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북도 = 나를 찾아서...

충남 서산 부석사 하루 묵으며 마음을 쉬게 해 주고 푼 곳

백련암 2014. 6. 24. 11:19

 

최근 일본에서 반입된 충남 서산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상은 1370년 전후 서산을 5차례 이상 침탈했던 왜구들이 약탈해

일본 쓰시마섬 관음사에 봉안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불상 관련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7일 서산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금동관음보살상을 당초 봉안됐던

서산 부석사로 돌려줄 것을 촉구하기 위한 학술발표회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문 명예교수는 서산 부석사 관음상 봉안협의회 주관으로 열린 이날 발표회에서 '서산 부석사 관음상의 역사적 의미'라는 제목의 주제발표를 통해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상은 1330년 고려 충선왕 즉위년 즉위일에 부석사 당주로 봉안하기 위해 조성됐다"며

 "1370년 전후 서산을 5차례 이상 침탈했던 왜구들이 약탈해서 일본 쓰시마섬 관음사에 봉안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보살상은 고려 후기 불상과 보살상중 최고 수준의 걸작"이라며 "약탈품이 거의 확실한 만큼 두 사찰이 불교적 인과법으로 합의하는

선에서 원래 봉안장소인 서산 부석사로 귀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허권 한국전통문화대 연구위원은 '문화재 반환의 국제법적 근거 및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 반환 제문제'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일본은 고미술품에 대해 폐쇄적 인식을 가지고 있고, 제도적으로 유럽 국가들에 비해 미술품의 공개, 기증 및 양도상 미비점을 가지고 있다"며

"일본인의 인식 결여, 한국의 감정론 등 두가지에 대한 균형적 감각을 갖고 평등한 관점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가 해결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완섭 서산시장은 "지난해 일본에서 반입된 관세음보살좌상은 본래 서산시 부석사에 모셔졌던 불상인 것으로 밝혀졌다"며

"부석사에 봉안됐던 확실한 근거가 복장기록에 남아 있고, 고려 후기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는 만큼

반드시 제자리로 환수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영 방송통신대 교수가 '고려 말 왜구와 일본소재 고려의 불교문화재', 김형남 변호사가 '문화유산 반환의 전제 조건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각각 주제발표를 했다.

 

이날 학술대회는 반환 논란이 일고 있는 금동관음보살상을 당초 봉안된 곳으로 알려진 서산 부석사로 되돌려줘야 한다는

지역 주민들의 여론에 따라 마련됐다.

서산 부석사 관음상 봉안협의회는 앞으로 불상의 부석사 반환을 촉구하는 궐기대회와 가두 서명운동을 벌일 계획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부도들

 

 

 

 

설법전에 오후의 빛이 아름다운 꽃무늬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예전에 왔을 땐 이 나무판이 어디엔가 서 있었던 것같은데 오늘은 이렇게 설법전 밑에 누워계신다.

극락전 내영도 그림에서 본 모습의 일부같은 생각이 든다. 맞는다면 좌우 보처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있었을 것이다.

 

 

연꽃위에 서 계시는 아미타불

 

 

달리고 싶은 말

 

 

등에다 무엇을 싣고 달려왔을까 경전을 말에다 실었다는 말은 들은적이 없으니...

 

 

 

 

 

 

선원(禪院)

 

 

 

雲居樓(운거루)

 

 

 

 

거루(雲居樓) 내부 여기서 내다보는 앞의 경치가 그만이다. 

 

사자문(獅子門)옆모습

 

 

도비산 다원

텅 비어 있으면 남에게는 아름답고 나에게는 고요합니다. 찾집에 쓰여있는 글귀

 

 

도비산 다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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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도비산 부석사란 현판을 달고있는 일주문은 온통 용이 뱀인지 용인지를 물고 있다.

용의 새끼를 물고있다는 것은 글쎄 풍요와 다산을 이야기하는것인지 모르겠다.

 

 

도비산 부석사라는 일주문 현판이 걸려있다.

 

 

서동철 서울신문 논설위원<금동관음보살>

일본 쓰시마의 관음사에서 도둑이 훔쳐 국내로 들여온 금동관음보살좌상을 당초 조성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절은 충남 서산의 부석사다.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이 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글로 더욱 유명한 경북 영주의 부석사와는 다른 절이다.

하지만 관음사의 문화재 안내판조차 불상의 고향을 영주 부석사로 잘못 표기하고 있을 만큼 혼동하는 사람이 많다.

한자 이름도 같은 두 부석사(부석사)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영주부석사는 676년 의상대사가 신라 문무황의 명을 받아 창건했다.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창건설화는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오는 의상의 뱃길을 선묘라는 낭자가 바다의 용이 되어 보살폈다는 내용이다.

