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북도 = 心 산사 길없는길

곡성 태안사(泰安寺) = 2

백련암 2013. 10. 30. 22:12

 

태안사는 통일신라말기 9산선문의 하나로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 세 스님에 의해서 절이 개창되었다.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 광자대사(廣慈大師), 윤다(允多)때 대사찰로 발전하였다.

 

풍수지리사상의 원조인 도선국사도 태안사에서 혜철스님헤게서 배웠다.

신라시대에는 대안사(大安寺)라 칭하였고 조선 후기에 태안사(泰安寺)로 불렸다.

 

태안사를 품고 있는 동리산(桐裏山 271m)은 봉황이 먹고 산다는 오동나무 열매가 열린 숲속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태안사의 말사였던 송광사(松廣寺)가 독립하였고 조선시대 억불정책(抑佛政策) 따라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쇠락하였으며 한국전쟁(6.25전란)으로 대웅전(大雄展)이 불타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경내는 적인선사 조륜청정탑 보물 제 273호, 광자대사탑과 탑비 보물 제 274호, 대바라 보물 제 956호,

천순명동종(天順銘銅鐘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24호), 능파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82호, 일주문 전남유형문화재 제 83호, 와 

고려후기의 삼층석탑 문화재 자료 제 170호 등 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삼성각(三聖閣)

산신도를 그려 놓았고 오른편에는 칠성탱화가 조성되어 만들어져 있으며, 왼편에는 독성탱화가 그려져 걸려있다.

 

 칠원성군(칠성단)

 

 독성단(나반존자)

 

산신단(산왕대신)

 

 

 범종각(梵鐘閣)

현재 태안사에는 사물을 완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 절 안에 보물로 지정된 범종이 있으나 그 크기가 작아 따로 범종각을 만들지는

않았으며 운판이나 법고 또한 사찰 내에 존재하지 않고 있다.  오직 목어만이 보제루 한쪽에 걸려있다.

 

 

 

범종루 옆면 

 

 

 

 

삼층석탑(三層石塔)

일주문 왼쪽에 넓게 연못을 만들고 그 중앙에 배치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원래는 광자대사 부도 옆에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새롭게 조성했다고 한다.

원래는 기단의 한쪽 면과 탑신의 1층 옥개석과 2, 3층의 탑신 부위가 없어진 상태였다고 하는데

(돌의 재질로 보아 3층 옥개석이 신재인 것으로 생각되며, 2, 3층 탑신 또한 원래 이 탑에 사용되던 부재로 생각된다),

이곳으로 옮기면서 새로이 복원하여 만들었다 한다.

현재 부도밭에는 석탑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옥개석을 하나 볼 수 있는데,

이 부재가 혹시 이 석탑에 사용되었던 부재가 아닌가 추정된다.

 

기단 아래에는 원래 탑에 사용되지 않았던 방형의 지대석을 3단 놓아 원래 탑에 비해 높이가 높아졌다.

기단은 가구식 기단을 사용하고 있다. 탑신도 역시 네면 각 모서리에 기둥형태를 조각해 두었다.

2층 옥개석은 많은 부분이 깨져 있으며 각층의 탑신석도 많은 부분이 깨져있다.

3층 옥개석과 상륜 부위는 신재로 교체해 복원한 듯 돌의 재질이 달랐다. 다만 상륜부 중 노반은 원래 탑의 부재로 생각된다.

이 탑은 기단과 옥개석의 양식으로 보아 신라양식을 계승한 고려초의 탑으로 추정되는데, 전체적으로 안정된 체감을 갖고 있다.

 

 

 23년 전 불교에 처음 입문하고 왔을때 보았던 사리탑!  그  탑이 아니네요 저의 마음이 잘못된것이겠죠 그 탑이 보고싶고 그리워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만큼...!1

 

 

 

 

 

 초전법륜(初轉法輪)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얻은 뒤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다섯 명의 비구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한것을 가리킴

부처님이 설법하는 것을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것이라고 하는 말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처음 다섯비구를 위하여 처음으로 법을 설하신것이 초전법륜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으신 후(成道) 바로 법을 설하시지 않으시고 49일간의 법열(法렬悅)에 들어 계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대중에게 법을 설하신것은 예전에 부처님과 함께 수행했던 오비구들이였습니다.

