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이야기=고려외

국립중앙박물관 = 사라함속 부처, 사리함과 내용물, 공양탑, 칠지도, 무구정광대다라니

백련암 2014. 3. 27. 21:28

 

사리함(舍利函) 안에 넣었던 금동 불 입상(金銅佛立像)

 

 

사리함(舍利函) 안에 넣었던 금동 불 입상(金銅佛立像)

 

 

사리함(舍利函) 안에 넣었던 금동 불 입상(金銅佛立像)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갖춤(羅原里 五層石塔 舍利 具) : 통일신라(統一新羅) 8세기   출토지 = 경북 경주(慶北 慶州)

 

이 사리갖춤은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인 나오리 오층 석탑(국보 39호)에서 1996년에 출토되었다.

금동 사각 외함의 네 면에 각각의 방위를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사리함 안에는 금동제 구층소탑과 여래입상, 그리고

『무구정광대다리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종이조각이 있었으며, 사리는 여래입상의 대좌(臺座) 아래 안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리갖춤은 통일신라 초기의 대표적인 석탑인 나오리 오층 석탑(국보 39호) 사리함 안에는 금동제 3층소탑이다.

 

 

무구정광대 다라니 경

 

현존하는 섹계 최고의 목판 인쇄본으로, 1966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을 보수할 때 여려 가지 사리장엄구와 더불어 발견되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석탑에서 다수 발견되는 작은 탑과 관련이 있으며, 사리신앙에 영향을 주고 있다.

8세기 중엽 무렵에 만든 것이며 당나라 측전무후가 집권하고 있을 때 만들어 사용했던 무주제자(武周制字)도 나타나고 있어 이채롭다.

통일신라 불교문화의 우수성과 한국 인쇄 문화의 높은 수준을 증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拓境立碑圖[척경입비도]  : 시대 : 조선 17 - 18세기,  소재지 =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복제품

여진을 정벌하여 얻은 땅에 비(碑)를 세우는 장면을 그린 그림

 

조선 후기에 제작된『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拓境立碑圖[척경입비도]』이다.

이 그림은 고려 예종 2년(1107년)에 윤관(?~1111년)과 오연총(1055년 ~ 1116년)이 지금의 함경도 일대의 여진족을 정벌한 뒤

길주 · 공험진 등 9성을 쌓고 선춘령에 "高麗之境[고려지경]" 이라고 새긴 비를 세워 경계를 삼은 일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여진의 집요한 반환 요청과 잦은 공격으로 9성을 지키기 어렵게 되자 결국 돌려주고 말았다.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은 고려부터 조선 선조 대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무공을 세운 인물들의 행적을 모아 엮은 그림첩이다.

 

 

紺紙金泥妙法蓮華經 券第 七 (감지금니 묘법연화경 권 제7) : 보물 제 1138호,  시대 : 고려 공민왕 15년(1366년)

기존 사경을 약간 보충한 사경

 

전농 직장 권도남 등이 죽은 아버지와 선조들의 명복을 빌며 공민황 15년(1366년)에 봉정사에 봉안한 사경이다.

『묘법연화경』을 감색 종이에 금니로 베껴 썼는데, 끝부분과 사성기(寫成記)에 비해 본문 앞부분은 상대적으로 금니 빛깔이 바래고

글씨 획의 일부가 희미하다.  기존 사경의 본문 뒷부분을 보충하고 자신들의 사성기를 써서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전농 직장 = 국가 대제에 쓸 곡식을 관장하던 전농시의 하급 관원(정 7품 또는 종 7품)

 

 

 

 

 

小字本 佛頂心觀世音菩薩 大陀羅尼經 合刻本(소자본 불정심관세음보살 대 다라니경 합각본) : 보물 제 691호

시대 : 고려 희종 2년(1206년)~ 고종 6년(1219년)   일명 =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충헌 가족을 위한 호신용 경전과 경갑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1149년~1219년)과 그 두 아들 최우 · 최향을 위해 만든 휴대용 불경과 경갑이다. 

최승헌 부자가 자신들의 호신과 재난 예방을 위해 사가판(私家版)으로 간행한 불경으로 맨 끝에 발원문이 있다.

은 바탕에 금을 입힌 경갑에 넣어 끈으로 매어 차고 다니도록 하였다.

한편 불경의 인쇄 시기를 14세기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 경전 끝부분의 발원기=

特爲晉康侯 崔 兼□ 男□內侍將軍瑀  殿中內給事珦  厄難頓消福壽無疆之願

(특위진강후 최 겸□ 남□내시장군우  전중내급사향  액난돈소복수무강지원)

특별히 진강후 최[최충헌]와 □남 내시장군 우[최우], 전중내급사 향[최향]이 복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기를 빌며.