상대적으로 조촐한 서산부석사에도 677년 의상대사 창건설이 전하는데, 청건 설화도 영주 부석사와 같은 선묘 설화라는 것이 흥미롭다.

 

실제로 두 절은 닮은꼴이다. 우선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한다는 아미타부처를 주존으로 모셨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주는 무량수전, 서산은 극락전으로

큰법당의 이름은 다르다. 하지만 무량수전의 주존인 무량수무량광불(無量壽無量光佛)은 극락전의 주존인 아미타부처를 뜻한다.

그러니 무량수전이 극락전이고, 극락전이 무량수전이다. 서산 부석사는 무량수각을 별도로 지었다. 두 절은 전망 좋은 사찰로도 유명하다.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 앞에는 소백산맥 연봉이 바라보이는 안양루가 자리잡았다. 서산 부석사에도 천수만 일대 간척지와 부남호, 그 너머 안면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역시 안양루가 세워졌다.

관음보살이 서산 부석사에서 조성됐다는 사실은 기록으로 확인됐다. 불상 내부에 ‘고려국 서주 부석사 당주 관음’을 주조한 내용을 담은 ‘결연문’이 들어

있었다. 서주(瑞州)는 고려시대 서산의 지명이다. 불상을 조성한 천력 3년은 충선왕 즉위년인 1330년으로, 천력(天曆)은 원나라 문종의 연호이다.

‘당주(堂主) 관음’이라고 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 불상은 높이 50.5㎝ 정도지만, 독립된 법당의 당당한 주존이었다는 뜻이다.

과거 서산 부석사의 큰법당은 극락전이 아니라 관음보살이 주인인 원통전이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서산 부석사에는 ‘충남도지’에 나오는 또 하나의 창건설이 있다. 고려 말의 충신 유금헌이 망국의 한을 품고 은거하다 세상을 떠나자 승려 적감이 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 창건 설화가 좀 더 사실에 근접했다고 보면, 의상대사와 연결시켜 아미타도량으로 만든 것은 절의 역사를 좀 더 빛나게 하겠다는 후대의 노력일 수도 있다. 어쨌든 과거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상의 지위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적어도 외국의 작은 절에 선물로 줄 만큼 미미한 존재는 아니었다. 한·일 관계는 어려워지겠지만, ‘왜구의 약탈설’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日 반입 서산 부석사 불상 1370년 전후 倭(왜놈)가 약탈"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 학술발표회서 주장

(서산=연합뉴스) 유의주 기자 =

 

 

 

불교신문에서...

도비산<島飛山>에 세세생생 영원할 마애부처님 나투시다.

 

마애아미타부처님 봉안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서산 부석사에 마애아미타부처님(마애아미타석불입상)이 조성됐다. 서산 부석사(주지 주경스님)는 오는 8월9일 오전10시

부석사 경내에서 ‘마애아미타부처님 점안법회’를 봉행한다.

이날 점안법회에는 덕숭총림 수덕사방장 설정스님을 비롯해 수덕사주지 지운스님 등 총림 사부대중이 대거 동참할 예정이다.

부석사가 마애부처님을 조성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초 일본에서 불법으로 반입된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부터다.

이 관음보살좌상은 1330년 서산 부석사에서 조성 봉안돼 있다가 왜구들이 약탈해 간 불상으로 대마도 관음사에 소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 들어온 금동관세음보살좌상에 대해 부석사는 현재 ‘불상 반환금지 가처분 신청’ 제기해 놓은 상태다.

 

 

서산 부석사가 올해 조성한 ‘마애아미타부처님’의 자애로운 모습으로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기도처가 되고 있다.

 

왜구들이 약탈해 간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 보며 

 

오래도록 모실 수 있는

 

마애부처님 조성 원력 세워 

 

올해 높이 4.5m 규모로 완공 

 

8월 9일 점안법회 봉행

 

부석사주지 주경스님은 “과거 기록을 보면 부석사에 불 · 보살상이나 성보들이 많이 모셔져 있었는데 제가 주지로 왔을 때는 거의 도난당해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래도록 모실 수 있는 불보살님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서 신도님들과 논의해 마애부처님을 모시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의가 시작된 시점은 지난해 초부터였다. 일반인들은 오래된 불상을 그저 가치있는 문화재 정도로 생각했지만 부석사 신도를 비롯한 불자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인 성보(聖寶)였다. 주지 주경스님은 당시 심정을 불교신문 칼럼을 통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지난 1월말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모셔져 있던 우리 서산 부석사 금동관세음보살님이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급히 뉴스를 검색해보니 문화재 절도범들에 의해 몰래 반입이 되었고 불상은 문화재청에서 보관한다고 하였다.

이 관세음보살상은 1999년 처음 부석사 주지를 맡으면서부터 가슴에 품어왔던 불상이다.