고행만으로 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안 싯다르타는 고행을 포기하고 동료들을 떠났습니다.

실망한 동료들은 변해버린 그를 변절자라고 욕을 하며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고 제일 먼저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자 누구라고 할것없이 오 비구들은 무릎을 끓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녹야원에서 이들 다섯비구들 앞에서 처음으로 법륜을 펴시게 되었습니다.

 

점성가제도(占星家濟度)

 

 귀자모신(鬼子母神)

귀자모신(鬼子母神)이란 = 출산(出産)과 유아양육(乳兒養育)을 맡은 神이다.

 

이 神은 一千명의 자식을 낳았다. 그 중에서 맨 마지막에 낳은 애노(愛奴)를 가장 애지중지하였다.

그럼에도 이 神은 남의 아이를 잡아먹는 공포의 대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로 놔 둘 수가 없어서 어느 날 애노를 데려와서 숨겼다. 그러자 이 神은 애가 달아서 백방으로 찾아다녔다.

그러나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낙담과 상심(傷心)이 이만저만이 아닌 채 7일을 넘기자

자신도 모르게 부처님이 설법하는 곳에 끼어들게 되었다.

그리고 설법을 듣고 자신으로 인해 다른 부모들이 얼마나 해통해 했을까를 깨닫고 그동안 에

저지른 죄악을 반성하였다고 한다.

이 귀신은 앞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기로 맹세를 하자 부처님은 자식을 돌려주었다. 크게 뉘우친 귀자모신은 자식을 돌려받은 기쁨에

앞으로는 善한 일만하겠다고 결심하고 불교에 귀의 했답니다.

 

그럼에도 이 귀신의 자식들 일천명은 반씩 갈렸다 5백 명은 천상계(天上界)에 들었지만 5백명은 인간계(人間界)에서 여전히 황당한

광기를 저질렀다. 그러나 나중에는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 모두가 선신이 되었다고 한다.

 

 난타제도(難陀濟度)

난타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배다른 동생이다.

즉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정반왕의 아들이지만 부처님은 마야부인을 어머니로 하고 난타는 마하파자파티 부인을 어머니로 하였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고국인 카필라에 돌아왔을 때 마침 난타에게는 세 가지 경사스러운 일이 겹쳐 있었다.

그것은 새 궁전이 완성되어 그곳으로 들어가는것, 신부를 맞아 결혼식을 올리는 것, 그리고 카필라국의 태자로 책립된다는 것등의 

 일이었다. 특히 새로 맞이하는 신부는 나라에서 제일가는 미녀로 이름을 순다리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우되는 난타를 제도(濟度)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성 안에 들어가 난타의 집으로 가셨다.

난타가 나와서 보니 부처님께서는 걸식을 하러 와서 빈 바루를 들고 서 계셨다.

그래서 바루를 받아 음식을 담아 부처님께 드리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받지 않고 되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난타는 하는 수 없어 어디선가 바루를 건네줄 생각으로 뒤를 따라 가다가 마침내 니그로다 정사에까지 오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의자에 앉게하고 “착하다, 비구여! ” 하고 말씀하시자 저절로 머리가 깎이고 몸에는 가사가 입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타의 생각은 집에 두고 온 부인의 모습이 생각나서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이 언제나 그를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탈주의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그는 정사의 당번을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낮시간에 부처님과 비구들이 걸식하기 위하여 밖에 나가면 한사람은 남아서 당번을 서는 것이다.

그는 드디어 탈주의 기회가 왔다 생각하고 부처님이 다니시는 큰 길을 피해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아시고 오솔길 맞은 편에서 오고 계셨다. 부처님께서는 가까이 다가가서 자비스럽게 말씀하셨다.

