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백제, 그리고 고려가 함께한 고찰인 수덕사.

백련암 2014. 4. 10. 11:03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는 현존하는 백제 고찰의 하나로 창건에 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으나 백제 위덕왕(威德王 554-597年) 재위시에

창건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수덕사는 창건이후 백제의 고승 혜현(惠現)스님이 주석하며 법화경(法華經) 강론을 폈으며, 고려 충렬왕(忠烈王) 34年(1308年)에 대웅전(國寶 49호)이

건립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 와서는 중수기(重修記)에 의하면 중종(中宗) 23年(1528年) 영조(英祖) 27年(1751年)과 46年(1770年), 순조(純祖) 3年(1803年)에

색채보수, 부연과 풍판의 개수등 4차례 보수한 기록이 있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만공스님 대에는 대웅전 전체를 해체보수하였고 이때 포벽에서는 고려 · 조선 양시대에 걸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벽화의 안쪽에서 발견된 고려벽화는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 · 공양화도(供養花圖)  수화도(樹華圖)등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그려진 오불도(五佛圖) 등이 있었지만 유실되고 없으며,

현재는 그 모사본(模寫本)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고 사진자료가 일부 전해지고 있다.

 

현재 대웅전 건물 내부 대들보에 남아있는 금룡도(金龍圖)는 우아한 색채와 생동감있는 필치의 걸작으로 고려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한편 수덕사는 근대 한국불교 선풍(禪風)을 진작시킨 경허 · 만공스님이 주석하시며 한국 불교를 중흥 시킨 도량으로 경내에는 대웅전 · 청련당 · 백련당 ·

조인정사 · 황하정루 · 근역성보관 · 금강문 · 천왕문 · 일주문의 당우를 갖추고 있으며,

대웅전 앞으로는 통일신라말 고려초에 제작된 삼층석탑이 있다.

 

산내에는 정혜사 · 소림초당 · 향운각 · 금선대 · 전월사의 암자와 토굴이 있고, 정혜사에는 능인선원(能仁禪院)이 있으니 경허 · 만공스님의 선맥을 계승하는

선원으로 많은 고승대덕의 출현처이고 작금도 선객들이 줄을 잇는 도량이기도 하다.

또한 덕숭산 서쪽 줄기에는 비구니 제일선원인 견성암이 있으며 김일엽스님이 주석한 환희대와 극락암 선수암의 비구니 암자가 있다.

근래에는 승가대학을 설립운영하고 있으며, 사부중이 철야용맹정진을 하는 등 선풍을 진작하는 총림(叢林)으로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내포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는 수덕사이다. 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580m) 중턱에 널찍이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고려때 지은 대웅전이 건재하고 근세에 들오와서는 경허와 만공 같은 큰스님이 있었다.

수덕사는「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스님이 있던 곳으로 유명해졌다.

 

한창 정열이 넘쳐흐를 때 일엽스님이 쓴 「그대여 웃어주소서」라는 시를 옮겨본다.

 

으스러져라 껴안기던 그대의 몸

숨가쁘게 느껴지던 그대의 입술

이 영역은 이 좁은 내 가슴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런데 나도 모르게

그 고운 모습들을 싸안은 세월이

뒷담을 넘는 것을 창공은 보았다잖아요

 

수덕사 댕우전은 고려충렬왕 34년(1308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고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이를 기준으로하여 건축사가들은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등 고려시대 건축의 양식과 편년을 고찰한다.

 

 

기둥이 4개이니 일주문은 아니고  뭐라고 해야할지...

 

 

수덕사에서 바로본 입구

 

 

이것이 일주문인것 같은데 뭔가가 좀 이상합니다.

 

 

키를 썼네요.  소금받으러 가시남...

 

 덕숭총림(德崇總林) 제 3대 방장(第 三代 方丈) 원담대선사탑(圓潭大禪師塔)

"원담 진성(圓潭 眞性, 1926年~2008年)스님은 경허(鏡虛) 만공(滿空)의 선풍을 계승하여..."

현대의 선농일여(禪農一如)의 기풍을 새롭게 진작한 선지식이다.

 

스님의 속명은 몽술(夢述) 법명은 진성(眞性), 법호는 원담(圓潭)이다. 1926년 전북 옥구에서 부친 김낙관(金洛觀)과 어머니 나채봉(羅采鳳)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씨부인의 꿈에 신승(神僧)이 이름을 지어주었다하여 몽술이라 하였는데,

울지 않던 아이가 화주하러 온 스님의 목탁과 염불 소리를 듣고 그때 부터 울음을 터트리니 심상치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스님은 7세되던 1933년에 벽초(碧超)스님을 은사로(恩師)로 만공(滿空)스님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를 받았고, 1941년에 비구계를 받았다.

만공 선사로부터 전법게(傳法偈)를 받은 후 수덕사를 현재의 덕숭총림으로 지정하여 가람수호와 산중의 화합에 매진하였으며,

납자의 탁마(琢磨)에는 시처를 가리지 않았으니 근대 불조의 혜맥을 잇는 선지식이다.

