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가 있는 그곳

꽃의 소묘(素描)

백련암 2014. 1. 3. 15:39

 

꽃의 소묘(素描)

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희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화분(花紛)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천(阡)의 눈이여, 阡= 두렁 천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은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신부(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간(肝)을
쪼아 먹는다.


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나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


김 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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