 

“난타 ! 너는 아직까지도 집에 두고 온 부인 생각만을 하고 있구나.”   “예, 그렇습니다. 부처님 ”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데리고 히말라야 깊은 산으로 가셨다. 그 산 속에는 한 마리의 늙은 원숭이가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원숭이를 가리키며 "부인은 미인이라는데 이 눈 먼 원숭이와 비기면 어떠냐" 

“제 아내 순다라는 미인으로서는 인간 중에서도 겨룰 자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녀를 눈먼 원숭이 따위와 비교하십니까?"

 

그 다음 부처님께서는 난타를 데리고 천상계 (天上界)에 올라가 천상의 궁전을 구경시켰다.

궁전 속에는 500명이나 되는  아름다운 천녀가 미묘한 악기를 울리며 누구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궁금해진 난타가 천녀들에게 물었다. “누구를 맞이하기 위해 그토록 준비를 하십니까?”

“염부제라는 나라에 부처님의 동생으로 난타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고 수행한 공덕으로 다음 생에

이곳에 출생하여 저희들의 천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그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난타는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 난타라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이대로 여기서 살게 해 주십시요.”

“안됩니다. 우리들은 천녀입니다만 당신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일생을 마치고 와 주셔요.”

난타도 이에는 답할 말이 없어 그대로 부처님에게 돌아와서 천녀들에게 들은 것을 부처님에게 이야기 하였다.

 

“네 아내는 미인이라고 하지만 그 천녀들과 비교하면 어떻냐.”

“제 아내와 천녀의 차이는 늙은 원숭이와 제 아내의 차이와 같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난타를 데리고 염부제로 돌아왔는데 그 이래 난타의 수행은 비상한 것이었다.

 

그 후 부처님께서는 다시 난타를 데라고 지옥을 구경하였다.

지옥에는 큰 가마솥이 여러개 있고 그중의 솥 하나는 펄펄 끓는 데도 옥졸들은 계속 나무를 집어넣고 있는 것이었다.

난타는 옥졸들에게 물어 보았다.

“여보시오 다른 가마엔 모두 죄인이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인데, 이 가마는 계속 끓이고 있으니 어떤 까닭입니까?”

“염부제에 부처님의 동생으로 난타란 자가 있지요. 그는 출가했으니 다음 생에는 천상에 태어나겠지만 천상의 수명이 다 하면

다시 이 지옥에 떨어지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가마솥을 끓이며 기다리고 있소이다.” 

난타는 두려워 떨면서 부처님께 다가와서 어서 염부제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너는 천상의 세계에 태어나고 싶어서 계율을 지키고 정진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저는 천상에 살고 싶지 않읍니다. 제발 지옥에만 떨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렇게 해서 더욱 수행에 전념하게 된 난타는 17일 만에 아라한과를 성취하였다.

 

무연중생제도불가(無緣衆生濟度不可) =

인연없는 중생은 제도하기 어렵다.

연이없는 중생, 전세에 불 · 보살에게 인연을 맺은 일이 없는 중생, 부처님이나  보살도 인연이 없는 중생은 제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앙굴마라제도( 鴦崛摩羅濟度)

부처님 시대 유명한 악인 중 앙구리말라(손가락목걸리 란 뜻)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원래 한 외도에 입문하여 열심히 수행한 결과 스승의 총애를 받는 수행자였으나  스승의 젊은 사모님이 그를 좋아하여

그를 꾀었으나 넘어가지 않자 사모님이 스승에게 그가 나를 겁탈하려 하였다고 거짓으로 고하자 스승은 연적을 골탕먹이려고  

최후의 수행법을 일러준다며 백개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니라는 명령을 내렸다.

 

어리석게도 그것을 그대로 믿은 앙굴리말라는 99개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마지막 하나의 손가락을 구하기 위해 가다가 발견한 사람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잡으려고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서라고 소리치자 부처님은 '나는 여기 이렇게 멈춰 서 있으니 헐떡이는 네 마음이나 쉬어라'고 하였다.