 

 

小字本 佛頂心觀世音菩薩 大陀羅尼經 合刻本(소자본 불정심관세음보살 대 다라니경 합각본) : 보물 제 691호

시대 : 고려 희종 2년(1206년)~ 고종 6년(1219년)   일명 =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충헌 가족을 위한 호신용 경전과 경갑

 

= 경전 끝부분의 발원기=

特爲晉康侯 崔 兼□ 男□內侍將軍瑀  殿中內給事珦  厄難頓消福壽無疆之願

(특위진강후 최 겸□ 남□내시장군우  전중내급사향  액난돈소복수무강지원)

특별히 진강후 최[최충헌]와 □남 내시장군 우[최우], 전중내급사 향[최향]이 복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기를 빌며.

 

 

순천 송광사

 

감은사지동 삼층석탑 금동 전각형 사리기(感恩寺址 東三層 石塔 舍利內函) : 통일신라(統一新羅) 682년 경  寶物 제 1359호

 

감은사지동 삼층석탑 금동 전각형 사리기(感恩寺址 東三層 石塔 舍利內函) : 통일신라(統一新羅) 682년 경  寶物 제 1359호

출토지 =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양북면(陽北面) 감은사지(感恩寺址) 동삼층석탑(東三層石塔)

 

방형의 기단 위에 죽절형 기둥 4개가 화려하게 장식된 천개를 받치고 있는 전각형의 구조. 

기단부는 眼象을 8개 투조하고 공양보살 4구와 신장 4구를 좌우에 배치. 기단 위에 중앙에 舍利甁座를 두고 주위에 四天王과 僧像을 돌림.

대좌와 바닥판은 분리. 바닥면의 가운데 부분은 결실. 천개 등 전체적으로 결실된 부분이 많음.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東三層石塔 舍利具) : 통일신라(統一新羅) 682년 경  寶物 제 1359호.  일명 =  금동 전각형사리기

출토지 =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양북면(陽北面) 감은사지(感恩寺址) 동삼층석탑(東三層石塔)

 

감은사感恩寺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682년경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이다.

지금은 동서 삼층석탑과 건물터만이 남아 있다. 이 사리갖춤은 1996년 동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했을 때 3층 탑신석 윗면의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다.

 

사리갖춤은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탑 안에 넣을 때 담았던 여러 겹의 용기 세트를 말한다.

감은사 동탑의 사리갖춤은 전각(殿閣) 모양 사리기를 상자 모양 사리외함 안에 넣어 중첩시켰다.

 

또한 사리갖춤 앞에 전시된 수정 사리병은 원래 사리기 중앙에 놓은 후 보주와 연꽃잎으로 장식된 복발9覆鉢) 모양의 뚜껑을 덮어 보이지 않도록 했다.

한편 금도금을 한 사리외함의 네 면에는 안에 넣은 사리기를 지키는 사천왕상 부조가 붙어 있다.

 

부처님의 세상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은 사천왕은 각 방위를 지키고 있는데, 북방 다문천왕은 손에 탑을 들어 방위를 나타낸다.

갑옷을 입은 사천왕의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한 조각 기법이나 사천왕의 자연스러운 자세 등을 볼 때

당시의 금속공예 기술이 매우 우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東三層石塔 舍利具) : 통일신라(統一新羅) 682년 경  寶物 제 1359호.  일명 =  금동 전각형사리기

 

 

   

 

 

감은사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感恩寺址 東三層石塔 舍利具) : 통일신라(統一新羅) 682년 경  寶物 제 1359호.  일명 =  금동 전각형사리기

출토지 =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양북면(陽北面) 감은사지(感恩寺址) 동삼층석탑(東三層石塔)

다양한 모습

 

 

철 칠지도(鐵 七支刀)  : 삼국시대(三國時代) 백제(百濟) 4세기

 

태화 4년 5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백번이나 달구어 두두려 만든 강철로 철지도를 제작하였다.

<이 칼은>여러군대를 물리칠 수있어 우왕에게 주기에 알맞다. □□□□ 가 만들었다.

 

선세이래 미유차도 백제왕세자 기생성음 고위왜왕 지조전 시후세<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濟王世子 奇生성音 故爲倭王 旨造傳 示後世>

이전에 이런 칼이 없었으나 백제 왕세자가 특별히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보이노라

 

 

   

청동 소탑(靑銅小塔)  :  고려(高麗) 13-14세기   일명 = 공양탑(供養塔)

 

    

1. 공양탑                                                                                     2.지장보살의 석장 머리장식

1. 공양탑(供養塔)

이 공양탑은 목탑이나  석탑을 재현한 소형 금속제 탑으로, 사리와 함께 탑에 넣거나 전각  내부에 안치하였던 것으로추정된다.

청동으로 주조(주조)하였으며 문과 창호, 난간과 기둥, 지붕과 마루 등 건축젝 구조를 섬세하게 표현하여 고려시대 당시의 건축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2.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석장 머리장식(金銅錫杖頭)

수행생활을 하는 승려들이 독사나 맹수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휴대했던 석장의 머리 장식 부분이다.

머리 장식에는 둥근 고리를 여러 개 달아 소리를 냈는데, 이 석장에는 현존하는 고리가 없다.