또한 이러한 선지로 쓰신 일필(逸筆)은 당대최고의 선필(禪筆)로 유명하다.

 

 

수덕여관

=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 先生=   

1996년 11월 30일 충청남도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었다. 이응로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고암(顧庵)·죽사(竹史)이다.

 

김규진(金圭鎭)의 문하생으로 일본의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敎]를 졸업하였다.  

1925년 이후 주로 사군자를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8.15광복 뒤에 단구미술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48년 여러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고, 대한미술인협회에서 상임위원 등을 지내다가 1958년 파리로 가서 정착하였다.  

1963년 살롱 도톤에 출품하면서 유럽 화단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68년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대상을 수상하여 세계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1969년 사면되었다. 대표작에 《콤포지션》 《작품》 등이 있다.

 

수덕여관은 이응로가 1944년에 구입하여 6·25전쟁 때 피난처로 사용한 곳이다. 

이곳에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기도 하였다.

 

수덕여관 앞 바위 조각은 동백림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 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영고성쇠를 문자적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수덕사 수덕여관과 인연 있는 또 한 여인이 있다.

 

축복이나 영광, 면성과는너무도 거리가 먼 쓸쓸하고 조용한 분이다. 수덕여관의 주인 이분은 우리 현대미술사의 화가인

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의 본부인이시다.

고암은 작가적 열정이 대단한 화가였다. 이제까지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고암만큼 다양한 작품세계를 섭렵한 화가도 없고,

고암만큼 방대한 작업량을 보여준 화가도 없으며, 고암만큼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화가도 없다. 그리고 고암만큼 정치적 파란을 겪은 화가도 없다.

 

1957년 고암이 자신의 예술을 국제무대에서 펼쳐볼 의욕으로 독일을 거쳐 빠리로 건너갈 때 그는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여사와 함께 갔다.

들리기엔 오래 전부터 본부인을 버리고 그렇게 살았단다. 버림받은 고암의 본부인은 초가집 수덕여관을 지어 운영하면서 조용히 수절하며 살았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섭섭함이 조금도 얼굴에 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남편이 "동백림공작단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납치되어 옥살이할 때 대전교도소, 전주교도소로 옥바라지한 분은 이 버림받은 본부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교도소에서 나와 이내 빠리로 돌아갔다.

이것을 아름다운 얘기라고 해야  것인가, 슬픈 얘기라 할 것인가,

어쩌면 조선여인의 체념어린 순종을 그분이 마지막으로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예전에 김일엽스님의 사랑이야기와 함께 들은 이야기이며 책에 쓰여있는 이야기이다.

 

 

수덕여관

 

 

 

수덕사 선 미술관

 

수덕사칠층석탑 (修德寺七層石塔)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81호, 새대 = 일제강점기  

이 탑은 1930년 당시 수덕사 주지이신 만공선사께서 대웅전 앞에 건립한 화강석재 7층석탑으로 기단면석 외부로 두드러지게 우주를 표현하고 있는데 면석에는 두께 10㎝ 정도의 사각 테두리가 돌려져 있다. 기단 위에 탑신부의 옥신대신 4개의 정사면채 석채를 주춧돌처럼 놓아 1층의 옥계석을 받치고 있다.

이 탑의 특징은 기단부는 없이 바로 탑신과 옥계석이 놓여 있으며 옥계석은 반전되어 있다. 현재 7층석탑은 황하루 옆으로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

 

수덕사칠층석탑 (修德寺七層石塔)

 

포대화상

 

대해탈장

 

코끼리 상

 

 

 

 

 

수덕사삼층석탑 (修德寺三層石塔)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3호, 고려시대.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안길 79 수덕사

수덕사내의 대웅전 앞에 자리한 고려시대 3층 석탑이다.

형태는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위·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살짝 들려있다. 꼭대기에는는 3층 지붕돌과 한 돌로 만들어진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있고 그 위로

보륜(寶輪:수레바퀴 모양의 머리장식)과 보개(寶蓋:덮개 모양의 머리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있다.

1·2층 지붕돌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각 부분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준다. 통일신라 문무왕 5년(665)에 세웠다고 전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오히려 통일신라 석탑 전성기에 비해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의 수가 줄고,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고 있어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수덕사삼층석탑 (修德寺三層石塔)

 

 

 대웅전(大雄殿) : 국보 제 49호  시대 = 고려 충렬왕 34年(1308年)

 

절에 남겨진 기록에는 백제후기 숭제법사가 처음 짓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다시 고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기록에는 백제 법왕 1년(599년)에 지명법사가 짓고 원효가 다시 고쳤다고도 전한다. 

 

석가모니 삼불상을 모셔 놓은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지은 건물로,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의 하나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대웅전은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삼세불(三世佛) = 아미타불(阿彌陀佛) 左측,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중앙,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右측

수덕사목조삼세불좌상일괄(修德寺木造三世佛坐像一括) : 보물 제 1381호, 시대 = 조선(朝鮮)

 

 

삼세불(三世佛) = 아미타불(阿彌陀佛) 左측,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중앙,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右측

 

 

부도 림

 

부도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