 하여 본인의 육신을 벗어놓고 영 을 이무기로 옮겨 이무기를 움직였답니다.
그 이무기를 큰 강으로 끌고가 강물에 떠내려 보내고 자기 육신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잘 생긴 본인의 육신은 온데 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아주 못 생긴 사람의 몸뚱이가 있더랍니다.
스님은 할 수 없이 그 못생긴 육신에 자기 영을 담아서가던 길 을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는 곳 마을 마다 스님을 보면 사람들이 화를 내고 문전박대를 하는 거 였습니다.
스님은 왜 마을 사람들이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보니
당신이 여지껏 우리한테 한짓을 몰라서 그러느냐고 화를 내는 거였습니다.
스님은 이러저러 묻고 물어 못생긴 몸 의 원래 주인이 어느 깊은 산 동굴 속에서 도를 닦는 사람이라는거를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그곳을 물어 물어 찾아갔더니 그곳에는 많은 도인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스님의 몸을 가지고 있어 스님께서는 왜 내 몸을 가져 왔냐고 따져 물었답니다.

그 도인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못생기고 우락부락한 모습때문에 가는 마을 마다 사람들이 흉을보고 욕도 하며 심지어 돌팔매질도 하더랍니다. 그래서 본인도 마을 사람들에게 행패를 많이 부롔답니다. 그러다 며칠전 길을 가는데 아주 잘 생긴 육신이 길에 누워 있길래 못 생긴 자기 몸을 벗어놓고 잘생긴 몸을 기지고 왔다고 하는거 였습니다.

도인의 말을 다 들은 달마대사님은 그 도인을 가엾게 생각하여 영원히 몸을 바꿔서 살기로 하였답니다.
그려서 지금의 못 생긴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잔해 내려온답니다.

 

 

♠포대화상 이야기♠

 

우리나라에는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에서는 미륵보살의 화현이라고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섬겨지고 있다.

포대화상은 중국 당나라 명주 봉화현 사람으로 법명은 차(此)이다. 호는 장정자라 했고 악림사에서 출가했다.

뚱뚱한 몸집에 얼굴은 항상 웃는 모습이었으며, 배는 풍선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둘러메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포대화상이라고 불렀다.

그 자루 속에다 장난감, 과자, 엿 등을 가득히 넣고는 마을을 돌면서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포대화상은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아먹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고, 구름을 이불삼고 어느 곳에서든지 벌렁 누워 태평하게 코를 골며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 며서 세속 사람들과 같이 차별 없이 어울리면서 길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자고 깨었으며 자연과 더불어 행하였고 대자연으로 돌아간 걸림 없는 대자유인이었다.

연꽃과 같은 삶이었다. 사방을 걸림 없이 다니며, 천지를 내집삼아 살던 포대화상은 때때로 길흉을 예언하였는데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어도 스님이 나막신을 꺼내 신고 나타나면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一笑空中色是空, 如斯之謂空乎色, 是色是空設不窮, 相俱无眼界中

(일소공중색시공, 여사지위공호색, 시색시공설불궁, 상구무안계중)

 

一 笑 空 中 色 是 空,(일소 공 중 색 시공) = 한번 웃음에 공 가운데 색이 공이라

如 斯 之 謂 空 乎 色,(여사 지위 공 호색) = 다만 이 공을 이르러 색이라 하니

是 色 是 空 設 不 窮,(시색 시공 설불 궁) = 색과 공을 설함에 끝이 없다.

相 俱 无 眼 界 中,(상구무안계중) =

 

그리고 장마철이라 비가 계속 내리다가 스님이 짚신을 신고 다니면 비가 그치고 날이 개이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복장을 보고 날씨의 변화를 알아채곤 했다. 그는 약간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지만 사람과 어울려 길흉화복에 대해 곧잘 얘기를 했는데

아주 신통했다.

 

한 사람이 포대화상에게 물었다. “스님! 우리는 스님이 매우 높은 깨달음에 도달하신 훌륭한 스님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장난스런운 행동은 저희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하여 귀중한 시간을 아이들과 노는 데만 허비하고 계십니까?