헐떡이는 마음을 쉬라는 말씀을 들은 그는 번개를 맞은 듯 멍하였다가 꿈에서 깨어났고

부처님은 그를 거둬 기원정사로 데리고 가서 제자로 삼았다.

 

살인마가 사문이 되었다는 소문은 곧 퍼졌고 마을로 탁발을 하러 갈때 같이한 앙굴리말라에게 분노한 사람들은 돌을 던졌고,

심약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어느 부인은 아기를 낳기 위해 산실에 들었다가 그가 탁발을 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서 아기를 낳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스로 지은 잘못의 과보를 확인한 그는 땅을 치며 슬피 울다가 부처님께로 돌아가 도저히 승려생활을 할 수없으니

차라리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그때 부처님께서 '앙굴리말라야, 그 가족들에게 말해라.

태어난 이래 산목숨을 죽인 일이 없다고, 이 말이 사실이라면 산모는 편안히 해산할 것이라고.'라고 말씀하였다.

 

부처님 말씀의 의미는 진리를 모르던 시절에 한 잘못은 용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용기를 얻어 산모를 편하게 해주었음을 물론이다.

그러나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를 만난 이들이 돌과 몽둥이를 가지고 때리자 피투성이가 되어

기원정사로 돌아와 상처 속에 웃는 얼굴로 부처님께 아뢰었다.

'소나 말을 다루려면 채찍을 쓰고 코끼리를 길들이려면 갈고리를 씁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채찍도 갈고리도 쓰지 않고 흉악한 제 마음을 다스려 주셨습니다.

이제 참는 마음을 닦아 다시는 성내지도 다투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서운 살인마에서 훌륭한 스님이 되었던 앙굴리라마,

지금도 인도에 가면 사위성에서 멀지 않는 곳에 앙굴리말라가 살던 동굴이 있어 관광코스에 들어 간다 한다.

 

 

다문제일 아난타존자(多聞第一阿難陀尊者)

부처님이 열반에 든 뒤 제자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여 후세에 전할 방법과 부처님 열반 후의 교단 운영

문제 등을 상의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가섭존자 등을 비롯하여 499명의 아라한의 지위에 오른 비구들이 선출되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비구들이 말하였다.

"아난은 25년간이나 부처님을 모신 사람으로 설법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하고 있을 터인데

아난을 결집 회의에 넣는 것이 옳은 듯 합니다."

하지만 가섭존자는 이를 반대하였다. "안됩니다.

아난은 비록 많이 듣기는 하였으나 道를 깨치지 못하여 아직도 애욕에 빠지고 화를 쉬이 내는 등의 번뇌가 남아 있기에 곤란합니다."

이말은 들은 아난은 크게 분발하여 홀로 절벽 끝에 서서 합장한 채로 발꿈치를 들고

"도를 깨치지 못하면 이 자리에서 떨어져 죽고 말리라." 고 다짐하였다.

이렇게 7일간 용맹 정진한 결과 드디어 道를 깨달아서 아라한이 되었다. 그래서 제 1결집에 참석하게 되었다.

 

 

 금0 조제어(金 0鳥制御)

 

관음세지 전생서원(觀音勢至前生誓願 )

 

 

 빈여 일등(貧女一燈)

가난한 사람이 밝힌 등불 하나 라는 뜻으로 가난속에서 보인 성의가 부귀한 사람들의 많은 보시보다 가치있다는 것으로

정성의 소중함을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사위국의 한 정사에 머물 때의 일이다.  그 마을에 난타라는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여인이 있었다.

그는 많은 사람이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공양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했다.

이튼날 온종일 다니며 구걸한 끝에 한 푼을 얻어 기름을 샀다. 그녀의 한 푼어치의 기름으로 등을 만들어 부처님께 공양을 바쳤다.