꽃잎처럼 테두리를 두른 다음 가운데에 연꽃 위에 서 있는 보살상을 장식했다.  연꽃 대좌 양쪽으로는 둥근 연봉오리가 뻗어 나가  테두리와 맞닿아 있다.

석장 머리 장식의 가장 윗부분에는 탑이 놓여 있다. 기다란 나무 손잡이는 아랬부분의 원통형 장식 안으로 끼워 넣었는데,

이것을 고정 시키기 위해 뚫었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다.

 

 

청동 소탑(靑銅小塔)  :  고려(高麗) 13-14세기   일명 = 공양탑(供養塔)

 

이 공양탑은 목탑이나  석탑을 재현한 소형 금속제 탑으로, 사리와 함께 탑에 넣거나 전각  내부에 안치하였던 것으로추정된다.

청동으로 주조(鑄造)하였으며 문과 창호, 난간과 기둥, 지붕과 마루 등 건축젝 구조를 섬세하게 표현하여 고려시대 당시의 건축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청동 소탑(靑銅小塔)  :  고려(高麗) 13-14세기   일명 = 공양탑(供養塔)

 

이 공양탑은 목탑이나  석탑을 재현한 소형 금속제 탑으로, 사리와 함께 탑에 넣거나 전각  내부에 안치하였던 것으로추정된다.

청동으로 주조(鑄造)하였으며 문과 창호, 난간과 기둥, 지붕과 마루 등 건축젝 구조를 섬세하게 표현하여 고려시대 당시의 건축 모습을 자세히 보여준다.

 

 

금제 사리탑 · 은제 사리함(金製舍利塔, 銀製舍利函)  : 고려(고려) 14세기. 일명  =  사리탑 · 사리그릇

 

 

금제 사리탑 · 은제 사리함(金製舍利塔, 銀製舍利函)  : 고려(고려) 14세기. 일명  =  사리탑 · 사리그릇

 

 

금제 사리탑 · 은제 사리함(金製舍利塔, 銀製舍利函)  : 고려(고려) 14세기. 일명  =  사리탑 · 사리그릇

 

 

   

청동 금강저(靑銅金剛鈴) : 고려(高麗)    일명 = 금강령(金剛鈴)

 

금강령은 법회에서 의식을 행할 때 흔들어 소리를 내는 도구이다.

손잡이가 금강저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손잡이 끝의 돌출한 부분의 갯수에 따라 독고령(獨鈷鈴), 삼고령(三鈷鈴), 오고령(五鈷鈴)으로 나뉜다.

고려 후기 중국 원과 교류하면서 유입된 라마교의 영향으로 금강령과 같은 밀교법구가 유행하였다.

 

 

    

청동 금강저(靑銅金剛杵) : 고려(高麗)

 

금강저는 고대 인도의 무기에서 유래한 형태로 번뇌를 깨뜨린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밀교법구이다.

제석천(帝釋天)이 지닌 상징물 이기도하다 

고려 후기에 중국 元 과 교류하면서 유입된 라마교의 영향으로 이와 같은 밀교법구가 유행하였다.

양 끝의 뾰족하게 돌출한 부분에 갯 수에 따라 독고저(獨鈷杵), 삼고저(三鈷杵) 오고저(五鈷杵)로 나뉜다.

 

 

나한 = 朝鮮時代 = 이 나한은 엄지와 검지를 맞댄 설법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로, 부처 입멸후에도 이 세상에 남아 신통력으로 스스로의 수명을 연장하며 불법 수호와 중생 제도를 위임 받은자이다.

사찰에서는 나한전<羅漢殿>이나 응진전<應眞殿>등에 모셔져 신앙되고 있다.

이 나한상들은 가부좌를 하고 앉아 수행하는 젊은 승려 모습인데, 한 나한은 엄지와 검지를 맞댄 설법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 다른 나한은 사나운 집승도 항복시키는 신통력을 보여주려는 듯 호랑이를 무릎 위에 안고 있다.

 

 

나한 = 석조나한좌상(石造 羅漢 坐像) : 조선 후기(朝鮮 後期)

 

나한은 불화뿐 아니라 상으로도 제작되었다. 이 소형 나한상은 나한전(羅漢殿· 영산전(靈山殿) 등에 봉안하는

십육나한상 또는 오백나한상의 하나로 추정된다.

여러점을 함께 제작 봉안할 때 유리하도록 몸체는 단순화시키고 머리는 크게 만들었다.

얼굴과 옷은 조각하기 보다는 대부분 그려서 표현하였다.

 

 

목조동자 입상(木造童子立像) : 조선시대(朝鮮時代)  1987년 기증

 

사찰에서 동자는 지장보살이나 나한등 높은 존재의 시중을 드는 역할로 나타난다. 영상에 잠긴 듯 고요한 표정과 늘어뜨린 옷주름이 잘 표현되었다.

 

 

목조 나한은 사나운 집승도 항복시키는 신통력을 보여주려는 듯 호랑이를 무릎 위에 안고 있다. = 호랑이를 안고 있는 나한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