전임 주지스님께서 주지 인수인계 당시에 96년 일본 대마도 관음사에 다녀오신 이야기와 불상을 돌려달라고 했던 경험을 전해주셨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부석사로 모셔 오도록 하라는 간곡한 당부가 있었다.”

 

당시 사건을 계기로 스님은 부석사가 모시고 있던 성보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1932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하여 관보에 게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부석사에는 4점의 불상과 불화, 범종 등 10여점의 성보들이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의 모두 도난 또는

분실되고 몇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부석사에 영원히 모실 수 있는 부처님을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부석사에는 부처님을 조성할 좋은 자연석 바위가 있었고 서쪽방향을 바라보고 있으니 아미타부처님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바위 모양으로 봐서 석불입상이 좋겠다는 의견도 모아졌다. 이렇게 해서 산신각 아래 우측 자연석 바위에 높이 4.5m, 폭 1.5m 규모의 마애아미타부처님을

조성하기로 결정됐다.
주지스님이 먼저 불사금을 내놓고, 사찰 신도들의 십시일반으로 불사금이 모연됐고, 여러 장인들의 작품을 비교해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88석재(구 연화석예)

대표로 있는 김대연(55, 석공예 문화재기능 보유자) 조각가에게 부처님조성 불사를 맡겼다.

 

김대연 조각가는 “마애부처님의 상호는 고풍을 살려 투박하면서도 엄숙하고 자애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며 “자연석에 그대로 조각하는 마애불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균형을 맞추기보다는 불자들에게 친근감 있게 다가가기 위해 몸집을 조금 크게 조성했다”고 밝혔다.

 

도비산 자연석에 아로새겨진 마애아미타부처님은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며 겉은 부드러운 석질을 간직하고 있지만 바위 내부는 강한 석질을 가지고 있어

세세생생 영원히 불자들과 함께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부석사 마애아미타부처님은 이번 부처님오신날 즈음에 그 모습을 불자들에게

선보였다. 그러자 사찰 불자들은 물론 지역에서 기도객이 발길을 잇고 있어 부석사 최고의 명소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아직 점안을 하지 않은 마애부처님이지만 그 자애로운 모습에 감동받은 불자들의 기도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부석사는 마애아미타부처님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점안법회를 오는 8월9일로 정했다. 백중 회향일 바로 전날 토요일로 정해 덕숭총림방장 설정큰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셨다.
부석사주지 주경스님은 “소납이 부임한 지 15년째 되던 해에 의미 있는 불사를 회향하게 되어 기쁜 마음”이라며 “마애아미타부처님 조성을 계기로 부석사를

찾는 불자들의 발길이 많아지고 지역불교가 활성화 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지역민에게 기쁨과 이익 주는 사찰되겠다”

 

인터뷰 / 부석사주지 주경스님

 

 

“부석사 주변에는 석불이 많습니다. 백제시대부터 조성된 부처님들인데 서산마애삼존불, 태안마애삼존불 등 국보와 보물이 산재해 있습니다.

이런 지역에 과거에 장엄했던 불보살님을 우리사찰도 현대에 한번 조성해 기도의 힘을 얻어 보자고 원을 세웠습니다.”

 

오는 8월9일 ‘부석사 마애아미타부처님 점안법회’를 봉행하는 서산 부석사주지 주경스님<사진>. 스님이 마애부처님을 조성한 인연에는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들어온 금동관세음보살좌상이 부석사에 봉안돼 있었던 성보였지만 돌아오지 못한 아픔이 있었다.

과거 많은 성보들이 부석사에 봉안돼 있었지만 도난이나 유실돼 현재는 부석사 일원만 문화재 자료로 지정돼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점이 안타까워 부석사와

함께 세세생생 영원할 수 있는 마애부처님을 조성하기로 신도들과 뜻을 모았다.

 

“처음 부석사에 부임했을 때 전각은 겨우 3채밖에 없었어요. 본사 어른스님들도 소납을 주지로 보내면서 ‘절이 어려우니 가서 도량수호 잘 하라’고 당부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렇게 1999년 7월에 부석사에 부임한 스님은 4개월동안 사찰청소를 한 뒤 11월에 취임식을 가졌다. 그때 왔던 도반스님들은 너무나 궁벽한 절살림을

걱정해 줄 정도였다.

 

“한달 내내 있어도 신도가 거의 오지 않았어요. 전임 주지스님도 고시생을 받아 밥해 주고, 흑염소 키워 절살림을 했다고 할 정도로 절살림이 어렵다고

했어요.”
사찰이 노후 해 도배할 재정이 없어 아는 사람을 통해 은행에서 대출을 1000만원 받았는데 갚는데만 3년이 걸릴 정도였다.

그렇게 부석사주지 소임을 시작한 스님은 매년 절살림을 늘여갔고, 사찰을 찾는 신도들도 점차 늘어났다.