정말 스님께서 선에 통달하셨다면 저희들에게 선의 진수를 보여주십시오.”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대화상은 자신의 포대를 땅바닥에 ‘쿵’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는 이렇게 말했다.“이것이다.

이것이 선의 진수이다.!”

그들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포대화상은 이렇게 들려주었다.

“이것이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전부이다. 내가 짐을 내려놓았듯이 그대들도 자신의 짐을 벗도록 하라.”

 

그러자 그들이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그는 아무말없이 포대를 후다닥 걸머지고는 발길을 내디디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바로 그 다음일이다. 그러나 나는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 짐을 나의 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제 나에게 이 세상의 모든

짐들은 단지 어린이들을 위한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하였다. 짓굿은 아이들이 막대기로 번갈아가며 때리기도 하였으나 그는 웃음으로 받아넘기고, 아이들과

실랑이질하기도 하며 바보짓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상견(相見), 사견(邪見)을 가진 일반인들을 제도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

 

포대화상은 다음 네 편의 게송을 남겼다.

 

일 발 천 가 반(一 鉢 千 家 飯) = 발우 하나로 천집의 밥을 먹고

고 신 만 리 유(孤 身 萬 里 遊) = 외로운 몸 만리에 노닌다.

청 목 관 인 소(靑 目 觀 人 少) = 푸른 눈은 사람을 보는 일 없고

문 로 백 운 두(問 路 白 雲 頭) = 길을 물으니 백운의 끝이더라.

00자 재 무 소 위(00自 在 無 所 爲) = 늠름하고 자재하여 하는 일 없으니,

한한 구경 출가 아(閑閑 究竟 出家 兒) = 한가롭고 한가로와 출가한 장부일세.

약관목전진대도(若 觀 目 前 眞 大道) = 눈앞에 참된 도를 본다하여도.

불 견0야대호기(不 見0也 大 毫 奇) = 티끌만큼도 기이하게 여기지 않의.

 

아 유 일 포 대(我 有 一 布 袋) = 나에게 한 포대가 있으니,

허 공 무 괘 애(虛 空 無 罫 碍) = 허공에 걸림이 없어라

전 개 0 우 주(展 開 0 宇 宙) = 열어 펴면 우주에 두루하고,

입 시 관 자 재(入 時 觀 自 在) = 오므리면 관자재로다.

 

미륵 진 미륵(彌勒 眞 彌勒) = 미륵 참 미륵이여,

분신 천백억(分身 千百 億) = 천 백억의 몸으로 나누어,

시시시시인(時時 示 時 人) = 때때로 시속 사람들에게 보이나

시 인 자 불 식(時 人 自 不 識) = 세속사람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더라.

 

포대화상은 네 번째의 게송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산속 큰 바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자연인답게 입적하시니, 수많은 사람들과 들짐승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포대화상을 미륵불의 화현으로 모시며 현재도 중국 악림사 동당에는 포대화상의 전신이 그대로 모셔져 있어서 깨어날 때를 기다린다고 한다.

또한 악림사 입구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석상이 앉은 모습으로 웃고 있고, 석상 밑 글귀에는 천하의 품기 어려운 일도 다포용할 수 있고, 웃는 그 얼굴은 세상

의 어리석은 일들을 너그러운 웃음으로 받아들이다. 라고 적혀있다.

=요약= 

중국의 승려인데 이름은 계자이고 명주 봉화현 사람 몸집이 뚱뚱하고 이마는 늘 찡그려 깊은 주름이 잡혀 있고 커다란 배는 늘어져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언제나 지팡이에 큰 자루를 지니고 다녔는데 필요한 소지품은 모두 그 자루 속에 넣고 다녔다 날씨 예측이나 길흉회복을 잘 예언 했고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다 바루대 하나로 천 집의 밥을 얻어먹으며 외로운 이 몸 만리 길을 떠다니네 맑은 날에도 사람 만나기 어렵고 길을 묻는 사이 머리에는

백발이 내렸네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고 서기 916년 3월 명주 악림사 행랑 밑 반석에 단정히 앉아서 입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