저녁이 되어 별안간 바람이 휘몰아치며 모든 등불이 꺼져 버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일하게 그녀가 바친 등은 다른 모든 등불이 꺼진 뒤에도 홀로 빛나고 있었으며 바람에도 꺼지지 않았다.

 

동자공양(童子供養) = 모래 공양을 올린 소년 (아쇼카 왕의 전생이야기)   

부처님께서 아난존자와 함께 성안으로 탁발하러 가시는 길에 소꿉 장난을 하는 아이들을 만나셨다. 

 아이들은 모래와 흙으로 집과 창고를 만들고 또 신발에다 모래를 담아 밥이라고 하며 놀고 있었다.

그 아이들 중에 키가 작은 아이 하나가 부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부처님께 무엇이든지 공양을 올리면

큰 복을 받는다고 하던데 이렇게 생각한 아이는 신발에 밥이라며 담아 놓은 모래를 동생을 엎드리게하고는

그 위에 올라가 부처님께 정성스레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모래 밥을 받으시고는 빙그레 웃으시며 아난에게 건네 주셨다.

 이 모래를 가지고 가서 내 방의 허물어진 곳에 바르도록 하여라  정사로 돌아온 아난이 말씀대로 방의 허물어진 곳에 바르고 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린 두 아이가 환희심으로 모래를 보시하였으니 그 공덕으로 다음에는 국왕이 되어 삼보를 받들고 여래를 위하여

팔만사천 보탑을 세울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찌 한 줌의 흙의 공덕으로 그와 같이 큰 공덕을 성취할수 있습니까 ? ”  

과거에 한 국왕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니 임금과 신하들이 모두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법을 청하여 들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왕은 마음의 문이 열리고 깨닫는 바가 참으로 많았다 왕은 이 기쁜 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부처님의 형상을 팔만사천 장을 그려 보시하였으며 그 공덕으로 팔만 사천의 탑을 건립할 수가 있는 괴보를 얻을수 있었다

그 국왕이 바로 오늘 모래를 공양한 소년이다.

 

 부모사중(父母思重) 

어버이 살아계실제 섬기기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닮다 어리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 뿐이가 아노라.

 

1. 懷耽守護恩(회탐수호은) = 나를 잉태하시고 지켜 주신 은혜

2. 臨産受苦恩(임산수고은) = 출산의 고통을 감내한 은혜

3. 生子忘憂恩(생자망우은) =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신 은혜

4. 嚥苦土甘恩(연고토감은) = 쓴것을 삼키고 단것을 뱉아 먹여준 은혜

5. 廻乾就濕恩(회건취습은) =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신 은혜

6. 乳哺養育恩(유포양육은) = 젖먹이고 사랑으로 길러 주시는 은혜

7. 洗濯不淨恩(세탁부정은) = 손발이 다 닳도록 목욕과 세탁 더러움을 씻어 주시는 은혜

8. 遠行憶念恩(원행억념은) = 먼 길 떠날 때 근심 걱정하시는 은혜

9. 爲浩惡業恩(위호악업은) = 자식을 위해서는 모진 일까지 서슴치 않는 은혜

10. 究竟憐愍銀(구경연민은) =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

 

염화의 미소(拈花의 微笑) = 꽃을 들자 미소 짓다.

 

부처님이 왕사성 근처 영취산에서 설법하시기 위해 모습을 보이셨다. 대중들은 평소처럼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데

 

부처님은 아무말도 없이 옆에 있는 연꽃 한 송이 만을 들어 보였습니다. 

이 때 대중들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쳐다보기만 하는데 마하가섭만 그 뜻을 알아치리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부처님은 가섭의 미소를 보고 "나의 정법안장,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등은 교리 밖에 따로 전해지는 것인데

이것을 가섭에게 부촉한다." 하셨습니다.

 

 

 계족선정(鷄足禪定)

 

 쌍사자 석등

 

 돌무덤

 

우정 이중근거사 공덕비(宇庭 李重根居士 功德碑)

 

 

 

고려후기의 삼층석탑 문화재 자료 제 17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