 

“2002년 산신각 불사하면서 신도들 신심도 늘었어요. 회향식에는 전 총무원장이셨던 법장스님(2005년 원적)이 증명법사로 모셨어요. 그 후로부터 템플스테이

를 비롯한 다양한 포교 프로그램으로 부석사를 널리 알리는데 매진했어요.”

2003년부터 시작한 템플스테이에는 연인원 3000여명이 다녀갈 정도다. 템플스테이와 더불어 12년째 진행하고 있는 산사음악회도 지역의 유명한 문화행사다.

매달 발간하는 사보도 80호째 발간했고 108산사 순례기도도 71번째 다녀왔다.

 

“부석사 산사음악회는 서산에서 가장 오래 된 문화행사가 됐습니다. 그래서 서산 사람들은 절에 간다고 하면 의례 부석사를 가는 줄 안다고 할 정도입니다.”
이제 부석사는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이 됐고, 전국에서도 알아 주는 템플스테이 도량이 됐다. 그 과정에서 사찰 건물도 늘어 10여 채가 된다.

 

“시골 사찰이지만 부석사에는 많은 소모임이 있습니다. 봉사모임인 선재회가 있고, 경전모임인 일선회가 있습니다. 또 사찰음식 연구모임인 공양청과 다도

모임, 108산사순례 모임도 있습니다.”
부석사주지 소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종단일에 꾸준히 활동해 온 스님은 포교원 포교국장. 총무국장. 템플스테이 초대 사무국장. 총무원 기획실장,

서울 역삼청소년수련관장. 중앙종회의원 등의 직책을 수행해 왔다. 현재는 불교신문 주간으로 활동하고 있다. 93년부터 불교잡지 <불광>에 연재를 하면서

틈틈이 모은 글과 불교방송, 불교텔레비전에서 방송한 글들을 엮어 <마음을 천천히 쓰는 법> 등 5권의 책을 저술했다.

 

주경스님은“ 처음 부임했을 때 서산사람들은 부석사의 존재에 대해 잘 알고 있지 못했는데 이제는 부석사를 모두가 잘 알고 지역 주민들은 사찰 입구에

나무도 심도 꽃도 심으며 가꾸기도 한다.”며 “앞으로도 지역민들에게 기쁨과 이익을 주는 부석사가 되도록 가꾸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서산부석사는… 

 

신라고승 의상스님 창건  

 

영주 부석사와 ‘쌍둥이 사찰’ 

 

경허·만공스님 주석처

 

한국불교 중흥조인 경허선사와 그의 제자 만공스님이 주석했던 부석사 전경. 아래는

경허선사가 썼다고 전해지는 심검당(尋劍堂) 현판이며 맨 아래는 만공스님이 70세에 쓴 부석사(浮石寺) 현판

 

원효스님과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인 의상스님이 서기 677년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심검당 보수과정에서 나온 상량기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중국에 갔다 온 인연으로 부석사를 창건한 이래로”라고 기록돼 있다.

 

사찰 창건설화는 영주 부석사와 똑같아 ‘쌍둥이 사찰’로 불린다.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의상스님은 종남산 지장사에서 지엄스님으로부터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신세를 진 신도의 집에 들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때 신도집의 딸인 선묘는 의상스님에게 청혼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의상스님이 떠나자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이 몸 용이 되어 의상스님을 무사히 귀국하게 할 것이다’라고 발원했다.

 

무사히 신라에 귀국한 의상스님은 선묘의 넋을 천도하기 위해 절을 지을 명당을 찾아 나섰다가 근처 바닷가 의상스님의 발길이 멈춘 곳이 도비산(島飛山 -

마치 섬이 날아가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백제가 멸망한 뒤 유민들의 민심이 흉흉하던 지역이라 반대가 많았다.

 

항상 의상스님을 따라 다녔던 선묘는 곧 의상스님의 뜻을 알아채고 허공중에 커다란 바위를 띄워 사람들을 물리친 뒤 바다에 그 돌을 띄워 놓으니 사람들이

스님과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의상스님은 도비산 중턱에 부석사를 세웠고 사찰 앞 바다에 떠 있는 돌을 부석(浮石) 혹은 ‘검은여’라고 불렀다.

이후 부석사는 무학대사가 중창을 했으며 한국불교의 중흥조였던 경허선사가 주석하며 선풍을 휘날렸고, 그의 제자 만공스님이 머문 호서지방의 명찰로

손꼽히고 있다

 

데스크승인 2014.07.29  11:40:59 = 불교신문

 

※서산 부석사 마애아미타부처님 점안법회

일      시 = 불기 2558년(서기 2014년) 8월 9일(토) 오전 10시

장      소 = 서산 부석사 경내

증명법사 = 덕숭총림 수덕사방장 설정큰스님